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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인황(聖祖仁皇)——강희대제 전기 5

【강희대제】 친정(親政) 초기 정치 조치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강희대제는 조상들과 전조(前朝 명조)의 전통을 따라 일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성세를 창건할 기틀을 닦았다. 강옹건 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한무제(漢武帝)가 연호를 제정한 이래 역대 황제들은 즉위하거나 국가의 대사가 있을 때 ‘개원(改元)’을 했다. 즉 새로운 연호를 세우는 것이다. 연호는 대부분 경사롭고 상서롭거나 진취적이고 흥성한다는 뜻을 담아, 한 시대의 제왕이 국가와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담는다.

청조 초기의 연호들을 살펴보면, 태종 홍타이지가 처음 건국하며 ‘숭덕(崇德)’이라는 연호를 만들었고, 세조 복림은 ‘순치(順治)’로 개원했으며, 성조(聖朝) 황제의 ‘강희(康熙)’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기서 한 왕조가 일어나 흥성해지는 변천 과정을 볼 수 있다. 강희제는 친정 이후 실제로 조상과 전조의 전통을 계승해 일련의 조치를 취하며 성세를 창건할 기반을 다졌다.

어문청정(御門聽政)

“짐은 30년 동안 매일 아침 어문청정을 하며 여러 신하를 만나 시정의 득실을 묻는 것을 습관으로 삼아 왔다.” —— 강희제

(출처: 짐은 30년 동안 매일 아침 정사를 돌보고 여러 신하들을 면담하며 득(得)과 실(失)을 자문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 《강희조실록(康熙朝實錄)》)

강희제 친정 후, 건청문에서 ‘어문청정(禦門聽政)’하는 전통을 이었다. 그림은 건청문 편액이다.(Shizhao/Wikimedia Commons 제공)

자금성 내정에는 ‘건청문(乾淸門)’이라는 우뚝 솟은 화려한 정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야 강희제의 침전인 건청궁(乾淸宮)에 이를 수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궁문의 특별함은 위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청나라 천자의 ‘어문청정’ 역사를 지켜봤다는 점이다.

어문청정이란 황제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직접 건청문에 나와 정무를 듣고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아침 조회(早朝)’을 뜻한다. 이는 명성조(明成祖 영락제) 주체(朱棣)가 정한 제왕의 정사 처리 방식인데 차이라면 장소만 태화문(太和門)이었을 뿐이다.

[역주: 태화문은 외조의 정문으로 자금성 남쪽의 공개적인 통치공간이라면 건청문은 내정으로 들어가는 정문으로 황제의 거처와 가까워 정무를 보기에 편리하다.]

이처럼 청이 명의 제도를 계승하는 것은 순치제부터 시작해 강희제 시기에 정점에 달했다. 이후의 황제들은 점차 원명원(圓明園)에서 정사를 돌보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의 상상을 깨는 일일 수도 있는데, 명청 시대 황제와 대신들이 비바람과 추위, 더위를 피하지 않고 궁궐 대문 입구에서 조회를 한 것은 그들이 매우 근면하게 정사에 임했음을 입증한다.

강희제의 청정(聽政 신하들의 보고를 듣고 정사를 살펴 처리하는 일)은 그가 친정을 선포한 날 시작되었으며, 이후 어문청정은 그가 정무를 처리하는 큰 특징이 되었다. 순행을 나갈 때를 제외하고 강희제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궁문 앞에 나타나 여러 신하들과 국사를 상의했다. 다만 극심한 무더위에는 장소를 일시적으로 서원(西苑)의 영대문(瀛台門)으로 옮기기도 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대학사(大學士 역주: 명청 시기에는 재상 제도가 없지만 실질적인 재상 역할을 담당), 학사, 구경(九卿), 첨사(詹事) 등의 관리들은 오문(午門)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중좌문(中左門)을 지나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건청문(乾淸門) 밖에서 알현을 기다렸다. 보통 봄과 여름 아침에는 6시, 가을과 겨울 아침에는 7시에 강희제가 반드시 건청문에 임해 정사를 다스렸다. 이때 관리들이 줄지어 들어가 차례로 보고했다. 보고가 끝나면 대학사와 학사들이 다시 ‘절본(折本)’을 올려 어지(御旨)를 청했다. 절본이란 강희제가 비답을 내리고 모서리를 접어 표시해 관리들에게 다시 논의하게 한 상소문을 말한다.

청정 과정에서 강희제는 신하들과 직접 대화하며 즉시 정무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렸다. 친정 초기 2년은 아직 오배가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라 강희제의 뜻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당시 그의 청정은 주로 오배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보좌 대신 시대에는 관리들의 상소문을 이튿날 보좌 대신 등 소수 인원이 내정(內廷)에서 결정했다. 이렇게 되면 대학사가 참여할 수 없었고 명조 내각 대신들이 가졌던 표의(票擬)나 장주(章奏) 등 황제에게 의견을 제시할 권한이 없었기에 오배가 권력을 농단하기 쉬웠다. 강희제는 청정을 시작하면서 내정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조정의 뜻있는 선비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동시에 관리들의 재능과 품행을 직접 살필 수 있었다.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달려 있다고 하듯, 강희제의 청정은 그가 아래의 실정을 파악하고 정책을 추진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나중에 그는 청정 절차를 개선하라는 어지를 여러 차례 내려 군신이 일체가 되어 정사에 힘쓰도록 했다. 동시에 관리들의 실제 상황을 고려해 융통성을 발휘하면서도 자신은 매일 청정에 임했다.

신하들은 황제의 노고를 안타까워하며 청정 시간을 매일에서 3~5일에 한 번으로 조정하자고 여러 번 건의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정성과 근면이 중요하며,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하고 중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治國之道,重要的是精誠勤勞,善始善終,不應有間斷)”[1]라고 여겼다. 정사에 힘쓰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강희제는 자신의 행동으로 50년 넘게 견지했다.

내각 재건

강희제는 내삼원(內三院)을 내각(內閣)으로 개편하라는 명을 내렸다. 대학사와 학사의 관직명, 한림원의 관제 등은 모두 순치 15년의 옛 사례를 참고하게 했다.

(출처: 내삼원을 고쳐 내각으로 삼으라 명했다. 대학사와 학사의 관직명 및 한림원 아문 등의 관직 설치는 순치 15년의 예에 따라 논의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 《강희조실록》)

강희제는 멀리는 명조의 제도를 계승하고 가까이는 조상을 본받아 내각 제도를 재건했다. 그림은 당 이소도(李昭道)의 《궁전도엽(宮殿圖頁)》이다.(공유 영역)

빛나는 제업(帝業)은 보좌하는 대신들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강희제의 보좌 시대가 끝난 후에도 조정에는 천자를 도울 효율적인 중추 기구가 필요했다. 이때 강희제는 멀리는 명조의 제도를 따르고 가까이는 선조의 법을 본받아 내각 제도를 재건했다.

내각은 명청 시대 특유의 중추 기구다. 명 태조가 중서성을 없애고 승상을 폐지한 후 후대 황제들은 한림원(翰林院)을 바탕으로 내각을 구성했다. 한림원이란 당조에서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예능에 정통한 인사들이었으나, 당현종 이후에는 조서를 기초하는 문학 시종관(侍從官)으로 변했다. 이백도 한림원 학사를 지낸 바 있다.

명조는 한림원 안에 전각(殿閣) 대학사를 두었는데 문연각(文淵閣) 대학사, 무영전(武英殿) 대학사 등의 칭호를 가졌으며 황제의 비서에 해당한다. 영락제 때 대학사들이 정무에 참여하기 시작하며 ‘내각’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그중 수석을 ‘수보(首輔)’라 불렀다. 이들은 표의권(票擬權)을 가져 그 권력이 승상에 비견되었다.

[역주: 표의(票擬)란 명청 시기 내각 대학사들이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에 대해 미리 초안을 작성하여 답변 권고안을 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재상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황제에게 과도한 업무량이 부과됨에 따라 이를 처리하기 위한 방법. 대부분의 경우 황제가 그대로 비준하거나 일부 수정해서 결정을 내렸다.]

청조에 이르러 홍타이지는 천총(天聰) 3년(1636년), 문서와 역사 편찬 등을 담당하던 문관을 내삼원, 즉 내국사원(內國史院)·내홍문원(內弘文院)·내비서원(內秘書院)으로 개편하고 만주족과 한족 대학사를 두어 정사를 논의하게 함으로써 내각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당시 정사는 여러 왕과 베이러들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내삼원은 주로 왕들의 권력을 견제하고 황권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순치제 때도 주로 내삼원 체제를 유지하며 명조를 본떠 한림원 및 전각 대학사 관직을 두기도 했다.

강희 8년(1669년) 오배를 타도한 후 강희제는 황권의 상징인 ‘비홍권(批紅權)’을 회수하고 내삼원 대학사 인사를 조정했다. 그해 말 어사 이지방(李之芳)이 상소를 올려 대학사가 입직하는 옛 제도를 회복하자고 건의했다. 9년 8월, 강희제는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내삼원을 내각으로 고치고 한림원 설립 및 대학사, 학사의 관직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 10월에는 만주족과 한족 전각 대학사들을 임명했다. 12월에는 한림원의 시독학사(侍讀學士), 시강학사(侍講學士) 등 각급 관리를 임명하며 정식으로 한림원 기구를 세웠다.

강희제 시기 내각 대학사는 상소문을 대신 읽고, 비답(批答)의 초안을 작성하며, 정사에 참여하고, 사료 편찬 등을 담당하며 중추 기구의 역할을 수행했다.

평소 한문화(漢文化)를 흠모했던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의 교류도 매우 중시했다. 내각 인원 비율에서 그는 만주족, 북방 한인, 남방 한인을 같은 비율로 선발해 대학사로 삼으려 노력했다. 그들이 조정에서 재능을 펼치게 함으로써 각 민족 백성의 복지를 더 잘 살피려 한 것이다. 이로써 국가 중추 기구는 날로 건전해졌고 매일의 어문청정 또한 더 높은 효율과 실질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경연과 일강(日講)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끊임이 없어야 수확이 있다. 앞으로는 춥거나 덥거나 상관없이 강학 활동을 멈추지 마라.” —— 강희제

(출처: 황상이 유지를 내리길 “학문의 도는 반드시 간격이 없어야 도움이 된다. 이후로는 추위와 더위 때문에 강학을 중단하지 말라”고 하셨다. 《청성조실록(清聖祖實錄)》)

《서현경환적도(徐顯卿宦跡圖)·경연진강(經筵進講)》에서 표현한 명 신종(神宗) 경연 장면.(공유 영역)

한무제가 유술(儒術)을 숭상한 이래 전통 유학은 중화민족의 주류 문화가 되었다. 역사상 가장 근면하고 박식한 황제였던 강희제는 유년에 이미 한문화(漢文化), 특히 유학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즉위 초기 그는 장(張) 씨와 임(林) 씨 두 내시에게 구독(句讀 문장을 끊어서 읽은 법)을 배우며 입문했다. 이 두 사람은 명조의 독서인(讀書人)들이었는데 강희제를 가르칠 때 유가 경전 해설을 위주로 했고 나중에는 시와 문장도 가르쳤다. 이후 한림 심전(沈荃)이 명인(明人 명조 사람) 동기창(董其昌)의 글씨체에 능해 강희제의 서예 스승이 되었다.

강희제는 정무를 처리하는 틈틈이 한정된 여가 시간을 쪼개어 학문에 전념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독서하고 밤에는 반복해서 생각하며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심지어 과로로 피를 토하면서도 쉬지 않았다. [2] 덕분에 강희제는 짧은 시간에 학문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서예 실력도 뛰어났다.

나이가 들면서 강희제는 학업을 높여줄 더 큰 학자들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제왕의 학문에 전념하는 경연(經筵)과 일강(日講) 활동이 청조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경연이란 황제가 경사(經史)와 치국의 도리를 논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어전 강연석으로, 대신이 황제에게 강의하며 군신이 함께 경전을 연구하고 정사를 토론하는 학습 제도다.

경연 제도는 한(漢)에서 시작되어 송(宋)에서 완성되었으며 명청 시대에도 그 제도를 따랐다.

경연에는 대경연과 소경연이 있는데, 대경연은 주로 봄과 가을에 성대하게 열렸다. 소경연인 일강(日講)은 더 빈번하게 열려 실용성을 중시했는데 이것이 일상적인 수업이었다. 강희제 시기에 신하들이 경연을 열자고 여러 차례 건의했다. 강희 9년부터 강희제는 아침에 어문청정을 마치고 진시(辰時)에 홍덕전(弘德殿)에 임해 강관(講官)의 강의를 들었으며 대경연 전례(典禮)도 준비했다.

강희 10년(1671년) 이른 봄 2월, 강희제는 한림과 내각 학사 중에서 10여 명의 만한(滿漢 만주족과 한족) 경연 강관을 선발해 태화전(太和殿)에서 성대하고 장엄한 경연 대전을 거행했다. 이후 대전은 매년 봄가을에 정례적으로 열렸고 소경연은 격일로 진행되었다. 이들 제왕의 스승들은 유가 경전과 역대 사실(史實)에 정통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성군을 보필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 옛일을 들어 오늘을 비유하고 정사와 결합해 정성껏 강희제를 가르쳤다.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강희제는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자치통감》 등 고전의 정수를 빠르게 파악했다.

더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 강희제는 12년(1673년) 2월 어지를 내려 과거의 관례를 깨고, 황제의 순행 시기를 제외하고는 매일 강학하게 하여 ‘일강’이 명실상부한 활동이 되게 했다. “하늘의 운행이 굳세니(天行健) 군자는 이에 자강불식(自强不息)한다”는 《주역》의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강희제는 추위와 더위, 바쁜 정무 속에서도 제때 건청궁(乾淸宮), 홍덕전(弘德殿) 또는 무근전(懋勤殿)에 나타나 강관들에게 겸허히 배우며 소중한 오전 시간을 보냈다.

강희제는 강학의 실효성도 매우 중시했다. 예를 들어 강관이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방식은 관례를 따를 뿐 학문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아 군신이 서로 소통하는 방식으로 개선했다. 14년(1675년) 4월, 그는 강관들에게 “앞으로 강의가 끝난 뒤에는 짐도 경사(經史)를 해설하리니, 이처럼 서로 토론해야 실학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3]

그는 또한 강학의 내용도 중시해서 공허한 담론을 경계했다. 15년(1676년) 2월에는 강관들에게 “강학 중 공덕(功德)을 찬송하는 부분은 너무 많이 논하지 말고 실질적인 학문에 도움이 되는 내용만 골라 강의하라”고 명시했다. [4] 16년에 이르러 강희제의 학문이 날로 깊어지자 강의 방식이 황제가 먼저 설명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정성껏 공부한 덕분에 강희제는 마침내 고금에 두루 통하고 문재(文才)가 뛰어난 제왕이 되었다. 그는 평생 천여 수의 시와 백만 자가 넘는 저술을 남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또한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적인 태도는 청대(淸代) 문인들의 탐구 정신을 고취했고 문화적 번영을 촉진했다.

남서방(南書房) 설치

“짐이 평소 글을 읽고 글씨를 연습함에 있어 가까운 시종 중에 박식하고 글씨에 능한 자가 부족해 강론할 때 제대로 응대하지 못함을 느낀다. 이에 한림원 중에서 박식하고 글씨에 능한 자 두 명을 선택해 곁에서 모시게 하여 함께 문학의 의리를 연구하고자 한다.” —— 강희제

(출처: 짐이 수시로 책을 보고 글씨를 쓰나 근시(近侍) 중에 박식하고 글씨에 능한 자가 없어 강론할 때 응대하지 못한다. 이제 한림 내에서 박식하고 글씨에 능한 자 두 명을 선발해 늘 곁에 머물며 문장의 뜻을 연구하게 하고자 한다. —— 《강희기거주》)

砚台 毛笔 古代书房 文房四宝

강희제가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건청궁 서남쪽 즉 자신이 예전에 독서하던 곳을 업무 공간으로 개설하고 한림 문신들을 선발해 입직하게 하니, 이것이 곧 남서방(南書房)의 개설이다.(HelloRF Zcool/shutterstock)

강희제 시기에는 한족(漢族) 사대부들로만 구성된 특수한 내정 기구가 있었다. 청초의 유명한 문인 웅사리, 진정경(陳廷敬), 왕사정(王士禎), 사신행(查慎行) 등이 이곳에 입직했다. 그리하여 이곳은 청나라 조정에서 인재가 구름처럼 모이는 곳이 되었고, 한인(漢人)들은 이곳에서 근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 이름은 ‘남서방’으로, 듣기에는 풍아(風雅)하기만 하고 위엄은 부족해 보이지만 강희제 곁에서 가장 중요한 자문과 의사결정을 담당한 기구였다.

남서방은 늦어도 강희 10년 이전에는 창설되었으며 강희제 친정 초기의 중요한 조치였다. 《청사고》 서예가 심전의 기록에 “강희 10년에 시강(侍講)을 제수받고 남서방에 입직했다”는 내용이 있다. 강희제의 이러한 행보는 만주 귀족의 구례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누르하치 시기부터 종실 자제들을 위한 ‘서방’을 두고 문재(文才)가 있는 자를 뽑아 학업을 돕고 문서를 관리하게 했다. 홍타이지는 서방을 문방(文房)으로 고치고 유생들을 뽑아 공식 기구로 삼았다. 순치제는 서방을 따로 두지는 않았으나 궁중에 공무를 보는 곳을 마련해 한림원 관원들이 교대로 근무하며 수시로 자문에 응하게 했다.

강희제는 친정 직후 선조의 모범을 이어받아 건청궁 서남쪽, 즉 자신이 예전에 공부하던 곳을 집무 구역으로 개방하고 한림 문신들을 선발해 입직시키니 이것이 남서방의 시작이다. 남서방 관원들은 처음에 문학 시종으로서 수시로 황제 곁에서 고문에 응하고 경사와 시문을 논했으며, 나아가 황제의 조칙 초안을 작성하고 기밀 업무에도 참여했다.

남서방 관원은 정해진 인원이나 편제가 없었으나 강희제가 매우 중시한 근신들이었다. 강희 16년(1677년) 10월, 남서방은 새로운 발전을 맞이했다. 강희제는 대학사 늑덕홍(勒德洪)과 명주(明珠)에게 “짐이 요즘 글을 읽고 글씨를 쓸 때 근시 중에 박식하고 글씨에 능한 자가 부족함을 발견했다”며 한림 중에서 현재를 선발해 늘 곁에서 문학을 논하게 하라고 명했다. 더욱이 강희제는 자금성 안에 저택을 하사해 은총을 표시했다. 이후 시강학사 장영(張英)과 내각학사 고사기(高士奇)가 남서방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어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5]

남서방 관원의 선발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강희제의 말대로 한림원이나 유학을 가르치던 문신 중에서 발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능이 뛰어난 선비를 직접 발탁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해녕(海寧)의 사신행(查慎行)은 역학에 정통하고 시로 명성이 높아 특별히 부름을 받았고, 진원룡(陳元龍)은 서예 실력을 인정받아 남서방에 입직했다.

전반적으로 남서방 관원들은 천자의 근시이자 스승이며 친구, 나아가 심복이었다. 강희제는 그들을 매우 예우하고 중용했다. 예를 들어 장영은 입직한 지 3년도 안 되어 한림원 학사 겸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 승진했고, 나중에 한림원 장원학사(掌院學士 한림원 책임자), 예부상서가 되어 남서방을 총괄했다. 강희제는 그를 두고 “장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경하고 신중하니 옛 대신(大臣)의 풍모가 있다”라고 찬탄했다. [6] 장영이 퇴임한 후에도 강희제는 여러 차례 그에게 지방 관리를 다스리는 법을 자문했다.

남서방의 높은 위상은 만한(滿漢)의 벽을 허문 강희제의 넓은 흉금과 문인(文人) 및 심오한 한문화에 대한 경의를 보여준다. 임금이 예로써 신하를 부리면 신하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법이다. 천자가 이처럼 성명(聖明)하니 그의 주변에는 마치 온갖 강물이 바다로 모이듯 덕과 재능을 겸비한 충신(忠臣)과 현사(賢士)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충성스럽게 강희제를 따르며 청조의 전성기를 함께 열어 나갔다.

주석:

[1] 《강희조실록》 권115: 강희 23년 5월 병자조.

[2] 《강희교자정훈격언》 제3장.

[3] 《강희조실록》 권54: 강희 14년 4월 신해조.

[4] 《성조인황제성훈》 권5: 강관 라사리, 서원문에게 내린 유지에 “이후 경연에서 강의할 때 칭송하는 부분은 과도한 미사여구를 쓰지 말고 오직 실학에 보탬이 되는 절실하고 요긴한 내용만 취하라”고 하셨다.

[5] 《강희기거주》 강희 16년 10월 20일 계해조.

[6] 《청사고》 권267 참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5/n1213560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