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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재대략(雄才大略), 천고일제 한무제전 (2)

【한무제전】 2: 소년 천자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연호는 서한 한무제 시기에 나타났으며 연호는 건원(전140년~전135년)이다. 이전의 제왕들은 재위 연수만 있었고 연호는 없었다.(유쯔/에포크타임스)

한무제 유철은 네 살에 왕에 봉해지고 일곱 살에 태자가 되었으며 열여섯 살에 보위에 올라 서한(西漢)의 일곱 번째 제왕이 되었다. 한무제가 물려받은 국가는 육십여 년간의 휴양생식을 거쳐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젊은 국가였다. 젊고 재능이 넘치는 한무제는 결코 태평성대의 한가한 황제로 남기를 원치 않았다.

서기전 140년은 한무제가 즉위한 첫해로, 훗날 무제와 신하들이 “건원(建元) 원년”으로 정했다. 한무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연호를 확립하여 황제가 연호를 정하는 선례를 남겼다. 건원(建元)이란 새로운 기원을 세운다는 뜻으로, 거대한 업적의 시작을 밝히는 것이다. 한무제가 이런 전무후무한 창거를 행한 것은 당시 그가 대한 제국을 위해 웅장한 청사진을 그리고 위대한 시대를 만들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무제는 자신의 웅재대략(雄才大略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재가 기초가 되어야 함을 잘 알고 있었으며, 널리 현사(賢士)를 기용해 자신의 새로운 정치를 추진하고자 했다. 이에 즉위 후 즉시 전국 관료들에게 감히 간언할 수 있는 현량방정(賢良方正)한 인재를 중앙에 추천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이번 선발은 문턱을 두지 않고 오직 진정한 실력을 갖춘 자만을 찾았는데, 이때 채용한 관리 선발 제도는 바로 한초부터 수나라까지 이어진 찰거제(察擧制), 즉 고찰과 추천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의 전신이었다.

한무제의 조칙이 내려지자 각지의 현사들이 다투어 상서를 올려 자천했다. 즉위 구 개월 후 한무제는 이렇게 선발된 백여 명을 소집해 유명한 대책(對策) 회의를 열었다. 이는 황제가 치국에 관한 문제를 제시하면 다른 이들이 문장 형식으로 답을 내놓는 것이었다. 한무제는 세 차례의 제서(制書)를 내렸는데, 첫 번째 제서에서 명확하게 자신의 취지를 밝혔다.

“짐은 선제의 가장 숭고한 지위와 가장 아름다운 덕행을 계승하여 이를 무궁하게 전하려 하니 그 임무가 거대하고 책임이 중차대하다. 이에 각지의 현량하고 덕이 높으며 박학(博學)한 인재들을 널리 초청하여 치국안민의 대도리를 듣고자 한다.”

이어 한무제는 이 국가에 기탁한 이상적인 목표를 담은 일련의 질문을 던졌다. 이때 동중서(董仲舒)라는 유생이 두각을 나타내며 유명한 『천인삼책(天人三策)』을 올렸고, 이는 한무제가 즉위 이래 내린 첫 번째 중대한 조치인 ‘유술(儒術)에 대한 존숭’로 이어져 유가 문화가 중화 문명 속에서 주류 지위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동중서 초상 (공유영역)

천인삼책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동중서는 공양파(公羊派) 『춘추(春秋)』의 대가로 서른 살에 이미 곳곳에서 강의하며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이번 추천 시험에서도 1등을 차지해 ‘대책’의 기회를 가졌다. 한무제는 동중서에게 세 차례 책문을 던졌고 동중서는 세 편의 책문으로 응답했다. 한무제의 세 차례 책문이 모두 천도, 인륜과 관련되었기에 동중서의 이 세 편을 『천인삼책』이라 부른다.

한무제와 동중서의 세 차례 문답 내용은 『한서(漢書)』에 매우 긴 분량으로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한무제가 던진 질문은 각각 다음과 같다.

첫째는 어떻게 상고 시대의 왕도를 회복할 것인가, 즉 정치의 근본 도리를 공고히 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일관된 준칙이 있는가, 즉 치국의 정술(政術)을 묻는 것이다.

셋째는 천인감응(天人感應)과 당대 정무(政務)의 득실에 관한 것이다.

이 세 질문은 모두 매우 방대하여 몇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웠으나 동중서는 조목조목 명확하게 답을 내놓았다. 한무제는 첫 번째 편을 읽고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았으며, 대책이 끝나고 동중서의 재능을 충분히 긍정하여 그를 역왕(易王) 유비(劉非 무제의 형)의 상국(相國 제후국의 승상)으로 임명했다. 이제 동중서의 답변 내용을 살펴보자.

동중서는 세 편의 책론에서 주로 세 가지 큰 관계를 제시했다.

첫째는 천인(天人) 관계다. 사람은 하늘로부터 명(命)을 받았으며 군주의 권한은 신이 주신 것이다. 천자가 나라를 잘 다스리면 상서(祥瑞)가 내리고, 다스림에 도가 없으면 재앙이 내린다. 그러므로 하늘은 인애(仁愛)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천자 역시 천의에 순응해 인덕(仁德)을 널리 베풀어야 한다.

둘째는 명(命), 성(性), 정(情)의 관계와 교화 문제다. 명은 하늘로부터 오고, 성은 사람이 타고난 자질이며, 정은 사람의 욕망이다. 사람의 수명이 길고 짧음 품덕(品德)의 높낮이는 교화를 통해 훈도(薰陶)할 수 있다.

셋째는 덕(德)과 형(刑 형벌)의 관계다. 덕은 양(陽)으로 살리는 것을 주관하고, 형은 음(陰)으로 죽이는 것을 주관한다. 천자는 마땅히 덕에 의지해야지 형벌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이에 동중서는 치국의 대도로서 다섯 가지 요점을 제시했다.

첫째, 신왕개제(新王改制)다. 동중서는 왕조가 교체되면 새 황제는 왕조의 제도와 의식을 바꾸어야 하며 먼저 역법(曆法)과 상징 색깔부터 고쳐야 한다고 보았다. 그 원인은 군권신수(君權神授)에 있으니, 왕조의 교체는 천의이며 황제의 권력 또한 하늘이 창생을 구하기 위해 내린 운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왕조가 제도와 의식을 바꾸는 것은 천의에 순응하며 새 시대를 여는 상징이 된다.

둘째, “대일통(大一統)” 즉 천하 통일이다. 이는 흉노를 평정하고 대일통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한무제의 갈망과 딱 맞아떨어졌다.

셋째,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현량(賢良)을 천거”하는 것이다. 태학은 국가 최고 학부이니 이를 일으킴은 사직의 인재를 기르는 것이다. 현량 천거는 천하의 어진 인재를 널리 거두는 것이다. 동중서는 이년마다 천하에 인재를 징집하여 이를 규범화, 제도화할 것을 건의했다. 인재에 목말랐던 한무제에게 이 제안은 즉각 받아들여졌다.

넷째, 존유(尊儒) 즉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獨尊儒術 백가를 몰아내고 유술만 존숭)’이다. 동중서는 관리든 백성이든 유가의 육경(六經)만 읽으면 되지 다른 책은 필요 없다고 보았다. 사상은 통일하기 가장 어렵고 제자백가가 각기 사상이 다르면 통일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통일되지 않으면 법규와 제도를 통일할 수 없고 천하 사람들도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유학을 정통으로 선택해 가르치고 다른 사상을 금한다면 천하의 사상과 제도가 통일될 것이다.

다섯째, “갱화(更化)” 즉 개혁이다. 동중서는 개혁이 왕조에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한조(漢朝)가 건국 이래 발전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중요한 원인이 개혁의 부족에 있다고 본 것이다.

두태황태후의 간섭 아래 한무제가 즉위 초기에 펼친 신정은 저지당했다. 그림은 명대 당인(唐寅)의 《반희단선(班姬團扇)》이다. (공유 영역)

신정의 좌절

동중서의 『천인삼책』은 한무제의 정치 이상과 부합했다. 특히 “존유(尊儒)” 사상은 한무제를 고무시켰고, 그는 유학을 숭상하고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신정을 대대적으로 추진할 준비를 했다.

한무제는 관리 임면부터 착수하여 유학을 받드는 신하들을 대거 기용했다. 서한 시기 삼공(三公)의 으뜸인 승상(丞相)의 권력이 매우 컸기에 승상 임명은 중대한 일이었다. 한무제는 먼저 황로(黃老)의 정치 주장을 따르던 자신의 스승 위관(衛綰)을 승상에서 면직시키고, 할머니인 두태황태후의 조카 두영(竇嬰)을 승상으로, 외삼촌 전분(田蚡)을 군권을 쥔 태위(太尉)로 임명했다. 두 사람 모두 유학을 좋아했으니 한무제의 존유 방침에 부합할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황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한무제는 또한 정중한 예우로 천하의 유학의 대가 신생(申生)을 초빙해 천하 대사를 물었다. 수레의 요동을 줄이려 바퀴에 부드러운 풀을 감았으니 이것이 역사 속 ‘포륜안차(蒲輪安車)’ 고사의 유래다. 신생은 조정 고문이 되었고 그의 제자 왕장(王臧)과 조관(趙綰)도 중용되었다. 한무제는 유학 관료들의 건의에 따라 일련의 혁신 조치를 취했다. 상고의 명당(明堂)을 세우고 유가 기준으로 혼인과 장례, 제후의 조견 제도를 규정했다. 도성에 머물던 열후(列侯)들에게 봉지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고 제후국 간의 관문을 철폐했으며, 두씨 외척과 권력자들의 위법 행위를 가려내고 흉노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깊은 궁궐 속 두태황태후는 그제야 황로지학으로 다스리던 대한(大漢)의 조정이 슬며시 방향을 틀었음을 발견했다. 그녀가 아끼던 손자가 젊은이의 과단성과 서슬 퍼런 기세로 역대 선제들의 무위이치(無爲而治) 전통을 깨고 유가 학설을 강력히 추진하자 황로를 숭상하던 태황태후는 몹시 불쾌했다. 더욱이 한무제의 조치들이 두씨 외척과 권귀들의 이익을 건드리자 태황태후의 귀에는 그들의 하소연과 고발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한무제가 조종(祖宗)의 제도를 파괴하고 조정을 어지럽힌다고 주장했다.

태황태후가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왕장이 한무제에게 태황태후가 더 이상 조정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제안한 일이었다. 소식을 들은 태황태후는 격노했다. 그녀는 한무제에게 명하여 왕장, 조관 등의 관직을 박탈하게 했고, 갓 시행된 일련의 개혁 조치들을 폐지하게 했다. 또한 승상 두영과 태위 전분을 파면하고 자신이 총애하는 인물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한무제가 비록 천자라 하나 아직 젊었고 한조는 대대로 효(孝)를 숭상했기에 조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두태황태후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무제는 신정 폐지에 동의했고 정무를 수시로 태황태후에게 보고하며 유생들을 중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기세 좋게 추진하던 건원 신정은 그렇게 잠시 멈추었고 존유의 치국 사상도 타격을 받았다. 한무제와 두태황태후는 왜 사상의 차이 때문에 이토록 큰 갈등을 빚었을까?

明 仇英《清明上河图》(局部)。(公有领域)

한 초기 제왕들은 황로지학(黃老之學)으로 나라를 다스려 한조의 국력을 신속히 회복시켰다. 그림은 명대 구영(仇英)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일부)이다. (공유 영역)

한초(漢初)의 배경

이는 서한 육십 년간의 사회 현상과 관련이 있다. 한초에는 진이세(秦二世)의 가혹한 정치와 초한(楚漢) 쟁패의 전란을 거치며 나라 전체가 황폐해지고 경제가 피폐했다. 당시 한조가 얼마나 경제상황이 열악했는가 하면, 『한서 식화지』에 천자가 네 마리 같은 색의 준마가 끄는 수레를 갖추지 못해 장상들이 소수레를 탈 정도였고 민간에는 농사지을 땅도 재물도 없었다고 전한다. 흉년이 들면 쌀 한 섬에 오천 전이나 하여 사람들이 굶어 죽고 백성 절반이 기근으로 사망했다.

사회 회복과 발전의 요구에 부응해 황로지학이 천의와 민심에 순응하는 치국 이념이 되었다. 황로지학은 도가(道家) 유파의 하나로 ‘무위이치’를 핵심으로 한다. 군주의 정책이 사회의 자연스러운 질서를 깨뜨려 천하를 해칠 수 있으니 군주는 자연을 본받아 백성이 자유롭게 발전하게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욕심내지 않고 고요하면 천하는 장차 스스로 안정된다.(不欲以靜 天下將自定)”과 같다. 한고조는 관중에 들어온 이래 약법삼장으로 진나라 법을 폐했고 건국 후 천자부터 왕후까지 절검을 봉행하며 부세를 낮추고 백성과 더불어 휴식했다. 이것이 무위 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이에 고조, 혜제, 문제, 경제 네 조정에서 농업을 중시하고 민력을 아끼는 국책이 이어졌다. 특히 한문제(漢文帝)는 절검과 애민으로 유명하여 전조(田租 농지세)를 감면했고 한경제는 삼십세일(三十稅一 수확의 3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것) 제도를 확립했다. 이런 무위이치는 사상 문화 영역으로도 확장되어 조정은 황로를 숭상하면서도 유학을 포함한 제자백가의 학설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로지학이 주도하는 가운데 다른 학술 사상도 자유롭게 발전했다.

역사가 증명하듯 초기의 황로지학은 성공적이었고 국력은 신속히 회복되어 문제와 경제 시기 ‘문경(文景)의 치’가 나타났다. 한무제 시기에 이르면 국가는 이미 상당히 부유해졌다. 『사기』에는 당시 관가 창고에 햇곡식이 옛 곡식을 누르고 돈 창고에는 돈을 꿴 끈이 썩어 끊어질 정도로 돈이 넘쳐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은 풍족하여 저마다 말을 가졌고 들판에는 소와 양이 떼를 지었다. 두태황태후 역시 황로를 숭상하여 궁중에서 강력히 추진했고 황손과 외척들에게 『황제(黃帝)』와 『노자』를 숙독하게 했다.

하지만 한초의 국력 회복이 사회 문제까지 가릴 수는 없었으며 이는 황로지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서 식화지』에 따르면 한무제 초년에 법망이 느슨해 백성은 부유해졌으나 재물을 가진 자들이 교만해져 토지를 겸병하고 지방에서 무단(武斷)을 일삼았다. 종실과 관료들은 사치를 일삼으며 의식주가 법도를 넘어서기 일쑤였다. 지나치게 성하면 쇠퇴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였다.

서한의 내외적 정치 군사 위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안으로는 제후가 할거하고 밖으로는 흉노가 침범하여 대일통(大一統) 왕조를 위협했다. 국력이 약했기에 역대 제왕들은 타협과 수성(守成)의 책략을 썼을 뿐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했다. 한조는 이제 모든 먹구름을 쓸어버리고 진정한 대일통 성세 제국(帝國)으로 변모시킬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황제 권력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한무제가 등극했을 때 대업을 이루고자 했던 젊은 제왕은 더욱 적극적인 입세(入世) 태도를 지닌 유가 학설에 깊은 흥미를 느꼈고 존유(尊儒)의 문화 조류가 시대의 요구에 응해 나타난 것이다.

돈황벽화: 실크로드의 대상(공유 영역)

서남부 소통

한무제는 서기전 140년에 등극했고 두태황태후는 서기전 13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몇 년 사이 한무제는 신정의 좌절을 겪으면서도 대외적으로 영향력이 큰 두 가지 일을 해냈으니 하나는 장건(張騫)을 서역에 보낸 것이고 하나는 남방의 동구국(東甌國)을 절묘하게 구원한 것이다.

장건이 서역으로 가 실크로드를 연 것은 유명하지만 그의 초심은 북방 흉노에 항거하기 위한 한무제의 결정이었다. 한초 이래 흉노의 침입은 한조의 가장 큰 골칫거리이자 한무제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장애물이었다. 한고조 유방조차 흉노군과 싸우다 포위되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후 한조 황제들은 감히 흉노에 출병하지 못한 채 소극적인 방어 정책과 화친, 하사품으로 흉노를 달래왔다.

우연한 기회에 한무제는 흉노 포로로부터 서역의 대월지(大月氏)국이 흉노에게 압박을 받아 국왕이 살해되고 백성들이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무제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생각을 품었으나 대월지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한무제는 사절을 모집했고 용맹과 지략을 갖춘 장건을 사절로 임명했다.

장건은 본래 궁중 낭관(郎官)으로 말타기와 화살에 능하며 흉노의 사정에 밝았고 한무제처럼 무력 대응을 주장했다. 건원 이년(전139년) 장건과 백여 명의 일행은 농서(隴西)를 출발해 서역 탐방의 길에 올랐다. 앞길은 아득했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뜻밖에도 장건은 하서주랑(河西走廊)에 들어서자마자 흉노에게 붙잡혔고 한조와 소식이 끊겼다.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는 가운데 같은 해 건원 신정은 중단되었다. 흉노가 다시 화친을 요구하자 확실한 작전 계획이 없었던 한무제는 일단 흉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장건을 보낸 일은 이미 그의 거대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복선이 되었다.

건원 3년(BC138년) 남방의 민월국(閩越國)이 동구국을 포위하자 동구국이 한 조정에 구원을 요청했다. 한조 동남부에는 민월, 남월, 동구가 있었는데 이들은 진조(秦朝) 시기 소수민족인 월인(越人)의 후예였다. 한경제 시기 오초칠국의 난 때 동구왕 낙망(駱望)이 작은 이익을 탐해 오왕 유비(劉濞)의 반란군에 가담했다.

반란이 실패한 후 유비는 동구(東甌)로 도망쳤다. 한경제는 사절을 보내 협상하며, 낙망(駱望)에게 유비를 넘겨주기만 하면 그 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했다. 낙망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유비를 죽이자 유비의 아들 유구(劉駒)가 민월국(閩越國)으로 도망쳐 그곳 국왕을 부추겨 영토를 확장하고 동구국을 공격하게 했다. 동구는 이에 저항하기 어려워 한 조정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이것은 한무제에게 참으로 난제였다. 만약 동구에 군대를 파견하려면 반드시 태황태후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무위이치(無爲而治)”를 받드는 태황태후는 용병에 반대할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큰 뜻을 품은 한무제는 이번에 동구국을 구하지 못하면 각국에 위신을 세울 수 없고, 장차 만국을 진무(鎭撫)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절충안을 생각했다.

한무제는 대신 장조(莊助)를 현지로 보내 현지 주둔군을 동원해 민월에 대항하게 했다. 장조 일행은 한무제가 수여한 권력의 상징인 절장(節杖)을 가지고 회계(會稽)에 도착해 현지 최고 장관에게 황제의 명령을 선포했다. 민월왕은 한무제가 대신을 회계에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신속히 군대를 철수시켰으며, 이로써 동구국의 위기가 해소되었다. 그 후 동구는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사이의 지역으로 이주했고 정식으로 대한(大漢)의 신민(臣民)이 되었다.

한무제는 동구국을 성공적으로 구원하여 조정 안팎에 위신을 세웠다. 비록 몇 년간 한무제는 뜻을 펴기 어려웠으나, 그가 드러낸 박력과 모략은 사람들을 괄목상대하게 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7/26/n11411529.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