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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북 가뭄과 무당산 기우

소양춘

【정견망】

무당산 금정(金頂) 진무대제(真武大帝) 동상 (공유 영역)

호북 무한 중심 기상대가 최근(역주: 이 글은 원래 2022년 9월에 작성되었다) 가뭄 주황색 예보 신호를 발령했다. 현재 성 전체 29개 현(시, 구)이 이미 심한 가뭄이 나타났으며, 향후 일주일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중국 최대 담수호인 파양호는 홍수기에 오히려 물이 마르는 현상이 나타나, 예년보다 100여 일 앞당겨 극심한 갈수기에 진입했다. 이에 수많은 관광객이 드러난 호수 바닥에서 자동차 경주를 즐기기도 한다. 이에 일부 네티즌들은 장강이 바닥을 드러내어 다리를 건너지 않고도 호북에서 강서까지 걸어갈 수 있겠다고 풍자하고 있다.

아래에서 호북 역사상의 두 차례 기우제를 살펴보며, 현재의 인공 강우와 무엇이 다른지 알아보자.

1. 정관 기우에 오룡(五龍) 현성(顯聖)

중국 고대 오행설에 따르면 동방은 청룡으로 목(木)에 속하고, 서방은 백호로 금(金)에 속하며, 남방은 주작으로 화(火)에 속하고, 북방은 현무로 수(水)에 속한다. 무당산에 좌정해 있는 현무대제(玄武大帝 진무대제라고도 함)는 바로 물을 관장하는 주신(主神)이다.

왕일은 《초사장구》에서 굴원의 〈구회(九懷)〉 중 ‘현무보혜수모, 여오기혜남영(玄武步兮水母,與吾期兮南榮)’에 대해 “현무는 수모와 보조를 맞추고, 하늘의 거북인 수신(水神 물의 신)이 나를 배웅한다”라고 주석하며 현무를 수신으로 해석했다. 《중수위서집성(重修緯書集成)》에서도 현무를 “북방 7신의 별자리로, 실로 두(斗)수에서 시작하여 북방을 진압하고 풍우(風雨)를 주관한다”라고 여겼다. 음력 2월 2일은 흔히 용이 머리를 치켜드는 ‘용태두(龍抬頭)’라 부른다. 민간의 신중들은 흔히 이날 신룡(神龍)에게 제사를 지내고 제단을 쌓아 비를 빌며, 풍조우순과 오곡이 풍성하길 바라는 아름다운 염원을 표현하곤 한다.

현무대제는 북방의 신으로, “머리를 풀고 검은 옷을 입었으며, 검을 짚고 거북과 뱀을 밟고 있고, 시종들은 검은 깃발을 들고 있다.” “요마(妖魔)를 굴복시키고 세상을 구도하며, 삼계를 시찰한다.” (공유 영역)

당태종 정관(貞觀) 8년, 천하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받았다. 태종은 덕망 높은 균주(筠州)자사 요간(姚簡)을 무당산에 보내 재초(齋醮)를 올리며 비를 빌게 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단비가 내렸고, 백성들은 평안하게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대당성세(大唐盛世)가 천운에 응하여 일어났다.

전설에 따르면 요간이 산에 들어가 제사를 지낼 때, 무당산의 물과 형상이 모두 신령한 신적(神跡)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도경(道經)의 기록에 따르면 요간이 산중에서 용모가 특이한 다섯 선비를 만났는데, 스스로를 ‘오기룡군(五氣龍君)’이라 일컬었다. 용군은 진무대제의 명을 받들어 무당산을 수호하고 있었는데, 요간이 정직하고 욕심이 없으며 제사가 경건한 것을 보고 대제(大帝)의 명을 청하여 특별히 신령함을 나타내 비를 내리러 온 것이라고 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뇌성과 단비가 즉시 천하에 가득 찼으나 다섯 선비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렇다면 오기룡군은 대체 어떤 신성(神聖)일까? 《무당복지총진집(武當福地總真集)》에 따르면, 진무대제가 무당산에서 수행을 원만했을 때 다섯 마리의 신룡이 “그를 부축하여 비승”하게 하여 옥황상제를 알현하게 했다고 한다. 그 후 오룡은 진무대제를 따라 무당산에 남아서 진무대제의 사신로서 큰 산과 인간 세상을 수호하게 되었다. 진무대제와 용군(龍君)이 비를 내린 성스러운 덕을 표창하기 위해 태종은 조서를 내려 요간이 비를 빌었던 곳에 오룡사(五龍寺)를 건립하게 했다. 이때부터 무당산은 최초의 황실 사묘(祠廟)를 갖게 되었다. 오룡사는 역대 제왕들이 비를 구하는 복지가 되었으며, “역대 공양의 응답이 메아리처럼 빨랐다.”

2. 3일간 법을 닦아(修法) 기우에 성공

호북 무한 홍산(洪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보통사(寶通寺)의 원래 이름은 동산사(東山寺)다. 남북조 시대에 창건되어 현재까지 1,5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 태종 정관 4년(서기 630년) 울지경덕이 악국공에 봉해져 태종의 명을 받들어 악주(鄂州 지금의 무창) 성을 쌓을 때, 동산사를 기초로 사찰을 확장하고 철불을 주조하여 미타사(彌陀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명태조 홍무 14년(서기 1381년) 주원장의 아들 초소왕(楚昭王) 주정(朱楨)이 무창에 번왕으로 부임하여 사산의 남쪽에 초왕부를 세울 때 홍산에 사찰을 중건했다. 명조 성화 21년(서기 1485년) 사찰의 이름을 ‘보통선사(寶通禪寺)’로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홍산보탑은 홍산 정상에 우뚝 솟아 있으며, 서기 1280년경 개산조사인 자인(慈忍)법사를 기념하기 위해 시주를 받아 세워졌다. 설계가 정교해 형초(荊楚) 지역의 으뜸으로 꼽힌다. 기저층의 홍예문을 통해 들어가 계단을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 꼭대기에서 멀리 바라보면 무한 삼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유 영역)

보통사 본원 뒤쪽에는 불교 밀종의 단성(壇城)인 법계궁(法界宮)이 있다. 이 밀교 건축은 민국 13년(서기 1924년) 지송(持松)법사가 보통사 방장으로 재임할 때 건립한 것이다. 2년 동안 지송법사는 매일 이곳에서 법을 닦고, 경을 강의하며, 계를 전하고, 관정을 베풀었는데 관정을 받은 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 밀법(密法)이 크게 흥성한 것은 오대 이후 없었던 일이다.

그해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 호북에 큰 가뭄이 닥치자,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지송법사는 공작명왕단(孔雀明王壇)을 설치하여 비를 빌었다. 법을 닦은 지 3일째 되는 날, 하늘에서 우릉우릉 뇌성이 들리더니 곧이어 폭우가 쏟아졌다. 모든 이들이 환호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인연을 맺고 관정을 받으러 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호북독군(湖北督軍) 겸 양호순열사(兩湖巡閱使)인 소요남(蕭耀南)은 지송법사의 기우제가 성공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거액을 기부하여 보통사 내에 법계궁, 유지당, 오륜탑을 건립하고 각종 법구를 갖추게 했다. 또한 사람을 시켜 여러 존상의 만다라를 그리게 하여, 홍산 보통사가 중국 진언종(眞言宗)의 근본 도량이 되어 실전된 천년의 당밀(唐密)을 회복하기를 기대했다.

민국 14년(서기 1925년) 가을, 동아불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송법사는 무한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2년 후 국내로 돌아왔을 때 보통사와 법계궁은 이미 포화 속에 파괴되었고, 밀법 단장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 고대 중화 대지에 왜 이토록 보기 드문 가뭄 날씨가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일까? 《후한서·지(志 )제십삼》에서는 “나라에 큰 가뭄이 드는 것은 원통한 옥사가 맺혔기 때문이다. 가뭄이란 양기가 옮겨가고 정기가 베풀어지지 않는 것이니, 군주가 절제를 잃고 사치와 음란함이 분수를 넘쳐 그 기운이 어지러워 하늘을 감동시키면 가뭄의 징조가 나타난다”라고 했다. 《회남자》에서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면 나라가 붉은 땅(가뭄)이 된다”라고 했다.

《서유기》 속 봉선군에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어 우물에 물이 없고 샘 바닥에 진액이 말라 백성 중 열에 일곱이 굶어 죽은 것도 군후(君侯)가 하늘에 무례를 범했기 때문이었다. 지극히 다행스럽게도 군후가 마음을 돌려 선을 향하고, 성 안의 남녀노소 모두가 불경을 외우고 경전을 읽게 했다. “정성이 지극하면 금석도 열린다”라고 했듯이, 마침내 하늘이 단비를 내려 가뭄이 해소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8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