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766년 –1122년)
심연(心緣)
【정견망】

역사는 하조(夏朝)를 지나 은상(殷商)으로 들어섰다. 상조(商朝) 역사에 관해 초기에는 하대(夏代)와 마찬가지로 주로 《상서》, 《사기》 등 후대 전적에 의존해 파악했으며 당시의 문자 증거가 부족했다. 그러나 은허(殷墟) 유적의 발굴과 특히 갑골문(甲骨文)의 발견은 상나라 역사를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 역사로 만들었기에 상나라는 신빙성 있는 중국 역사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갑골문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이기도 하다.
은허 유적에서는 은상의 궁전, 능묘, 공방, 순장 갱을 비롯해 수많은 청동기, 도기, 석기, 옥기 등이 발굴되었을 뿐만 아니라 16만 편 이상의 갑골이 발굴되었다. 그 위에는 서로 다른 한자 4,000여 개가 있었으며 그중 판독 가능한 것이 2,000개에 가깝다. 갑골에 새겨진 문구인 각사(刻辭)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여 주로 제사, 날씨, 수확, 전쟁, 농사, 수렵 등을 포함하며 일상생활이나 꿈과 같은 사소한 일들도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은 상나라의 생산과 사회생활 등 각 방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상 사람은 제곡(帝嚳)의 아들인 설(契)의 후예다. 설이 우(禹)의 치수를 보좌한 공이 있어 순(舜)으로부터 상(商) 땅에 봉해졌다. 하나라 말기에 상족은 점차 강성해졌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하걸(夏桀)이 포학하고 음란하며 도가 없었기에 천하 백성의 불만을 샀고 제후들도 잇달아 배반했다.
상탕(商湯)은 걸왕을 벌할 시기가 성숙했음을 보고 천명(天命)을 구호로 내걸며 “하나라에 죄가 많아 하늘이 멸하라고 명령하셨다”라고 말하며 모두가 함께 하나라를 멸하여 하늘의 뜻을 집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윤(伊尹)의 보좌 아래 명조(鳴條) 전투에서 하걸의 군대가 패하여 남소(南巢)로 도망치니 하왕조는 이로써 멸망했다.
3,000 제후가 상탕에게 귀순하며 상조가 정식으로 수립되었고 박(亳)에 도읍을 정하니 중국 역사상 두 번째 왕조가 되었다. 《주역・혁》에서는 상탕이 걸왕을 벌하고 하나라를 멸한 것을 “탕왕과 무왕의 혁명은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에 부응한 것이다[湯武革命,順乎天而應乎人]”라고 평가했다.
《사기》 기록에 따르면 성탕(成湯)이 나라를 세운 때부터 상주(商紂)가 나라를 망친 때까지 총 17세 30대로 전해졌으며 전후로 600여 년간 지속되었다. 대략 서기전 13세기경 상왕 반경(盤庚)이 은(殷)으로 도읍을 옮겼기에 후세에는 상을 은이라 부르거나 상은(商殷) 또는 은상(殷商)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조와 마찬가지로 상조 역사 또한 하늘의 명을 공경하게 따르는 인덕(仁德) 있는 군주만이 국가를 강성하게 하고 인민을 평안하게 살게 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반면 국가의 쇠락과 멸망을 초래하는 것은 음란하고 포학하며 도가 없는 군주들이었으니 그들의 행위로 인해 스스로 하늘과 끊어져 하늘의 버림을 받았고 그들은 하늘의 견책 대상이 되었다.
상조는 중국 역사상 현군(賢君)이 비교적 많았던 왕조라고 할 수 있다. 《사기》에 따르면 상조는 성탕 이후 제4대 태갑(大甲), 제9대 태무(大戊), 제13대 조을(祖乙), 제19대 반경 그리고 제22대 무정(武丁)이 모두 어질고 덕 있는 군주였다. 그들은 하늘의 명을 공경히 따르고 어진 덕으로 천하를 다스렸기에 국운이 창성하고 인민의 생활이 안정되었으며 제후들이 모두 와서 복종했다.
은상의 조상
은상(殷商)의 시조는 설이며 그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라 하는데 유융(有娀) 씨의 딸이자 제곡의 두 번째 비였다. 전설에 따르면 간적 등 세 사람이 강물에 목욕하러 갔다가 현조(玄鳥, 즉 봉황)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고 간적이 그것을 주워 먹어 임신하여 설을 낳았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현조에게 명하여 내려와 상을 낳게 했다(天命玄鳥, 降而生商)”(《시경・상송・현조》)는 내용이다.
설이 장성한 후 우의 치수를 도와 공을 세우자 순임금은 설을 사도(司徒)로 임명하여 오륜 교육을 성실히 시행하게 하며 말하기를 “지금 백성들이 서로 친애하지 않아 부자, 군신, 부부, 장유, 친구 사이의 오륜 관계가 순조롭지 못하다. 네가 가서 오륜 교육을 시행하되 관대한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후 설은 상 땅에 봉해졌고 자(子)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설은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 시대에 흥기하여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했고 공적이 뚜렷하여 백성들이 그 덕분에 안정될 수 있었다.
설이 죽은 후 아들 소명(昭明)이 뒤를 이었다. 11대를 전해 내려와 주계(主癸)가 즉위했고 주계가 죽은 후 아들 태을(太乙)이 즉위했다. 이분이 바로 성탕[成湯 후에 상탕(商湯)이라 함]이다.
설부터 성탕까지 도읍을 여덟 번 옮겼다. 성탕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박에 정착했는데 이는 선왕인 제곡을 따르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성탕은 이를 위해 《제고(帝誥)》를 지어 제곡에게 천도 상황을 보고했다.
박(亳)은 상조 전기에 가장 중요한 도읍이었다. 상조 건국 전 성탕이 도읍을 박으로 옮긴 때부터 6대 11왕을 거치며 약 150~200년 동안 상조의 수도는 줄곧 박에 있었다. 상조 역사에서 도읍 정착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곳은 은(殷)이고 그다음이 박이다.
박의 위치에 대해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지금의 하남(河南) 상구(商丘) 부근(남박南亳), 지금의 하남 언사(偃師) 이리두(二里頭, 서박西亳), 지금의 산동(山東) 조현(曹縣) 접경(북박北亳), 그리고 어떤 이는 지금의 섬서(陝西) 장안(長安) 현 접경(두박杜亳)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상구설을 따른다.
은상의 창건자 상탕
* 상탕의 덕행
상탕은 하나라 시대에 방백(方伯, 지방 제후의 우두머리)으로서 인근 제후를 정벌할 권한이 있었다. 갈백(葛伯)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자 성탕이 먼저 그를 정벌했다.
상탕이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이 물에 비춰보면 자신의 형상을 볼 수 있고 백성을 살펴보면 국가가 잘 다스려지는지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윤이 말하기를 “현명하십니다! 좋은 말을 받아들여야 도덕이 진보합니다. 국가를 다스리고 만민을 보살피며 덕행이 있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조정의 관리로 임용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상탕이 갈백에게 “너희가 하늘의 명에 경순하지 않으니 나는 너희를 엄히 처벌할 것이며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말하고는 《탕정(湯征)》을 지어 갈(葛)을 정벌한 상황을 기록했다.
상탕은 하늘의 명에 경순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어진 신하를 등용할 줄 알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윤은 재능과 덕망이 있으나 관직에 나아가려 하지 않는 은사였는데 상탕이 사람을 보내 다섯 번이나 청한 끝에야 비로소 응낙하여 귀순했다. 그는 상탕에게 원고(遠古) 시대 제왕 및 아홉 부류 군주들의 행적을 설명했다. 상탕은 이에 그에게 국정을 맡겼다. 이윤은 일찍이 상탕을 떠나 하걸에게 간 적이 있었으나 하걸이 무도(無道)한 것을 보고 매우 혐오하여 다시 상의 도읍인 박으로 돌아와 상탕을 계속 보좌했다.
상탕은 사람됨이 매우 인덕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사냥을 나갔다가 교외 사방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다. 그물을 친 사람이 기도하기를 “사방에서 오는 것들이 모두 내 그물에 걸리게 하소서!”라고 했다. 상탕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아, 그렇게 하면 짐승이 다 씨가 마르겠구나!”라고 하며 그물 세 면을 걷어내게 했다. 그리고 그물을 친 사람에게 이렇게 기도하게 했다. “왼쪽으로 가고 싶은 것은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도망치고 싶은 것은 오른쪽으로 도망치거라.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만 내 그물로 들어오너라.” 제후들이 이 일을 듣고 모두 말하기를 “탕왕의 인덕은 참으로 지극하여 짐승들까지도 그의 은혜를 입는구나”라고 했다.
* 상탕이 천명에 따라 하걸을 정벌
이와 동시에 하왕(夏王) 걸은 폭정을 일삼고 음란하며 도가 없었으며 제후인 곤오(昆吾) 씨도 일어나 난을 일으켰다. 상탕은 이에 제후들을 거느리고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윤이 수행했다. 상탕은 직접 지휘하여 먼저 곤오를 정벌하고 이어서 하걸을 정벌하러 갔다.
상탕이 부족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감히 군사를 일으켜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걸이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너희가 원망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으나 하걸에게 죄가 있으니 나는 하늘이 두려워 정벌하러 가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하걸이 그토록 많은 죄를 지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에게 그를 벌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지금 너희는 ‘우리 임금이 우리를 가엽게 여기지 않고 우리 농사일을 돌보지 않은 채 정벌 전쟁을 하려 한다’라고 말한다. 너희는 또 ‘하걸의 죄가 도대체 어떠한가?’라고 물을지 모른다. 하걸은 군신 간에 대규모 요역을 시켜 하나라의 민력(民力)을 소진시켰고 또 가혹하게 수탈하여 하나라의 자산을 바닥냈다. 하나라 백성들은 모두 태업하며 그와 협력하지 않는다. 하나라 백성들은 태양을 가리키며 하걸을 저주하기를 ‘너는 언제 망하겠느냐, 내 기꺼이 너와 함께 망하겠다’라고 한다(하걸은 일찍이 자신의 통치가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늘에 태양이 있는 것은 마치 나에게 백성이 있는 것과 같다. 태양이 망하겠는가? 태양이 망해야 나도 망할 것이다”라고 했다).
하왕의 덕행이 이미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나는 반드시 그를 정벌해야 한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하늘이 내린 벌을 집행하기를 바라며 나는 너희에게 두둑이 상을 줄 것이다. 너희는 의심하지 마라, 나는 절대로 빈말을 하지 않는다. 만약 너희가 내 맹세를 어긴다면 나는 너희를 처벌할 것이며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상탕은 이를 위해 《탕서(湯誓)》를 지었다. 상탕은 일찍이 “나는 매우 용맹하다”라고 말했기에 또 무왕(武王)이라 존칭되기도 했다.
탕왕은 이윤의 보좌 아래 전차 70대와 보졸 5,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하왕조의 군대와 명조(鳴條)에서 만나 대결전을 벌였다. 명조 전투에서 하걸의 군대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걸왕은 도주한 후 남소에서 죽었으며 하왕조는 이로써 멸망했다.
* 상탕의 인정(仁政)
이윤은 제후들에게 이번 대전의 상황을 공포했다. 이후 다른 제후들이 모두 귀복했고 상탕은 천자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평정했다. 새로운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상탕은 군대를 거두어 수도인 박으로 돌아와 하(夏)의 정령을 폐지하고 《탕고(湯誥)》를 지어 제후들에게 하늘을 경외하고 덕치를 닦으며 백성을 위해 이익을 도모할 것을 훈계했다.
《탕고》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3월에 은왕이 친히 동쪽 교외에 나아가 각 제후국 군주들에게 선포했다. ‘그대들은 백성을 위해 공업을 세우는 데 힘쓰지 않으면 안 되며 그대들의 일을 잘 처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대들을 엄중히 처벌할 것이니 그때 가서 나를 원망하지 마라.’
또 말하기를 ‘과거에 우와 고요(皋陶)는 오랫동안 밖에서 고생하며 백성을 위해 공업을 세웠기에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당시 그들은 동쪽으로는 장강을, 북쪽으로는 제하(濟河)를, 서쪽으로는 황하를, 남쪽으로는 회하(淮河)를 다스렸다. 이 네 개의 중요한 하천 물길이 잘 다스려지자 만민이 비로소 정착할 수 있었다. 후직(后稷)은 백성에게 오곡 심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온갖 농작물 심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 세 고인(古人)은 모두 백성에게 공이 있었기에 그들의 후손이 나라를 세우고 가업을 이룰 수 있었다. 다른 경우도 있다. 예전에 치우(蚩尤)와 그의 대신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폭란을 일으키자 상제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지 않으셨으니 이런 일은 역사에 있었던 일이다. 선왕의 가르침을 노력하여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 만약 도의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 자가 있다면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 다시 제후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그때 너희는 나를 원망하지 마라.'”
탕왕은 이런 말로 제후들을 훈계했다. 이때 이윤은 또 《함유일덕(咸有一德)》을 지어 군신이 모두 순수한 하나의 덕을 가져야 함을 설명했고 구단(咎單)은 《명거(明居)》를 지어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를 다루었다.
상탕은 말한 대로 스스로 몸소 실천했다. 상조 초기에 7년간 가뭄이 지속되었다. 사서에 따르면 “……3월에 상왕이 천자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해에 크게 가물었다”(《통감전편(通鑒前編)》),
“요와 우에게는 9년의 홍수가 있었고 탕에게는 7년의 가뭄이 있었다”(《관자・경중편》).
7년 연속된 가뭄으로 강과 우물이 마르고 풀과 나무가 고사했으며 싹이 돋지 않아 농작물을 거둘 수 없었고 시신이 들판에 가득했다. 절박한 가뭄은 상왕조 전체를 뒤흔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천제께서 하신 일이 생각했다.
복사(卜辭) 중에는 “점치노니, 비가 오지 않음은 제(帝)께서 우리를 가물게 하심인가”(《구龜》 1.25.13)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천제가 내린 가뭄이라는 뜻이다.
당시 상나라는 “은나라 사람은 신을 존숭하여 백성을 거느리고 신을 섬기며 귀신을 앞세우고 예(禮)를 뒤로 했다”(《소대례・표기편》). 그러므로 가뭄이 발생한 이후 상탕은 교외에 제단을 세우고 매일 사람을 시켜 제례를 거행하며 천제에게 가뭄을 없애고 비를 내려줄 것을 기도했다. 이것이 ‘교제(郊祭)’다.
교제의 초기 의식은 땔나무를 태우고 소, 양, 돼지, 개 등 가축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제사 때 사관(史官)은 세 발 달린 솥인 정(鼎)을 손에 받들었는데 솥 안에는 소, 양 등의 내장이 제물로 담겨 있었다. 사관은 경건하게 천지산천(天地山川)에 기도하며 말했다.
“우리의 왕정이 절도와 법도가 없기 때문입니까? 인민이 고통을 겪게 했기 때문입니까?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탐오했기 때문입니까? 소인들의 참언이 유행하기 때문입니까? 여자가 정사에 간섭하기 때문입니까? 궁실을 너무 크고 화려하게 지었기 때문입니까? 어찌하여 아직 속히 비를 내려주지 않으십니까?”
이는 사관이 탕왕의 명을 받아 자책하는 여섯 가지 일을 말함으로써 천제와 귀신이 복을 내려 비를 주기를 간구한 것이다. 그러나 제사는 효과가 없었다. 상탕이 사관에게 매일 제례를 올리게 하며 애절하게 간구했음에도 천제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복을 내려 비를 주지 않았다.
대가뭄이 7년째 지속되자 상탕은 사관들에게 나무가 울창한 산에 상림(桑林)이라는 곳을 택해 제단을 설치하게 하고 직접 이윤 등 대신들을 거느리고 기우제를 지냈다. 그러나 제사 후에도 비가 오지 않자 상탕은 사관에게 점을 치게 했다.
사관들이 점을 친 후 말하기를 “제사 때 소와 양을 희생으로 쓰는 것 외에 사람을 제물로 써야 합니다”라고 했다. 상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내가 점을 쳐서 비를 구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한 것인데 어찌 다른 사람을 태울 수 있겠는가? 나로 대신하겠다!”라고 말했다.
말을 마치고 좌우에 제사에 쓸 장작더미를 쌓게 한 뒤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자르고 몸을 깨끗이 씻은 후 하늘에 기도했다. “나 한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만민을 벌하지 마시고 만민에게 죄가 있다면 모두 나 한 사람에게 있게 하소서. 나 한 사람의 무능함 때문에 천제와 귀신께서 인민의 생명을 해치지 마소서.”
기도를 마치고 상탕은 장작더미 위에 앉았다. 좌우에서 막 불을 붙이려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큰 바람이 일더니 사람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큰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것이 역사상의 ‘탕도상림(湯禱桑林 탕이 상림에서 한 기도)’이다. 사람들은 바로 탕왕의 백성을 위해 희생하려는 정신이 천제를 감동시켰기에 하늘에서 단비를 내려 가뭄이 해소된 것이라고 여겼다.
상탕은 정무에 임한 후 역법을 수정하여 하력(夏曆)의 인월(寅月)을 세수(歲首)로 하던 것을 축월(丑月)로 바꾸었고 기물과 복식의 색깔을 바꾸어 백색을 숭상했으며 낮에 조회(朝會)를 거행했다.
은상의 발전
* 태갑이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덕치를 베풀다
상탕이 세상을 떠난 후 세자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기에 태정의 동생 외병(外丙)을 제(帝)로 세우니 이분이 외병제다. 외병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외병의 동생 중임(中壬)을 제로 세우니 이분이 중임제다. 중임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윤은 태정의 아들 태갑(太甲)을 제로 옹립했다. 태갑은 성탕의 적장손으로 바로 태갑제다.
태갑제가 정무에 임한 지 3년 만에 혼란하고 포학하여 탕왕의 법도를 어기고 덕업을 망쳤다. 이에 이윤은 그를 탕왕의 묘소가 있는 동궁(桐宮)으로 내쫓았다. 이후 3년 동안 이윤이 정무를 대행하며 국사를 주관하고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태갑은 동궁에서 3년 동안 머물며 잘못을 뉘우치고 자책하며 다시 선으로 돌아왔기에 이윤은 다시 그를 조정으로 맞이하여 정권을 되돌려주었다. 이후 태갑제는 덕행을 닦으니 제후들이 모두 와서 복종했고 백성들도 그 덕분에 안녕을 누릴 수 있었다. 이윤은 태갑제를 매우 찬탄하며 《태갑훈(太甲訓)》 세 편을 지어 태갑을 찬양하고 그를 태종(太宗)이라 칭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 옥정(沃丁)이 즉위했다. 옥정이 정무에 임할 때 이윤이 세상을 떠났다. 다시 3세(世)를 지나 옹기(雍己)제 때 이르러 국세가 이미 쇠약해져 어떤 제후들은 조회하러 오지 않기도 했다.
* 태무가 간언에 따라 덕을 닦다
옹기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동생 태무(太戊)가 즉위했다. 이분이 태무제다. 태무는 이척(伊陟)을 재상에 임용했다. 당시 수도 박의 조정 마당에 상나무와 저나무가 합쳐져 자라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는데 하룻밤 사이에 두 손을 모아 쥘 정도로 굵게 자랐다. 태무제는 매우 두려워하며 이척에게 물었다.
이척이 태무제에게 말하기를 “제가 듣기로 요괴와 이변은 덕행이 있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혹시 폐하의 정치에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부디 덕행을 더욱 닦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태무가 이척의 규간(規諫)을 따르니 그 괴상한 나무가 시들어 사라졌다. 이척이 이 말들을 무함(巫咸)에게 전했다. 무함은 《함애(咸艾)》, 《태무(太戊)》를 지어 태무제가 간언을 따르고 덕을 닦은 것을 칭송했다. 이렇게 하여 은상의 국세는 다시 흥성해졌고 제후들이 다시 와서 복종했다. 그리하여 태무제를 중종(中宗)이라 칭했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중정(中丁), 외임(外壬)을 거쳐 하단갑(河亶甲)이 즉위하자 은나라 국세는 다시 쇠약해졌다.
하단갑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조을(祖乙)이 즉위했다. 조을제가 즉위한 후 천하에 덕을 펴니 은나라는 다시 흥성했다.
조을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조신(祖辛)제가 즉위했다. 다시 3대를 거쳐 양갑(陽甲)제가 재위할 때 은나라 국세는 다시 쇠약해졌다.
중정제 이래로 적장자 계승제를 폐지하고 여러 형제 및 형제의 아들들을 옹립하니 이들이 왕위를 얻기 위해 서로 다투어 9대에 걸친 혼란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제후들 중 아무도 조회하러 오지 않았다.
* 반경이 천도하고 덕치를 따르다
양갑제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동생 반경(盤庚)이 계승했다. 반경이 즉위했을 때 은나라는 이미 황하 북쪽의 엄(奄) 땅에 도읍하고 있었다. 반경은 황하를 건너 황하 남쪽의 박에 도읍을 정하니 다시 성탕의 옛 터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상나라 역사에서 정치적 동란과 재해의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왕은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다. 중정은 박에서 효(囂, 지금의 하남 형양)로, 하단갑은 효에서 상(相, 지금의 하남 내황)으로, 조을은 비(庇, 지금의 산동 정도)에 거주했고 남경(南庚)은 비에서 엄(奄 지금의 산동 곡부)으로, 반경은 엄에서 은(殷 지금의 하남 안양시)으로 옮겼으며 이후 무을은 은에서 하북(조가)으로 옮겼다. 이 다섯 차례 이동할 때마다 상나라 백성들은 저마다 원성이 자자하여 다시 이동하는 고통을 겪으려 하지 않았다.
반경은 이런 상황을 보고 제후와 대신들에게 고하기를 “예전에 선왕 성탕께서 너희 조상들과 함께 천하를 평정하셨을 때 그분들이 전해주신 법도와 준칙은 마땅히 따라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것들을 버리고 노력하여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황하를 건너 남쪽 박으로 옮겨 성탕의 옛 궁전을 수리하고 성탕의 정령을 준행했다. 이후 백성들이 점차 안정되었고 은나라 국세는 다시 한번 흥성했다. 반경이 성탕의 덕치를 따랐기에 제후들도 잇달아 와서 조회했다.
‘반경의 은 천도(盤庚遷殷)’는 상나라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으며 상왕조의 퇴조를 되돌려 중흥의 길로 들어서게 하여 “백성이 이로써 편안해지고 은나라의 도가 다시 일어났다”는 정치 국면이 나타났다. 이로써 상왕조는 누차 도읍을 옮기던 동란의 세월을 끝내고 정치, 경제, 문화 발전의 새로운 시기를 맞이했다.
반경이 새 도읍으로 옮긴 후 당시에는 그곳을 ‘은’이라 부르지 않았고 갑골문에서는 ‘대읍상(大邑商)’이라 칭했으며 상나라를 은나라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주(周)가 상(商)을 멸한 후 상나라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표시하기 위해 상나라 도읍 부근 상왕의 사냥터인 은원(殷原)의 ‘은’이라는 지명으로 상나라 사람들을 불렀다. 그리하여 상나라는 ‘은’ 또는 ‘은상’이라 불리게 되었다.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은은 지금의 하남 안양 서북쪽 소둔촌(小屯村) 일대로 면적이 24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데 이는 고고학 발굴 면적일 뿐 실제 면적은 이보다 더 넓었을 것이다. 이 상조의 수도는 무왕이 주왕(紂王)을 멸한 이후 파괴되어 점차 폐기되어 폐허가 되었으므로 ‘은허(殷墟)’라 부른다.
반경제가 서거하고 그의 동생 소신(小辛)이 즉위하니 이분이 소신제다. 소신 재위 시 은은 다시 쇠약해졌다. 백성들이 반경을 그리워하며 《반경》 세 편을 지었다. 소신제가 서거한 후 그의 동생 소을(小乙)이 즉위하니 이분이 소을제다.
* 무정이 상나라를 부흥시키다
소을제가 서거하고 그의 아들 무정(武丁)이 즉위했다. 무정제는 즉위 후 상나라를 부흥시키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줄곧 적임자인 보좌 대신을 찾지 못했다. 이에 무정은 3년 동안 정견을 발표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塚宰)가 결정하게 한 채 자신은 신중하게 국가의 풍기를 관찰했다.
어느 날 밤 그는 꿈에 한 성인(聖人)을 얻었는데 이름을 열(說)이라 했다. 낮에 그는 꿈에서 본 형상에 따라 수많은 신하들과 백관(百官)을 관찰했으나 그 성인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백관을 민간에 보내 사방으로 찾게 한 끝에 마침내 부험(傅險)에서 열(說)을 찾았다. 이때 그는 형기를 복역하며 부험에서 길을 닦고 있었는데 백관이 열을 데려와 무정에게 보이자 무정은 바로 이 사람이라고 말했다. 열을 찾은 후 무정이 그와 대화해보니 과연 현덕(賢德)하고 성명(聖明)한 사람임을 알게 되어 그를 국상(國相)으로 임용했다. 이때부터 국가가 아주 잘 다스려졌다. 부험이라는 곳에서 열을 찾았기에 부(傅)를 성으로 삼아 그를 부열(傅說)이라 불렀다.
한번은 무정이 성탕에게 제사를 지냈다. 다음 날 들꿩 한 마리가 날아와 솥의 귀(鼎耳)에 올라앉아 울자 무정은 이 일로 놀라고 불안해했다. 대신 조기(祖己)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먼저 정사를 잘 처리하십시오”라고 했다. 조기는 무정을 더 일깨워 말하기를 “하늘이 하민(下民)을 살피는 것은 그들의 도의에 착안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사람에게 주신 수명은 길고 짧음이 있으니 하늘이 일부러 사람의 수명을 일찍 끊어 중도에 목숨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도덕을 따르지 않고 죄악을 인정하지 않다가 하늘이 그의 덕행을 교정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찌할까’라고 생각합니다. 아, 대왕께서는 왕위를 계승하여 백성의 일을 잘 처리하려고 노력하시니 천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계속해서 일상대로 제사를 지내되 바른 도를 버리는 일에 근거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무정은 조기의 권고를 듣고 덕정(德政)을 닦으니 상조의 국세가 점차 강성해졌다.
무정 시기에 상왕조의 판도와 정치적 영향력은 전례 없이 확대되었다.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상나라의 통치 구역은 서쪽으로 지금의 섬서 서부, 동쪽으로 바다, 북쪽으로 요녕(遼寧), 남쪽으로 한수(漢水) 이남의 장강 유역에 이르렀으며 지금의 하남, 산동, 하북, 산서, 섬서, 안휘, 호북의 대부분과 강남의 일부를 포함했고 아마도 지금의 내몽골의 일부 지역까지 포함했을 것이다.
무정 재위 기간 상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는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루어 상나라의 전성기에 도달했고 번영기로 진입했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무정중흥(武丁中興)’이라 한다.
은상의 쇠락과 멸망
조경제 서거 후 그의 동생 조갑(祖甲)이 즉위하니 이분이 조갑제다. 조갑제가 음란하여 은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조갑제가 서거하고 아들 늠신(廩辛)이 즉위했다. 늠신 서거 후 그의 동생 경정(庚丁)이 즉위하니 이분이 경정제다. 경정이 서거 후 그의 아들 무을(武乙)이 즉위했는데 이때 은나라 도읍은 다시 박에서 황하 북쪽으로 옮겨졌다.
* 천지에 불경한 폭군 무을의 죽음
무을은 포학하고 무도했다. 일찍이 나무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천신(天神)이라 부르고 옆 사람에게 대신 수를 두게 하여 자신과 바둑을 두며 승부를 겨루었다. 만약 천신이 지면 그것을 모욕했다. 또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 피를 가득 채우고 하늘을 향해 쏘며 이를 ‘하늘을 쏜다(射天)’라고 했다. 한번은 무을이 황하와 위하(渭河) 사이로 사냥을 나갔다가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이 쳐 무을은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4년에 불과했다.
무을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태정(太丁)제가 즉위했다. 태정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을제(乙帝)가 즉위했는데 을제가 즉위했을 때 은나라는 더욱 쇠락했다. 을제 서거 후 막내아들 신(辛)이 계승하니 이분이 신제(辛帝)다.
* 주왕의 음란함으로 나라가 망하다
천하 사람들은 모두 신제(辛帝)를 ‘주(紂)’라고 불렀는데 이는 ‘주’가 의를 해치고 선을 손상시킨다는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주는 비록 천성이 총명하고 말솜씨가 있으며 행동이 빠르고 습득 능력이 매우 강한 데다 기운이 남달라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을 정도였으나 독단적이고 아집이 세어 신하들의 간언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허물을 덮는 데 능했고 약간의 재능을 가지고 대신들 앞에서 자만했으며 위세를 빌려 도처에서 자신을 높였고 천하의 모든 사람이 자신만 못하다고 여겼다. 그는 또한 현량(賢良)한 이를 박해하고 백성을 잔혹하게 해쳤다. 그는 술 마시기를 즐기고 방탕하게 즐겼으며 여자를 총애했다. 그는 특히 비(妃)인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모든 일을 달기의 말에 따랐다. 그는 악사 연(涓)에게 자신을 위해 새로운 음란한 음악을 만들게 하여 즐거움에 사용했다.
그는 또한 세금을 무겁게 매겨 녹대(鹿台) 돈 창고에 돈을 가득 쌓고 거교(鉅橋) 창고에 식량을 가득 채웠다. 그는 다방면으로 개와 말 그리고 기이한 물건들을 수집하여 궁실을 채웠고 사구(沙丘)의 원림과 누대를 확충하여 대량의 들짐승과 새들을 잡아 그 안에 가두었다. 그는 귀신에 대해 오만하고 공경하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광대를 불러 사구에 모아놓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었으니 즉 술을 연못물로 삼고 고기를 걸어 숲으로 삼아 남녀가 벌거벗은 채 그 사이에서 쫓고 장난치며 술 마시고 즐기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주왕이 이토록 음란하고 무절제하니 백성들은 그를 매우 원망했고 어떤 제후들은 그를 배반했다. 이에 그는 형벌을 무겁게 하여 ‘포락(炮烙)’이라 불리는 가혹한 형벌을 설치했으니 기름을 칠한 구리 기둥 위를 사람이 기어가게 하고 아래에는 숯불을 피워 기어가지 못하면 숯불 속으로 떨어지게 했다.
주왕의 신하 중에 삼공(三公)이 있었으니 서백 창(昌), 구후(九侯), 악후(鄂侯)였다. 구후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어 주왕에게 바쳤는데 그녀가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자 주왕이 크게 노하여 그녀를 죽이고 동시에 구후에게도 해형(醢刑, 살을 저며 젓갈을 담그는 형벌)을 내려 육장(肉醬)으로 만들었다. 악후가 극력 간언하자 결국 악후 역시 부형(脯刑, 살을 말려 육포를 만드는 형벌)을 당해 말린 고기가 되었다. 서백 창이 이 일을 듣고 남몰래 탄식했다. 숭후호(崇侯虎)가 이를 알고 주왕에게 밀고하자 주왕은 서백을 유리(羑里)에 감금했다.
서백의 신하 굉요(閎夭) 등이 미녀와 기물 그리고 좋은 말을 찾아 주왕에게 바치자 주왕은 그제야 서백을 석방했다. 서백은 옥에서 나온 후 주왕에게 낙수(洛水) 서쪽의 땅 일부를 헌납하며 포락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폐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주왕이 이를 승낙하고 그에게 활과 화살 그리고 큰 도끼를 하사하여 다른 제후를 정벌할 수 있게 하니 이로써 그는 서부 지역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주왕은 비중(費仲)을 임용하여 국가 정사를 관리하게 했다. 비중은 아첨을 잘하고 재물을 탐했기에 은나라 사람들이 이로 인해 가까이하지 않게 되었다. 주왕은 또 악래(惡來)를 임용했는데 악래는 비방을 잘하고 참언하기를 즐겼기에 제후들이 이로 인해 더욱 멀어졌다.
서백은 본국으로 돌아와 남몰래 덕을 닦고 선정을 베푸니 많은 제후가 주왕을 배반하고 서백에게 귀복했다. 서백의 세력은 더욱 강대해졌고 주왕은 이로 인해 점차 권세를 잃어갔다. 대신 비간(比干)이 주왕에게 권했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다.
이후 서백이 기(饑)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자 주(紂)왕의 대신 조이(祖伊)가 이를 듣고 주나라를 원망하는 동시에 매우 두려워하며 주왕에게 달려가 간언했다.
“하늘이 이미 우리 상나라의 수명을 끊으셨습니다. 길흉을 아는 사람의 예측이든 거북점으로 친 점괘든 좋은 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제 생각에 선왕께서 우리 후손을 돕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대왕께서 음란하고 포학하여 스스로 하늘과 끊어졌기에 하늘이 우리를 버려 우리가 편히 먹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천의를 헤아려 알지도 못하시고 상법(常法)을 따르지도 않으십니다. 지금 우리 백성들 중에 상나라가 속히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들은 ‘하늘은 어찌하여 아직 당신의 위엄을 보이지 않으시는가? 주(紂)를 멸하라는 명령은 왜 아직 도착하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대왕께서는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주왕이 말하기를 “내가 태어나 군주가 된 것은 하늘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했다. 조이가 돌아가서 말하기를 “주왕은 이제 권고할 방법이 없구나!”라고 했다.
서백 창이 죽은 후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동정(東征)하여 맹진(盟津)에 이르렀을 때 은주를 배반하고 무왕과 합류한 제후가 800개국이었다. 제후들이 모두 말하기를 “주왕을 정벌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주무왕은 “그대들은 천명을 모른다”라고 말하며 다시 군대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갔다.
주왕은 더욱 음란해져 멈출 줄 몰랐다. 미자(微子)가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주왕이 듣지 않자 미자는 태사(太師), 소사(少師)와 상의한 후 상을 떠났다. 그러나 비간은 “남의 신하가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간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극력 간언했다. 주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성인의 마음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하더라”라고 했다. 그리고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 보았다. 기자(箕子)는 이 상황을 보고 두려워하여 미친 척하며 남의 노예가 되었다. 주왕은 이를 알고 기자를 다시 감금했다. 상나라의 태사, 소사는 제기(祭器)와 악기(樂器)를 가지고 급히 주나라로 도망갔다.
주왕의 폭행은 하늘의 진노를 샀다. 상조 말기에 지진이 발생했다. 《죽서기년》에는 “제신(帝辛) 43년 봄…… 요산(嶢山)이 무너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회남자》에 따르면 “은주 때 요산이 무너지고 세 하천이 말랐다”라고 한다. 사서에서는 지진의 원인을 해석하기를 “주왕이 무도했기에 요산이 무너지고 박락(薄落)의 물이 말랐다”라고 했다. 이는 상왕조의 붕괴를 가속화했으며 상조의 기운이 다했음을 예시했다.
주무왕은 시기(時機)가 왔음을 보고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紂)를 정벌했다. 주왕은 군대를 보내 목야(牧野)에서 저항했다. 주력(周曆) 2월 5일 갑자일에 주왕의 군대가 패배하자 주왕은 황급히 내성으로 도망쳐 녹대에 올라 보옥 옷을 입고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다. 주왕은 600여 년 전 하걸의 전철을 밟았다. 주무왕이 도착하여 그의 머리를 베어 태백(太白) 깃대에 매달아 대중에게 보였다. 주무왕은 또 달기를 처형하고 기자를 석방했으며 비간의 무덤을 수리했다.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祿父)를 봉해 은상의 제사를 잇게 하고 반경의 덕치를 시행하도록 명하니 은상의 인민들이 매우 기뻐했다. 그리하여 주무왕이 천자가 되었다.
상왕조의 문화와 과학 기술
(1) 과학 기술
* 수공업과 주조(鑄造)업
은허의 발굴 및 갑골문에 기록된 사실에 근거하면 상조의 청동기 주조 기술은 정점에 달해 상나라 문명의 상징이 되었다. 석기, 옥기, 골기, 동기 등이 모두 독립된 생산 부문이 되었다. 또한 상나라 사람들은 이미 원시적인 자기(瓷器)를 발명했으며 희고 섬세한 백도(白陶)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조형이 사실적이고 조각이 정교한 옥석기는 상나라 옥공(玉工)의 뛰어난 기예를 보여주었다. 견직물에는 평직물인 완(紈), 교차해서 조직이 느슨한 사라(紗羅), 주름이 많은 고(絝) 등이 있어 상조가 이미 복잡한 무늬를 만드는 기술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이 외에도 제혁, 양조, 주거(舟車) 등이 있었다. 공자는 일찍이 은나라 사람들의 수레가 매우 좋았다고 말한 바 있다.
상조 시기 백도(白陶 흰색 도기) 공예 수준이 가장 높았다. 백도는 고령토를 1,000°C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 만든 것으로 질감이 희고 섬세하며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상대의 옥기는 매우 아름답고 모양이 다양하여 두 마리 용이 맞닿은 원형(圓形),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 보는 반원형이 있는가 하면 사람 얼굴, 짐승 머리, 호랑이, 코끼리, 토끼, 새, 개구리, 매미, 물고기 등의 모양으로 조각되어 자태가 생동감 있고 활기차다. 하남 안양 상왕 무정의 아내 부호(婦好)의 묘에서 고고학자들은 600여 점의 옥, 석기와 높이가 30~40센티미터에 달하는 상아 조각품 세 점을 발굴했는데 이는 상나라의 뛰어난 공예 수준을 집중적으로 반영한다. 상아 잔은 그중 대표작이다. 원조(圓雕) 옥인(玉人)은 모든 장식품 중 가장 정교한 작품이다.
무릎 꿇고 앉은 옥인(상나라) 전체 높이 7센티미터, 76년 하남성 안양 은허 부호묘 출토,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소장
은허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총 수천 점에 달한다. 청동기의 종류는 매우 복잡하며 상나라 청동기는 주로 예기(禮器)였다.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정(鼎), 역(鬲), 언(甗 시루), 이(彝), 존(尊), 작(爵) 등이 있으며 악기, 병기 및 수레 장식도 있다. 이러한 청동기의 형식과 무늬는 매우 정교하며 그중 많은 것이 정교한 예술품이다.
출토된 상나라 최대의 청동기인 사모무정(司母戊鼎)은 상나라 청동기의 대표작이다. 무게가 875킬로그램에 달하며 솥의 배 부분은 직사각형이고 위로는 두 개의 귀가 곧게 서 있으며 아래에는 네 개의 원주형 다리가 있다. 솥의 높이는 1.32미터, 길이는 1.1미터, 너비는 80센티미터로 기형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으며 현존하는 최대의 상나라 청동기다. 당시 생산 수준으로 볼 때 이러한 거대 청동기를 주조하려면 200~300명의 숙련된 장인이 분업 협력해야만 주조할 수 있었으며 기술 또한 매우 복잡했다. 이것은 1939년 안양 무관촌 농민이 밭에서 발굴한 것으로 솥 내부 벽면에 ‘사모무(司母戊)’라는 세 글자의 명문이 주조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상왕이 그 어머니(이름이 무)에게 제사 지내기 위한 기념 기물이다.
주조 공예는 주로 제범(制範)과 주조 두 단계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사모무정의 주조는 상나라 청동 주조 기술의 고도 발전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상나라 청동 주조업의 규모가 방대하고 조직이 엄밀하며 분업이 세밀했음을 설명한다.

사모무정(상나라) 전체 높이 133센티미터, 무게 875킬로그램, 1939년 하남성 안양 은허 출토, 현재 중국역사박물관 소장
* 천문
상대(商代) 달력에는 이미 큰달과 작은달의 구분이 있었으며 366일을 한 주기로 규정하고 연말에 윤달을 두어 삭망월과 회귀년의 길이를 조정했다. 복사(卜辭 점친 기록) 기록에 따르면 은력(殷曆)의 대월은 30일, 소월은 29일이며 태양력과 태음력의 차이 나는 일수를 합쳐 한 달이 될 때 그해 연말에 13월을 하나 추가하니 이를 “끝에 남은 것을 귀속시킨다(歸餘於終)”라고 했다. 이것이 중국 윤달 설치의 시작이다. 중국 전통 역법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상대는 천상(天象) 관측을 중시하는 전통을 계승했으며 은허 복사에는 천상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다. 그중에는 일식과 월식의 기록이 있으며 항성에 대해서도 일정한 인식이 있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성(新星) 관측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 수학
상대 갑골문에는 크게는 3만에 달하는 숫자가 있고 명확한 십진법이 있으며 기수, 우수 및 배수의 개념이 있다.
* 광학
광학 지식은 아주 일찍부터 응용되었다. 상나라에서 출토된 미볼록거울(微凸面鏡)은 작은 거울 면에 사람 얼굴 전체를 비출 수 있었다.
(2) 문화와 예술
* 문자와 문학
문자는 인류 사회가 문명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상징이다. 역사상 창힐(倉頡)이 글자를 만들었다고 하나 자료가 한정되어 당시 문자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상나라 문자는 갑골문이 가장 많으며 이 외에도 금문(金文 금속 기물에 새긴 문자), 도문(陶文 도자기에 새겨진 문자) 및 옥석(玉石) 명문 등의 유형이 있다. 상대 갑골문은 중국에서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자로 지금으로부터 대략 3,000~4,000년 전의 역사다.
상대 갑골문은 이미 원시 그림 문자 단계를 초월하여 매우 간단한 선과 기호로 문자를 창작할 수 있었다. 글을 새기는 방향의 다양한 변화는 자형 구조를 매우 활발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위에서 아래로 쓰는 장법(章法)의 종세화(縱勢化)는 중국 서예의 장법 형식을 열었으며 상형, 회의, 형성, 가차, 지사 등 다양한 조자 방법을 갖춘 이미 성숙한 문자였다.
출토된 갑골 복사 중 총 4,672자가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이 인식한 것이 이미 1,072자이며 그 내용은 정치, 경제, 철학, 역사, 군사, 천문 역법, 지리 기후, 예의 민속, 의학, 문법 등을 망라한다. 갑골문은 새기는 재료가 딱딱했기에 글자체가 사각형인 반면 동시에 존재한 금문은 주조 방식이었기에 글자체가 원형이었다.
금문의 문자 내용은 갑골문보다 더 풍부하다. 은상 기물 위의 한두 자부터 서주 춘추 기물 위의 수백 자에 이르기까지 제전(祭典) 훈고, 정벌 공훈, 상사(償賜) 책명, 서약(誓約), 혼인 물품 등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다. 청동기와 함께 주조된 명문은 그 형식 면에서 장엄, 신중, 엄숙, 질서, 정교함을 요구했으니 이는 “기물에 예를 감춘다(藏禮於器)”는 예의 문화의 특징에 부합한다.
장법 면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방식을 유지하는 외에도 전체적인 정방형의 정제함을 매우 중시했다. 즉 상하 여백의 가지런함이며 들쑥날쑥한 행각(行脚)이 거의 없고 첫 행과 마지막 행도 거의 동일한 수평선 안에 통제되었다. 서주 금문 형체 변천의 주요 추세는 선화와 직선화다. 초기 금문의 상형적 특징은 후기 금문에서 변화를 겪었으며 이는 굵기가 균일한 전서(篆書)의 서사 방식이 탄생하는 데 견고한 기초가 되었다.
상대에는 이미 풍부한 문헌 전적이 있었다. 대량의 갑골 복사(卜辭)는 당시 문헌 기록의 일부다. 전업 사관(史官)인 ‘작책(作冊)’이 있어 전적을 수집 관리했다. 현존하는 《상서》 중의 《상서(商書)》는 은상 사관이 기록한 서(誓), 명(命), 훈(訓), 고(誥)다. 그중 신뢰할 만한 것으로는 《반경》, 《고종융일》, 《서백감려》 등의 편이 있다. 주초(周初) 문헌에 따르면 은나라 선인들에게는 책(冊)이 있고 전(典)이 있었다고 하는데 상술한 여러 편이 바로 이러한 전책(典冊) 안에 포함되어 보존되어 내려온 것이다. 《반경》(세 편)은 은왕 반경이 천도 전후에 세족 백관, 백성 및 서민들에게 한 연설이다. 이 세 편은 총 1,200여 자로 언어가 생동감 있고 문장이 간결하여 고대 문학 중 상등품에 속한다.
* 음악
상대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귀신을 섬기는 것을 존숭한 것이다. 제사 등 ‘예’를 거행할 때는 노래와 춤이 동반되었다. 상나라 사람은 음악으로 신귀(神鬼)와 대화했으니 이는 신귀에게 들려주기 위해 부르는 것이었다. 악무(樂舞)는 사람들이 신귀에게 바치고 섬기며 즐겁게 하여 신과 인간이 소통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 악기
상나라의 북은 매우 특색이 있다. 현존하는 것은 단 두 점뿐이며 모두 청동으로 주조한 모조 나무 북이다.
상나라 음악 발전 수준이 높았음은 악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이미 대량의 정교하고 화려한 악기가 출현했다. 상나라에는 이미 세트로 된 악기가 있었으니 현재 발견된 것으로 도훈(陶塤), 석경(石磬), 동령(銅鈴), 동요(銅鐃), 북 등이 있어 당시 음악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반영한다.
상대 악기 중 후세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종(鍾)과 경(磬)을 꼽을 수 있다. 하남 안양 무관촌 대묘에서 출토된 큰 석경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호랑이 형상으로 부조되어 있으며 문양과 기물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복호문(伏虎紋) 석경은 길이 84센티미터, 높이 42센티미터, 두께 2.5센티미터로 청색이 도는 흰 대리석을 정교하게 깎고 갈아 만든 것으로 외관이 장중하고 단아하다. 경의 한 면에는 가느다란 두 줄로 엎드린 호랑이 도안을 새겼는데 자태가 아름답고 설계가 교묘하여 기형과 혼연일체를 이룬다. 현대의 심미안으로 보더라도 전체 경은 최상급의 공예품이라 할 만하다. 음 측정 결과 그 음고는 #c1보다 약간 높다. 소리가 중후하고 우렁차며 음색은 청동과 비슷하고 비교적 긴 여운이 있다. 이 복호문 대석경은 단일 품목으로 세트를 이루지 않으니 이러한 경을 또 특경(特磬)이라 한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대형 악기이자 고도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조각품이다.

상대 호문(虎紋) 석경은 부호묘에서 출토되었다. 이 호문 석경은 상대 경 중의 왕이라 할 수 있으며 정면에 건장한 호랑이 문양이 새겨져 있다. 측정에 따르면 이 경은 5개의 음계가 있어 서로 다른 악곡을 연주할 수 있다.
– 악무(樂舞 음악과 춤)
상나라 악무 중 고증 가능한 것으로는 《상림(桑林)》과 《확(濩)》이 있다. ‘상림’은 본래 일종의 대규모 국가급 제사 활동으로 성격은 ‘사(社, 토지신)’에 제사 지내는 것과 같다. 춘추 시대 묵자(墨子) 시대(약 서기전 5세기)까지도 ‘상림’은 여전히 수만 명이 주목하는 성대한 제사 활동이었다. ‘상림’ 제사에 쓰인 악무 역시 그 제사 이름을 그대로 따서 《상림》이라 불렀다.
《확》은 주나라 때 주의 선모(先母) 강원(姜嫄)에게 제사 지내는 데 사용되었으니 그 내용은 제사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전해지는 문헌 외에 갑골문 중에도 제사 악무에 관한 기록이 일부 있으나 너무 간략하여 자세히 고증하기 어렵다.
상조 왕계표(王系表) (1766 B.C. — 1122 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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