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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재대략(雄才大略), 천고일제 한무제전 (1)

【한무제전】 1: 성세(盛世)의 군주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한무제는 위로는 진시황과 더불어 진황한무(秦皇漢武)라 일컬어지고, 아래로는 당 태종과 함께 한당성세(漢唐盛世)를 창조한 천고일제(千古一帝)다. (유쯔/에포크타임스)

도도한 오천 년 중화 문명, 우뚝한 사백 년 강한(强漢) 제국, 한조(漢朝)는 확실히 중화 자손들이 긍지로 여기며 동경하는 최고의 왕조 중 하나다. 한족(漢族)이라 칭하고, 한어(漢語)를 말하며, 한자(漢字)를 쓰는 것은 모두 한을 국호로 삼은 이 왕조에 대한 우러름과 숭배에서 기원했다. ‘한조’라는 이름은 개국 황제인 한고조 유방이 초패왕 항우로부터 십팔로(十八路) 제후를 분봉받을 때 하사받은 한왕(漢王)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한조를 세계 정상의 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웅재대략의 위대한 제왕이 있어야 했다.

그는 천명을 받들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여섯 대 선왕(先王)의 유업을 계승하고 고금에 보기 드문 성세를 창조했다. 안으로는 예악(禮樂)을 닦고 옛 제도를 변혁하여 후세의 본보기가 되는 찬란한 제도를 세웠으며, 밖으로는 변경을 개척하고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어 천추에 빛나는 혁혁한 무공을 이뤘다. 그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을 행하며 여러 차례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냈고, 백왕(百王)을 뛰어넘는 공적을 세운 일대(一代) 대한(大漢) 천자가 되었다. 그가 바로 위로는 진시황과 더불어 진황한무(秦皇漢武)라 불리고, 아래로는 당태종과 함께 한당성세(漢唐盛世)를 일궈낸 천고일제인 한무제다.

이천여 년이 흘러 각 왕조가 조수처럼 일고 지며 교체되었고 한무제도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사적과 전설은 끊임없이 후세에 전해지며 찬송되고 있다. 우리는 비록 그와 같은 시대를 살 수는 없지만, 여전히 역사가 유구한 이 땅 위에서 한무제의 웅자(雄姿)와 그의 불후의 공업을 아득히 생각하곤 한다.

우뚝 솟은 제릉(帝陵)

오랜 신주(神州) 대지 위에는 명성이 자자한 십삼 왕조의 도읍이었던 서안(西安)이 있다. 이곳은 주(周), 진(秦), 한(漢), 당(唐) 등 혁혁한 왕조의 휘황찬란한 역사와 천 년을 넘나드는 중화 문명의 전성기를 지켜보았다. 이곳은 역사 문화 고성이자 고대 제왕이 가장 많이 묻힌 도시다.

서안 시내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위하 북안의 함양원(咸陽原)에는 극히 아름다운 풍수의 보물과 같은 터가 있다. 이곳에는 서한 왕조의 아홉 황제가 잠들어 있다. 그들이 재위할 때 이곳 평지에 묘를 팠고, 현재 아홉 개의 능원이 일렬로 늘어서서 기세가 방대하고 고대 웅위한 황실 능원을 형성해 ‘중국의 피라미드군’이라 불린다. 그중 다섯 제왕의 능원 근처에 부유한 현읍(縣邑)을 설치했기에 함양원은 ‘오릉원(五陵原)’이라고도 불린다. 이 일대의 높고 웅장한 제릉 건축군은 제왕과 장상의 존엄과 영요, 대일통(大一統) 왕조의 번화함과 장려함을 묵묵히 드러낸다. 당시의 한조는 분명 백 배 천 배 더 번영하고 창성했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오릉원 위 서쪽 끝 가장 현격한 위치에 능원이 하나 있는데, 처음 보기에는 다른 여덟 개의 능원과 비슷해 보이지만 나름의 독특한 면모가 있다. 이것은 한대 제릉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높으며, 건조 시간이 가장 길고 가장 많은 자금이 투입되었으며 부장품이 가장 풍부한 곳으로, 동서로 약 9.5킬로미터, 남북으로 약 7킬로미터의 광활한 토지를 차지하고 있다. 제릉의 남쪽에는 석비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한효무제무릉(漢孝武帝茂陵)’이라는 여섯 글자가 고박하고 굳세게 새겨져 있다. 이것이 바로 한무제 전용의 제릉인 무릉(茂陵)이다.

무릉 능원 안에서 무제릉은 거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에는 400여 개의 좁고 긴 직사각형 배총들이 흩어져 있어 마치 뭇 별이 달을 에워싼 듯한 방사형 격국을 형성한다. 이는 대한 왕조에 사해가 복종하는 통일된 격국과 웅장한 기상을 상징한다. 《신당서》에는 무제가 재위한 세월이 길어 장례를 치를 때 능 안에 더 이상 물건을 채울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무제가 하관할 때 부장품이 너무나 풍부하여 지궁(地宮) 속에 다 담을 수 없었을 정도였으니, 이 지궁의 부유하고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다.

제릉 부근에는 또 서한의 두 명장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의 배총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각 기련산(祁連山)과 음산(陰山)의 형상을 모방해 축조되었다. 이는 묘 주인이 생전에 세운 뛰어난 전공을 밝히는 동시에 사후에도 여전히 위대한 군주를 수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가장 큰 배총으로 이부인(李夫人)의 묘가 있다. 이부인은 시가에서 찬송하는 경국지색의 절대가인(絕代佳人)이자 한무제가 생전에 가장 총애했던 비였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이곳에서 황후 묘의 유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인데, 이부인 역시 서거한 후에 황후로 추봉된 것이다.

제릉은 보통 황제가 등극하자마자 조성을 시작하여 승하할 때까지 계속되며, 능원의 형제와 규격은 제왕의 집정 이념과 일생의 공적을 반영한다. 한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서한 전체 역사의 4분의 1을 통치했고, 고금에 드문 웅재대략(雄才大略)으로 부강하고 흥성한 시대를 일궈냈다. 그런데 왜 그의 뒤에는 황후가 함께하지 않았을까? 이 역사 속 성세(盛世)의 전설과 일대 제왕의 천추 위업 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웅장하고도 경천동지할 사연과 신비로움, 유감이 숨겨져 있을까? 이 모든 것은 한무제의 내력부터 시작해야 한다.

옥저룡(玉豬龍), 중국 동북 신석기 시대, 홍산문화(紅山文化, 서기전 3500년-전 3000년). (집미박물관(集美博物館) 제공)

태어날 때의 기이한 현상

한무제 유철(劉徹)은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다. 한고조, 혜제, 두 명의 소제(少帝), 문제를 거쳐 그의 부친 한경제(漢景帝)에 이르기까지, 한무제의 어린 시절과 소년기는 한초 문경(文景)의 치의 황금시대에 처해 있었다. 『사기』와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한무제는 부친 한경제가 등극한 해에 태어났다. 지괴 소설 『한무고사(漢武故事)』에서는 그가 태어난 정확한 시간이 을유년 칠월 칠일 아침, 즉 서기전 156년 음력 칠석 아침이라고 전한다. 새 황제의 등극은 왕조의 경사스러운 대사건이며, 조정의 법제, 군사, 문화 등 방면에서 새로운 기상이 나타나는 때다. 이때 탄생한 황자는 그 운명이 매우 귀할 것임을 예시하는 듯했다. 실제로 한무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정사에도 한무제의 생모 왕미인(王美人)이 임신했을 때 태양이 자신의 품으로 달려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를 당시 태자였던 한경제에게 알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경제는 이를 듣고 기뻐하며 “이는 현귀(顯貴)한 징조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왕미인의 내력도 흥미롭다. 그녀의 이름은 왕지(王娡)로 또는 왕수아(王姝兒)라고도 불렸다. 미인이란 후궁 품계다. 그녀의 어머니 장아(臧兒)는 항우가 제후를 봉할 때 연왕(燕王)으로 봉해진 장도(臧荼)의 손녀였다. 원래 왕미인은 평민인 금왕손(金王孫)의 아내였으나, 어떤 이가 왕미인과 그 여동생의 관상을 보고 두 딸이 모두 부귀해질 것이라 예언하자, 모친인 장아가 왕미인을 금씨와 이혼시켜 더 권세 있는 집안과 맺어주려 했다. 금씨 집안에서 당연히 보내주려 하지 않자 장아는 딸을 바로 궁으로 들여보내 태자의 첩실이 되게 했다.

다행히 당시 한경제는 왕미인을 매우 총애했고, 왕미인은 그를 위해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태양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은 이 아이가 바로 훗날의 한무제다. 한무제 출생의 길조는 한경제에게도 나타났다.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에 따르면 왕미인이 임신 중일 때 한경제는 온몸이 붉은 돼지가 구름 위에서 내려와 숭방각(崇芳閣)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한경제가 놀라 깨어 숭방각으로 가보니 구름과 안개를 타고 거대한 적룡(赤龍)이 선회하고 있었고, 그 운무가 궁전의 문창을 가릴 정도였다. 다른 비빈들도 각 위에 짙은 붉은 노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노을이 걷히자 적룡이 궁 안을 선회하며 춤추는 것을 보았다. 고대에서 돼지는 매우 존귀한 동물로 용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신석기 시대 출토 유물 중에는 돼지 머리에 뱀의 몸을 한 “C자형”의 옥기인 옥수결(玉獸玦)이 있는데, ‘화하(華夏) 제일의 용’이라는 미칭이 있으며 용의 최초 원형으로 여겨진다.

이런 상서로운 징조가 내리자 한경제는 명리에 정통한 요옹(姚翁)을 불러 가르침을 청했다. 요옹은 “이는 아주 길한 징조이며 이 숭방각에서 반드시 국가의 운명을 주재할 인물이 태어나 북방의 이(夷), 적(狄) 등 이민족을 평정하고 국운을 창성하게 하여 유씨 왕조 흥성시기의 명주(明主)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한경제는 숭방각을 의란전(猗蘭殿)으로 이름을 바꾸고 왕미인을 머물게 했다. 왕미인은 임신 14개월 만에 전 안에서 한무제를 낳았다.

『한무고사』에서는 한경제에게 고조가 현몽했다고 전한다. 유방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미인의 이 아이의 이름은 ‘체(彘 돼지)’라 지으라”고 했다. 한무제가 일곱 살 전까지 불린 이름이 ‘체’인 것은 한경제가 꾼 두 꿈과 관련이 깊다.

이 여러 중첩된 길조를 안고 태어난 어린 황자는 네 살에 교동왕에 봉해졌고, 일곱 살에 태자로 책립되었으며, 열여섯 살에 정식으로 등극하여 소년 천자가 되었다. 왕미인 역시 관상가의 말대로 천하를 다스리는 황후와 태후가 되었다. 한무제의 초년은 매우 순탄해 보였으나 실상 그는 애초 황위(皇位)와 거의 인연이 없었는데, 어찌 된 일일까?

태자 폐립 풍파

서주 시기 주공이 예악을 제정한 이래, 고대 제왕은 적장자(嫡長子) 계승제를 확립했다. 황위는 황후의 장자가 계승하며 정처에게 아들이 없으면 가장 귀한 비빈의 아들을 세웠다. 『공양전』에서 말하는 “적자(嫡子)를 세움에는 나이가 많은 이를 우선하고 어진 이를 우선하지 않으며, 아들을 세움에는 신분이 귀한 이를 우선하고 나이가 많은 이를 우선하지 않는다.”이다. 한경제의 박(薄)황후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자는 다른 여섯 비빈이 낳은 열네 명의 서자(庶子)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한무제는 순서상 열째로 앞에 아홉 형이 있었고, 맏형인 유영(劉榮)은 한경제가 가장 총애하던 율희(栗姬)의 아들이었다. 이에 한경제는 등극 후 유영을 태자로 세우고 무제를 교동왕에 봉했다.

그러나 운명의 안배는 늘 드라마틱하다. 한경제의 누님인 관도공주(館陶公主)에게는 딸 진씨(陳氏)가 있었는데 훗날 전설 속의 진아교(陳阿嬌)다. 공주는 자기 딸을 태자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율희에게 호감을 표했다. 하지만 율희는 시기심이 많았고 관도공주가 한경제에게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자주 추천하여 총애받게 하자 공주에 대한 앙심이 깊어 혼사를 단칼에 거절했다.

문제는 관도공주는 두태후의 애지중지하는 딸이자 한경제와도 매우 친해서 후궁에서 위상이 아주 높았다. 하지만 율희는 흉금이 좁아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으로 그녀를 분노하게 했다. 관도공주는 화가 나서 동생인 경제 앞에서 율희의 험담을 했고 시간이 흐르자 경제는 율희를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또한 공주는 혼사가 좌절되자 목표를 왕미인에게 돌렸고 왕미인이 흔쾌히 승낙하면서 교동왕의 운명도 바뀌기 시작했다.

『한무고사』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관도공주가 어린 유철을 무릎에 앉히고 장가들고 싶으냐고 묻자 유철은 그렇다고 답했다. 공주가 곁에 있던 백여 명의 시녀를 가리키며 묻자 유철은 모두 싫다고 했다. 마지막에 공주가 자신의 딸을 가리키며 아교는 어떠냐고 묻자 유철은 웃으며 “너무 좋아요! 아교를 얻는다면 금으로 집을 지어 살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금옥장교(金屋藏嬌)’라는 성어의 유래다.

관도공주는 크게 기뻐하며 한경제에게 두 사람의 혼인을 청했고, 매일 한경제 앞에서 유철의 현능함을 칭찬했다. 한경제의 마음도 서서히 유철과 왕미인에게 기울었다. 율희는 유력한 아군인 공주를 잃었으나 자신의 위험한 처지를 알지 못한 채 태자의 생모라는 신분만 믿고 질투와 원망을 일삼다 결국 화를 당했다.

어느 날 조정에서 대행례관(大行禮官)이 보고를 마친 후, “자식은 어머니로 인해 귀해지고 어머니는 자식으로 인해 귀해지니 현재 태자의 생모(율희)에게 봉호가 없으니 마땅히 황후로 세워야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박황후가 조모인 박태후가 세상을 떠난 후 폐위되어 황후 자리가 줄곧 비어 있었다. 이에 한경제가 “이것이 네가 마땅히 할 말이냐!”라고 크게 화를 내며 예관을 죽였다. 이어서 한경제는 태자를 폐하고 일곱 살 교동왕 유철을 태자로 세웠으며 왕미인을 황후로 봉했다.

율희는 총애를 잃고 한경제 앞에 변명할 길조차 없어 울화로 생을 마감했다. 입후 사건에서 율희는 함정에 빠진 것일 수도 있으나 그 비극은 스스로 자초한 면이 컸다. 예전에 한경제가 몸이 좋지 않을 때 그녀를 황후로 세우려 하며 아들들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내가 죽은 후 그들을 잘 돌보라는 명백한 부탁의 뜻을 율희는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생모가 자신의 은총을 뺏어갔다며 악담을 퍼붓고 거절했다. 한경제는 당시 몹시 분노했으나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때 한경제가 태자를 새로 세우며 최종적으로 한무제의 등극의 길을 닦았다.

한경제(漢景帝) 초상화. 출처는 명대 왕기(王圻)가 엮고 만력(萬曆) 연간에 판각한 《삼재도회(三才圖會)》 (공유 영역)

천재 소년

이 시기에 경제의 동생 양효왕이 어머니 두태후(竇太后)의 지지를 받으며 저군(儲君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태후가 신하들에게 설득되어 생각을 접자 양왕(梁王)은 그 신하들을 암살했다. 두태후의 체면을 보아 한경제는 양왕을 봉지로 쫓아내고 경성 출입을 금했다. 이로써 한무제의 등극을 막는 장애물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한무제의 등극이 궁중 암투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 그는 하늘이 선발한 인물이었다. 상서로운 징조가 따랐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현능(賢能)하며 처신이 발라 한경제와 궁인들을 감탄하게 했으니, 이는 그가 미래 황제의 적임자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한무고사』는 그에 대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모가 있었으며, 궁인이나 형제들과 놀 때도 그들의 뜻을 잘 살펴 응대하니 모두의 환심을 샀고, 부황 앞에서는 공경히 응대함이 성인과 같아 태후 이하 시위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고 했다.

『한무제내전』에도 한무제의 어린 시절 일화가 있다. 그가 세 살 때 한경제가 무릎에 앉히고 “얘야 천자가 되고 싶으냐?”라고 묻자 어린 유철이 대답했다. “그 일은 하늘의 안배에 달린 것이니 제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매일 황궁에 머물며 아버님 앞에서 노닐고 싶을 뿐이며, 감히 방자하게 굴어 아들의 도리를 잃지 않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사리에 밝은 말을 하자 한경제는 속으로 기이하게 여겨 이후 그의 교육에 특히 신경을 썼다. 며칠 후 한경제는 유철을 책상 앞으로 데려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묻자 유철은 복희 이래 성현의 저작과 음양오행, 역대 국책(國策) 논문 수만 자를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암송했다. 이런 기억력에 한경제는 그를 아이로 대하지 않았고 일곱 살에 정식으로 이름을 철(徹)로 바꾸어 주었다. 『장자』에 “눈이 통하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귀가 통하는 것을 총(聰)이라 하며, 코가 통하는 것을 전(顫)이라 하고, 입이 통하는 것을 감(甘)이라 하며, 마음이 통하는 것을 지(知)라 하고, 앎이 통하는 것을 덕(德)이라 한다.(目徹爲明,耳徹爲聰,鼻徹爲顫,口徹爲甘,心徹爲知,知徹爲德)”라고 했으니, ‘철(徹)’은 신성하게 통함이 남다르다는 뜻으로 한경제의 찬사와 기대가 담긴 이름이었다.

유철은 태자가 된 후 더욱 학문에 정진했다. 말타기, 활쏘기, 유학과 문학 등 광범위하게 배웠고 이로 인해 한경제의 사랑을 더욱 받았다.

『한무고사』에는 유철이 열네 살 때의 일도 기록되어 있다. 정위(廷尉)가 한경제에게 살인 사건의 심판을 요청했는데, 방년(防年)이라는 자가 자신의 친부를 죽인 계모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정위는 대역죄로 판결하려 했으나 한경제는 석연치 않아 유철에게 의견을 물었다. 유철은 분석하기를 보통 계모가 생모와 같다고들 하지만 이는 아버지가 아내로 맞이했기에 지위가 생모와 같은 것일 뿐이며, 이제 방년의 계모가 친부를 죽였으니 계모와는 정이 끊겼고 더 이상 모자 관계가 아니므로 마땅히 일반 살인죄로 다스려야지 대역죄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경제는 이를 받아들여 방년을 일반 살인죄인 기시(棄市 시장에서 공개 처형)로 처결했다. 신하들도 유철의 분석이 타당하다고 여겼고 한경제는 그를 더욱 중히 여겼다.

서기전 140년, 한경제가 48세로 붕어했다. 같은 날, 열여섯 살 유철이 정식으로 황위를 계승하니 그가 바로 한무제다. 이로부터 한가(漢家) 왕조는 강성을 향한 서막을 열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7/25/n11409609.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