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여(劉如)
【정견망】
지난 편에서 설명했듯이, 황건군의 반란으로 장각의 한 무리가 유주(幽州)【주1】 경계를 침범해 형세가 위급해지자, 유주 태수 유언(劉焉)이 각 현에 방을 붙여 의병을 모집했다. 이 방문이 탁현(涿縣)【주2】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비(劉備)가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유비의 등장, 덕(德)과 뜻(志)이 먼저
드디어 도원결의의 이야기가 정식으로 시작되며 유비가 가장 먼저 출현한다. 우리는 원작의 문장 서술 순서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서술된 것은 그의 품성과 큰 뜻이다. “그 사람은 독서는 그리 즐기지 않았으나,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말수가 적었다.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평소 큰 뜻을 품고 천하의 호걸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했다.”
여러분은 아마 저자가 처음에 왜 한경제의 현손(玄孫)과 같은 제왕의 후예라는 출신이나 성명을 먼저 쓰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저자가 책을 쓴 취지는 인물 이야기를 통해 의리(義理)를 표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인물을 묘사할 때, 특히 주인공인 핵심 인물을 쓸 때는 덕행(德行)을 가장 우선시한다.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말수가 적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라는 한 구절로 그의 기본 인품인 인자한 마음과 이성적이고 침착한 면모를 확정 지은 것이다. 또한 큰 뜻을 품었다고 했는데, 어떤 뜻인가? 바로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濟世安民)이다. 이는 도원결의의 맹세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덕(德)과 지(志), 이것은 고대 군자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왕이 되든 신하가 되든, 군신이 일체가 되어 한마음 한뜻으로 군신의 의(義)를 연기함에 있어 이 이치는 동일하다. 따라서 저자는 이 두 가지 기본 정보를 먼저 서술함으로써, 이것이 유비가 제왕의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었던 두 가지 핵심 요소임을 밝히고 있다. 작품 전체에서 유비를 묘사할 때 반드시 이를 핵심으로 삼을 것이며, 유비의 형상은 필연적으로 인의(仁義)의 군주가 된다.
의리 중에서도 특히 유비의 인후(仁厚)한 마음이 강조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유비가 도겸(陶謙)에게 서주를 사양하고 유표(劉表)의 형주를 빼앗지 않으며, 신야를 불태운 후 조조군의 추격을 피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따르는 백성을 차마 버리지 못해 목숨을 잃을 뻔한 과정 등이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서주를 여포(呂布)에게 양보하고 여포에게 쫓겨 다니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유비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얻는다고 반드시 기뻐할 일도 아니요, 잃는다고 반드시 나쁜 일도 아니다”라고 감탄하며 매우 활달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옛사람들이 천명(天命)을 굳게 믿는 동시에 인의의 도(道)를 굳게 지켰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왜 독서를 즐기지 않는가?
누군가는 군자라면 마땅히 독서인일 텐데 왜 서두에 “그 사람은 독서는 그리 즐기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있는지 물을 것이다. 이 답은 나중에 제갈량이 유생들과 설전을 벌이는 장에서 대유(大儒)와 부유(腐儒)의 차이를 논할 때 아주 명쾌하게 설명된다. 동한 말, 도덕과 인심이 패괴되면서 많은 독서인이 독서의 근본 목적이 사람의 도리를 깨닫고 이를 일상생활과 업무에서 실천하는 데 있음을 잊어버렸다.
당시 동한 말의 독서인들을 보라. 비록 경륜이 가득하고 원소(袁紹)나 원술(袁術)처럼 사세삼공(四世三公)의 명문 가문 출신이라 할지라도, 형제간에 우애와 공경이 없고 마음이 좁으며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인자하게 대하지 않아 군신 간의 화합이 깨진 명리를 쫓는 소인이 되고 말았다. 만 권의 책을 읽은들 실천하지 않아 결국 인심을 잃고 주변이 모두 떠나가 조조에게 멸망당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저자는 유비가 비록 독서는 많지 않았을지언정 사람 됨됨이에 천성적으로 군자의 품성을 갖추었음을 이 구절로 나타낸 것이다. 이는 매일 책을 읽으면서도 행실은 성인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부유들보다 훨씬 낫다는 뜻이다.
사실 군자가 되는 길에 독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자(賢者)를 많이 접하고 그들을 본받으려 노력하는 것 또한 공자의 가르침이자 지름길이다. 이는 공자 자신의 관점이기도 하다. 《논어》 ‘학이(學而)’ 편을 읽어보면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가 나온다.
공자는 “제자는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아가면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인자한 이를 가까이해야 한다. 이렇게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비로소 글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즉 제자로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집에서 부모님과 어른을 효도로 모시고, 밖에서는 형제처럼 우애 있게 사람을 대하며 언행을 삼가고 사람들을 널리 사랑하며 인자한 이를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다 하고 나서야 비로소 독서와 공부를 통해 더 많은 지식을 쌓으라는 말이다. 공자의 강조점은 효제충신(孝悌忠信) 등 의리의 실천과 어진 이를 가까이하여 본받는 데 있으며, 독서와 문학 공부는 그다음으로 두었다.
자하(子夏)는 공자의 말을 듣고 자신의 이해를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진 이를 어질게 대하되 안색을 바꾸어 하고, 부모를 섬김에 그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김에 자신의 몸을 다 바칠 수 있고, 벗과 사귐에 말에 믿음이 있다면, 비록 배운 적이 없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어진 이를 본받아 태도를 바르게 하고(어진 이를 가까이 함), 부모를 정성껏 모시며(집에 들어오면 효도), 임금에게 마음과 몸을 다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킨다면(대외적인 언행), 설령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이미 학문의 참뜻을 깨달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삼국연의》의 저자는 학문의 참뜻에 대한 공자의 인식을 복원하고 있다. 군자의 참모습은 독서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실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본문 뒤쪽에는 “현덕(玄德)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라고 적혀 있다. 현덕은 유비의 자(字)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효도로 모셨다는 것은 유비의 행실이 군자의 본질과 성인의 가르침에 부합함을 말해준다.
경제(景帝)의 현손, 가난한 가문
그 후에야 저자는 생김새와 제왕 후예라는 출신, 이름, 그리고 현재의 가난한 가계 상황을 묘사한다. “키가 7척 5촌이며,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지고 두 손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갔다. 눈을 돌려 자기 귀를 볼 수 있었으며 얼굴은 다듬어 놓은 옥 같고 입술은 연지를 바른 듯했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자 한경제의 현손으로, 성은 유(劉)이고 이름은 비(備)이며 자는 현덕이다.” “현덕은 어려서 홀로 되어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집이 가난하여 신발을 팔고 돗자리를 짜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집은 본 현의 누상촌(樓桑村)에 있었다.”
반드시 귀인이 나온다는 예언, 제왕의 운명
마지막으로 유비가 장차 제왕의 업을 이룰 것이라는 예언을 기록했다.
“그 집의 동남쪽에 높이 5장 남짓한 큰 뽕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빽빽한 모습이 마치 수레의 덮개 같았다. 상자(相者, 관상이나 운명을 보는 이)가 이르기를 ‘이 집에서 반드시 귀인이 나올 것이다’라고 했다.”
“현덕이 어릴 때 동네 아이들과 나무 아래서 놀며 말하기를 ‘내가 천자가 되면 마땅히 이 수레 덮개를 타리라’고 했다. 숙부 유원기(劉元起)가 그 말을 기이하게 여겨 ‘이 아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라고 했다.” “나이 열다섯에 어머니가 외지로 보내 공부하게 하니, 일찍이 정현(鄭玄)과 노식(盧植)을 스승으로 모셨고 공손찬(公孫瓚) 등과 벗이 되었다.”
이러한 서술은 유비가 제왕의 후예라는 신분과 현재 홀어머니를 모시는 가난한 가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가 독서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님을 밝히고 있다. 공자가 말한 대로 열다섯 살에 집에서 효도를 실천한 후 당시의 대유학자인 정현과 노식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그의 학식 또한 분명 남달랐을 것이다.
이어서 장비와 관우가 등장한다. 다음 편에 계속하겠다.
【주1】 유주(幽州): 고대 구주(九州) 및 한 13자사부 중 하나. 《주례(周禮)》에 “동북쪽을 유주라 한다”라고 했다. 북방은 태음(太陰)이기에 유명(幽冥)으로써 이름을 삼았다. 소공(召公)이 이곳을 봉토로 받으면서 연(燕)나라가 되었다. 동한 시기 유주의 관할 지역은 지금의 북경시, 천진시, 하북성 북부, 요녕성 남부 및 한반도 서북부에 해당한다. 당시 주 아래에 11개 군(국)이 있었고 군 아래에 90개 현이 있었다. 주의 최고 행정관은 자사(刺史)였고, 태수(太守)는 대개 군국의 장관을 일컫는다.
【주2】 탁현(涿縣): 지금의 하북성 중부에 위치하며 대개 현재의 탁주시(涿州市)를 말한다. 북경의 ‘남대문’으로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