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칠웅 중 조나라 흥망사
심연
【정견망】
조나라의 흥망사
*조나라의 선조
조씨(趙氏)의 선조는 진(秦)나라의 선조와 같다. 중연(中衍)에 이르러 태무제 수레를 몰았다. 그 후세 비렴(蜚廉)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 한 아들의 이름을 오래(惡來)라 했는데 주왕(紂王)을 섬기다가 주(周)나라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손이 진(秦)이 되었다. 오래의 동생은 계승(季勝)이라 했는데 그 후손이 조(趙)가 되었다.
나중에 엄보(奄父)에 와서는 공중(公仲)이라 했는데 주나라 선왕(宣王)이 융(戎)을 정벌할 때 수레를 몰았다. 천무(千畝) 전투에서 엄보는 선왕을 탈출시켰다. 엄보는 숙대(叔帶)를 낳았다. 숙대 때 주나라 유왕(幽王)이 무도하게 굴자 주나라를 떠나 진(晉)나라에 가서 문후(文侯)를 섬기니 처음으로 진나라에서 조씨 가문을 세웠다.
숙대 이래 조씨 집안이 갈수록 흥성해졌고 조최(趙衰)에 이르렀다.
조숙이 공맹(共孟)을 낳은 것은 바로 노나라 민공(閔公) 원년(기원전 661년)이었다. 공맹은 조최(趙衰)를 낳았는데 자를 자여(子餘)라 했다.
조최가 진나라 헌공과 여러 공자들 중 누구를 섬길지 점을 쳤으나 길하지 않았다. 공자 중이(重耳)를 섬기는 것에 대해 점을 쳤더니 길하다고 나와 바로 중이를 섬겼다. 중이는 여희(驪姬)의 난 때문에 적나라로 도망쳤는데 조최가 따랐다. 적나라가 장고여(嗇咎如)를 정벌하여 두 여자를 얻었는데, 그 중 어린 여자를 중이의 처로 삼게 하고 나이 든 여자를 조최의 처로 삼게 하여 조돈(趙盾)을 낳았다.
당초 중이가 진(晉)나라에 있을 때 조최의 아내는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를 낳았다. 조최는 중이를 따라 19년을 망명한 끝에 귀국할 수 있었다. 중이는 진나라 문공이 되었고, 조최는 원성(原城)의 대부(大夫)가 되어 원성에 살면서 국정을 맡았다. 문공이 나라로 돌아와 패자가 된 것도 대부분 조최의 계책 때문이었다. 이 일은 「진세가(晉世家)」에 있다.
조최가 진나라로 돌아오자 진나라에 있던 아내가 적인 아내를 기어이 데려오라고 요구했고, 또 그 아들 조돈을 적자(嫡子)로 삼으니 진나라 아내에게서 난 세 아들이 모두 조돈을 섬겼다.
진나라 양공(襄公) 6년(기원전 622년)에 조최가 죽었다. 시호는 성계(成季)였다.
조최가 진나라로 돌아온 후 진나라에 있던 본처는 그가 적에서 얻은 아내를 맞이해 올 것을 간곡히 요구했다. 또한 적처의 아들 조돈을 정통 후계자로 삼고 자신의 세 아들은 아랫자리에 머물며 그를 섬기게 했다. 진상공 6년(기원전 662년), 조최가 세상을 떠나니 그의 시호는 성계다.
조돈이 성계를 이어 국정을 주관한 지 2년 후 진양공(晉襄公)이 세상을 떠났는데 태자 이고(夷皋)의 나이가 어렸다. 조돈은 나라에 난제가 많음을 이유로 양공의 아우 옹(雍)을 군주로 세우고자 했다. 옹은 당시 진(秦)나라에 있었기에 사신을 보내 그를 맞이하려 했다. 태자의 어머니가 밤낮으로 울며 조돈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선군께 무슨 죄가 있기에 왜 그의 적자를 버리고 다른 군주를 찾으십니까?”라고 했다. 조돈은 이 일을 우려하다가 그녀의 종친과 대부들이 자신을 습격해 죽일까 두려워 마침내 태자를 세우니 이가 바로 진영공(晉靈公)이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 진나라로 양공의 아우를 맞이하러 가던 일행을 가로막았다. 영공이 즉위한 후 조돈은 진나라의 정사를 더욱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영공은 즉위 14년이 되자 갈수록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조돈이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한번은 곰 발바닥 요리가 다 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요리사를 죽여 그 시체를 메고 나가게 했는데, 마침 조돈이 이를 보았다. 영공은 이로 인해 두려워하여 조돈을 살해하려 했다. 조돈은 평소 사람을 대함에 너그럽고 자애로웠는데, 일찍이 뽕나무 아래 굶주려 쓰러진 사람에게 음식을 준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이 조돈을 보호하고 구해주어 조돈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그가 아직 국경을 벗어나기 전 사촌동생인 조천(趙穿)이 영공을 살해하고 양공의 아우 흑둔(黑臀)을 군주로 세우니 이가 바로 진성공(晉成公)이다. 조돈이 다시 돌아와 국정을 주관했다.
군자는 조돈을 비꼬아 “정경(正卿)의 신분으로 망명하며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역적을 처단하지 않았다”라고 했으므로 사관은 “조돈이 그 군주를 시해했다”라고 기록했다. 진경공(晉景公) 때 조돈이 세상을 떠나니 그의 시호는 선맹(宣孟)이며 아들 조삭(趙朔)이 작위를 계승했다.
*공손저구가 조씨 고아를 구출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경공 3년, 대부 도안고(屠岸賈)가 조씨 가문을 멸하려 했다. 당초 조돈이 살아있을 때 일찍이 숙대가 자신의 허리를 안고 통곡하며 매우 슬퍼하다가 나중에 또 크게 웃으며 손뼉 치고 노래 부르는 꿈을 꾸었다. 조돈이 이를 점치니 거북 등의 균열이 중간에 끊어졌으나 뒷부분은 다시 좋아졌다. 원(援)이라는 이름의 조나라 사관이 “이 꿈은 매우 흉하나 그 응험이 당신 몸에 있지 않고 아들에게 있으며, 또한 당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입니다. 당신 손자 대에 이르면 조씨 가문은 더욱 쇠락할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
도안고라는 사람은 처음에 영공의 총애를 받았고 경공 때 사구가 되어 난을 일으키려 했다. 먼저 영공을 죽인 역적을 징벌한다는 명목으로 조돈을 연루시키고 모든 장령에게 고하기를 “조돈은 비록 정황을 몰랐다 하나 여전히 역적의 우두머리다. 신하가 군주를 시해했는데 그 자손이 여전히 조정에서 관직을 맡고 있으니 이래서야 어찌 죄인을 징벌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그를 죽입시다”라고 했다.
한궐(韓厥 한헌자)이 말하기를 “영공이 살해당할 때 조돈은 타지에 있었고 우리 선군께서도 그가 죄 없음을 인정하여 죽이지 않으셨소. 이제 여러 장수들이 그의 후손을 죽이려 하는 것은 선군의 뜻이 아니라 함부로 살생하는 것이며, 함부로 살생하는 것이 곧 난이오. 신하가 큰일을 하면서 군주께 알리지 않는 것은 군주를 무시하는 처사이오”라고 했다.
하지만 도안고는 듣지 않았다. 한궐이 조삭에게 소식을 알려 얼른 도망가게 했다. 조삭은 도망가려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당신이 반드시 조씨의 대를 끊기지 않게 해준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소”라고 했다. 한궐은 그의 요구를 승낙하고 병을 핑계로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도안고는 군주에게 청하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여러 장수들과 함께 하궁(下宮)에서 조씨를 습격하여 조삭, 조동, 조괄, 조영제를 죽이고 그 가문을 멸했다.
조삭의 아내는 성공(成公)의 누나인데 조삭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으며, 경공의 궁으로 도망가 숨었다. 조삭의 문객 중에 공손저구(公孫杵臼)라는 이가 있었는데 저구가 조삭의 친구 정영(程嬰)에게 “당신은 왜 죽지 않소?”라고 했다.
정영이 말하기를 “조삭의 아내가 아이를 가졌으니 다행히 아들이라면 내가 봉양할 것이고, 만약 딸이라면 그때 천천히 죽을 뿐이오.”라고 했다.
얼마 후 조삭의 아내가 해산하여 아들을 낳았다. 도안고가 이 소식을 듣고 궁으로 수색하러 왔다. 부인은 갓난아이를 바지 속에 넣고 기도하며 “조씨 종족이 멸절할 것이라면 네가 크게 울고, 만약 멸절하지 않을 것이라면 소리를 내지 마라”라고 했다.
수색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아이는 뜻밖에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위기를 넘긴 후 정영이 공손저구에게 말했다.
“오늘 한 번의 수색은 피했으나 앞으로 반드시 다시 수색하러 올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공손저구가 “고아를 세우는 것과 죽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물었다.
정영이 “죽기는 쉬우나 고아를 세우기는 어렵소”라고 했다.
공손저구가 말하기를 “조씨의 선군께서 그대를 두텁게 대하셨으니 그대는 어려운 일을 맡으시오. 나는 쉬운 일을 하여 먼저 죽겠소!”라고 했다.
이에 두 사람은 다른 집의 아이를 구해 비단 이불을 입혀 깊은 산속에 숨겼다. 정영이 산에서 나와 거짓으로 장군들에게 말하기를 “나 정영은 못나서 조씨 고아를 봉양할 수 없으니, 누가 내게 천금을 준다면 조씨 고아가 어디 숨었는지 알려주겠소”라고 했다.
장군들이 모두 기뻐하며 승낙하고 군사를 보내 정영을 따라 공손저구를 치게 했다. 저구가 거짓으로 말하기를 “정영, 이 소인배놈아! 당초 하궁의 난 때 죽지 못하고 나와 상의하여 조씨 고아를 숨기더니 이제는 나를 팔아넘기는구나. 설사 네가 키우지 못한다 한들 어찌 차마 팔아넘길 수 있느냐!” 하며 아이를 안고 크게 외쳤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조씨 고아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제발 이 아이를 살려주시고 저 저구만 죽여주십시오”라고 했다.
하지만 장군들은 허락하지 않고 즉시 저구와 아이를 죽였다. 장군들은 조씨 고아가 확실히 죽었다고 믿고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진짜 조씨 고아는 여전히 살아있었으며, 정영은 마침내 그와 함께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었다.
15년이 지난 후 진경공은 조씨 고아 조무(趙武)를 찾아냈고 도안고 가문을 멸했다. 경공은 다시 원래 조씨의 봉읍을 조무에게 하사했다.
조씨가 작위를 회복한 지 11년 후 진여공(晉厲公)이 극(郤)씨 대부 셋을 죽였다. 난서(欒書)가 자신에게 연루될까 두려워 진여공을 죽이고 양공의 증손인 주(周)를 세우니 이가 바로 진도공(晉悼公)이다. 이때부터 진나라 대부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졌다.
조무가 조씨 종족을 이은 지 27년 후 진평공(晋平公)이 즉위했다. 평공 12년(기원전 546년), 조무는 정경이 되었다. 평공 13년, 오나라의 연릉계자(延陵季子 계찰)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말하기를 “진나라의 정권은 결국 조무자(趙武子), 한선자(韓宣子), 위헌자(魏獻子)의 후대 손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조무가 죽은 후 시호는 문자(文子)다.
조양자(趙襄子)에 이르러 그는 한강자(韓康子), 위환자(魏桓子)와 함께 지백을 물리치고 그의 영지를 나누어 가졌으며, 그들 세 가문의 영지는 더욱 커져 제후를 능가했다. 기원전 403년, 한나라와 조나라, 위나라는 함께 주 왕실로부터 제후국으로 공인받았다.
*조나라의 발전
헌후(獻侯 조양자의 양자)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수도는 중모(中牟)였다. 조양자의 아우 환자(桓子)가 헌후를 축출하고 대 땅에서 스스로 후가 되었으나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조나라 사람들은 환후가 즉위한 것이 조양자의 본뜻이 아니라고 여겨 다 함께 그의 아들을 죽이고 다시 헌후를 맞이해 복위시켰다. 조헌후 10년, 중산국 무공(武公)이 처음 즉위했다. 조헌후13년, 평읍(平邑)에 성을 쌓았다. 15년, 헌후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열후(㤠侯) 조적(趙籍)이 즉위했다.
열후가 9년 만에 죽고 동생인 무공이 올랐으나 13년 만에 죽자 사람들이 열후의 태자였던 장(章)을 추대하니 이가 바로 경후(敬侯)다.
경후 11년(기원전 376년), 위, 한, 조 세 나라가 공동으로 진(晉)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조나라는 중산국을 공격하여 중인 지역에서 교전했다. 12년, 경후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인 조종(趙種)이 성후(成侯)가 되었다.
이후 조나라는 각각 위(衛)나라, 위(魏)나라, 제나라, 진(秦)나라 등과 전쟁을 벌여 승패를 주고받았다.
경후가 25년만에 죽자 태자를 세워 숙후(肅侯)가 되었다. 숙후 원년(기원전 349년)에 이르러 조나라는 다시 진(晉) 공실의 단씨현(端氏縣)을 빼앗고 진군(晉君)을 둔류(屯留)로 옮겨 안치했다. 숙후 4년, 주 천자를 배알했다.
숙후 6년, 제나라를 공격해 고당(高唐)을 빼앗았다.
숙후 7년, 공자 조각(趙刻)이 위(魏)나라의 수원(首垣)을 공격했다.
숙후 11년, 진효공(秦孝公)이 상앙을 보내 위나라를 정벌하고 위나라 장군 공자 앙(仰)을 포로로 잡았다. 조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했다.
숙후 16년, 숙후가 대릉을 유람하며 노문을 지나는데 재상 태무오(太戊午)가 말머리를 잡고 말하기를 “정당히 농사일이 바쁠 때 하루 농사짓지 않으면 백 일 동안 먹을 밥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숙후는 이 말을 듣고 즉시 수레에서 내려 사과했다.
숙후 17년, 위나라 황읍(黃邑)을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동시에 조나라가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24년, 숙후가 세상을 떠났다. 진, 초, 연, 제, 위나라는 정예병 각 1만 명씩 보내 장례에 참석했다. 숙후의 아들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했다.
*무령왕의 개혁
무령왕 원년(기원전 325년), 양문군(陽文君) 조표(趙豹)가 재상을 맡았다. 양양왕(梁襄王)과 태자 사(嗣), 한선왕(韓宣王)과 태자 창(倉)이 신궁(新宮)으로 와서 하례했다. 당시 무령왕은 나이가 어려 아직 정사를 처리할 수 없었으므로 넓은 견문을 지닌 스승 세 명과 좌우에서 군주의 과실을 감찰하는 사과관(司過官) 세 명을 두었다.
무령왕 8년, 한나라가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다섯 나라가 서로 왕이라 칭했으나 오직 조나라만 왕이라 칭하지 않았는데, 조나라만 거부하며 “실속도 없이 어찌 헛된 명분에 머물겠는가!”라며 조나라 사람들에게 모두 자신을 “군(君)”이라 부르게 했다.
무령왕 9년,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진나라가 삼국 군대를 물리치고 8만 명을 참살했다. 제나라가 관택(觀澤)에서 조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무령왕 17년, 구문(九門 지명)에 가서 야대(野臺)를 쌓아 제나라와 중산국의 국경을 살폈다.
19년 봄 정월에 신궁(信宮)에서 조회를 크게 열었다. 비의(肥義)를 불러 천하의 일을 논의했는데 5일 만에 끝났다. 왕은 북으로 중산의 땅을 공략하여 방자(房子)에 이르러 대로 가니 북으로는 무궁(無窮)에까지 이르렀다. 서쪽으로는 황하에 이르러 황화산(黃華山) 정상에 올랐다.
누완(樓緩)을 불러 “선왕께서는 세상의 변화에 따라 남쪽 변방의 땅을 넓히고, 장수(漳水)와 부수(滏水)의 험난한 지세를 따라 장성을 쌓으셨소. 또 인(藺)과 곽랑(郭狼)을 취하고 임(荏)에서 임호(林胡)를 무찌르셨으나 그 공업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소. 지금 중산은 우리 뱃속 한가운데에 있고, 북으로는 연나라가 있고, 동으로는 호(胡)나라가 있으며, 서쪽은 임호, 누번(樓煩), 진나라, 한나라의 변경이오. 강한 병력의 지원이 없으면 사직이 망하게 생겼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세상을 뛰어넘는 명성을 가지면 세속의 비난이 있기 마련이지만 내가 호복(胡服)을 입고자 하오.”라고 상의했다.
누완이 “좋습니다.”라고 했으나 신하들은 모두 원치 않았다.
이때 비의가 왕의 곁에 있었는데 왕이 “간자와 양자 두 주군은 호(胡)나라와 적(狄)나라에 대해 승리를 꾀했습니다. 신하된 자는 어려울 때는 윤리도덕에 순종하는 절조를 보여야 하고, 잘 나갈 때는 군주와 인민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야말로 신하의 직분이지요. 이제 나는 양왕의 사업을 이어받아 호나라와 적나라로 땅을 넓히고자 하는데, 죽을 때까지 성과를 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적을 약하게 하면서도 힘은 적게 들이고, 많은 공을 이루고도 백성을 수고롭게 만들지 않음으로써 전에 없는 공을 얻고 싶습니다. 무릇 세상을 뛰어넘는 공을 세운 사람은 세속의 비난을 위배할 수밖에 없고, 자신만의 분명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어리석은 인민의 원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오랑캐 옷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을 백성에게 가르칠 터인데, 세상은 틀림없이 과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것이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했다.
비의는 “신이 듣기에 일을 의심하면 공이 없고, 의심하고 행동하면 명성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왕께서 이미 세속과 어긋난다는 비난을 듣기로 결정하셨으니 천하의 논의는 돌아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릇 지극한 덕을 말하는 사람은 세속과 화합하지 못하고, 큰 공을 이루는 자는 여러 사람과 도모하지 않습니다. 옛날 순은 묘(苗)의 춤을 추었고, 우는 나국(裸國)에서 옷을 벗었지만 한 때의 욕구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극한 덕과 큰 공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이 성사되어도 모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모습이 나타나기 전에 봅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무엇을 의심하십니까?”라고 했다.
왕이 “내가 호복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가 나를 비웃을까 두렵습니다. 미친 자가 즐거워하는 것에 지혜로운 사람은 비애를 느끼고, 어리석은 자가 비웃은 것을 현명한 사람은 살피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따른다면 호복으로 인한 공은 이루 다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비웃을지언정 호의 땅과 중산을 내가 반드시 차지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호복을 입었다.
무령왕이 왕설(王緤)을 시켜 숙부인 공자 성(成)에게 “과인이 호복을 입고 조회에 임할 터이니 숙부께서도 호복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집에서는 양친의 말씀을 따르고, 나라에서는 군주의 말을 듣는 것이 고금의 공인된 준칙입니다. 자식이 양친에 반대하지 않고, 신하가 군주를 거스르지 않는 것은 선왕이 정하신 의리입니다. 지금 과인이 복장을 바꾸라고 명령했거늘 숙부께서 입지 않으신다면 천하가 이를 두고 말들이 많을까 걱정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원칙은 인민을 이롭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정무를 처리하는 원칙은 위에서부터 시행하는 것입니다. 덕을 밝히려면 먼저 아랫사람부터 시작하고, 정책을 실행하려면 귀한 사람부터 먼저 믿게 해야 합니다.
지금 호복을 입는 뜻이 욕심과 즐거움 때문이 아닙니다. 일이란 목표 지점이 있고, 공은 이루어야 하는 바가 있습니다. 일이 성사되고 공을 세운 다음이라야 다 잘 된 것입니다. 지금 과인은 숙부께서 정치의 원칙을 거역하고 숙부께서 반대하는 자들을 따르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그리고 과인이 듣기에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의 행동에는 사악함이 없고 귀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자는 명성에 누가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숙부의 명성에 힘입어 호복의 공업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에 왕설에게 숙부를 뵙고 호복을 입어 주십사 청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공자 성은 두 번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이 왕께서 호복을 입으신다는 얘기를 줄곧 들었습니다. 신은 불초한 데다 병석에 오래 누워있는 통에 달려가 인사도 여쭙지 못했습니다. 왕께서 명령을 내리셨다 하니 신이 감히 그에 대해 어리석으나마 충정을 다하고자 합니다. 신이 듣기에 중국은 총명하고 예지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자, 만물과 재화가 모여드는 곳이자, 성현의 가르침을 행하는 곳이자, 인의로 나라를 다스리는 곳이자, 『시(詩)』, 『서(書)』, 예악이 행해지는 곳이자, 기교와 기능이 펼쳐지는 곳이자,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보러오는 곳이자, 오랑캐들이 모범으로 받드는 곳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이런 것들을 버리고 먼 곳의 복장을 입어 고인의 가르침과 법도를 바꾸고, 인심을 거역하고, 학자들과 어긋나고, 중국과 멀어지려 하십니다. 이에 신은 왕께서 이를 진지하게 고려해 주시길 바라옵니다.”라고 했다.
사신이 이를 보고하자 왕은 “내가 숙부께서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가 직접 가서 청을 드려야겠다.”고 했다.
이에 왕은 공자 성의 집으로 가서 친히 그에게 이렇게 청했다.
“옷이란 행동의 편의를 위한 것이고, 예의란 일의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성인들께서는 사람의 경향에 근거하여 그 편의에 따르고, 일에 근거하여 예를 제정했기 때문에 인민에게 이롭고 나라는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구월(甌越)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고, 팔짱을 끼고, 왼쪽 어깨를 드러냅니다. 이를 검게 물들이고, 이마에 문신을 하고, 물고기 껍질로 된 모자를 쓰고, 거친 옷을 입는 것은 대오(大吳)라는 나라입니다. 이처럼 예의와 복장은 다 달랐지만 편리라는 점에서는 한 가지였습니다. 경향이 다르면 그 활용이 변하고, 일이 다르면 예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들은 그 나라에 이롭다면 한 가지 방법에만 매이지 않았고, 그 일에 정말 편리하다면 똑같은 예의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는 같은 스승에게서 나오지만 습속은 다릅니다. 중국은 예의는 같지만 교화는 다 다릅니다. 하물며 산속의 편리함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따라서 거취의 변화는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한 가지만을 강구할 수는 없습니다. 지역마다 다른 복장을 성현이라도 일치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석진 곳일수록 이상한 것이 많고, 왜곡된 학자일수록 궤변이 많습니다. 모르면 의심하지 않고 자기와 다르면 비난하지 않아야 공정하고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숙부께서는 습속 그 자체를 말씀하신 것이고, 저는 습속을 만드는 이치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동으로 황하와 장수(漳水)로서 제나라의 중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나 배를 사용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상산(常山)에서 대(代)나라, 상당(上黨)에 이르는 동쪽은 연나라, 동호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 누번, 진(秦)나라, 한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지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병으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과인은 배를 사용하지도 못하면서 물에서 사는 인민들이 앞으로 어떻게 황하와 박락수(薄洛水)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복장을 바꾸고 말을 타고 활을 쏨으로써 연나라, 삼호(三胡), 진(秦)나라, 한나라의 변경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조간자께서 진양과 상당에 요새를 쌓지 않았기에 조양자께서 융나라를 병합하고 대나라를 취하여 호나라 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도 총명한 자도 다 아는 일입니다. 일전에 중산이 제나라의 강력한 군대를 등에 업고 우리 땅을 침범하여 우리 인민들을 힘들게 하고 물을 끌어들여 호(鄗)를 포위했습니다. 사직의 신령이 돌보지 않았더라면 호는 거의 지키지 어려웠을 것입니다.
선왕께서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셨고, 원한은 아직 갚지 못했습니다. 지금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으로 방비한다면 가깝게는 상당의 형세가 편해질 수 있고, 멀리는 중산에 대한 원한을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숙부께서는 중국의 습속에 따르시느라 간자, 양자의 뜻을 거스르고 복장을 바꾸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호에서의 부끄러운 일을 잊고 계신 것 같으니 이는 과인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공자 성이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이 어리석어 왕의 뜻을 깨닫지 못한 채 감히 세속의 들은 바만 늘어놓았으니 신의 죄입니다! 지금 왕께서 간자, 양자의 뜻을 잇고 선왕의 의지를 따르겠다고 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왕의 명을 듣지 않겠습니까?”라며 다시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에 호복을 내렸고, 다음 날 이것을 입고 조회에 나왔다. 이에 호복령을 처음으로 내렸다.
조문(趙文), 조조(趙造), 주소(周祒), 조준(趙俊)이 모두 왕에게 호복을 입지 말 것과 옛날 법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아뢰었다. 왕은 이렇게 말했다.
“선왕들의 습속이 다 같지 않은데 어떤 법을 말하는가? 제왕들이 서로 이어받지 않았는데 어떤 예를 따르자는 말인가?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은 교화만 했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황제(黃帝), 요(堯), 순(舜)은 사람을 죽이긴 했지만 화를 다른 사람에게 연루시키지는 않았다. 삼왕(三王)에 이르기까지 때에 따라 법을 만들고 일에 따라 예(禮)를 제정했다. 법령과 제도는 각각 그 편의를 따랐고, 의복이나 기계는 사용하기에 편리했다. 그러므로 예가 꼭 한 가지 방법일 필요는 없으며, 나라를 편리하게 하는데 굳이 옛것일 필요는 없다.
성인이 일어난 것도 옛 것을 이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고, 하나라와 은나라는 쇠약해지는데도 예를 바꾸지 않아 망한 것이다. 따라서 옛 것에 반대한다고 비난할 수 없으며, 예에 따른다고 해서 칭찬할 것도 아니다. 그리고 복장이 기이하니 그 뜻이 음탕하다고 한다면 추(鄒)나라, 노(魯)나라에는 기이한 행동이 없을 것이고, 습속이 나쁜 지역의 사람은 좋지 않다고 한다면 오나라, 월나라에는 좋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인께서는 몸에 편리한 것이 옷이고, 일에 편리한 것이 예라고 하셨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과 의복의 제도는 보통 인민들을 가지런히 하려는 것이지 현자들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민들은 습속과 함께 흐르고 현명한 사람은 변화와 함께 하는 것이다. 속담에 ‘책으로 말을 몰려는 자는 말의 성질을 다 모르며, 옛날로 지금을 통제하려는 자는 일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고 했소. 법을 지키려는 공만으로는 세상을 뛰어넘을 수 없고, 옛날 학문만을 본받아서는 지금을 통제하기 부족하오. 그대들이 이 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오.” 마침내 호복을 입고 기병과 사수를 모집했다.
드디어 호복(胡服)을 시행하고 병사를 모집하여 기사(騎射)를 연습하게 했다. 이른바 호복기사란, 전통적인 갑병(甲兵)을 기병으로 바꾸고 전차전(車戰)을 운동전으로 바꾸어 조나라의 군사 실력을 크게 증강시킨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조나라는 진나라가 동쪽으로 발전하는 데 새로운 장애가 되었다. 이번 복식 개혁의 영향은 단지 조나라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중국 역사 발전에 미친 영향 또한 다방면이었다.
27년 5월 무신일, 동궁에서 성대한 조회를 열어 무령왕이 양위하니 왕자 조하(趙何)가 왕이 되었다. 새 왕이 조묘에서 선조를 참배하는 예를 행한 후 나와서 조회를 열었다. 대부들은 모두 대신이 되었고 비의가 상국을 맡아 새 왕의 스승이 되었다. 이가 바로 조 혜문왕(惠文王)이다. 혜문왕은 무령왕이 총애했던 혜후(惠后) 오왜(吳娃)의 아들이다. 무령왕은 스스로 주부(主父)라 칭했다.
후에 혜문왕이 나이가 어려 공자 성, 이태(李兌)가 정사를 마음대로 했는데, 무령왕의 큰아들인 왕자 장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나중에 주부의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아예 궁을 포위해 굶어죽게 했다.
*조무령왕 이후의 전쟁과 쇠망
혜문왕 5년(기원전 294년), 조나라는 주와 이 두 지역을 연나라에 주었다. 8년, 남행당성을 쌓았다. 9년, 조량이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와 연합하여 한국을 공격하여 노관 아래에 이르렀다. 10년에 이르러 진나라가 스스로 서제(西帝)라 칭했다. 11년, 동숙과 위씨가 송나라를 정벌하고 위나라에서 하양을 얻었다. 진나라가 경양을 빼앗았다. 12년, 조량이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공격했다. 13년, 한서가 통솔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공주가 세상을 떠났다. 14년, 연나라 재상 악의가 조, 진, 한, 위, 연 오국 연합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영구를 빼앗았다. 조왕과 진왕이 중양에서 만났다. 15년, 연소왕이 조왕을 만나러 왔다. 조나라는 한, 위, 진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쳤고 제왕이 패해 달아나자 연나라 군사가 깊숙이 들어가 임치성을 함락했다. 제나라 모사가 글을 써서 조왕을 설득했다. 조나라는 진병을 멈추고 진나라를 사절하며 더 이상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혜문왕 5년(기원전 294년)에 조나라가 막(鄚)과 역(易)을 연나라에 주었다.
8년 남행당(南行唐)에 성을 쌓았다.
9년에 조량(趙梁)이 장군이 되어 제나라와 연합하여 한을 공격하여 노관(魯關) 아래에 이르렀다.
10년 진(秦)나라가 서제(西帝)를 칭했다.
11년에 동숙(董叔 조나라 장수)이 위씨(魏氏)와 송나라를 정벌해 위나라로부터 하양(河陽)을 얻었다. 진(秦)나라가 경양(梗陽)을 탈취했다.
12년에 조량이 제나라를 공격했다.
13년에 한서(韓徐)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했다. 혜문왕의 누이인 공주가 죽었다.
14년에 상국 악의(樂毅)가 조나라, 진나라, 한나라, 위나라, 연나라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해 영구(靈丘)를 빼앗았다. 진나라와 중양(中陽)에서 회맹했다.
15년에 연나라 소왕(昭王)이 와서 만났다. 조나라가 한나라, 위나라, 진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니 제나라가 패하여 달아났다. 연나라가 홀로 깊이 들어가 임치(臨菑)를 차지했다.
제나라의 모신(謀臣)이 서신을 써서 조왕(趙王)을 설득했다. 이에 조나라가 진병(進兵)을 멈추고 진나라를 거부하며 더는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혜문왕(惠文王) 17년, 악의(樂毅)가 조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 백양(伯陽)을 공격했다. 진나라는 조나라가 자신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조나라를 정벌하고 조나라의 성 두 곳을 함락시켰다.
18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석성(石城)을 함락시켰다. 조나라 왕이 다시 위(衛) 땅의 동양(東陽)에 가서 황하(黃河) 물을 터뜨려 위나라를 정벌했다. 큰물이 재난이 되어 장수(漳水)가 범람했다. 진나라의 위염(魏冉 양후)이 조나라에 와서 재상을 맡았다.
19년, 진나라 군사가 조나라 성 두 곳을 탈취했다. 조나라가 백양을 위나라에 돌려주었다. 조사(趙奢)가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의 맥구(麥丘)를 공격해 점령했다.
20년, 장군 염파(廉頗)가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 왕과 진소왕(秦昭王)이 서하(西河) 밖에서 만났다.
21년, 조나라가 장수(漳水)의 물길을 무평(武平)의 서쪽으로 고쳤다.
22년, 조나라에 온역(瘟疫 돌림병)이 대규모로 유행했다. 공자(公子) 단(丹)을 태자로 세웠다.
28년, 인상여(藺相如)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평읍에 이르렀다.
29년에 진나라가 한나라와 조나라를 공격하여 연여(閼與)를 포위했다. 조나라는 조사를 장수로 삼아 진나라를 공격하여 연여성 아래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대파하니 (조사에게) 마복군(馬服君)이라는 호칭을 내렸다.
33년에 혜문왕이 죽고, 태자 단이 즉위하니 이가 효성왕(孝成王)이다.
효성왕 원년(기원전 265년),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성 세 곳을 함락했다. 조왕이 갓 즉위하여 태후가 섭정했는데 진나라가 공격을 가속했다.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제나라 왕이 말하기를 “반드시 장안군(長安君 태후가 총애하는 아들)을 볼모로 보내야 군사를 낼 수 있다”라고 했다. 촉룡이 태후를 설득하여 장안군을 제나라에 볼모로 보내기로 동의하자 제나라가 그제야 군사를 냈다.
4년, 효성왕이 꿈에 좌우 양색의 옷을 입고 비룡을 타고 하늘에 오르다 하늘에 닿기 전 추락하여 금옥이 산처럼 쌓인 것을 보았다. 다음 날 효성왕이 감이라는 이름의 서사관(筮史官)을 불러 점을 치니 그가 말하기를 “꿈에 좌우 양색의 옷을 입은 것은 결함을 상징합니다. 비룡을 타고 하늘에 오르다 닿지 못하고 추락한 것은 기세는 있으나 실력이 없음을 상징합니다. 금옥이 산처럼 쌓인 것을 본 것은 우환을 상징합니다”라고 했다.
사흘 후 한나라 상당(上堂)의 수장 풍정(馮亭)이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가 상당을 지킬 수 없어 진(秦)나라에 편입되려 합니다. 그곳의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조나라에 귀속되기를 원하고 진나라에 귀속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상당에는 성읍 17개가 있으니 조나라에 귀속되기를 바라며, 대왕께서 어찌 관리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실지 결정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효성왕이 크게 기뻐하며 평양군 조표를 불러 말하기를 “풍정이 17개 성을 바친다 하니 이것을 받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했다.
조표가 대답하기를 “성인은 아무 이유 없는 이익을 큰 화근으로 보십니다”라고 했다.
효성왕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의 은덕에 감화된 것인데 어찌 이유가 없다 하는가?”라고 했다.
조표가 대답하기를 “진나라가 한나라 땅을 잠식하여 중간을 끊어 양쪽이 통하지 못하게 한 것은 본래 안온하게 상당의 땅을 얻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가 진나라에 귀순하지 않는 것은 화를 조나라에 전가하려는 것입니다. 진나라는 노고를 들였는데 조나라가 거저 이득을 얻는다면, 강국 대국도 소국 약국에서 마음대로 이득을 취하지 못하는데 소국 약국이 도리어 강국 대국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어찌 이유 없는 이득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하물며 진나라는 우전(牛田 진나라 지명)의 수로를 이용해 군량을 운반하며 한나라를 잠식하고 정예 전차로 힘써 싸워 한나라 땅을 분할했으니 그들의 정령이 이미 시행되어 대적할 수 없으므로 절대로 받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효성왕이 말하기를 “이제 백만 대군을 내어 공격해도 1, 2년 안에 성 하나 얻기 힘든데, 지금 저들이 17개 성읍을 선물로 보내오니 이것은 큰 이익이오!”라고 했다.
효성왕은 끝내 평양군의 말을 따르지 않고 평원군 조승의 말을 따라 사람을 보내 상당 땅을 접수했다. 진나라는 이 일로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 군대를 대파했으며, 조사의 아들인 장군 조괄(趙括)이 군사를 이끌고 대패해 투항하자 40여 만 명의 조나라 군사들이 모두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에 의해 구덩이에 파묻혀 죽었다.
효성왕은 그제야 평양군 표의 의견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이로 인해 장평의 재앙이 있게 되었다. 장평 대전은 진나라와 중원의 마지막 적수와의 결전이었으며 전국 시대 최후의 대전이었다. 이로써 동방 육국은 더 이상 진나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장평 대전 전 동방에는 저명한 전국 사군자(四君子)가 출현했는데, 바로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전문, 조나라 평원군(平原君) 조승, 위나라 신릉군(信陵君) 무기, 초나라 춘신군(春申君) 황헐이다. 그들은 인재를 예의로 대접하고 빈객을 널리 모집하며 국사에 관심을 두고 권세를 도모했으며, 각종 공개적이고 비밀스러운, 광명하고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 진나라의 침입에 맞서고 조국의 멸망을 구하려 했다.
장평대전 이후 진나라 군사가 그 기세를 몰아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했다. 진군(秦軍)의 참살은 조나라 사람들의 의분과 다른 나라들의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며, 위급존망의 앞에서 초나라 춘신군, 위나라 신릉군이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 군대와 안팎으로 협공하여 진군을 대파했다. 또한 연나라 태자 단은 심지어 형가를 보내 진왕 정(政)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역사의 큰 흐흠은 이미 되돌릴 수 없었으며 육국은 결국 망국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효성왕 10년, 조나라 장군 낙승(樂勝), 경사(慶舍)가 진나라 신량(信梁)의 군대를 공격하여 물리쳤다.
15년, 위문(尉文 지명)을 상국(相國)인 염파에게 봉하고 신평군(信平君)이라 칭했다. 연나라 왕이 승상 율복(栗腹)을 보내 조나라와 우호를 맺으며 금 500근을 보냈다. 율복이 귀국 후 연나라 왕에게 보고하기를 “조나라 장정들은 모두 장평에서 죽었고 그 고아들은 아직 자라지 않았으니 공격할 만합니다”라고 했다.
아에 연나라 왕이 창국군 악간(樂間 악의의 아들)을 불러 물었다. 악간이 대답하기를 “조나라는 사방으로 적을 맞이하는 나라이며 백성들이 모두 군사 훈련을 받았으니 공격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연왕이 “우리가 다수로 소수를 치니 둘이 하나를 치는 격인데 가능하지 않겠소?”라고 했으나 악간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연왕이 “그럼 내가 다섯으로 하나를 치면 되겠느냐?” 하니 여전히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연왕이 크게 노했다. 군신들은 모두 가능하다고 여겼다. 연나라는 결국 두 갈래 군사, 전차 2천 대를 출동시켜 율복은 비성을 공격하고 경진은 대 땅을 공격했다. 그러나 염파가 조나라 대장이 되어 율복을 격파해 죽이고 경진과 악간을 포로로 잡았다.
16년, 염파가 연나라 도성을 포위했다. 악승을 무양군(武襄君)으로 봉했다.
17년, 대리 재상 대장 무양군이 연나라를 공격해 도성를 포위했다.
18년, 연릉균(延陵鈞)이 군사를 거느리고 상국 신평군 염파를 따라 위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 군이 조나라 유차(榆次) 지역의 37개 성을 함락했다.
19년, 조나라와 연나라가 국토를 교환했다. 조나라는 용태, 분문, 임락을 연나라에 주고, 연나라는 갈성, 무양, 평서를 조나라에 주었다.
20년(기원전 246년), 진왕 정이 즉위했다. 진나라 군이 조나라의 진양(晉陽)을 함락했다. 21년, 효성왕이 세상을 떠났다.
효성왕의 아들 조언(趙偃)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도양왕(悼襄王)이다. 도양왕 기간에 전쟁이 더욱 빈번해졌으며 조나라는 전후로 연나라, 제나라, 위나라 등의 땅을 빼앗았다. 도양왕의 아들 유목왕(幽繆王) 조천(趙遷) 때 이르러 진나라는 더욱 강력해졌으며 기원전 228년 조왕을 포로로 잡고 이듬해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했다. 진나라가 조천을 포로로 잡은 후 조나라의 망명한 대부들이 다 함께 조가(趙嘉)를 왕으로 옹립하여 대(代) 땅에서 6년 동안 왕이라 칭했다. 진나라가 병사를 보내 조가를 물리치고 마침내 조나라를 멸하고 군(郡)으로 삼았다.
사마천은 조나라 멸망의 원인이 조왕 천이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참언을 믿었으며, 조나라의 양장 이목(李牧)을 죽이고 곽개(郭開)를 중용한 데 있다고 보았다. 과연 그러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