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王舍微)
【정견망】
서기전 228년, 즉 지금으로부터 2200여 년 전, 연(燕)나라의 역수(易水) 강가(지금의 하북성 서부 역현易縣)에서 중국 역사상 매우 비장한 ‘형가자진(荊軻刺秦) 형가가 진왕을 찌르다’의 서막이 정식으로 올랐다. 독서와 검술을 즐기던 위(衛)나라 사람 형가(荊軻)가 정사(正使)가 되고, 13세에 사람을 죽여 사람들이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는 연나라 용사 진무양(秦舞陽)이 부사(副使)가 되어 길을 떠나려 했다.
그들은 진나라가 천금을 걸고 수배한 반장(叛將) 번오기(樊於期)의 머리와 연나라 독항(督亢)의 지도를 지니고 있었다. 지도 두루마리 속에는 천하의 날카로운 병기인 서부인(徐夫人)의 비수가 숨겨져 있었는데, 장인에게 독약을 달여 바르게 하여 시험해 보니 피가 실낱만큼만 묻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즉 극독이 발라져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도궁비견(圖窮匕見 지도가 끝나는 곳에 비수가 드러난다)’이라는 성어가 유래했다.
연나라 태자 단(丹)은 무리를 이끌고 형가를 배웅했는데, 모두 흰 옷을 입고 흰 관을 써서 그를 보냈다. 고점리(高漸離)가 축(築)을 타고 형가가 화답하여 노래하니 변치(變徵)의 소리가 되어 선비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형가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 노래했다.
“바람 소리 쓸쓸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
장사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風蕭蕭兮易水寒,壯士一去兮不複還!
다시 우(羽)조의 소리로 강개하게 노래하자 선비들이 모두 눈을 부릅뜨고 머리카락이 위로 솟구쳐 관을 찔렀다. 이에 형가는 수레에 올라 떠나며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기·자객열전》)
이 장면은 비분하고 강개해서 후세에 줄곧 칭송받아 온 연조(燕趙)의 ‘강개비가(慷慨悲歌)’ 가풍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배웅하는 이와 떠나는 이 모두 이번 길에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에, 흰 옷과 흰 모자는 분명히 영원한 이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형가는 수레에 올라 떠났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진무양은 형가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조력자가 아니었으며, 그가 기다리던 친구는 아직 연나라 도성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형가가 부른 이 《도역수가(渡易水歌)》는 비록 두 구절뿐이지만, 앞 구절은 가을바람의 쓸쓸함과 역수의 차가움을 묘사하여 창량하고 비장한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뒷 구절은 비수 한 자루를 들고 예측할 수 없는 강한 진나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으려는 형가의 대의름름하고 의기충천한 확고한 의지와 헌신 정신을 부각했다. 짧은 두 구절의 가사는 형가로 인해 천고에 전해지며, 천백 년 동안 수많은 인인지사(仁人志士)의 비장한 회포와 처량한 감회를 담아내고 있다.
서기전 227년, 형가는 진나라에 도착했다. 진왕은 아홉 명이 손님을 맞이하는 성대한 의식을 마련해 함양궁에서 연나라 사절을 접견했다. 궁전 앞 계단 아래에 이르렀을 때 “진무양의 안색이 변하며 두려워 떨자”, 형가가 그의 손에서 지도를 받아 혼자 전상(殿上)에 올랐다. 지도를 펼쳐 진왕에게 바치는데 지도가 다 펼쳐지자 비수가 나타났다. 형가는 그 기세를 몰아 왼손으로 진왕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들어 진왕을 찔렀으나 찌르지 못했다. 진왕은 크게 놀라 뒤로 뛰어 물러났고 소매는 형가에 의해 끊어졌다. 한바탕 우여곡절 끝에 진왕이 칼을 뽑아 형가를 쳤으며, 이에 좌우 사람들이 달려들어 형가를 죽였다.
후대 사람들은 사마천의 《사기》 속 이 문장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형가는 자신의 검술이 정교하지 못함을 알았기에 멀리 있는 조력자를 기다리려 했으나, 그 사람이 멀리 있어 오지 않자 태자가 이를 지체하며 마음을 바꿨는지 의심했다. 이에 형가가 노하여 마침내 출발했다는 것이다.
태사공은 춘추필법의 문장 속에 이미 복선을 깔아두었다.
“개섭(蓋聶)과 검을 논하다가 개섭이 화가 나 그를 노려보자 형가가 나갔다”라고 했다. 이는 전국시대 말기 유명한 검객 앞에서 형가가 검술 면에서 충분한 자신감이 없었음을 설명한다. 게다가 진무양이 겁을 먹어 전상에 오르지 못했으니, 만약 조력자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중국 역사상 형가에 대한 평가는 주로 협의(俠義)를 지닌 영웅과 필부인 자객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 집중되어 왔다.
첫 번째 관점은 형가를 긍정적인 협의 영웅이자 천고의 장사(壯士)로 보는 것이다.
진대(晉代) 도연명은 오언시 《영형가(詠荊軻)–형가를 노래하다》를 보면 진왕을 찌른 형가의 취의(取義) 장거를 커다란 열정으로 찬송했음을 알 수 있다. 시 전체가 격앙되고 비장하며 호방하고 힘이 넘쳐, 평담하기로 유명한 ‘고금 은일시인의 종조(宗祖)’인 도연명의 시 중에서는 매우 독특하고 보기 드문 작품이다. 특히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은 기이한 공적을 이루지 못한 시인의 무한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연나라 태자 단은 무사 양성을 잘하였으니
그의 뜻은 강한 영을 보복함에 있었다.
일당백의 뛰어난 인물 불러 모으다가
연말에 가서 형경을 얻게 되었다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기도 하는데
검을 빼어 들고서 연나라 서울로 나섰다
흰 말은 넓은 길 가에서 우는데
원통하고 슬퍼 떠나는 날 전송한다.
燕丹善養士
志在報强嬴
招集百夫良
歲暮得荊卿
君子死知己
提劍出燕京
素驥鳴廣陌
慷慨送我行
……
힘을 떨쳐 만리 먼 길 넘어가고
좁은 길 거치고 천 개의 성을 지났다
지도가 다 펴지자 일이 절로 닥쳐와
호방한 임금도 정녕 겁에 질려있다
아깝도다, 검술이 허술하여
기묘한 공적을 마침내 이룩하지 못했다
그 사람 비록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천년이 지나가도 깊은 정이 남아 있다
凌勵越萬里
逶迤過千城
圖窮事自至
豪主正怔營
惜哉劍術疎
奇功遂不成
其人雖已沒
千載有餘情
이는 그 사람이 비록 죽은 지 천 년이 지났으나 그의 협의 정신은 여전히 세상에 길이 남았다는 뜻이다.
태사공 역시 형가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조말(曹沫)로부터 형가에 이르기까지 다섯 사람은, 그 의로움이 성공하기도 하고 성공하지 못하기도 했으나, 그 뜻을 세움이 분명하여 자신의 뜻을 속이지 않았으니 이름이 후세에 전해짐이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즉 조말부터 형가까지 이 다섯 명은 그 협의의 거사가 성공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모두 명확하게 뜻을 세웠고 끝내 자신의 뜻을 어기지 않아 만대에 이름을 남겼으니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역주: 사마천인 말하는 5명은 노나라 사람으로 제나라 환공을 위협하여 빼앗긴 땅을 돌려받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조말(曹沫), 오나라 사람으로 생선 요리 속에 비수를 숨겨 왕을 살해한 전제(專諸),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신을 알아준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 자신의 몸을 망가뜨린 예양(豫讓), 제나라 사람으로 엄중자의 부탁을 받아 한나라 재상 협루를 찔러 죽인 후 자신의 얼굴을 훼손하여 정체를 숨기고 자결한 섭정(聶政)과 본문에 나온 형가를 말한다.]
두 번째 관점은 형가를 사마귀가 수레를 막아서는 것과 같은 필부나 어리석은 용기를 가진 무리로 보는 것이다.
당대(唐代) 유종원(柳宗元) 역시 《영형가詠荊軻–형가를 노래하다》》라는 오언시를 썼으나, 그의 감회는 도연명과 제목은 같아도 뜻은 달랐다.
“…… 시작함은 어찌 그리 날카롭더니, 막상 일에 임해서는 결국 머뭇거렸나. 긴 무지개가 태양을 뚫었건만, 갑작스럽게 도리어 죽임을 당했네. …… 처음엔 근심과 재난을 없애려 했으나, 끝내 재앙의 고리를 움직였도다. 진황은 본래 속임수와 힘을 썼으니, 제환공과는 사정이 다르네. 어찌하여 조말을 본받으려 했는가, 참으로 용맹하고도 어리석다 하겠네. 세상에 전해지는 것엔 잘못이 많으니, 태사공은 하무저(夏無且)의 증언을 살피라.”
……
시작할 때는 어찌 그리 날카롭던가
정작 일에 임해서는 결국 머뭇거렸고
긴 무지개가 태양을 뚫었건만
갑작스럽게 도리어 죽임을 당했네
造端何其銳
臨事竟趑趄
長虹吐白日
倉卒反受誅
……
처음엔 근심과 재난을 없애려 했으나
끝내 재앙의 고리를 움직였도다
진시황은 본래 속임수와 힘을 썼으니
사정이 제환공과는 다른데
어찌하여 조말을 본받으려 했는가
참으로 용맹하고도 어리석다 하겠네
세상에 전해지는 것엔 잘못이 많으니
태사공은 하무저(夏無且)의 증언을 살피라
始期憂患弭
卒動災禍樞
秦皇本詐力
事與桓公殊
奈何效曹子
實謂勇且愚
世傳故多謬
太史徵無且
유종원은 조말이 비수를 잡고 제환공을 위협해 노나라의 빼앗긴 땅을 모두 돌려받기로 약속받았다는 고사를 빌려, 형가의 이런 행위가 용맹하긴 하지만 어리석었음을 풍자했다. 원래 재앙을 없애려 했으나 오히려 재앙의 스위치를 건드려 진시황을 노하게 하여 연나라를 공격하게 만들었고, 연왕은 태자 단의 머리를 바쳐 진나라에 비위를 맞췄음에도 소용이 없었으니 나라가 망하는 화를 앞당겼을 뿐이다.
송대 사마광은 《자치통감·진기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나라 단은 하루아침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호랑이와 이리 같은 진나라를 범했으니, 생각이 가볍고 도모함이 얕아 원한을 사고 화를 재촉했다. 소공(召公)의 묘사가 갑자기 끊기게 했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 만승의 나라를 가지고 필부의 분노를 터뜨리며 도적의 꾀를 부렸으니, 공은 무너지고 몸은 죽어 사직이 폐허가 되었으니 또한 슬프지 않은가!” 여기서 형가가 진왕을 찌른 것을 필부의 분노이자 도적의 꾀라고 했으니, 얼마나 낮은 부정적 평가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송나라 소순(蘇洵)도 《육국론》에서 “단이 형경으로써 계책을 삼음에 이르러 비로소 화가 빨라졌다”라고 같은 견해를 밝혔다.
형가자진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보면, 한진(漢晉) 시기에는 진나라가 멸망한 시점과 가까워 긍정적 평가가 위주였다. 이는 진시황이 무력으로 육국을 통일한 것에 대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점과 관련이 있는데, 진왕을 찌른 것을 반항의 의미로 의거(義擧)로 보았던 것이 아닐까? 반면 당송(唐宋) 시기에 이르면 시대가 이미 오래되었고 사람들은 여러 차례 조대의 흥망성쇠를 겪으며 역사의 수레바퀴가 앞으로 굴러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문화 발전의 정점에 진입하여 보편적으로 문(文)을 숭상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협객이 생존할 토양이 사라졌기에 형가에 대한 평가는 점차 부정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역사 인물의 공과 평가 역시 사람의 감정이나 좋고 나쁨을 척도로 삼는 것은 아니다. 소식(蘇軾)의 오언시 《화도영형가(和陶詠荊軻)–도연명의 형가를 노래하다에 화답》는 또 다른 시각과 평가 층면을 보여준다.
“진나라는 말 뒤의 소와 같으니, 여씨(呂氏)는 다시 영씨(嬴氏)가 아니네. 하늘이 그 독을 두텁게 하려 하여, 자객 이씨의 손을 빌렸도다. 공을 이루자 뜻이 스스로 가득 차고, 쌓인 악은 언덕과 산 같네. 몸이 멸망할 때가 올 것이니, 천천히 살피며 편안히 가리라. …… 형가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자(田子)는 늙음이 놀랍구나. 연조 땅에 기이한 선비 많다지만, 애석하구나 역시 빈 이름뿐이네. …… 진나라를 망하게 함은 단 세 집이면 충분한데, 하물며 우리는 수십 개의 성이 있지 않은가.”
진나라는 말 뒤의 소와 같으니
여씨는 다시 영씨가 아니라네
하늘이 그 독을 두텁게 하고자
이객경(이사)의 손을 빌렸다네
공을 이루자 뜻이 스스로 가득 찼고
쌓인 악은 언덕과 산 같았네
몸이 멸망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니
천천히 살피며 편안히 가야 하거늘
秦如馬後牛
呂氏非復嬴
天欲厚其毒
假手李客卿
功成志自滿
積惡如陵京
滅身會有時
徐觀可安行
형가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자(田子 전광)는 늙어서 놀라운 일을 했구나
연나라와 조나라에 기이한 선비 많다더니
애석하구나 역시 헛된 이름뿐이네
……
진나라를 망하게 함은 단 세 집이면 충분한데
하물며 우리는 수십 개의 성이 있지 않았던가
荊軻不足說
田子老可驚
燕趙多奇士
惜哉亦虛名
……
亡秦只三戶
況我數十城
이 시에는 몇 가지 고사가 인용되었다.
첫째, “진나라는 말 뒤의 소와 같으니, 여씨는 다시 영씨가 아니라네”라는 구절은 진시황이 본래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을 가리킨다. 《사기·여불위열전》에는 자초(子楚)가 여불위의 첩 조희(趙姬)를 요구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희는 스스로 몸에 아이가 있음을 숨겼다고 했다.
“말 뒤의 소(馬後牛)”란 동진(東晉) 때 ‘소(牛)가 말(馬)의 뒤를 잇는다’는 예언이 있어 사마의가 대장군 우금(牛金)을 몹시 시기하여 독주로 죽였으나, 공왕비(㳟王妃) 하후씨(夏后氏)가 결국 우씨(牛氏 소) 성의 하급 관리와 통정하여 원제(元帝) 사마예를 낳았다는 설(《시주소시(施注蘇詩)》 권41)을 뜻한다.
둘째, “하늘이 그 독을 두텁게 하려 하여”는 《좌전·소공 4년》에서 유래했다. 사마후(司馬侯)가 이르기를 “하늘이 혹 그 마음을 방자하게 하여 그 독을 두텁게 한 뒤 벌을 내리려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로 하여금 끝마치게 할지도 알 수 없다. 진(晉)과 초(楚)는 오직 하늘이 돕는 바이니 다툴 수 없다. 임금께서는 허락하시고 덕을 닦으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소서”라고 했다.
셋째, ‘진나라를 망하게 함은 단 세 집이면 충분한데’라는 구절은 《사기·항우본기》의 명구인 “초나라에 비록 세 집만 남았을지라도 진나라를 망하게 할 나라는 반드시 초나라다”를 인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소동파의 시는 대체로 역사 발전에는 저절로 정해진 수(定數)가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진시황이 왕위를 계승해 통일 대업을 완성한 것과 진나라가 속히 멸망한 것 모두 천의(天意)라는 것이다. “하늘이 장차 멸망시키려 하면 반드시 먼저 미치게 한다(《증광현문》).” 먼저 그 업을 언덕과 산처럼 높게 쌓게 한 뒤 벌을 내린다는 뜻이다.
당사자는 사전에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으므로 굳이 다툴 필요가 없으며, 덕을 닦으며 기다리고 시간을 두고 고요히 관찰하는 것이 가장 좋다. 초나라의 세 가문만으로도 진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는데, 당시 연나라에 아직 수십 개의 성이 있었거늘 어찌하여 이처럼 험난한 계책을 썼느냐는 뜻이다.
그렇다면 형가가 진왕을 찌른 것은 정의로운 거동이었을까? 사마천은 《사기》에서 유협(遊俠)과 자객을 나누어 서술했다. 유협은 무용(武勇)의 힘을 가졌으나 제때 중용되지 못한 인물들을 가리킨다. 자객은 원래 유협이었으나 많은 이가 권세가 밑에 의탁하여 길러지며 하루아침에 쓰이기를 기다렸다. 사마천은 분명히 ‘은의(恩義) 맺음’을 강조했다. 따라서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거나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했기에 국사로 보답한다’는 것이 자객의 신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의리는 사적인 관계를 준칙으로 삼은 개인의 은덕이나 주관적 판단에 기초해 행해진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유협열전서》에서 한비자의 논술을 인용해 “지금 유협들은 그 행실이 비록 정의(正義)에 부합하지는 않으나, 그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그 행함은 반드시 과단성이 있으며, 승낙한 것은 반드시 성실히 지킨다”라고 했다. 즉 암살 행위가 비록 과감하고 두려움이 없었을지라도 그 방식이 정의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역사상 진나라가 무력으로 6국을 통일한 것이 정의냐 비정의냐 하는 문제는 어떠한가? 나관중은 《삼국연의》 제1회 본문에서 “천하의 대세란 나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지면 반드시 나뉜다”라고 했다. 조대의 교체와 합치고 나누어짐, 어느 왕조가 흥하고 어느 왕조가 멸망할지는 본래 하늘의 질서 있는 안배가 있다.
강자아(姜子牙)가 후세에 남긴 예언 《건곤만년가(乾坤萬年歌)》에도 주나라 천하가 여(呂)씨 성을 가진 이가 세운 진나라에 의해 대체될 것이며, 20년 안에 멸망할 것임을 예언했다.
“지금 천하는 주나라가 통일했으니
예악과 문장이 발달해 800년을 가리라
여(呂)씨에 천하를 전하니
진(秦)이 된다
천하의 유래가 굳고 오래지 못하여
20년을 지킬 수 없도다”
而今天下一統周
禮樂文章八百秋
串去中直傳天下
卻是春禾換日頭
天下由來不固久
二十年間不能守
공자는 《논어·계씨》에서 “천하에 도가 있으면 예악과 정벌이 천자로부터 나오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맹자는 “춘추시대에 정의로운 전쟁은 없었다(《맹자·진심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주 천자의 조명(詔命 천자의 명령)을 받지 않은 제후국 간의 전쟁은 모두 정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정의로운지 여부는 전통적 가치인 인·의·예·지·신과 중용(中庸)에 따라 측정하고 판단하는 것이지, ‘천하의 대세’에 순응하여 성공했는지 여부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승리자는 역사라는 연극의 대본 속에 이미 설계된 것이며, 무력으로 천하를 다투는 것은 세간의 반리(反理)에는 부합할지라도 동시에 멸망의 인과를 심는 일이다.
가의(賈誼)가 《과진론》에서 정교하게 논술했듯 “인의(仁義)를 베풀지 않으면 공수(攻守)의 형세가 달라진다”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위(仁義)’란 인애와 정의를 뜻한다.
현대 사회의 어떤 장면들에서 정의(正義)는 어떤 입장이나 정치적 올바름의 기호로 취급되거나, 이해득실 속에서 공정함과 공정성을 추구하는 가치 판단 개념으로 전의되기도 한다. 또한 일단 정치적 올바름의 고지를 점령하기만 하면 도덕적 저지선도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다.
맹자는 “인(仁)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義)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맹자·이루상》)”라고 했다. 인은 의의 핵심이며, 의는 인의 발현이다.
공자는 “의(義)란 마땅함이다(《예기·중용》)”라고 했다. 이는 처세가 정리에 합당하고 지극히 바르며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애(仁愛)의 마음이야말로 정의의 시작이며, 정의는 적절함 속의 행위 윤리 준칙이지 정치적 올바름식의 극단적인 행위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직 보편적 가치만이 정의의 핵심적 함축이자 측정 기준이다.
[역주: 사한췌진(史翰萃真)이란 수많은 역사서 중에서 진실만을 뽑아 모았다는 뜻이다. 현재 정견에 연재되고 있는 본격 역사물 시리즈니 독자들의 관심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5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