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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동주 제후 쟁패 시기─춘추전국 (8)

—전국 칠웅 중 서쪽 웅주(雄主) 진(秦)나라

심연

【정견망】

서쪽 웅주 진나라

춘추시기, 진(秦) 목공(穆公)은 나라를 잘 다스려 춘추 오패(五霸) 중 한 명이 되었다. 목공 이후 한동안은 군주가 빈번하게 교체되고 군신 관계도 조화롭지 못해 타국과의 전쟁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헌공(獻公)부터 시작해 효공(孝公), 혜문왕(惠文王), 소양왕(昭襄王) 등 이후의 진왕들은 모두 어진 인재를 널리 모집하고 적재적소에 임용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점차 강대해졌으며 최종적으로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목공이 세상을 떠난 후 태자 앵(罃)이 뒤를 이어 강공(康公)이 되었다. 이후 공공(共公), 환공(桓公), 경공(景公), 애공(哀公), 이공(夷公), 혜공(惠公), 도공(悼公)을 거쳐 여공공(厲共公)이 계승했다.

여공공 34년(기원전 443), 일식이 발생했다. 이때는 이미 전국 시기에 진입해 있었다. 여공공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 조공(躁公)이 계승했다.

다시 5대를 거쳐 헌공(獻公)이 즉위했다. 당시 진나라는 빈번한 군주 교체로 인해 진나라는 전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기간에 진나라 하서(河西 황하 서쪽 연안) 땅을 진(晉)나라에 많이 빼앗겼다.

점차 강성해지는 진나라

*진 통일의 예언

헌공은 즉위 후 가장 먼저 순장(殉葬) 제도를 폐지했다. 이어 변경을 안정시키고 역양(櫟陽)으로 천도했다.

헌공 4년 정월 경인일, 효공(孝公)이 태어났다.

11년(기원전 374), 주(周)나라 태사 담(檐)이 헌공을 알현해 말했다.

“주나라와 진나라는 본래 합쳐져 있었으나 나중에 진이 분리되었습니다. 갈라진 지 500년 후에 다시 합쳐질 것이며, 합쳐진 지 17년 후에 패권을 차지해 천하를 통일할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16년(기원전 369), 복숭아나무에 겨울 꽃이 피었다.

18년(기원전 367), 역양 하늘에서 황금 비가 내렸다.

21년(기원전 364), 진나라 군사가 위(魏)나라와 석문(石門)에서 교전해 위나라 병사 6만 명을 죽이자 천자가 무늬를 수놓은 예복을 보내 축하했다.

24년(기원전 361), 헌공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효공이 계승하니 이때 효공의 나이는 21세였다.

*효공의 개혁

효공이 즉위할 당시 천하의 형세는 황하와 효산 동쪽에 6개의 강대국이 있었으며, 진 효공은 제(齊) 위왕, 초(楚) 선왕, 위(魏) 혜왕, 연(燕) 도후, 한(韓) 애후, 조(趙) 성후와 병립했다. 회하와 사수(泗水) 사이에는 10여 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초나라와 위나라는 진(秦)나라와 접경해 있었다. 위나라는 타국을 방어하기 위해 정현(鄭縣)부터 낙하를 따라 북쪽으로 상군(上郡) 땅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있었다. 초나라 땅은 한중(漢中)에서 남쪽으로 파군(巴郡), 검중(黔中)을 차지했다. 이때 주 왕실은 더욱 쇠미해졌고 제후들 사이에는 무력으로 정벌하며 서로 삼키고 죽였다. 진(秦)나라는 벽지인 옹주(雍州)에 처해 있어 중원 각국 제후들의 맹회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제후들은 진나라를 이적(夷狄)처럼 대우했다.

이에 효공은 은덕을 널리 베풀고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며 전사를 모집했다. 논공행상의 법령을 명확히 하고 전국에 현사(賢士)를 모집하는 공고를 발표해 과거 목공의 정령(政令)을 다시 닦기를 희망했다. 위나라의 위앙(衛鞅)이 이 소식을 듣고 효공을 찾아왔다. 3년(기원전 359), 위앙은 효공에게 변법을 시행해 인구 증식 장려, 농업 중시 및 상업 억제, 세경세록 제도 폐지, 군공 장려, 호구 편성, 연좌법 시행 등을 권했다. 효공은 이 방법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감룡(甘龍), 두지(杜摯) 등이 동의하지 않아 쌍방이 이를 두고 논쟁했다. 결국 효공은 위앙의 신법을 채택했다. 백성들은 이에 대해 원망이 끊이지 않았으나 3년이 지나자 오히려 적응하게 되었다. 이에 효공은 위앙을 좌서장(左庶長)에 임명했다. 이 일은 《사기・상군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12년(기원전 350), 위앙은 함양성(咸陽城)을 건설하고 법령을 공포하는 문궐(門闕)을 세웠으며 함양으로 천도했다. 또한 여러 작은 마을을 합쳐 큰 현으로 만들고 현마다 현령(縣令) 1명을 두니 전국에 총 41개 현이 되었다. 전답을 개간하고 정전제 하에서 종횡으로 엇갈린 밭둑을 폐지했다. 이때 진나라 동쪽 경계는 이미 낙수(洛水)를 넘었다.

14년(기원전 348), 새로운 부세(賦稅) 제도를 제정하기 시작했다.

19년(기원전 343), 천자가 패주 칭호를 하사했다.

20년(기원전 342), 제후들이 모두 와서 축하했다. 진나라는 공자 소관(少官)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제후들과 봉택(逢澤)에서 회맹하며 천자를 알현했다.

22년(기원전 340), 진 효공은 위앙을 열후에 봉하고 상군(商君)이라 칭했으니 이때부터 그를 상앙(商鞅)이라고도 불렀다.

24년(기원전 338), 진 효공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혜문군(惠文君)이 계승했다. 즉의 첫해에 혜문군이 위앙을 죽였다. 본래 위앙이 처음 진나라에서 신법을 시행할 때 법령이 시행되지 않았는데 태자가 금령을 범했다. 위앙이 말하기를 “법령이 시행되지 않는 근원은 군주의 친족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군주께서 참으로 신법을 시행하려 하신다면 태자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태자에게 문신을 새기는 묵형을 가할 수 없으니 스승에게 대신 묵형을 가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다. 이때부터 법령이 순조롭게 시행되어 진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효공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가 즉위하자 진나라 종실의 대다수가 위앙을 원망했다. 위앙이 도망치자 반역죄로 다스려 결국 저잣거리에서 거열형(다섯 마리 말이 끄는 수레로 찢는 형벌)에 처해졌다.

*효공 이후의 패권 쟁탈전

비록 상앙이 처형되긴 했으나 신법이 폐지되지는 않았다.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 이후 전국 중기 7국 중 실력이 가장 강한 국가로 급부상했고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먼저 삼진(三晉)을 격파하고 위나라 하서(河西)의 모든 땅을 할양받았다. 이후 다시 서, 남, 북으로 강토를 확충해 기원전 4세기 말에는 강토의 크기가 초나라에 육박했다.

강대해진 진나라는 먼저 동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기원전 329년, 위나라 사람 장의(張儀)가 진나라에 와서 혜문군에게 연횡책(連橫策)을 올리며 위나라, 초나라와 친선할 것을 건의했다. 이어 위와 초의 협력 하에 한나라 신성과 의양을 공격하고 군대를 낙양까지 진격시켜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며, 마지막에 다시 돌아서서 위, 초의 영토를 탈취해 천하 제후들이 모두 서쪽 진나라를 섬기게 하여 왕업을 완성하자는 책략이었다. 이 책략은 혜문군의 의도와 부합하여 장의를 객경(客卿)으로 삼았다.

장의는 거듭 진나라 군사를 충동질해 위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다시 빼앗은 땅을 위나라에 돌려주어 위나라가 먼저 진나라를 섬기게 함으로써 상군(上郡) 15개 현을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이는 다른 동방 국가들에 큰 위협이 되었고 장의는 진나라 정승에 임명되었다.

기원전 323년, 위나라 장수 공손연(公孫衍)이 합종책(合縱策)을 행해 위, 한, 조, 연, 중산 5국이 서로 상대 군주를 왕으로 인정하게 함으로써 연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하게 했다. 그러나 곧 초나라가 군사를 보내 위나라를 치는 바람에 공손연의 책략은 좌절되었다.

위나라 정승 혜시(惠施)가 제, 초와 연합하려던 활동도 실패해 추방되었다. 위 혜왕은 제, 초의 공격을 받고 부득이 기원전 322년 장의를 위나라 재상으로 임용해 진, 한의 병력과 연합하여 제, 초를 치려 했다. 그러나 장의의 진정한 의도는 위나라가 먼저 진나라를 섬기게 하여 다른 제후국들이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위 혜왕은 장의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제, 초, 연, 조, 한 등 여러 나라의 지지 하에 장의를 쫓아내고 공손연을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318년, 공손연은 위, 초, 연, 조, 한 5국의 제1차 합종공진을 발동해 초 회왕을 종장(縱長)으로 삼았으나 진나라에 의해 궤멸되었다.

이후 진나라는 끊임없이 삼진을 공격했고, 파(巴)와 촉(蜀)이 서로 공격하는 기회를 이용해 군대를 내어 파촉 전역을 점령함으로써 부유한 후방 기지를 확보했다. 기원전 316년, 연왕 쾌(噲)는 왕위를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양도했다. 자지가 왕이 된 지 3년 만에 국내가 대란에 빠졌고 장군 시피(市被)와 태자 평(平)이 결탁해 자지를 공격하자 백성들이 반격해 태자 평과 시피를 죽이니 사망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 제 선왕은 틈을 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쳤는데, 제군이 평민을 대량 학살하자 연나라 사람들이 일어나 저항해 제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제나라의 힘이 여전히 상당함을 증명했다. 동시에 제나라는 초나라와 동맹을 맺어 진나라에 맞서는 힘을 더욱 강화했다.

초·제 동맹을 파괴하기 위해 기원전 313년 장의가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초나라가 제나라와 절교하게 했다. 초 회왕이 속은 것을 깨닫고 다시 군사를 발동해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 군사들이 단양(丹陽)에서 초나라 군을 물리치고 초나라 한중 땅 600리를 탈취했다. 장의는 다시 한, 조, 연을 설득해 진나라와 연횡하게 했다. 기원전 299년, 초 회왕은 다시 속아서 진나라에 갔다가 억류되어 결국 진나라에서 죽었다. 이때부터 초나라는 다시 떨치지 못했다.

진의 6국 멸망과 천하 통일

진나라는 효공 때 상앙 변법으로부터 진 혜왕, 무왕, 소왕을 거치는 100여 년 동안 비교적 공고한 중앙집권 통치를 건립했다. 또한 역대 진나라 왕들은 수리(水利)와 농업 생산을 매우 중시하고 군공을 장려했으며 군대 장비가 우수했다. 아울러 객경을 충분히 이용해 작전을 모의함으로써 제후국들 사이에서 싸울수록 강해졌고 마침내 동방의 여러 강적을 물리치고 천하 제일의 강국이 되었다.

효문왕이 즉위 1년(기원전 250) 만에 죽고 장양왕(莊襄王)이 즉위해 상인 출신 여불위(呂不韋)를 승상으로 임용했다.

2년에 군대를 거느리고 동주(東周)를 멸했으며 한나라의 성고, 형양을 탈취해 삼천군(三川郡)을 만들었다. 이듬해 진나라 군사들이 조나라를 치고 한나라를 정벌해 상당(上黨)에 태원군(太原郡)을 설치했다. 장양왕이 3년(기원전 247)만에 죽고 13세의 아들 진왕 정(政)이 계승하니 그가 바로 훗날의 진시황이다.

기원전 246년, 진왕 정(훗날의 진시황제)이 즉위했다. 그는 울료(尉繚), 이사(李斯) 등을 임용해 통일의 발걸음을 재촉했으며 금전으로 6국의 권신들을 매수해 6국의 배치를 교란하고 연달아 군사를 내어 동부 정벌에 나섰다.

진왕 정 5년(기원전 242), 진나라 군사가 위나라를 공격해 산조(酸棗) 등 20개 성을 빼앗고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진왕 정 6년(기원전 241) 초, 조, 위, 한 등 여러 나라의 제4차이자 마지막 합종 공동 공격을 분쇄했으며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진나라에 가장 격렬히 저항하던 위나라 신릉군을 제거했다. 이로써 강토가 넓고 병마가 강성한 진나라 앞에서 동방 6국 군주는 진나라의 군현 장관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진왕 정 9년(기원전 238), 노애의 난을 평정하고 영정(嬴政)이 직접 정권을 장악했다. 즉시 대군을 출동시켜 6국을 휩쓰니 이를 역사상 진의 6국 멸망이라 한다.

진왕 정 17년(기원전 230)에 한나라를 멸하고, 22년(기원전 225)에 위나라를 멸했으며, 24년(기원전 223)에 초나라를 멸하고, 25년(기원전 222)에 연나라와 조나라를 멸했다. 26년(기원전 221)에 제나라를 멸함으로써 마침내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다민족 중앙집권 국가를 건립했으며 역사는 새로운 한 페이지를 넘겼다.

총술:전국시대는 이처럼 진나라의 천하 통일로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다. 후세 사가들은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인을 계속 탐구해 왔다. 널리 알려진 원인들 외에 아마도 이것은 역사의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 역사상 나타난 통일 왕조는 분열 시기보다 훨씬 많았다. 모든 것은 안배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참고서적
1、《사기(史記)》, 사마천, 서한
2、《여저중국통사(呂著中國通史)》, 여사면(1884-1957), 화동사대출판사
3、에포크타임스와 정견망의 관련 문장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