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대제】 소년 천자 흔들림 없는 지혜로 오배를 제거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강희제가 오배를 제거한 것은 소년 강희제가 해낸 첫 번째 훌륭한 대업이자, 그가 친정(親政)으로 나아가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사진은 강옹건 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강희 6년(1667년) 7월, 토지 몰수 사건으로 세 명의 대신을 살해한 오배는 갈수록 기세가 등등해져 같은 보좌 대신인 소극살합을 죽이려 했다. 강희제는 그 안의 억울한 사정을 알고 소극살합의 목숨을 구해주려 했다. 더 큰 권력을 거머쥐려 했던 오배는 군신의 예의도 저버린 채 소매를 걷어붙이고 포효하며 다시 한번 강희제와 격렬하게 논쟁했다. 포악한 권신 앞에서 소년 강희제 또한 비범한 용기를 보여주며 소극살합에 대한 오배의 처치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는 어린 군주와 강한 신하의 정면 대결이었다. 논쟁은 온종일 이어졌고 강희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으나, 오배는 오랫동안 구축해 온 세력 집단을 이용해 소극살합의 형벌을 교형(絞刑)으로만 바꿨을 뿐 결국 그가 죽고 일가가 멸하는 결말을 막지는 못했다. 오배가 보좌한 6년 동안 두 차례나 잔인한 유혈 사태가 발생하자, 강희제는 마침내 직접 나서서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후세에 전해지는 강희제가 오배를 제거했다는 극치감 넘치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어진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다스려
강희제는 강희 6년 7월 을유일에 친정을 시작하며 건청문에서 어문청정(御門聽政)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좌 대신 오배가 권력을 휘둘러 소극살합의 가문을 멸했다. 강희제는 참고 움직이지 않으며 그에게 일등공(一等公)을 가봉했다.
(출처: 가을 7월 기유일에 상이 친정하시고… 비로소 건청문에서 정사를 보셨다. … 기미일에 보좌 대신 오배가 보좌 대신 소극살합과 그 자손들을 멋대로 죽였다. 계해일에 보좌 대신 알필륭과 오배에게 일등공을 더해 주었다. —— 《청사고》)
스무 살 무렵의 강희황제, 청나라 일명 미상 《청년 강희제 조복상》 국부. (공유영역)
소극살합을 제거한 후 조정에는 나약한 알필륭만이 오배와 대등한 지위에 남게 되었다. 오배는 더 이상 후환이 사라지자 언행이 날로 오만해졌다. 조정에서 정사를 논할 때 좌석이나 순서에 관계없이 공공연히 알필륭의 앞에 섰으며, 마치 제일의 보좌 대신인 양 행동했다. 일반 대신들은 천자 앞에서 경외심을 가졌으나 오배는 그렇지 않았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관리들에게 고함을 쳤고, 자주 황제의 명을 거역하며 매번 황제가 자신의 의도에 굴복하게 했다.
동시에 관리 임용에서도 더욱 제멋대로 굴어 좋아하는 자는 추천하고 미워하는 자는 모함했다. 의정 관리와 각 부처의 주요 부서에 자신을 따르는 간신들을 배치해 엄밀한 관계망을 형성하니, 문무백관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온다는 형세가 되었다. 오배는 심지어 황제를 건너뛰어 집에 작은 조정(朝廷)을 차려놓고 관리들을 불러 정무를 논의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강희제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날의 논쟁 이후 그는 예리함을 감추고 한발 뒤로 물러서는 전략을 취했다. 소극살합이 죽은 지 한 달 만에 강희제는 오배에게 일등공 작위를 내리고, 원래의 이등공은 아들이 계승하게 했다. 이듬해(1668년) 8월에는 다시 오배에게 태사(太師)의 존귀함을 내렸다. 오배는 죄를 묻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영예를 누렸다.
이는 강희제가 오배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인애(仁愛)와 자비의 마음에서 그가 국가에 공이 있는 삼조(三朝)의 원로임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동시에 오배가 자신의 언행을 스스로 반성하고 허물을 고쳐 은혜에 감사하며 죄를 멀리하고 공명을 보존하기를 바랐다. [1]
은혜를 베푸는 것 외에도 강희제는 자주 곁에서 넌지시 암시하며 오배가 신중하게 행동하고 하루빨리 깨닫기를 일깨워 주었다. 예를 들어 강희제가 한 회의에 참석했을 때, 어떤 관리가 대학사 이위(李霨)에게 은혜로운 조서로 죄수를 잘못 사면한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묻는 것을 들었다. 이위는 잘못된 대로 그냥 두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그러자 강희제는 그를 비판하며 죄수를 잘못 사면한 것은 혹 너그럽게 보아줄 수 있으나 사람을 잘못 죽인 것까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는 강희제가 오배가 대신을 억울하게 죽인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었다. 이위도 그 뜻을 알아차리고 황제의 말씀은 만세의 교훈이 될 만하다고 찬탄했다.
이런 일은 더 많았다. 한번은 어떤 관리가 오배가 황제의 어필 서명(朱批 붉은 색으로 표시하기에 주비라 함)이 끝나 이미 공표된 상소문을 가로채서 수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즉시 강희제에게 상소문은 이미 결재되고 공표되었으므로 고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오배는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그 관리의 죄를 다스리려 했으나, 강희제는 오히려 그 관리를 포상하고 보좌 대신들에게 앞으로 더욱 신중하라고 훈계했다.
또 한 번은 강희제가 보좌 대신들과 함께 상소문을 검토할 때 오배가 옆에서 잡담하며 정무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강희제는 즉시 그를 꾸짖으며 “이는 사람 목숨에 관한 사건으로 더욱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며, 너희는 사람 죽이는 것을 아무 일도 아닌 듯 여기지만 짐은 반드시 신중하게 살필 것이다”라고 말했다. [2]
《청사고》에는 강희제가 친정하기 전 몇 년 동안 일식, 혜성이 다른 별자리를 범하는 일, 금성이 낮에 나타나는 현상, 지진, 괴이한 비 등 국가에 여러 재이(災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국가의 정사에 실수가 있고 간신이 득세하며 백성이 유리걸식할 때 하늘은 이상 천상이나 재앙의 형태로 세상 사람들, 특히 군주에게 경고를 보낸다. 강희제도 이를 위해 여러 차례 형벌을 감면하는 조서를 내리고 관리들에게 스스로 허물을 반성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배 일당은 끝내 뉘우치지 않았다.
강희 7년(1668년) 9월, 내비서원(內秘書院) 시독학사(侍讀學士) 웅사리(熊賜履)는 강희제에게 특별히 상소를 올렸다. “근래 재이가 유행하는 것은 하늘의 견책이자 사람의 일로 인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천하의 치란(治亂)은 재상에게 달려 있는데 조정의 구습이 제거되지 않아 국계(國計)에 은밀한 우려가 크다”고 보고했다. 그가 암시한 것은 바로 오배와 그 당여들이 조정을 어지럽히는 일이었다. [3] 이에 강희제는 어떻게 응답했을까?
부동성색(不動聲色)
강희황제는 기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악(巨惡)인 오배를 제거했으니 이는 참으로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 소련(昭梿)
(출처: 목소리와 안색이 흔들리지 않고 거대한 악을 제거했으니 진실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소정잡록(嘯亭雜錄)》)
만주인은 무예를 숭상하여, 강희제는 어릴 때부터 글공부를 하는 틈틈이 기사와 활쏘기를 고되게 연습했다. 그림은 청(淸) 낭세녕(郞世寧)이 그린 《강희수렵도(康熙狩獵圖)》 부분으로,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이다.(공유 영역)
공자는 “오직 인자(仁者)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마음속에 인애(仁愛)를 품어야 비로소 시비와 선악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강희제 또한 이 문장을 인용해 신하들을 가르치며 “성인의 법도 안에는 인(仁)이 있다”고 보았다. [4] 인은 강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니, 성명(聖明)한 인군(仁君)은 인의가 가득한 큰 사랑을 가짐과 동시에 악을 벌하고 선을 권장하는 위엄도 지니고 있다. 이는 강희제에게서 충분히 나타났다.
강희제가 오배를 대할 때도 이런 대인대위(大仁大義)가 체현되었다. 진정으로 오배를 제거하기 전까지 강희제는 포상과 훈계를 병행하며 그가 스스로 고칠 기회를 반복해서 주었다. 유감스럽게도 오배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황제가 어려서 속이기 쉽다고 오판하고 정권을 독점했다. 이에 강희제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고 오배를 생포하기로 했다.
군신 관계에서 한쪽은 병권(兵權)을 쥐고 세력이 뿌리 깊은 원로 보좌 대신이었고, 다른 한쪽은 친정한 지 2년도 안 된 소년 황제였다. 이렇게 보면 오배의 뿌리를 흔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밝은 지혜를 지닌 강희제의 마음속에는 이미 오배를 제거할 완벽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실제 행동에 옮기기 전까지 강희제는 겉으로는 아무런 기색 없이 그와 상대했다.
그리하여 웅사리가 오배의 권력 남용을 완곡하게 비판하며 강희제의 친정을 희망했을 때, 강희제는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짐짓 오배를 안심시키고 웅사리가 망령되게 상소를 올렸다고 꾸짖었다. 실제로 오배를 잡기 위한 준비 작업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오배가 입궐해 정사를 보고할 때면 궁 안에서 치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보니 강희제가 비슷한 또래의 젊은 시위들을 선발해 매일 무예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오배 또한 강희제가 시위들과 함께 만주족의 씨름인 부쿠(布庫) 경기를 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보기에 강희제는 씨름에 깊은 흥미를 느껴 마음이 이미 정무를 떠난 듯했다.
오배는 속으로 기뻐하며 황제가 역시 소년의 기질을 버리지 못했고 포부도 없어 그저 놀기만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러자 자신은 더욱 거리낌 없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는 그물이 자신을 향해 덮쳐오고 있음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만주족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기에 무예를 숭상했고, 귀족 자제들도 무예를 익히는 기풍이 있었다. 강희제 또한 어려서부터 글공부 외에 기사(騎射)와 궁술(弓術)을 연마했다. 이제 강희제는 이 특징을 이용해 시위 중 백여 명의 측근을 곁에 두었으니, 사실 그들이 오배를 잡을 주력군이었다. 그들의 매일 임무는 강희제와 씨름 연습을 하는 것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무예를 높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상을 만들어 오배를 방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강희제에게는 또 한 명의 유능한 조력자가 있었는데, 바로 소니의 아들이자 황후의 숙부인 소액도(索額圖)였다. 그는 처음 입궐했을 때 삼등 시위였으나 재능을 인정받아 일등 시위와 이부시랑으로 승진했다. 강희 8년(1669년) 5월, 소액도는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시위직으로 복귀하기를 청했다. 그리고 바로 그달에 오배를 생포하는 대사가 일어났다. 필기소설에서도 거사 며칠 전 강희제가 바둑을 둔다는 명목으로 그를 불러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소액도 역시 오배 제거의 중요한 참여자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5]
공식 행동에 앞서 강희제는 오배의 당여들을 외지로 파견해 오배 제거 시 조정에 미칠 파동을 최소화했다. 5월 16일이 되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강희제는 시위들을 불러 모아 물었다.
“너희는 모두 나의 심복인데, 도대체 나를 두려워하느냐 아니면 오배를 두려워하느냐?”
모두가 격앙되어 일제히 대답했다.
“오직 황상만을 두려워합니다!”
이에 강희제는 오배의 여러 죄상을 열거하며 오늘 오배를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6]
하늘이 내린 신명(神明)
“만약 강희제가 조정 관리들에게 직접 오배를 체포하게 했다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희제는 신령스러운 지혜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 특별한 방법으로 오배를 제거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리했으니, 참으로 일반인이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 요원지(姚元之)
(출처: “만약 당시에 외정(外廷)으로 하여금 잡아 신문하게 했다면 사단이 일어나는 것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제거하니 아무런 소동이 없었다. 하늘이 내신 신명이니 진실로 범인(凡人)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죽엽정잡기(竹葉亭雜記)》)
필기소설의 기재에 따르면, 강희제는 정사를 논하는 남서방내에서 묘계로 오배를 제복했다. 그림은 《강희제변장사자상(康熙帝便裝寫字像)》이다. (공유영역)
이날 강희제는 평소처럼 오배를 불러들였다. 오배 또한 늘 그렇듯 기세등등하게 입궐해 정사를 보고했다. 그런데 갑자기 강희제가 명령을 내리자 시위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기습했다. 아무런 대비도 없던 오배는 제아무리 뛰어난 무예를 지녔어도 백여 명의 젊은 용사들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고 금세 제압당했다. 이어 강희제는 그 당여들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고, 오배가 수년 동안 공들여 쌓아온 인맥과 세력은 한순간에 와해되었다.
오배를 생포하는 과정은 《남정필기》에 더 상세하고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강희제는 정사를 논하는 남서방(南書房)을 미리 꾸며 놓았다. 오배가 앉을 의자의 다리 하나를 부러뜨린 뒤 시위 한 명에게 뒤에서 붙잡고 있게 하여 멀쩡한 의자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리고 뜨겁게 달궈진 찻잔을 준비했으며, 구석구석에 무예가 출중한 시위들을 매복시켰다.
오배가 들어오자 강희제는 그를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앉게 하고 그 찻잔으로 차를 내렸다. 오배가 찻잔을 받자 손이 너무 뜨거워 찻잔을 놓쳤고 찻잔은 땅에 떨어져 깨졌다. 뒤에 있던 시위가 그 틈을 타 밀치자 오배는 즉시 땅에 넘어졌다. 강희제는 기회가 왔음을 보고 소리쳤다. “오배가 대불경(大不敬)을 저질렀다!” 시위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육탄전을 벌였고 순식간에 오배를 붙잡았다. [7]
한마디로 요약하면, 강희제가 오배를 제압한 계책은 주로 도광양회(韜光養晦)와 암도진창(暗渡陳倉)이었다. 준비 기간에는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겨 경계심을 풀게 했고, 배치가 완료되자 적절한 시기를 포착해 단숨에 명중시켰다. 전체 과정은 번개처럼 신속하게 진행되어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끝났으며, 조정에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았다. 강희제의 재치와 결단력은 후세 사람들에게 하늘이 내린 신명(神明)이라 칭송받았다. 그는 자신의 용사들과 함께 청나라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통쾌한 장면을 연출했다.
오배를 체포한 당일, 강희제는 의정 대신들에게 오배의 붕당 형성, 황제 기만, 언로 차단, 국법 파괴 등 7대 죄상을 폭로하며 “위로는 군부(君父)의 중대한 부탁을 어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해쳤으니 그 악행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고 꾸짖었다. [8] 이후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 강친왕(康親王)이 어명을 받들어 심문하여 오배의 30가지 대죄를 밝혀내고 관직 박탈과 즉각 처형이라는 중형을 판결했다. 다른 당여들 역시 차례로 심판을 받았다.
강희제가 오배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주목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오배의 최종 결말이다. 당시 선교사 부베의 기록에 따르면 오배는 원래 처형될 예정이었으나 황제를 다시 한번 뵙기를 청했다. 강희제가 그를 부르자 오배는 상의를 벗고 과거 태종 홍타이지를 구하다 입은 흉터를 보여주었다. 또한 태종이 서거한 후 오배가 황자 호격(豪格 홍타이지의 장남으로 순치제의 라이벌)을 옹립하기 위해 황위를 노리던 도르곤과 논쟁하며 목숨을 걸고 칼을 빼 들어 황권 찬탈 기도를 포기하게 했던 일도 있었다. 말하자면 오배는 순치제(順治帝)의 순조로운 즉위에도 공로가 있었다.
강희제는 오배 일생의 시비(是非)와 공과(功過)를 종합적으로 살피고 그가 삼조의 원로임을 가엾게 여겨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결국 오배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둘째는 또 다른 보좌 대신 알필륭에 대한 처벌이다. 이치대로라면 알필륭은 직접 오배의 당여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의 권세에 눌려 대부분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오배의 강제 토지 몰수나 대신 살해 등 전횡을 말리지 않았으니 황제를 속이고 나라를 그르친 과실이 있었다.
대의명분 앞에서 알필륭이 생각한 것은 오직 명철보신(明哲保身)하여 분쟁을 피하는 것이었으나, 바로 그의 방관과 용인이 오배의 기세와 힘을 키워주었다. 그리하여 오배가 몰락한 후 알필륭 역시 감옥에 갇혀 신문을 받았고 12가지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마지막에 강희제는 역시 인애의 마음으로 그의 사형을 면해주고 직무만 박탈한 채 작위(爵位)는 유지하게 했다.
예로부터 사(邪)는 정(正)을 이기지 못하며 선악에는 보응이 있는 법이다. 영명(英明)하고 신무(神武)한 강희제는 불과 단 10일 만에 오배 사건의 심리를 마쳐 조정의 먹구름을 말끔히 씻어냈다. 오배를 제거한 행동은 강희제의 침착함과 대지대용(大智大勇)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강희 조정 초년 최대의 정치적 풍파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고, 보좌 시기에서 강희제 친정의 새로운 시대로 정식 이행하게 되었다.
주석:
[1] 《강희조실록》 권28: 강희 8년 5월 경신조.
[2] [4]: 《강희조실록》 권254: 강희 52년 7월 신유조.
[3] 《강희조실록》 권26: 강희 7년 9월 계축조.
[5] 《소정잡록》 권1: 바둑을 둔다는 이유로 소상국 액도를 불러 모의했다.
[6] 《소정잡록》 권1: 며칠 후 오배가 알현하러 온 날, 여러 우림 소졸들을 불러 면전에서 묻기를 “너희는 모두 짐의 고굉지신들인데, 나를 두려워하느냐 아니면 오배를 두려워하느냐?” 하니 모두 “오직 황상만을 두려워합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오배의 여러 악행을 일깨우고 즉시 체포를 명했다.
[7] 《남정필기》 권1: 오배를 처단하던 날 강희제는 남서방에 있었는데 오배를 불러 강연하게 했다. 오배가 들어오자 내시가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앉게 하고 한 내시가 뒤에서 붙잡게 했다. 차를 내리라 명했는데 먼저 물에 끓여 아주 뜨겁게 한 뒤 손에 쥐여주니 찻잔이 땅에 떨어졌다. 의자를 잡고 있던 내시가 그 기세를 몰아 밀치니 땅에 엎어졌다. 강희제가 “오배가 대불경을 저질렀다!”라고 소리치니 건장한 아이들이 모두 일어나 그를 잡아 부서에 넘겨 법대로 논죄하게 했다.
[8] 《강희조실록》 권28: 강희 8년 5월 무신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3/n12131792.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