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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속의 가정 실책과 ‘흑백세계’ 성세의 변곡점

초약미(楚若薇)

【정견망】

삼국시대 건흥(建興) 6년 봄(228년), 제갈량의 제1차 북벌 중 발생한 가정(街亭) 전투는 정사와 후세의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이번 북벌 실패의 직접적인 결정타로 간주된다. 이로 인해 마속(馬謖)의 형상은 ‘가정을 잃다(失街亭)’라는 말과 뗄 수 없게 되었으며, 마속의 죽음과 제갈량이 스스로 3등급을 깎아 달라고 상소한 일 등은 문학, 연극 및 학술 연구에서 단골 소재로 다루어지곤 한다.

하지만 “재기(才器)가 남보다 뛰어나고 군사 계책 논하기를 좋아하여”[1] 제갈량이 “매번 불러 밤낮으로 담론을 나누었다”던 마속이 어찌하여 이토록 낮은 수준의 실수를 범했단 말인가? “마속이 제갈량의 절도(節度)를 어기고 거동이 부적절하여 장합에게 크게 패했다. 제갈량은 서쪽 현 천여 가구를 거느리고 한중으로 돌아온 뒤, 마속을 처형해 대중에게 사죄했다.”[2]

《자치통감》과 《삼국지》에는 이 사건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은 노장 위연, 오의 등을 선봉으로 삼지 않고 마속에게 군사를 감독하여 앞장서게 하여 가정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를 어기고 조치함에 번잡하고 소란스러웠으며,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성에 근거하지 않았다. 장합이 그 식수로를 끊고 공격하니 군사들이 흩어지며 대패했다.”[3]

“왕평이 연달아 마속에게 간언했으나 마속이 듣지 않아 가정에서 대패했다.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린 천 명만이 북을 치며 스스로를 지키니, 위나라 장수 장합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압박하지 못했다. 이에 왕평이 서서히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돌아왔다.”

이상의 역사 기록을 통해 가정 전투의 전말을 알 수 있다. “당시 경험이 풍부한 장수인 위연, 오일 등이 있어 논자들은 모두 이들을 선봉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으나, 제갈량이 대중의 의견을 어기고 마속을 발탁하여 대군을 통솔하게 했다.”

당시 상황은 제갈량이 반대 의견을 물리치고 마속과 왕평 등을 보내 가정을 지키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원래 배치를 어기고, 길목에 영채를 세워 장합이 이끄는 위군을 막는 대신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로 인해 촉군의 식수로가 차단되어 궤멸당했고, 결국 제갈량의 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속은 북벌에 참여하기 전 면죽(綿竹)·성도령(成都令), 월휴태수(越雟太守) 등 지방관을 역임했을 뿐, 실제로 병사를 거느리고 전장에 나선 기록은 없다. 즉, 마속은 실전 경험이 전무했다. 가정 전투는 마속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실전이었던 셈이다. 《삼국지》 기록에도 제갈량이 마속에게 ‘군사를 감독(督諸軍)’하게 했을 뿐, 정식 군사 직함이나 무관직을 수여했다는 말은 없다. 마속은 참군(參軍 참모)의 신분으로 출전했을 뿐 평생 정식 장군직을 얻지 못했다. 이는 군직에서 독자적으로 병사를 거느린 경험과 압박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했음을 말해준다. 동시에 “재기가 뛰어난” 마속이 단순히 길목에 영채를 세워 위군을 막는, 책략의 가치가 낮아 보이는 방어 임무에 만족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파죽지세로” 위군을 격파해 기공을 세우고 싶어 했던 것이다.

《삼국연의》 제37회에서 유비가 삼고초려를 하기 전, 사마휘는 제갈량의 재능을 두고 “늘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유하니 그 재능을 헤아릴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융중의 밭두렁에서 농부들이 부르는 공명의 노래가 있었다.

“푸른 하늘은 둥근 덮개 같고
대지는 바둑판 같구나.
세상 사람들 흑백으로 나뉘어
오가며 영화와 치욕을 다투네.
영화로운 자 절로 안온하고
욕된 자 정녕 분주하도다.
남양에 은거하는 이 있어
깊은 잠에 취해 있노라.”

이는 제갈량이 바둑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바둑으로 회포를 풀고 세상을 비유했음을 보여준다. 제갈량이 ‘흑백세계’의 기리(棋理 바둑 이치)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바둑은 요(堯)임금에게서 기원했다고 전해지며,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이미 사료에 기재된 바 있다. 송대(宋代)는 중국 고대 바둑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 바둑은 바둑알, 바둑판 그리고 착점법(규칙)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바둑과 상기의 다른 점은 바둑판 위에 집을 얼마나 둘러싸느냐에 따라 승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계가(計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집수가 많은 쪽이 승리한다. 양측이 서로 싸우는 중에 돌을 따내거나 장군을 불러 외통수 결말을 얻어 승리할 필요가 없다.

바둑알 하나가 빈 바둑판 중앙에 놓이면 네 군데의 활로인 기(氣)가 생기며, 한 알씩 더 연결될 때마다 통상적으로 두 군데의 기가 증가한다. 기가 긴 것은 생명력이 왕성함을 나타내며, 따라서 긴 기는 상대방과의 대국에서 세력의 체현이기도 한다. 만약 상대방 바둑알에 밀착되어 포위당하면 기가 조여짐을 의미한다. 기를 조이는 것은 바둑 대살(對殺)의 핵심 전술 수단으로, 착점을 통해 상대방 바둑알의 기를 막아 그 생존 공간을 축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돌이 이미 두 개의 진짜 눈(眼, 둘러싸인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연결된 빈 교차점)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다시는 죽일 수 없는 활기(活棋)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삼국 시대의 고대 전쟁에서 이 두 눈은 군량과 식수, 그리고 방어 영채 및 활과 화살 등을 의미할 수 있다.

동한의 반고는 《혁지(弈旨)》에서 “도(道)는 반드시 정직해야 하니 신명(神明)의 덕이며, 바둑에 흑백이 있음은 음양이 나뉨이다. …중략… 또한 사람됨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니 위태로움 속에서 바르게 해야 한다”고 했다.

북송의 장의(張擬)는 《기경(棋經)》에서 “적은 많고 우리는 적을 때 먼저 삶을 도모해야 하며, 우리가 많고 적이 적을 때는 힘써 그 세력을 펼쳐야 한다. …무릇 바둑은 처음에는 정공법으로 맞서고 마지막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승리하는 것이니, 반드시 사방의 땅을 돌아보아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남이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가 대비하지 못한 곳을 기습할 수 있다고 했다.”

현대 바둑의 대국 모형은 흑선백후(黑先白後)로 고정되어 있는데, 즉 흑을 잡은 쪽이 먼저 돌을 놓는다. 이 선수(先手)는 전술적 차원의 주도권을 의미하며, 선점의 이익을 이용해 주도권을 장악하고 바둑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둑 대국인 박혁(博弈)의 핵심 요체는 삶을 도모하고 세력을 펼치며 선수를 잡는 것이다. 활안(活眼)은 가장 중요한 생존 형태의 체현이며, 두 개의 활안을 가지는 것은 흔히 자기 편의 생존 보장과 공방의 우세를 의미한다. 반면 활안을 만들지 못하면 수동적인 상황에 빠지거나 위태로운 국면이 나타나게 된다.

가정 전투에서 마속은 촉군(蜀軍)을 이끌고 먼저 가정에 도착했고, 장합은 아직 오는 중이었으므로 촉군은 선점의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깊은 골짜기의 지세에서는 길목에 영채를 세우고 방어 시설을 구축하기만 하면 되었고, 본래 임무도 위군(魏軍)을 저지하여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고 아직 항복하지 않은 농서의 성들을 공략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속은 남산에 진을 쳤다가 장합에게 식수가 끊겼고, 결국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혼란에 빠졌다. 이는 촉군에게 활안이 없어 상대에게 기를 조여 퇴로를 잃었기 때문이다. 남산에 진을 친 그 순간부터 촉군은 본래 가졌던 선수와 선점의 형세를 잃었으며, 승패는 이미 분명해졌다.

바둑의 흑백 세계가 보여주는 기리(棋理 바둑 이치)는 인류가 현실 세계의 각종 활동 속에서 선과 악을 선택하는 인연이 아니겠는가. 인류의 양심과 전통 가치의 함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쟁 중일지라도 마찬가지로 선과 악의 선택이 체현되는 방식이 있다. 마속은 기회를 잡지 못했고 선념(善念)에 기초해 삶을 도모하는 법과 활안으로 바름을 지키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유비는 임종 전에 제갈량에게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크게 써서는 안 되므로 그대가 이를 살피라”고 했다. [1] 그런데 제갈량은 왜 이토록 중대한 용인술의 실수를 범했을까.

당대(唐代) 이한(李翰)은 《삼명신론(三名臣論)》에서 제갈량에 대해 “이는 이른바 일은 성사시켰으나 도(道)에는 온전하지 못했고, 자신에게서는 얻었으나 남을 살피는 데는 정밀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북송의 소동파는 《제갈량론》이라는 글에서 “인의로 취하고 인의로 지킨 것은 주(周)이고, 속임수와 힘으로 취하고 속임수와 힘으로 지킨 것은 진(秦)이다. 진이 취한 방식으로 취하고 주가 지키던 방식으로 지킨 것은 한(漢)인데, 인의와 기만책을 섞어서 천하를 취하려 한 것이 바로 공명이 실패한 원인이다.”라고 했다.

제갈량은 촉을 위해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고 죽은 후에야 그만두었으나, 도와 반본귀진(返本歸眞)의 가치 함의에 대해서는 인식에 한계가 있었다. 이는 그의 《논제자(論諸子)》라는 글에서 엿볼 수 있는데, “노자는 성을 기르는 데 장점이 있으나 위난에 임해서는 쓸 수 없다.”고 했다. 즉 도를 단지 세간에서 수신(修身)하고 처세하는 학문으로만 여긴 것이다. 세간 만물은 본래 도(道)에서 생겨나고 이루어진 것이며, 일체의 도는 또한 우주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당대 시인 맹교(孟郊)는 이렇게 읊었다.

선계의 하루는
인간 세상에선 천 년이라,
바둑 두 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만물이 모두 공허해졌구나,
나무꾼이 돌아가는 길에
도끼 자루는 바람 따라 썩어버렸네,
오직 돌다리만 남아
스스로 붉은 무지개를 능가하누나.

仙界一日內,人間千載窮。
雙棋未遍局,萬物皆爲空。
樵客返歸路,斧柯爛從風。
唯餘石橋在,猶自淩丹虹
(《난가석(爛柯石)》)

참고문헌
[1] 진(晉) 진수,《삼국지 마량전(馬良傳)》
[2] 진 진수,《삼국지 제갈량전》
[3] 송 사마광 《자치통감 위기(魏紀) 3》
[4] 진 진수,《삼국지 왕평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