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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연심 (44): 마변(魔變)

요연(了緣)

【정견망】

이 편의 제목을 정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마고(魔考 마의 고험)’이 더 적절할지, 아니면 ‘마변(魔變 마로 변화)’이 더 진실할지에 대한 문제는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한 글자 차이가 천 리나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변(魔變)은 우리가 생명 초기 순정(純淨)했던 상태에서 사심(私心)이 싹터 생명의 본원이 오염되고 점차 변이되어 패괴됨으로써, 층층이 아래로 떨어져 인간 세상에 오게 된 진실한 원인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진상(真相)은 사람을 가장 깊이 생각하게 한다. 마의 고험인 마고(魔考)는 우리가 층층의 장애를 뚫고 법을 얻어 수련하여 반본귀진(返本歸眞)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또한 이는 층층이 정화하며 변이된 부분의 에너지를 바로잡고 중생을 구도하는 과정이며, 저차원에서 고차원으로 승화하여 고차원의 나와 다시 융합하고 회귀하는 과정으로, 이를 통칭해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 한다.

듣기에는 문제가 없으나, 구세력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솔직히 말해 정법(正法)을 완전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신의 패괴된 요소를 철저히 바꾸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목적을 품고 정법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으며, 이로 인해 구우주의 사(私)를 극단으로 발휘했다. 스스로 파멸할지언정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았기에 정법의 가장 큰 장애가 되었다. 그들은 대법제자의 수련에 강제로 관여하고 심지어 많은 박해를 강요하면서 마의 고험을 핑계로 삼았으나, 실제 목적은 대법제자를 훼멸하는 데 있었으며 그 수단은 지극히 사악했다. 이것을 어찌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대법제자의 개공개오(開功開悟)를 성취하고 생명의 경지를 높이는 동시에 업력을 소멸하며 중생을 구도하여 정법이 반드시 성공하게 하려는 목적의 고험과 같은 반열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세력 역시 마변(魔變)된 존재들이다. 다만 똑같이 마변되었어도 우리는 초심을 유지하며 조건 없이 법에 동화되고 부족한 점을 찾아 생명의 기제를 완벽하게 하려 했기에 편차를 바로잡는 것이 절실했고 우주 정법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구세력은 생명 초기의 아름답고 신성함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과거에는 정신(正神)이었으나 마(魔)보다 더 다루기 힘들게 변했다. 마계(魔界)도 강자를 존중하는 법이라, 불복하면 싸우고 싸워서 이기면 고분고분 말을 듣는다. 그러나 정법을 파괴하는 데 가담한 구세력은 설령 얻어맞아 흩어지더라도 사심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으며, 동귀어진(同歸於盡)할 각오로 박해를 강요한다. 대법제자와 함께 멸망하겠다니, 그것들에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대법제자의 순도를 단련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구세력은 존재할 마지막 의미조차 없으며, 겨우 이 정도의 이용 가치뿐인데 무엇을 떠들어대겠는가.

수련인이 각성하는 그 순간이 바로 그것들이 멸망하는 때다. 다만 우주가 너무나 방대하고 사부님께서 너무나 자비로우시기에 중생의 목숨을 모두 자신의 몸속에 거두시고, 스스로 국면에 들어오셔서 중생을 대신해 모든 죄를 속죄하셨다. 중생을 건져 올려 깨끗이 씻기고 우리를 대신해 감당하신 업력의 부분, 즉 중생을 위해 업을 소멸하고 변화시켜 놓은 좋은 부분을 사부님 몸속에 거두셨다. 저차원 육신의 제자와 위아래로 대응되니, 오직 층층 각성하기만 하면 층층 융회관통(融會貫通)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 우리의 뿌리가 우주에 박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며 분명한 목표가 있는 말씀이다.

이로 보아 불은호탕(佛恩浩蕩)은 결코 형용사가 아니라 확고하게 주시는 것으로, 실재하는 하늘 사다리가 우리 생명의 기제 속에 놓여 있다. 경서를 펼치면 온 우주의 부름을 마주하게 되는데, 수련 역시 양방향의 여정이다. 사부님께서 길을 다 닦아 놓으셨으니 제자 또한 용맹정진해야 하며, 오직 당신이 깨달아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사부님의 설법을 한번 깨달아 보자.

“오늘날의 인류는 사실 정법이 아니라면 일찍이 훼멸되었을 것이다. 인류의 사상표준은 이미 지옥 아래에 있다. 법을 바로잡는 것 때문에 나는 삼계 내 일체 중생의 죄를 대속(贖)했다. (박수) 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라. 우리 수련생들로 말하면, 내가 당초에 당신들을 지옥에서 건져온 것과 같다. (박수) 나는 정말로 당신들을 대신하여 당신들이 저지른 천백 년의 죄를 감당했다. 단지 이러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나는 이로써 또 당신들을 제도하여 신(神)으로 성취되게 하려고 했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나는 당신들을 위해 온갖 고심을 했으며, 동시에 당신들이 그처럼 높은 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에게 그처럼 높은 신의 영예와 당신들에게 그처럼 높은 층차에서 갖춰야 할 일체 복을 주려고 한다. (박수) 천지개벽 이래 어떠한 신도 감히 이렇게 하지 못했고, 또한 지금까지 이러한 일이 있어본 적이 없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이 단락 설법은 사부님께서 중생의 명(命)과 한데 연결해, 차라리 중생을 대신해 업력을 감당하고 당신의 몸이 상할지언정 단 하나의 생명도 낙오시키지 않으려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생명이 변이되어 본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제 불능이 되었기에 정법의 시간이 자꾸만 지연되고 있다. 본래 이미 거의 곧 제 위치에 도달했던 동수들이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조금이라도 나태해지면 다시 오염되기 쉬워 수련의 난도가 높아졌다. 어려움은 또 기회이기도 하니, 이것은 생명의 본원 위치를 돌파해 극히 높은 경지까지 제고해 더 높은 위치로 정오(正悟)할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말처럼 쉽겠는가. 생명의 본원보다 더 높은 위치로 수련해 올라가는 것은 용광로에 넣어 다시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러므로 모든 동수가 기회를 잡아 원래 위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필경 정점에 다다랐을 때 동력을 잃으면 소극적이고 나태해지기 쉬우며, 수련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하므로 경지가 떨어지는 이도 있다. 이 때문에 사부님께서 각 방면의 생명을 모두 보살피시기가 더욱 어려워지셨다. 높을 수록 추위를 견디기 어렵다는데, 사부님의 고충을 누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사람을 제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이다! 본래 안배하신 정법은 반드시 성공하는 길 역시 일부 전진하지 못하는 동수들이 도태되는 상황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제자들을 잘 돌보는 것만도 충분히 어려운데, 사부님께서는 양쪽을 모두 아우르려 하시며 중생들도 가능한 한 끌어올려 최대한 많이 구도해 도태율을 낮추려 하신다. 구세력은 자신들이 구도받을 가망이 없자 중생을 묶어 함께 순장하려 하니, 구세력과 사람을 빼앗아 오는 것이야말로 지금 당장 시급한 일이다! 사부님의 의지의 근원이 같은 진수제자(真修弟子)로서 집행력이 반드시 강해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잘하지 못할 그 어떤 이유도 없으니, 필경 사부님의 명은 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사부님의 번티(本体)와 진신(眞身)이 모두 삼계로 내려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수승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아야 한다. 창세주의 신체(身體)가 바로 우주의 본원이다. 우리가 우주의 종단(終端)에서 수련할 때 사부님의 의지와 일치하고 사유가 고도로 융합된다면 그것이 바로 법에 녹아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각자의 위치까지 수련했을 때가 바로 우주의 근원과 종단이 완벽하게 합치되는 때이며, 구우주를 벗어나 신우주로 넘어가는 대원만(大圓滿)이다.

사부님의 진신조차 우리에게 맞춰주러 오셨다. 우주의 본원을 지니신 사부님과 종단인 우리가 같은 지구상에 있으며 우리와 이렇게 가까이 계시는데, 차이는 오직 사상의 거리뿐이다. 당신은 수련이 어렵다고 말하는가? 오직 자신의 인지(認知)를 높이고 사상을 바꾸어 점차 법에 녹아들기만 하면 승화해 올라갈 수 있다. 사람과 신의 거리는 멀지 않으며 그 차이는 오직 이 사람마음(人心)뿐이다. 이른바 홍진(紅塵)에서 마음을 단련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우주를 단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사부님께서 중생을 데리고 층층이 정화하며 바로잡아 올라가시는 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부님의 명은 어길 수 없다.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내야 할 것이며 반드시 집행해야 한다. 사부님의 의지는 곧 우주의 법칙이다. 우주의 법칙과 주파수를 맞춰야만 계속 개공개오(開功開悟)하고 승화해 올라갈 수 있다. 집행하는 과정이 곧 원만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우주의 근원을 이끌고 우리에게 맞춰주러 오셨는데, 우주의 종단인 우리가 갈 길이 아직도 멀단 말인가? 이것이 어찌 천 년, 만 년 만의 기회뿐이겠는가. 창세주와 함께 있는 것은 우주 천지개벽 이래 처음 있는 일이며, 분명 전무후무한 일이니 속으로 기뻐해야 한다. 우리 수련의 차이는 오직 심성(心性)의 거리뿐이다. 심성이라! 그것은 사부님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거리다. 손오공의 근두운처럼 심성이 갖춰지면 영산(靈山)은 엉덩이만 흔들어도 도착한다. 심성이 미달하면 구구 팔십일 난은 기본 코스가 된다. 영산이 내 마음속에 있음을 알면서도 산을 바라보며 말만 달리다 지치게 되니, 몇 바퀴를 돌아갈지는 오로지 오성(悟性)에 달렸다. 미혹과 깨달음은 일념의 사이다.

이렇게 쓰면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으니 조금 더 상세히 쓸 수 있지만, 요점만 짚는 데 그치겠다.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또 스스로의 길을 정오(正悟)해내야 하며 자기 것을 닦아내야 비로소 수련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에는 본보기가 없으며 베껴서도 안 된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수련인으로서 사부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으며, 심지어 사부님께조차 의존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타인이겠는가. 그러므로 잔꾀는 금물이며 대지혜(大智慧)야말로 세 가지 일을 잘해내는 근본이다. 수련에 지름길은 없지만 중점을 짚어줄 수는 있다.

수련의 중점은 바로 당신의 머릿속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통속적으로 말하면 엉덩이를 어디에 붙이고 앉았느냐가 머릿속 생각을 결정한다. 자신을 사람으로 여기면 머릿속에 사심(私心)과 잡념이 가득하다는 말은 점잖은 표현이고, 어쩌면 남도여창(男盜女娼 남자는 도둑질과 여자는 매춘) 같은 아이들이 보기에 부적절한 생각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신으로 여기면 머릿속에는 오직 책임뿐이다. 정신(正神)의 에너지는 자비(慈悲)이며, 수련인의 자비는 책임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가 누차 중생을 마음속에 품으라고 강조하는 것은 수련인이 매 순간 책임을 이행하도록 일깨우기 위해서다. 중생을 마음속에 품을 때 비로소 자비의 상태에 처할 수 있고, 자비는 정신(正神)의 에너지를 동원하여 생각이 닿는 곳마다 덮고 정화하며 귀정하므로 신적(神跡)이 온 우주에 가득하게 된다. 정념정행(正念正行)이야말로 수련인의 올바른 모습이다. 경서를 덮고 가부좌를 풀자마자 사유가 속인의 상태로 돌아가 사람마음과 집착이 사유를 주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신과 사람은 일념의 사이다! 그렇게 쉽게 사람의 상태로 전환되지 마라.

하지만 티끌 세상에 몸담고 있으면 주변은 온통 각종 유혹뿐이고, 생존을 위해 직장에서 각양각색의 사람과 사건에 대응해야 한다. 하물며 사람마음이란 것은 상한선은 있어도 하한선은 없어서 머릿속은 명리정(名利情)으로 가득하고 입만 열면 집착이다. 조금만 방심해도 사람에 이끌려 지능이 낮아지고 명리에 공감하게 된다. 수련인으로서 하루 24시간 내내 정념을 바짝 조이기는 어렵다. 호랑이도 졸 때가 있듯이 항상 느슨해질 때가 있지만, 사상과 의지가 늘 수련의 상태에 처하게 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매 순간 중생을 마음속에 품는 것이다. 자비의 상태에 처해 있다면 설령 사유가 느슨해지더라도 사심과 잡념이 싹터 중생에게 해로운 순간, 즉시 분별해 내는 동시에 그 배후의 요소를 바로잡을 수 있다. 사유가 법(法)과 일치하기만 하면 승화는 매분 매초마다 이루어진다.

자, 이제 3천 자 정도 기본을 썼으니 마변의 문제에 대해 말해보겠다. 사부님께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법, 즉 진신(眞神), 진신(眞身), 사상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더 높이 올라가 무형신(無形神)의 경지에 이르면 오직 사상만 남는다. 독자 여러분은 내가 짚은 중점이 무엇인지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사상이다. 마음이 곧 우주라면 사상은 우주의 내함을 풍부하게 하는 소재이자 또한 우리의 진신(真神)이다. 생각(念)은 마음에서 생기며 사유의 내원은 심념(心念)의 통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순수하지 못해 누락이 생기면 배후의 요소가 틈을 타 순간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사람마음은 잘 변하기 때문에 사유와 의식은 정념과 사념(邪念) 사이를 수시로 오가며, 자칫하면 사유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다스리기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마변 역시 일념 사이에 일어나며, 오직 심신합일(心神合一)에 도달해야만 사상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수련의 핵심이 되는 곳이다. 우주 대법을 우리에게 다 전해주셨으니, 자신이 위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사상이 그 경지와 통달할 수 있고 사유 활동으로 그 경지의 에너지를 동원해 정법할 수 있다. 관건은 홍진 속에서 정념정행을 유지하며 신을 본받고, 늘 안으로 찾으며 누락이 있으면 즉시 고치고 보완해 사람마음과 집착이 요동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잘못을 범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기도 하니 수련에 보장이 생긴다. 만에 하나 실수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제때 손실을 멈추는 것은 해내야 한다. 사람마음에 이끌려 작은 감정의 기복만 생겨도 하나의 작은 마변을 일으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생명의 본원부터 다시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쩐싼런(眞·善·忍)의 우주 특성 속에서 생겨났으며, 본원 초기 생명은 순선(純善), 순진(純眞), 순미(純美)했다. 생명에 사(私)가 생기면, 즉 하나의 작은 마변이 일어나 경지가 떨어질 때 고층 우주에서 다음 층 우주로 떨어진다. 단지 한 층 아래의 우주일 뿐이라 해도 거기에는 차원(維度)의 거리가 있다. 이 차이는 인간 세상의 숫자로는 헤아릴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도량형 자체가 다르니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또한 우주의 구조는 한 층의 신계(神界), 한 층의 마계(魔界)가 층층이 대응되어 내려간다. 우주에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가 존재하는 한, 우주는 층층마다 부처가 있으면 마도 있는 법이다. 우리의 유전자 DNA 사슬이 회전하는 작은 하늘 사다리 같다고 상상하며 사유를 확장해 보면 우주의 구조와 약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렇다, 비록 삼계로 떨어져 육신을 얻었을지라도 우리 생명의 메커니즘은 자체적으로 하늘 사다리를 갖추고 있다. 이는 원신(元神)이 본래 갖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 정법을 닦기만 하면 반본귀진할 수 있다.

본원 생명의 경지가 떨어지면 저 순백색 물질의 에너지에 검은 점, 즉 오점이 생겼다고 이해할 수 있으며 순백색 에너지 생명체 속에 검은 물질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고차원 생명이 어떻게 저차원으로 떨어졌을까? 차원의 차이와 에너지의 격차가 너무 커서 우주를 달걀 속에 집어넣는 것과 같으니, 저차원 공간은 고차원 에너지를 담을 수 없어 터져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에너지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개인적인 이해로는 두 가지 행방이 있다. 하나는 변이되어 패괴된 에너지는 마계(魔界)로 가고, 좋은 부분이 다음 한 층 아래의 신계(神界)로 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에너지의 일부가 봉인되고 남은 것만이 다음 계(界)로 내려간 것이다. 경지가 떨어지는 원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상의 마변(魔變)이다. 마변된 부분의 에너지는 마계로 떨어져 흑화된 내가 존재하게 되니 인간의 인지로는 신격(神格) 분열이라 할 수 있다. 순수한 부분은 다음 한 층 아래 신계로 떨어지지만 순도가 낮아진 것이다. 심성이 하락함에 따라 불성(佛性)도 줄어들고 마변된 에너지는 자동으로 분리되어 나가지만 여전히 동일한 생명체다. 다만 순수하지 못해 검은 물질이 있게 되며, 삼계 내로 떨어져 인신(人身)을 얻기 전까지 불성과 마성이 공존하게 된다. 우리의 마성은 아마 이렇게 온 것일 테다.

또 하나는 사명을 띠고 내려와 사부님을 따라 정법(正法)하는 신들이다. 마변되어 패괴되었기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무량한 중생의 명(命)과 희망, 여러 불도신(佛道神)의 의지를 짊어지고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기 위해 자원해서 내려온 것이다. 층층 신의 광환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내려올 때 층층이 봉인된 에너지는 제자리에 보존되지만, 층층의 마계 역시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라 뚫고 지나와야 한다.

다만 미혹이 깊지 않아 설사 마계에서 흑화(黑化)된 나와 겹쳐져 신의 지혜(神智)를 일부 잃더라도, 사명만 굳게 기억한다면 생명이 신의 청명(淸明)을 유지해 되도록 적게 머물고 인연만 맺고 떠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지나가는 시간에도 약간의 인과(因果)가 때묻게 마련이다. 마계는 거대한 염색통과 같으니 한 번 거치며 어찌 조금도 물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계에서 잘한 이는 걸음이 빨라 선연(善緣)을 많이 맺고 악연(惡緣)을 적게 맺어 마변된 에너지가 적다. 반대로 마계에서 잘하지 못한 이나 심지어 초심을 잊은 이는 마계에 미혹되어 노정이 지체될 뿐만 아니라, 마중(魔衆 마의 무리)과 너무 얽혀 악연을 많이 맺음으로써 마변된 에너지가 많아진다.

다행히 마계를 뚫고 지나가면 곧 신계(神界)다. 신계에 이르면 순정한 에너지의 세례를 받아 조금 깨어나 자신의 사명을 기억하지만, 다시 마계를 지나면 흐릿해진다. 이렇게 청성해졌다 흐릿해졌다 하면서 삼계에 도착하고 사람몸을 얻으면 미혹은 더욱 깊어진다. 물론 사명을 위해 온 대부분의 생명은 늘 청성함을 유지할 수 있지만, 마계에서 어쩔 수 없이 에너지가 조금 마변되어 검은 물질이 생기게 마련인데 사람몸을 얻어 사람 속에 미혹되는 것과 같다. 다만 미혹이 깊지 않아 일깨우기 쉽고 수련하려면 업력도 작다.

이로 보아 대다수 중생은 생명 초기에 순정(純正)한 에너지장이었으나 변이된 부분이 마계(魔界)로 갔고, 그것 역시 생명의 일부이기에 사람 이곳에 대응되면 불마동체(佛魔同體)가 된다. 그러므로 수련은 마성을 제거하고 불성(佛性)을 충실히 하여, 본원의 변이된 흑색 물질을 다시 깨끗이 씻어 거둠으로써 더 완벽하고 순정한 자신으로 수련 성취하는 것이다.

기왕지사 생명의 패괴(敗壞)가 마변에서 시작되었다면 그럼 생명의 회귀는 곧 모든 바르지 못한 요소를 바로잡는 것에서 시작해 법 속에서 새로이 미래를 개창하는 것이다. 정법의 에너지로 봉인(封印)을 충격하고 신마(神魔) 양계를 동화하고 바로잡으며, 더 높은 진아(眞我)와 층층이 융합하여 천지인(天地人) 우주가 고도로 합치되어야 한다. 진신(真身), 진신(真神), 사상이 융회관통하여 혼연일체가 되고 우주의 뇌로 성장해 완전히 법에 녹아들어야 한다. 그러면 오직 사상만 남는다. 진신(真神)과 진신(真身)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사상 속에서 고도로 융합된 것이며, 속박이 없어야만 비로소 대자재(大自在)다.

대체 얼마나 자재한가! 이것은 문자로 묘사하기 정말 어려운데, 깊이 입정(入定)한 상태의 느낌으로 대신하겠다. 신체의 모든 세포가 마치 흩어진 모래처럼 에너지의 작은 과립이 되어 우주와 주파수를 맞추고, 진동하는 주파수 속에서 널리 퍼져나가 환우에서 자유자재로 흩날리는 느낌이다. 사유와 의식을 마음속에 침전시키고 사상을 최대한 공무(空無)의 상태로 두면, 각 세포가 우주 에너지와 순환하며 팽창하고 흩날리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완전히 마음과 융합하여 허무(虛無)한 에너지의 상승 속에 처할 수도 있다.

심신(心身)이 에너지 의식체(意識體)가 되어 끝없이 확장되는 것, 그것은 곧 우주의 법칙 속에 침잠하여 정(靜) 중의 동(動)이라는 현묘하고 수승함을 체득하며 자연스럽게 우주의 주파수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할수록 정(定)이 깊어지고, 정(靜)은 지혜(慧)를 낳으니 정이 깊을수록 지혜가 원대하게 개척되며 신체의 흩어진 모래도 끝없이 넓어져 심신이 허무하고 흩날리는 가운데 있다. 점차 정(定) 속에서 육신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시간도 느끼지 못하며, 심지어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자는 인체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어 마치 모든 것이 허무(虛無)로 변한 듯하고 호흡조차 가늘어져 거의 들리지 않는 무변한 적정(寂靜)에 이른다.

사실 입정(入定)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체험은 이러하다. 가부좌 중에 에너지가 신체의 모든 세포를 충실히 채우면, 교차 순환하며 팽창하여 세포 껍질을 들어 올린다. 신체의 피각(皮殼 껍질)이 에너지로 채워져 들어 올려질 때 모든 바르지 못한 상태가 자연스럽게 바로잡힌다. 허리가 굽으면 에너지가 밀어 올려 곧게 펴고, 턱이 낮아지면 에너지가 밀어 올려준다. 육신이 고에너지 물질로 전화(轉化)되는 운행 중에 처하면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충실해진 육신의 피각은 마치 고정된 듯하여 점차 조각상처럼 앉아 있게 된다. 사유 의식 역시 정념(正念)으로 충만해져 개별적인 생각이 싹트더라도 순간적으로 흩어져 버리며, 심신이 에너지의 운행 속에 처한다. 연공을 마치고 공을 거두면 세포의 표면층이 일시에 느슨해지는 것을 느낀다. 사람의 이 층 물질 피각(皮殼)이 고에너지 물질에 의해 들어 올려져 운행될 때가 바로 입정(入定)의 상태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련의 법보는 안으로 찾는 것이다. 오직 안으로 찾고 바로잡아야만 누락된 곳을 법으로 개척하고 수선해서 제때 경지를 승화시키고 가장 아름다운 진아(真我)를 성취할 수 있다. 그래야 육신과 고에너지 물질이 혼연일체가 된 천인합일의 미묘하고 수승함을 진정으로 체득할 수 있다. 마음이 고요해야 닦아낸 공(功), 즉 에너지가 최대한 방출되어 우주와 공진(共振)할 수 있으며 신체의 각 세포가 고에너지 물질로 전화하도록 촉진할 수 있다. 에너지가 많이 전화되어 육신의 피각이 에너지로 가득 충실해지면 설령 아직 사람 속에 있을지라도 고에너지 물질로 채워져 들어 올려진 신체는 세포핵과 세포질이 모두 고에너지 물질로 전화된다. 오직 얇디 얇은 피각 한 층만이 에너지를 감싸고 사람몸을 유지하며 계속 수련하게 되는데, 이 역시 원만에 가까워진 신체(神體 신의 몸)라 할 수 있다.

이제 이 피각 조금만이 남았고 우리의 관성적인 사유로 사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사람 노릇을 너무 오래 해서 관성적인 사유가 매 순간 우리를 사람의 상태로 끌어당긴다. 예를 들어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자는 것은 이미 생체 시계가 형성되어, 필요가 없어도 때가 되면 하고 싶어지니 습관이 자연스러워져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신다.

남들이 비웃어도 상관없지만 나는 벌써 여러 해 동안 잠을 잘 자지 못했다. 한밤중만 되면 정신이 유독 맑아지고 에너지장이 아주 강하게 느껴진다. 설령 연공을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누워 있어도 체외의 에너지가 휭휭 돌아간다. 만약 자기 전에 연공이라도 하면 더욱 대단해져서 귓가에 스쳐 지나가는 굉음을 들으며 아침까지 정신이 말짱하다. 나도 사부님께서 잠이 오지 않으면 일어나 연공하라고, 휴식에 지장 없다고 하신 말씀을 알지만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다. 늘 습관적으로 잠을 못 자면 출근해서 정신이 없을 것이고 다크서클이 생기며 주름이 늘어 빨리 늙을 것이라 생각한다. 습관적인 사유가 자꾸 나를 사람의 상태로 끌어내리니, 남들은 얻지 못해 안달인 좋은 일이 내게는 고뇌가 되어 사람의 방법으로 잠을 청하려 하지만 당연히 효과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다년간 계속 이런 상태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으니 정말 신과 사람은 일념(一念)의 차이다. 심지어 연공도 적게 하게 되었는데, 마음만 고요히 하면 바로 정(定) 속에 처할 수 있고 다른 잡무를 하더라도 에너지 운행의 굉음은 존재하며 단지 정적일 때 뚜렷하고 바쁠 때는 덜할 뿐, 공이 사람을 연마하는(功煉人) 상태는 늘 유지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연공을 대신할 수는 없다.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법공부와 연공은 어느 것 하나 사사로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의 백맥(百脈)이 관통되어 신체 안의 맥락이 체외로 확장되고 체외의 기제(機制)와 연결되어 우주의 주파수와 공진하게 되면, 에너지의 순환 강도는 점점 더 커지며 수련인은 인간 세상을 걸어다니는 소우주가 된다.

이때 더 위로 수련해 올라가는 것은 뇌 속의 맥락을 통하게 하는 것이다. 송과체를 핵심으로 백맥이 모이고 모든 에너지가 더 깊은 층의 맥락을 충격하며 층층이 내려가는데, 대뇌 속에 얼마나 많은 층의 맥락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수년간 계속 충격하고 있다. 에너지가 미관(微觀)을 충격하는 동시에 가장 표면으로도 충격한다. 피부 위의 모세혈관처럼 가느다란 맥락도 층층이 연결되어 운행되는데, 특히 얼굴의 맥락을 충격할 때는 가렵다. 코끝의 맥락이 연결될 때는 마치 수많은 작은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모여드는 것처럼 몹시 가려워 가부좌 중에 나도 모르게 손으로 긁게 된다.

발바닥도 마찬가지다. 발바닥 피부의 맥락이 통할 때는 아주 민감해져서 발바닥이 몹시 가렵고 자꾸 긁고 싶어진다. 걸을 때 딛는 감각이 찌릿찌릿해서 한 걸음 한 걸음이 가려움을 비비는 것 같다. 다행히 이런 상태는 오래가지 않으며 상하 내외, 거시에서 미시에 이르기까지 맥락이 거의 다 연결되면 비로소 전체 에너지가 혼연일체가 된 느낌이 든다. 이때 대뇌의 층층의 장벽이 타파되고 맥락이 거의 다 통하게 되면 에너지 순환은 더 이상 구불구불한 것이 아니라 거침없이 질주하게 된다.

단전(丹田)을 밑받침(底座)으로 삼으면 우주는 커다란 자궁 같고 명문(命門)과 배꼽이 에너지 순환의 주 통로가 된다. 단전에 주입된 에너지가 위로 충격하는 것이 아마 중맥(中脈)일 것인데, 전중혈(膻中穴) 역시 주 통로다. 위뿐만 아니라 밖으로도 연결되니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않을 때 사마란귀(邪魔爛鬼)가 전중혈로 침입해 심방(心房)을 차지하고 패괴된 물질이 마음에 끼어 사유를 어지럽히며 마변의 요소가 된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다시 말하겠다. 즉 단전에서 올라온 에너지가 니환궁(泥丸宮)에 가득 차서 하늘 끝까지 솟구친다. 에너지가 뇌맥(腦脈)을 충격할 때 천정(天頂)도 완전히 열리며 가부좌 중에 온몸과 우주가 직선으로 관통되고 에너지 순환 역시 전체적으로 관통됨을 느낀다.

이런 것들을 쓰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단지 민감한 체질일 뿐이다. 나의 수련 상태는 대중적인 것은 아닐 것이며 교류할 사람도 없지만, 체내 공(功)의 연화(演化)를 언제든 명확히 살필 수 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고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나의 민감도는 아주 실질화되어 있다. 그러나 대다수 동수는 이런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느낌도 없이 오직 심성의 제고에 의지해 위로 승화하지만 공이 연화하는 원리는 모두 같다.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사부님께서는 똑같이 대하신다. 사부님께서 주시는 것은 모두 온 우주의 법이며 뿌리와 원천이 같아 편사(偏私 치우치거나 편애함)가 없으시니 얼마나 얻느냐는 전적으로 오성에 달렸다. 필경 수련도 쌍방향의 여정이다. 반석같이 견고한 마음이 없다면 어찌 층층의 마계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경지를 높이려 한다면 반드시 먼저 마계를 깨뜨려야 한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하셨는데 단지 느끼지 못한다고 묻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마음 가는 대로 썼으며 여러분에게 유익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마땅히 공능(功能)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늘 공능과 연관 지으면 지능이 낮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 역시 집착일지도 모른다. 좋은 일을 내가 다 차지할 수는 없듯이 내게도 넘기기 힘든 고비가 있다. 옛날에 나 역시 병을 고치고 몸을 건강히 하려는 목적으로 대법 수련에 들어왔지만, 다리를 틀고 제인(結印)을 한 뒤 마음을 가라앉히고 체내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을 때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알았다. 대법은 정말 수련이며 사부님께서는 정말로 사람을 제도하신다. 우리는 또한 사부님이 있는 사람들이니 반드시 진수(真修)해야 한다. 병을 고치고 몸을 건강히 하는 것은 덤일 뿐이며 더 고급 생명으로 회귀하는 것이야말로 수련의 진정한 의미이자 인생의 의미가 있는 곳이다.

진정으로 수련하려면 우선 식별 능력이 있어야 한다. 홍진(紅塵)에서 마음을 단련하자면 그럼 제고할 때마다 먼저 작은 마변(魔變)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사실 마변은 그저 말로 하니 무서울 뿐이고 무릇 내심을 건드려 작은 감정을 일으키는 모든 것이 다 마변에 해당한다. 다만 수련이 견실한 이는 정서가 요동치자마자 경각심을 갖고 즉시 바로잡아 내면이 평온해지니 부지불식간에 승화한다. 그러므로 마변은 전혀 두려울 것이 없으며 단지 승화하는 계단일 뿐이다. 사상이 자비의 상태에 처하게 하고 우주의 법칙이 관성적인 사유가 되게 하여 신(神)의 시각으로 홍진 세상을 본다면 바보가 되려 해도 어렵다.

말하고 말하다보니 결국 습관의 문제다. 사람의 습관을 제거하고 신(神)의 습관으로 대체하는 것, 그것이 바로 법에서 법을 인식하고 언행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신을 본받는다면 이른바 마변은 번쩍이는 섬광조차 내비치지 못한 채 해결될 것이고, 구세력은 눈을 부릅뜨기도 전에 인멸(湮滅)될 것이니 모두 통쾌하고 얼마나 좋겠는가. 지지부진한 것은 나도 지긋지긋하다.

사실 남을 말하는 것이 곧 나 자신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동안 정진하다가도 한동안 나태해지니 정체적인 수련 환경이 없으면 스스로 자율(自律)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러니 계속 함께 노력하여 조속히 박해를 해결하고 사부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환경을 회복하며, 션윈을 대륙에 초청해 공연하고 사부님의 대륙 귀환을 맞이하자.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