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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췌진 (7): 남원북철과 정강(靖康)의 난 배후의 원인

왕사미

【정견망】

‘남원북철(南轅北轍)’은 《전국책·위책 4》에서 유래한 중국 고대 우화다. 계량(季梁)이 위왕(魏王)에게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남쪽인 초나라로 가려 하면서 마차를 북쪽으로 몰며 “초나라로 가려 한다”라고 하기에, “내 말은 훌륭하고, 노잣돈도 많으며, 마부의 기술도 좋다”라고 답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와 방향이 정반대여서, 노력을 들일수록 목적지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 이를 일컬어 “남원북철” 즉 수레술대[轅]는 남쪽을 향하나 바퀴 자국[轍]은 북쪽으로 난다고 한다.

이 우화를 읽을 때면 대개 초나라로 가면서 북쪽으로 행하는 이가 무척 우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현실 세계에 어찌 이리 어리석은 사람이 있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 기상천외한 일은 북송 정강 연간에 실로 참혹한 역사극으로 상연되었다. 게다가 그 대본은 당 초기에 이미 세상에 알려져 전해지고 있었다.

당태종 시기 이순풍(李淳風)과 원천강(袁天罡)이 합작한 예언서 《추배도(推背圖)》(제21상) 참(讖)에 가로되:

“그 궁중이 텅 비고
눈이 석 자나 쌓였도다
슬프다 원수(元首)여,
남쪽으로 가려다 북쪽으로 가는구나”

空厥宮中
雪深叄尺
籲嗟元首
南轅北轍

송(頌)에 가로되:

“요사스러운 기운이 가라앉지 않아 편안치 못하니
북쪽의 봉화를 쓸어내며 제경(帝京)을 바라보네”

妖氛未靖不康寧
北掃烽煙望帝京

명대의 김성탄은 “이 상은 금(金) 병사가 남하하고 휘종이 선양한 일을 주관한다. 정강(靖康) 원년 11월 수도가 함락되고, 이듬해 4월 금이 북송의 두 황제 및 종실의 비빈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가고 장방창(張邦昌)을 세워 황제로 삼았다. ‘점친 세대(世)가 삼륙’이라는 것은 송나라가 태조부터 휘종·흠종까지 무릇 9세(九世)임을 말하며, 남으로 장강을 건넌 후 또 한 일세(一世)가 된다.”라고 주를 달았다.

이듬해인 정강 2년(1127년) 봄, 송휘종 조길(趙佶)과 흠종 조환(趙桓)은 북쪽으로 끌려갔다. 금나라 수도 회녕부(會寧府)에 도착한 후 포로 헌상 의식에 강제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상의를 벗고 금나라 종묘에서 항복한 군주의 ‘견양례(牽羊禮 상의를 벗고 양가죽을 뒤집어쓰고 짐승처럼 끌려가며 절을 하는 의식)’를 치렀다.

《송사》(권22)에는 송 휘종이 나라를 잃은 원인을 논하기를 “휘종이 나라를 잃은 연유를 살펴보면 진혜제(晉惠帝)처럼 어리석거나 손호(孫皓)처럼 포학해서도 아니고, 조(曹)씨의 위나 사마(司馬)씨의 진처럼 찬탈당한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잔꾀[私智小慧]를 믿고 마음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여 바른 선비를 멀리하고 간사한 아첨꾼을 가까이했기 때문이다. 이에 채경(蔡京)이 간사한 자질로 그의 방자하고 음란하며 방탕한 뜻을 도왔다. 허무한 것을 믿고 유람과 관람을 숭상하여 백성의 힘을 다하게 했다. 군신이 안일에 빠져 서로를 속이고 국정을 내팽개쳐 나날이 무도하게 행했다”라고 했다.

송휘종은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했다. 즉위 초부터 불교를 경시하는 정책을 폈다. 도사 임영소(林靈素)의 망언을 믿고 불상을 도상(道相)으로 바꾸었으며 부처를 ‘대각금선(大覺金仙)’이라 부르게 하고 도사의 위계를 승려보다 위에 있게 했다.

선화(宣和) 원년(1119년)에는 ‘혁불조(革佛詔)’를 내려 불교를 강제로 도가에 귀속시키고 사찰을 도관으로 바꾸었다. 승려와 비구니를 모두 ‘도덕사(道德士)’로 부르게 했으며 도교 경전을 익히게 하고 머리를 깎거나 연비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법사(法事)를 할 때면 도사의 뒤를 따르게 했다. 승려들이 이에 항의하며 토론을 요구하자 주동자인 일화엄(日華嚴), 명각(明覺) 등 일곱 승려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보각대사 영도(永道)가 상소하여 혁불을 멈춰달라고 청하자 그를 도주(道州 지금의 호남성 도현)로 유배 보냈다.

정화(政和) 원년 명을 받아 교를 흥성하게 하는 꿈과 정화 3년 겨울 남교(南郊)의 영감(靈感) 사건을 겪은 후, 휘종은 마침내 “나는 옥황상제의 맏아들인 대소제군(大霄帝君)이다”라고 선포했다. 정화 7년(1117년) 4월, 휘종은 공식적으로 자신의 또 다른 신분인 ‘교주도군황제(教主道君皇帝)’를 받아들였다. 그가 조씨 왕실에 황제로 태어난 이유는 “중화에 불교가 성행하여 손가락을 태우고 팔을 지지며 몸을 버려 정각(正覺)을 구하는 것을 보고 가련히 여겨, 상제께 간절히 빌어 인주(人主)가 되어 천하를 정도(正道)로 귀의시키고자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옥청화양궁(玉清和陽宮)을 옥청신소궁(玉清神霄宮)으로 바꾸고 신소(神霄)의 다스림을 통솔한다. 하늘에는 아홉 하늘이 있는데 신소가 가장 높다”라고 했다.(송대 양중량 《황송통감장편기사본말皇宋通鑒長編紀事本末》 권 127).

이 뜻은 이러한 새로 정의된 도교 세계가 전통적인 도교 세계보다 높으며, 완전히 새로운 신소(神霄)를 하늘 중의 최고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송휘종은 세속 세계와 신령 세계를 통틀어 ‘상제(上帝)’를 제외한 가장 높은 신이 된다. 송휘종은 유가 관념 속의 천자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 의미에서도 상제를 제외한 최고신으로 자신을 만들었다. 조정 신하들과는 현실 속의 군신 관계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천상 세계에서의 군신 관계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종교적 신성(神聖) 관계를 기초로 한 새로운 권력 구조 관념이 형성되었다.

교주도군황제(教主道君皇帝)인 송휘종이 말한 ‘천하를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한다’에서 그 ‘도(道)’란 도대체 무엇인가? 춘추전국시대에 유(儒)·석(釋)·도(道)의 신전문화(神傳文化)가 전해진 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정치와 가르침은 이미 분립된 상태였다. 조정의 정치는 천자를 총계(總系)로 삼았고, 인류의 도덕은 불교, 도교, 유교라는 전통 정교(正教)가 있어 사람들을 일깨우고 교화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교합일(政教合一)의 체제는 흔히 사교(邪教)로 흐르곤 한다. 그것은 왜일까? 정교(正敎)는 사람을 제도하거나 인류의 도덕을 승격시키는 데 지향점을 두기 때문이며, 정교합일이 된 후에는 어떤 현혹적인 명사를 사용하더라도 세간의 목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전통 정교(正敎)는 사람에게 세간의 득실심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한다. 반면 사교(邪敎)는 그와 반대로 행하며 세간의 인심, 이욕(利慾), 득실(得失)을 붙잡고 사람들이 그것을 간절히 구하게 한다. 황제는 그 왕조의 최고 대표이기에 만약 정도를 걷기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사직의 복이요, 만약 사도(邪道)로 잘못 들어선다면 반드시 하늘의 견책(天譴)을 받는 처참한 종국을 불러오게 된다.

어떤 도교 유파에서는 도사가 녹(籙)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관련 의식 활동에 종사할 자격이 생긴다. 수록(受籙)이란 도교 내에서 제자에게 법록(法籙)을 수여하는 것을 말한다. 무릇 도교 제자가 도를 전수받으려면 반드시 먼저 녹을 받아 스승의 전승을 귀하게 여겨야 하며, 반드시 사부로부터 녹을 받아야 한다.

송휘종은 자신이 도군황제이자 또한 ‘고상지도(高上之道)’의 종사(宗師)라고 선포했다. 중화(重和), 선화(宣和) 연간에 송휘종은 선후로 여러 조정 신하들에게 녹을 수여했다. 중화 원년 11월, 채경(蔡京)이 사랑하던 아들 채조(蔡絛)는 녹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휘종의 어필에 의해 면직 명령을 받았다. 송대 양중량이 편찬한 《황송통감장편기사본말(皇宋通鑑長編紀事本末)》(권 131)은 채조의 《소신문(訴神文)》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신의 온 집안 형제와 조카들이 모두 이름을 올려 신소비책(神霄秘策)을 받기를 청했으나, 유독 신만이 받기를 원치 않았기에 이에 구중궁궐(황제)께서 비로소 크게 노하셨다.” 채경이 백방으로 애걸한 덕분에 채조는 결국 죽을 고비를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강제적인 귀부(歸附)는 모종의 의미에서 사교(邪敎)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선화 7년(1125년) 말, 금나라 군대가 침입했다. 12월 23일, ‘26년’ 동안 군림했던 송휘종은 황급히 ‘내선(內禪)’하였고, 태자 조환(趙桓)이 황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송흠종이며 다음 해 연호를 ‘정강(靖康)’으로 고쳤다. 곧이어 이듬해인 정강 원년 정월 초사흗날(1126년 1월 27일) 밤에 창황히 도주했다. 3월이 되어서야 흠종이 사절을 보내 송휘종 일행을 맞이하여 용덕궁(龍德宮)으로 돌아왔다. 이번 ‘남원(南轅)’은 이어서 닥칠 포로 신세가 된 후의 ‘북철(北轍)’에 대한 복선이 되었다.

송휘종의 즉위 초기를 회고해 보면, 그의 시정(施政) 이념은 비교적 착실했다. 그 조서에 이르기를 “짐은 정치를 함에 있어 사람을 뽑을 때 이런저런 시기를 가리지 않고, 가부(可否)를 참작하여 거조와 손익을 오직 시의 적절함에 맞추리라. 충성과 간사를 가려내고 등용과 퇴출을 오직 의(義)가 있는 곳에 두리라. 정사가 그 마땅함을 잃지 않게 하고 인재가 각기 제자리를 얻게 하면 능히 할 일을 다 한 것이 되리라. 치우침도 없고 무리 지음도 없이 정직함을 함께하며, 상도를 본체로 삼고 중용을 사용하여 대체를 공경히 따라 천하와 더불어 휴식함으로써 짐이 선왕의 뜻을 잇고 일을 서술하는 아름다움을 이루고자 한다.(송대 양중량 《황송통감장편기사본말》 권 120)”고 했다.

아쉬운 점은 1년 뒤 연호를 ‘숭녕(崇寧)’으로 고쳤다는 것인데, 그 의미가 무엇인가? 숭희녕(崇熙寧)이니 곧 희녕변법(熙寧變法), 즉 왕안석(王安石)의 변법을 숭상한다는 뜻이다. 이는 북송의 당쟁 속에서 신당(新黨)을 지지했음을 의미한다.

북송 시기 붕당(朋黨)의 논의는 송인종 시기의 경력신정(慶曆新政)에서 시작되었다. 범중엄(范仲淹)이 추진한 신정은 채 펼쳐지기도 전에 조정 중추에서 폄하되어 쫓겨났는데, 이는 사대부와 천자가 ‘천하를 공치(共治)한다’는 관념이 점차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왜일까? 붕당의 논의 때문에 송인종의 지지를 잃은 것이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었다.

송사(宋史) 연구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경력신정에서 범중엄을 지지했던 한기(韓琦), 부필(富弼), 두연(杜衍), 여정(余靖), 구양수(歐陽修) 등은 대개 군자라고 본다. 반면 희녕변법에서 왕안석은 개인의 품격 면에서는 군자라 할 만했으나, 변법 과정에서 성과를 급히 내고자 등용했던 여혜경(呂惠卿), 증포(曾布), 등완(鄧綰), 장돈(章惇), 채경 등은 대개 소인배였으며 대부분 《송사·간신전》에 올랐다. 결국 조정의 정쟁은 붕당의 싸움으로 변질되어 북송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북송 시기의 사대부 계층은 봉읍(封邑)으로서의 ‘가(家)’를 갖지 못했기에, 이로부터 파생된 ‘가국천하(家國天下)’의 정서는 단지 아스라한 정치적 포부와 인격적 선언에 불과했다. 수신(修身)에 대한 이해는 자신의 도덕을 높이는 것에서 점차 입세(入世)적인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추구로 바뀌었다. 그중에는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천하를 자신의 임무로 삼은 어진 이와 지사들도 적지 않았으나, 현실 속에서 ‘가국(家國)’의 군주와 ‘천하(天下)’의 백성은 점차 분리되기 시작했다.

범중엄과 왕안석이 변혁을 추진한 것은 개인의 권세와 이록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소식(蘇軾)이 말한 바와 같다. “군자는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니 임금이 반드시 그를 공경하면서도 멀리한다. 소인은 오직 말하는 대로 어기지 않으니 임금이 반드시 그를 친근히 여겨 가까이한다. 멀리하는 자는 이간질하기 쉽지만 친근한 자는 떼어놓기 어렵다. 군자는 뜻을 얻지 못하면 자신을 받들어 물러나 도를 즐기며 벼슬하지 않는다.(소식 《속구양자붕당론(續歐陽子朋黨論)》)”

범중엄과 왕안석의 몸에는 전통 가치를 견지한 유가 학자의 가국 정서와 고상한 인격이 깃들어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유가의 전통 사상인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맹자·진심 하》)”는 측면에서 범중엄은 ‘민본(民本)’을 견지했고, 왕안석은 “서민은 군주를 중심으로 삼는다(言庶民以君爲中)”(왕안석 《홍범전》)고 했다는 점이다. 조정 재정의 수입원 확보와 지출 절감을 어떻게 균형 잡을지, 재정 정책을 어떻게 수립할지는 집정자가 인애(仁愛)의 마음을 품고 전통 가치를 따르는지를 검증하는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

송신종 희녕 6년(1073년), 왕안석은 주도하여 《주례(周禮)》, 《상서(尚書)》, 《시경(詩經)》을 다시 주해하고 편찬했다. 신종 희녕 8년, 《주관신의(周官新義)》, 《시경신의》, 《서경신의》가 완성되어 이를 합쳐 《삼경신의(三經新義)》라 불렀다. 그중에서도 왕안석이 직접 지은 《주관신의》가 가장 중요했다. 왕안석은 《답증공립서(答曾公立書)》에서 이르기를 “정사란 재물을 다스리는 것이요, 재물을 다스리는 것이 곧 이른바 의(義)이다. 한 권의 《주례》 중 재물을 다스리는 내용이 절반을 차지하니 주공(周公)이 어찌 이익을 위했겠는가?”라고 했다. 《주관신의》는 왕안석 변법의 중요한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고대의 유가든 법가의 선구자인 관중(管仲)이든 모두 시종일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부민(富民)을 국정 운영의 으뜸으로 삼았고, 부민을 ‘정사가 나오는’ 유일한 원천이자 가늠자로 삼았다. 다시 왕안석의 신학인 《삼경신의》를 보면, ‘의(義)’는 비록 새롭지만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근본으로 한다는 ‘부민(富民)’과 ‘민본(民本)’이란 유가의 핵심 사상에서는 등을 돌렸다.

또한 “하늘의 재앙도 두려워할 것 없고, 조상의 법도 본받을 것 없으며, 사람들의 말도 신경 쓸 것 없다(天變不足畏,祖宗不足法,人言不足恤)”《송사·열전·권 86》)는 저 유명한 ‘삼부족(三不足)’ 구호를 내세웠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 세상과 신전문화(神傳文化) 사이를 갈라놓았으며 통치자 권력의 정당성마저 무너뜨렸다. 세 조정에서 재상을 지낸 부필(富弼)은 말했다. “군주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하늘뿐이다. 만약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는가?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망할 날이 머지않았다. 이는 필시 간신들이 사악한 설을 들여오고자 먼저 상(上)을 인도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없게 함으로써, 보필하고 간쟁하는 신하들이 다시는 그 힘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치란(治亂)의 기틀이다.(소식 《부정공신도비(富鄭公神道碑)》)”

훗날의 전개는 정말 그러했다. 송휘종 시기에 이르러 “그리하여 채경이 마음대로 간사하고 아첨하며 아무런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놀아나니, 곧장 나라를 패망하게 한 뒤에야 그치려 했다.(송대 양중량 《황송통감장편기사본말》 권 131)”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인 이론적 근거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 그러므로 희녕변법이 바꾼 것은 단지 조세 정책뿐만이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었으며, 이때부터 신전문화에서 벗어난 돌아올 수 없 길을 걷게 되었다. 조정의 정치가 부패하고 사회 도덕이 하락함에 따라 북송의 처참한 패망은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보건대 북송의 멸망은 ‘남원북철(南轅北轍)’의 진실한 연출이었다. 송휘종은 본래 나라를 일으키려 했으나 전통 정도(正道)에서 벗어남으로써 나라를 그르치는 길로 들어섰다. 방향이 틀렸으니 아무리 노력한들 헛수고일 뿐이었다.

전통 가치는 중국 신전문화의 핵심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선량(善良)을 지키고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며 도덕을 승화시켜 반본귀진(返本歸真)으로 향하게 하는 초석이다. 중용(中庸)은 사람에게 중정(中正)과 중화(中和), 그리고 수양해서 덕(德)을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오직 끊임없이 각종 탐욕의 곤혹을 내려놓고 마음을 정화해야만 경지가 승격되는 중의 아름다움을 체득할 수 있다.

선화 7년(1125년) 말, 금나라 군대가 침공했다. 12월 23일, 26년간 재위한 송휘종은 서둘러 선위했고 태자 조환이 즉위하니 이가 송흠종이며 다음 해 연호를 ‘정강’으로 고쳤다. 정강 원년 정월 초사흘 밤에 휘종은 황급히 도주했다가 3월에야 흠종이 보낸 사절을 맞이해 용덕궁으로 돌아왔다. 이 남쪽으로의 도주[南轅]는 훗날 포로가 되어 북쪽으로 끌려가는[北轍] 복선이 되었다.

송휘종 즉위 초기를 돌아보면 그의 시정 이념은 비교적 실무적이었다. 조서에서 “정사를 다룸에 있어 충(忠)과 사(邪)를 구별하고 의(義)가 있는 곳에 나아가며 천하와 더불어 휴식하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1년 뒤 연호를 ‘숭녕(崇寧)’으로 고쳤는데 이는 ‘희녕(熙寧)을 숭상한다’는 뜻으로 왕안석의 변법을 지지하며 신당(新黨)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북송의 붕당 논쟁은 송인종 시기 경력신정에서 시작되었다. 범중엄의 신정은 채 펼쳐지기도 전에 그가 중앙에서 쫓겨나며 좌절되었고, 이는 사대부와 천자가 천하를 함께 다스린다는 ‘공치천하(共治天下)’의 균열을 의미했다. 붕당에 대한 송인종의 지지가 사라진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경력신정의 주역들인 한기, 부필, 구양수 등은 대개 군자로 평가받으나, 희녕변법 당시 왕안석은 개인은 군자였을지 모르나 급히 성과를 내려다보니 임용한 이들이 대개 《송사·간신전》에 오를 만한 소인배들이었다. 결국 정쟁은 붕당 간의 감정싸움으로 변질되어 북송 멸망까지 이어졌다.

북송 사대부들에게 ‘가국천하(家國天下)’의 정회는 아득한 정치적 포부이자 인격 선언이었다. 수신(修身)에 대한 이해는 도덕 제고에서 입세(入世)적인 치국평천하의 추구로 점차 변해갔다. 범중엄과 왕안석의 변혁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유교의 핵심인 ‘민귀군경(民貴君輕)’에 대해 범중엄은 민본(民本)을 견지한 반면, 왕안석은 “서민은 군주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보았다. 재정 정책을 어떻게 정하느냐는 집권자가 인애(仁愛)의 마음을 가졌는지를 검증하는 금석문과 같다.

송신종 희녕 6년(1073년), 왕안석은 《주례》, 《상서》, 《시경》을 새로 주해하여 《삼경신의(三經新義)》를 완성했다. 왕안석은 “재물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의(義)이다”라고 주장하며 변법의 사상적 기초로 삼았다. 고대 유가나 법가의 관중(管仲)조차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富民]을 치국의 으뜸으로 삼았으나, 왕안석의 신학(新學)은 ‘의(義)’를 앞세우면서도 정작 유가의 핵심인 민본에서 벗어났다. 또한 “하늘의 변함은 두려워할 것 없고, 조상은 본받을 것 없으며, 사람들의 말은 염려할 것 없다”라는 유명한 ‘삼부족(三不足)’ 구호는 인류와 신전문화의 연결을 끊어버렸고 통치 권력의 정당성을 무너뜨렸다. 재상 부필은 “군주가 두려워할 것은 오직 하늘인데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망국이 멀지 않았다”라고 경고했다.

훗날 송휘종 시기에 이르러 채경이 마음껏 간사함을 부리고 횡포를 일삼은 근거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 희녕변법은 단순한 부세 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었다. 신전문화와 멀어지는 불귀의 길을 택했고, 조정의 부패와 도덕 하락이 겹치며 북송의 처참한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결국 북송의 멸망은 ‘남원북철’의 실제 시연이었다. 송휘종은 나라를 일으키려 했으나 전통의 정도를 등짐으로써 나라를 망치는 길로 들어섰다. 방향이 틀리니 아무리 노력해도 헛수고일 뿐이었다. 전통 가치는 중국 신전문화의 핵심이며 사람이 선량함을 지키고 도덕을 높여 반본귀진(返本歸眞)하게 하는 초석이다. 중용은 중정(中正)과 중화(中和)를 가르쳐 덕을 지키게 하는 방법이다. 끊임없이 탐욕을 내려놓고 마음을 정화해야만 경계가 높아지는 속의 아름다움을 체득할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