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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동주 제후 쟁패 시기─춘추전국 (7)

—전국 칠웅 중 한나라 흥망사

심연

【정견망】

한(韓)나라의 흥망사

한나라는 전국시대에 세력이 가장 약한 나라였다. 동쪽으로는 위나라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진(秦)나라와 접했는데, 두 이웃 나라 모두 한나라보다 훨씬 강대했다. 한나라는 양쪽으로 적을 맞이하여 항상 침략을 받았다. 게다가 한나라는 경제 조건이 비교적 좋지 않고 인구가 적어 국력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객관적인 조건도 한나라가 약소했던 중요한 원인이었으나 주관적인 요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삼가분진(三家分晉)부터 한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약 200년 동안 한나라에는 기본적으로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긴 군주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라에는 일찍이 두 명의 걸출한 사상가이자 정치가가 나타났다. 그중 하나는 신불해(申不害)인데, 그는 소후(昭侯) 때 재상이 되어 정치 개혁을 실시했다. 그 결과 한나라는 “국내가 다스려짐으로써 제후들이 침략해 오지 않았고” 이 상태가 전후 15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는 한나라 역사상 가장 빛나는 한 페이지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걸출한 인물은 한비(韓非 흔히 한비자로 알려짐)인데, 이 한나라 공자는 당시 권력자에게 많은 개혁 건의를 했으나 모두 채택되지 않았다.

사마천은 한씨가 진(晉)나라에서 큰 공은 없었으나 조씨, 위씨와 같이 제후를 십여 대나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초 한궐(韓厥 한훤자)이 진(晉) 경공을 감동시켜 조씨 고아 조무(趙武)가 조씨의 작위를 계승하게 함으로써 정영과 공손저구의 대의를 이루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천하에 보기 드문 음덕(陰德)을 쌓은 결과라는 것이다.

* 한나라의 선조

한나라의 조상은 주나라 천자와 같은 성인 희씨(姬氏)다. 이후 그의 후손이 진(晉)나라를 섬기며 한원(韓原)에 봉해졌는데, 그를 한무자(韓武子)라 부른다. 한무자 이후 다시 3대를 전해 한궐(韓厥)이 있었는데, 그는 봉지의 명칭에 따라 한(韓)을 씨(氏)로 삼았다.

진경공(晉景公) 3년(기원전 597), 진나라 사구(司寇) 도안고(屠岸賈)가 난을 일으키려 하며 영공을 살해한 적신 조돈을 처벌한다고 내세웠다. 조돈은 이미 죽었기에 그의 아들인 조삭을 죽이려 했다. 한궐이 도안고를 저지했으나 도안고는 듣지 않았다. 한궐은 곧 조삭에게 알려 도망가게 했다. 조삭이 말하기를 “그대가 반드시 조씨의 후대가 끊기지 않게 해 준다면 내가 죽어도 유한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한궐은 그에게 약속했다. 도안고가 조씨를 멸할 때 한궐은 병을 핑계로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정영과 공손저구가 조씨 고아 조무를 숨겼는데 한궐은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진 경공 11년(기원전 589), 한궐은 극극(郤克)과 함께 800량의 전차 병력을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해 안(鞍)에서 제경공(齊頃公)을 격파하고 봉추보(逢醜父)를 포로로 잡았다. 이때부터 진나라는 육경(六卿)을 두었는데 한궐이 일경(一卿)의 자리에 올랐으며 호를 헌자(獻子)라 했다.

진 경공 17년, 경공이 병이 들었는데 점을 친 결과 대업(大業 진나라 개국공신)의 후손 중 마음이 순탄치 못한 자가 괴롭히는 것이라 했다. 한궐은 이에 진문공을 도와 패자가 되게 한 조최(趙衰)의 공로를 찬양하며 지금 조씨 가문에 향불을 이을 사람이 없음을 말하자 경공이 감했다.

경공이 “그에게 아직 후대가 있는가?” 물으니 한궐이 당시 조무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공은 이에 조씨 원래의 원래 봉읍을 다시 그에게 주어 조씨의 향불을 잇게 했다.

진도공(晉悼公) 7년(기원전 566), 한헌자가 노령으로 물러났다. 헌자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선자(宣子 한기)가 작위를 계승했다. 선자는 주읍(州邑)으로 옮겨 살았다.

선자가 죽고 그의 아들 정자(貞子 한불신)가 작위를 계승했다. 정자는 평양(平陽)으로 옮겨 살았다. 한정자가 죽고 그의 아들 간자(簡子)가 즉위했다. 한간자가 죽고 그의 아들 장자(莊子)가 즉위했다. 한장자가 죽고 그의 아들 강자(康子 한호)가 즉위했다.

한강자에 이르러 그는 조양자(趙襄子), 위환자(魏桓子)와 함께 지백을 물리치고 그의 영지를 나누어 가졌는데, 이들 세 가문의 영지는 더욱 커져 제후를 능가했다. 기원전 403년, 한나라는 조나라 위나라와 함께 주 왕실로부터 제후국으로 공인받았다.

나중에 한 문후(文侯) 2년(기원전 385), 한나라가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양성(陽城)을 점령했다. 또 송나라를 공격하여 팽성(彭城)까지 진격해 송나라 군주를 포로로 잡았다.

한 문후 7년, 제나라를 공격하여 상구(桑丘)까지 이르렀다. 정나라가 진(晉)나라를 배반했다.

문후 9년, 한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영구(靈丘)에 이르렀다.

10년, 한 문후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애후(哀侯)가 즉위했다. 한 애후 원년(기원전 376), 한나라가 조나라 위나라와 함께 진(晉)나라 나누어 가졌다. 애후 2년, 한나라가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신정(新鄭)으로 옮겼다.

* 한나라의 전쟁과 쇠망

한 소후(昭侯) 원년(기원전 358), 진(秦)나라 군사가 서산(西山)에서 한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소후 2년, 송나라가 한나라의 황지(黃池)를 빼앗았다. 위나라는 주읍을 빼앗았다.

소후 6년, 한나라 군사가 동주(東周)를 정벌해 능관(陵觀)과 형구(邢丘)를 차지했다.

소후 8년, 신불해(申不害)가 한나라의 재상이 되어 법가의 치국 도리를 시행하니 국내가 안정을 얻고 제후국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소후 22년, 신불해가 세상을 떠났다.

소후 24년, 진(秦)나라 군사가 한나라의 의양(宜陽)을 함락했다.

소후 25년, 가뭄이 들었는데 소후가 높은 성문을 지으라고 명했다.

초나라 대부 굴의구(屈宜臼)가 말했다.

“소후는 이 성문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때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때란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는 본래 순탄하거나 순탄치 못한 때가 있음을 말한다. 소후는 일찍이 순탄한 적이 있었으나 높은 성문을 건설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진나라가 의양을 함락했고 올해 가뭄이 들었는데 지금 백성의 다급함을 돌보긴커녕 도리어 더욱 사치하니, 이를 일컬어 ‘때가 어려울수록 사치스러운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라고 한다.”

26년, 높은 성문이 완성되었으나 소후도 세상을 떠났으니 과연 이 문을 나가지 못했다. 아들 선혜왕(宣惠王)이 즉위했다.

선혜왕 8년, 위나라 군사가 한나라 장군 한거(韓舉)를 격파했다.

선혜왕 11년, 군(君)의 칭호를 왕(王)으로 바꾸었다. 조나라 왕과 구서(區鼠)에서 만났다.

선혜왕 14년, 진(秦)나라 군사가 공격해 와 언릉에서 한나라 군을 격파했다.

선혜왕 16년, 진날 군사가 탁택에서 한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한나라 장령과 신차(申差)를 포로로 잡았다. 한나라가 다급해져 진(秦)나라와 화친하려 했다. 초나라는 진나라가 한나라를 합병해 초나라를 공격할까 걱정해 사람을 보내 한왕에게 후한 선물을 주며, 만약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면 초나라가 반드시 병사를 보내 돕겠다고 약속했다. 한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진나라와의 화친을 멈추고 국교를 끊었다. 진나라가 이에 크게 노해 병력을 증강해 한나라를 공격하니 두 나라가 대전했으나 초나라 구원병은 끝내 오지 않았다.

선혜왕 19년, 진(秦)나라 군사가 안문에서 한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했다. 한나라는 어쩔 수 없이 태자 창(倉)을 인질로 보내 진나라에 화친을 구했다.

선혜왕 21년, 한나라는 진(秦)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해 초나라 장수 굴개(屈丐)를 격파하고 단양(丹陽)에서 8만 초나라 군사를 참살했다. 이 해에 선혜왕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창이 즉위하니 이가 양왕(襄王)이다.

양왕 14년, 한나라가 제나라 위나라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해 함곡관에 이르러 주둔했다.

양왕 16년, 진나라가 황하 남쪽 땅과 무수(武遂)를 한나라에 돌려주었다. 양왕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구가 즉위하니 이가 희왕(僖王)이다.

희왕 3년(기원전 293), 공손희(公孫喜)를 보내 주(周)와 위(魏)의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진나라 한군 24만 명을 대파했다.

희왕 5년, 진(秦)나라 군사가 한나라의 완성(宛城)을 함락했다.

희왕 6년, 한나라가 무수 지대의 200리 땅을 진나라에 주었다.

희왕 10년, 진(秦)나라 군사가 하산(夏山)에서 한군을 격파했다.

12년, 한 희왕과 진소왕이 서주국에서 만나 진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가 패전하고 제 민왕은 망명했다.

14년, 한나라 왕과 진나라 왕이 두 주(周)나라 사이에서 만났다.

희왕 23년, 조, 위 두 나라가 한나라의 화양(華陽)을 공격했다. 한나라가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렸으나 진나라가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한나라 상국이 진서(陳筮)에게 말하기를 “사태가 급박하니 그대가 비록 병이 있으나 그래도 밤을 도와 진나라에 가주길 바라오”라고 했다.

진서가 진나라에 도착해 먼저 양후 위염을 만났다. 양후가 말하기를 “사정이 긴박해졌나 보군? 그래서 그대를 보낸 것이겠지”라 하자 진서가 “아직 그리 급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양후가 화를 내며 “그렇다면 그대의 군주가 어찌 그대를 사신으로 보냈겠는가? 그대들의 사신이 빈번히 오가며 모두 우리에게 위급함을 알리는데 그대는 와서 급하지 않다니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진서가 말하기를 “한나라가 정말 위급하다면 정책을 바꾸어 다른 나라를 따를 것인데 아직 위급한 때에 이르지 않았기에 제가 다시 온 것입니다”라고 했다.

양후가 말하기를 “그대는 진나라 왕을 만날 필요 없소. 지금 내가 즉시 발병하여 한나라를 구원하겠소”라고 했다. 8일이 지나 진(秦)나라 군이 도착해 화양산 아래에서 조군과 위군을 격파했다. 이 해에 희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환혜왕(惠枉)이 즉위했다.

환혜왕 원년(기원전 272), 한나라 군사가 연나라를 공격했다.

9년, 진(秦)나라 군사가 한나라의 형성(陘城)을 점령하고 분수 옆에 성을 쌓았다.

10년, 진(秦)나라 군사가 태항산에서 한나라 군을 공격하니 한나라 상당군수가 상당군을 들어 조나라에 투항했다.

17년, 진(秦)나라 군사가 한나라의 양성(陽城), 부서(負黍)를 점령했다.

24년, 진(秦)나라 군사가 한나라의 성고(成皐), 형양을 점령했다.

26년, 진(秦)나라 군사가 한나라의 상당 지역을 전부 점령했다.

29년, 진(秦)나라 군사가 한나라의 13개 성을 함락했다.

34년, 환혜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한왕 안(安)이 즉위했다. 한왕 안 5년(기원전 234),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해 한나라의 형세가 위급해지자 한비(韓非)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진나라는 한비를 머물게 했다가 나중에 그를 죽였다.

한왕 안 9년, 진(秦)나라 군사가 한왕 안을 사로잡으니 한나라의 영토는 전부 진나라에 귀속되어 영천군으로 설치되었다. 한나라가 마침내 멸망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