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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단명한 통일제국 진조(秦朝) (1) 상

–(기원전 221년—기원전 207년)

심연

【정견망】

웅장하고 격렬했던 춘추전국시대라는 역사의 한 막이 후세 사람들에게 무한한 추억을 남긴 채 마침내 막을 내렸다. 중국 역사상 지속 시간이 가장 길었던 주(周) 왕조 역시 그에 따라 시간의 터널 속으로 사라졌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육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중앙집권 국가를 건립했다. 진왕 영정(贏政)은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칭했는데, 이는 진조(秦朝)의 통치가 만년 동안 지속되기를 바라는 의미였다. 진시황은 새로운 왕조를 세운 후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일련의 중대한 조치를 실시하여 정권을 공고히 했다. 그가 제정한 일련의 국가 관리 법령, 제도, 방침, 정책 등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진나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이기도 했다. 유럽인들이 지금까지 중국을 ‘China’라고 부르는 것은 ‘진(秦 중국어 발음으로 친Qin)’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순식간에 이 전무후무하게 강력했던 왕조는 불과 15년 동안만 존재했을 뿐이며, 여기저기서 일어난 봉기의 파도 속에서 붕괴되었다. 사마천은 《사기·진시황본기》에서 서한의 정치평론가 가의(賈誼)가 진나라 멸망에 대해 내린 견해를 인용했다. “인의(仁義)를 베풀지 않아 공수(攻守)의 형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참으로 믿을 만한 말이로다!

진시황의 중국 통일

진시황제는 진 장양왕(莊襄王)의 아들이다. 장양왕은 일찍이 진소왕(秦昭王)의 손자 신분으로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는데, 여불위(呂不韋)의 첩을 아내로 맞아 시황을 낳았다. 진시황은 진소왕 48년(기원전 259년) 한단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후 이름을 정(政)이라 했고 성은 조(趙)씨였다.

그가 13세 되던 해에 장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계승해 진나라 왕이 되었다. 이때 진나라의 강역은 이미 파군, 촉군, 한중을 병합했고 완현(宛縣 지금의 남양)을 넘어 초나라의 영도를 점령하여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북쪽으로는 상군(上郡) 동쪽을 거두어 하동(河東), 태원(太原), 상당(上黨)군을 점령했고 동쪽으로는 형양(滎陽)에 이르러 서주와 동주 두 나라를 멸망시키고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했다. 여불위가 상국이 되어 10만 호를 봉 받았으며 봉호는 문신후였다. 그는 빈객과 유세객들을 불러 모아 이를 빌미로 천하를 병합하려 했다. 이사가 사인(舍人)이 되었고 몽오(蒙驁), 표공(麃公) 등이 장군이 되었다. 진왕은 나이가 어리고 막 왕위에 올랐기에 국사를 대신들에게 위탁했다.

진시황 원년(기원전 246년)부터 시작해 진나라는 대외 정벌 전쟁을 계속하여 선후로 한, 위, 조, 위, 초나라와 교전하며 이들 국가의 일부 성지(城池)를 차례로 점령했다. 기원전 239년, 진왕 정의 동생 성교가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할 때 돈류(屯留)에서 모반을 일으켰으나, 결국 부하 군관들이 모두 살해되고 그곳 백성들은 임조(臨洮)로 옮겨졌다. 모반을 토벌하러 왔던 장군 벽(壁)이 죽었고, 나중에 돈류(屯留)의 병사 포확이 다시 모반했으나 결국 전사했으며 죽은 뒤 시체에 매질을 당하는 혹형을 받았다. 그해 황하의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뭍으로 올라오는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기원전 238년, 진왕은 성인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가관례(加冠禮)를 거행하고 정식으로 친정을 시작했다.

기원전 237년, 상국 여불위가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대량(大梁) 사람 위료(尉繚)가 진나라에 와서 진왕에게 권유했다.

“진나라처럼 강대한 국력을 바탕으로 하면 제후들은 마치 군현의 수령과도 같습니다. 다만 산동의 각국이 합종하여 연합해 예기치 못한 습격을 가해올까 걱정될 뿐이니, 이것이 바로 옛날 지백, 부차, 민왕(泯王)이 멸망한 원인입니다.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말고 각국의 권귀(權貴)와 대신들에게 선물을 보내 그들을 이용하여 제후들의 계획을 어지럽히십시오. 이렇게 하면 불과 30만 금을 손해 보겠지만 제후들은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진왕은 그의 계책을 따랐으며 위료를 만날 때 평등한 예절로 대우하고 의복과 음식도 위료와 같게 했다. 위료는 영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진왕이라는 사람은 코가 높고 눈이 크며 매의 가슴에 승냥이 목소리를 가졌으니 인덕(仁德)이 부족하고 호랑이와 이리의 마음을 가졌다. 곤궁할 때는 남에게 겸손하기 쉬우나 뜻을 얻었을 때는 쉽게 사람을 잡아먹을 자다. 나는 평민임에도 그가 나를 대할 때 늘 저토록 겸손하니, 만약 진왕이 천하를 얻으려는 염원을 실현한다면 천하 사람들은 모두 노예가 될 것이다. 나는 그와 오래 사귈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도망가기로 결심했으나 진왕에게 발각되어 만류당했고, 진나라의 최고 군사 장관이 되었다. 이사가 국정을 장악했다.

기원전 236년부터 230년까지 진군(秦軍)은 선후로 업읍(鄴邑), 조나라 평양읍(平陽邑), 낭맹(狼孟)을 공격했고 기원전 230년에는 한나라를 멸망시켜 그곳에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했다.

기원전 229년, 진나라가 다시 대거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를 공격하여 정형을 점령하고 한단성을 포위했다. 기원전 228년, 조왕이 포로로 잡혔다. 진왕 영정은 한단에 와서 당초 자신이 조나라에서 태어났을 때 외가와 원한이 있던 자들을 찾아내 모두 생매장했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종족 수백 명을 이끌고 대지로 가서 스스로 대왕(代王)이 되어 동쪽으로 연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상곡군(上谷郡)에 주둔했다.

기원전 227년,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나라 군대가 연나라까지 쳐들어올 것을 걱정하여 형가를 보내 진왕을 암살하려 했다. 암살은 성공하지 못했고 진왕은 형가의 사지를 찢는 형벌을 내려 대중에게 보인 후 대장을 파견해 연나라를 공격했다. 연나라와 대나라가 군사를 내어 진군에 맞섰으나 진군은 역수(易水) 서쪽에서 연군을 격파했다. 기원전 226년, 진왕이 원군을 증파하여 마침내 연나라 태자의 군대를 격파하고 연나라 계성(薊城)을 점령하여 연나라 태자 단의 머리를 얻었다. 연왕은 동쪽으로 요동군의 땅을 거두어 그곳에서 왕이라 칭했다.

기원전 225년, 진군이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의 모든 땅을 얻었다.

기원전 224년, 진왕이 다시 군사를 보내 초나라를 공격하고 초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진왕이 순유하여 영도와 진현에 이르렀다.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이 창평군(昌平君)을 옹립하여 초왕으로 삼고 회하 이남에서 진나라에 반대했다.

기원전 223년, 왕전과 몽무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군을 격파하니 창평군이 죽고 항연 역시 자결했다.

기원전 222년, 진나라가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 요동군을 공격하여 연왕 희희(姬喜)를 사로잡았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나라를 공격하여 대왕 조가(趙嘉)를 포로로 잡았다. 이어 초나라 장강 이남 일대를 평정하고 월족의 수령을 투항시켜 회계군을 설치했다. 5월, 진나라는 다섯 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축하하기 위해 천하에 술자리를 갖는 것을 허락했다.

기원전 221년, 제왕 전건(田建)과 그의 상국(相國) 후승(後勝)이 군대를 보내 제나라 서부 국경을 방어하며 진나라와의 왕래를 끊었다. 진왕은 장군 왕분(王賁)을 파견해 연나라를 거쳐 남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제왕 전건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육국을 통일했다.

중국 통일 후 채택한 조치

* 제호(帝號) 수정—‘시황’의 유래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진왕 영정은 승상과 어사에게 명하여 제호를 상의하게 하여 ‘공업을 현양하고 후대에 전하게’ 했다. 승상 왕관, 어사대부 풍겁, 정위 이사 등은 모두 말했다. “‘고대에 천황이 있고 지황이 있으며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태황이 가장 존귀합니다.’ 그러니 왕을 ‘태황’이라 칭하십시오. 교령을 발표하는 것을 ‘제서(制書)’라 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을 ‘조서(詔書)’라 하며 천자가 스스로를 칭할 때는 ‘짐(朕)’이라 하십시오.”

영정이 말했다. “‘태’ 자를 빼고 ‘황’ 자를 남기며 상고 시대 ‘제(帝)’의 위호를 채용하여 ‘황제(皇帝)’라 칭할 것이며 나머지는 그대들이 논의한 대로 하라.”

그리하여 장양왕을 추존하여 태상황이라 했다. 또 명을 내려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상고 시대에는 호(號)만 있고 시(諡)가 없었으며 중고 시대에는 호가 있고 죽은 뒤 생전의 품행과 사적에 따라 시호를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자식이 아버지를 논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하는 것이니 매우 무의미하다. 나는 이런 방식을 취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시법(諡法)을 폐지한다. 나는 시황제라 불릴 것이며 후대는 나로부터 시작하여 2세, 3세부터 만세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전해져 끝이 없게 하라”고 했다.

* 역법과 복색 수정

진시황은 수, 화, 목, 금, 토 오행의 상생상극과 종시(終始)순환 원리에 따라 추구하여, 주나라가 화(火)덕의 속성을 가졌다고 여겼다. 진나라가 주나라를 대신하려면 주나라의 화덕(火德)이 이기지 못하는 수덕(水德)을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지금은 수덕이 시작되는 해이므로 천의에 순응하기 위해 한 해의 시작을 변경해야 한다고 했다. 신하들이 조회하고 하례하는 날을 모두 10월 초하루로 정했다. 의복, 부절, 깃발의 장식은 모두 검은색을 숭상했다.

수덕은 음(陰)에 속하고 《역》 괘에서 음을 나타내는 기호인 음효를 ‘6’이라 하기에 수치를 10을 종극으로 하던 것에서 6을 종극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부절과 어사가 쓰는 법관은 모두 6촌으로 규정했고 수레의 폭은 6척, 6척을 1보로 하며 수레 한 대에는 말 6필을 매게 했다. 황하의 이름을 ‘덕수(德水)’로 고쳐 수덕의 시작임을 표시했다. 모든 일은 법률에 따라 결정하며 강인하고 엄격하게 하고, 인애나 은혜, 화선(和善), 정당한 도리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가혹하게 여겨야 비로소 오덕 중 수가 음(陰)을 주관하는 명수(命數)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이에 법령을 지극히 엄혹하게 하여 법을 범하면 오래도록 사면받을 수 없게 했다.

* 삼공구경(三公九卿) 제도 설립

진시황은 자신 아래에 삼공구경을 두어 중앙 정부를 구성했다. 삼공은 승상(丞相),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말한다. 삼공은 서로 제약하여 황제가 권력을 한 몸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삼공 아래에는 구경을 두었다. 봉상(종묘 예법 주관), 낭중령(궁정 경비 주관), 태복(궁정 거마 관리), 위위(衛尉 황궁 보위 주관), 전객(典客 소수 민족 사무 및 외교 처리), 정위(廷尉 사법 책임), 치속내사(전국 재정 세수 주관), 종정(황족 내부 사무 관리), 소부(少府 전국 산하호해의 세수와 수공업 제조를 주관하여 황실의 필요 물자 공급) 등이다.

진시황이 설립한 삼공구경 제도는 이후 역대 정치 제도에 영향을 미쳤다.

* 36군 설치

어떤 이가 진시황에게 청하여 여러 황자를 왕으로 봉하자고 건의했고 일부 대신들도 이것이 유리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정위(廷尉) 이사는 반대 의견을 내놓으며, 옛날 주문왕과 주무왕이 자제와 동성 친척을 많이 분봉했으나 후대로 가면서 점차 소원해져 서로 공격하기를 원수같이 했고 제후들끼리 전쟁을 벌여 주 천자도 막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제후를 설치하는 것은 이득이 없다고 했다. 시황은 이를 매우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천하를 36군으로 나누었다. 각 군에는 수(守), 위(尉), 감(監)을 설치했다. 백성의 칭호를 ‘검수(黔首)’로 고쳤다.

군수(郡守)는 한 군의 최고 장관으로 중앙 정부의 직접 관할을 받았다. 군수 아래에는 군위(郡尉)를 두어 군수를 보좌해 군의 군사를 주관하게 했고, 또 감어사(監禦史)를 두어 감찰을 책임지게 했다. 각 군은 매년 정기적으로 중앙에 현지의 조세 수입, 호구 통계, 치안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한 군 내에는 여러 현이 있었는데 만 호 이상의 현에는 현령(縣令)을 두고 만 호 미만에는 현장(縣長)을 두어 현 백성을 관리하게 했다. 현령과 현장 아래에는 현위(縣尉)를 두어 현의 군사를 주관하게 했고 현승(縣丞)을 두어 현령과 현장을 보좌하며 사법 재판을 책임지게 했다. 한 현 내에는 여러 향으로 나뉘었는데 향에는 삼로(교화 주관), 색부(조세 징수와 요역 징발 책임), 유요(遊徼 지방 치안 책임)를 두었다. 향 아래에는 정(亭), 리(里) 등이 있어 엄밀한 지방 기구를 구성했다.

* 법률, 화폐, 도량형과 문자 통일

진시황은 천하의 병기를 수집하여 함양으로 모으게 한 뒤, 이를 녹여 큰 종과 12개의 동인(銅人)을 주조했는데 각각의 무게가 12만 근에 달했으며 이를 궁정에 배치했다.

그뿐만 아니라 법령, 화폐, 도량형 표준을 통일했다. 전국시대에는 각국이 화폐를 스스로 주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모양, 크기, 경중이 제각각이었고 특히 가치가 같지 않아 환산하기 어려웠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킨 후 화폐 통일 조치를 시행했다. 화폐를 두 등급으로 나누어 황금을 상폐(上幣)로 삼고 일(鎰)을 단위로 했으며, 둥글고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난 동전을 하폐(下幣)로 삼아 반량(半兩)을 단위로 했다. 이로써 과거 화폐가 통일되지 않았던 혼란 상태를 끝내고 각지의 상품 교환과 경제 교류를 편리하게 했다.

전국시대에는 도량형 제도 또한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진나라 통일 후 상앙 변법 때 제정된 도량형 제도를 전국에 시행했고, 전용 도량형 통일 조서를 공포하여 이를 관에서 정한 도량형기에 새겨 전국에 보내 표준 기구로 삼게 했다. 현재 함양에서 출토된 ‘대량조 상앙량(大良造商鞅量)’ 밑면에는 진시황 26년 도량형 통일 조서가 보충되어 새겨져 있다. 동시에 도량형 정기 검사 제도를 계속 집행하여 매년 2월 전국 도량형기를 감정함으로써 계량 기구의 정확함과 통일을 보장했다.

진나라 통일 후 진시황은 승상 이사 등에게 명하여 문자를 정리하게 하여 소전(小篆)을 제정하고 이를 표준 문자로 삼아 공문과 법령에 통용하게 했다. 나중에 정막(程邈)이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서체를 근거로 더욱 간편한 새로운 서체인 예서(隸書)를 정리하여 통용 문자로 전국 범위에 보급했다. 호북성 운몽에서 출토된 진나라 죽간은 진나라의 공식 문서가 이미 예서를 사용했음을 증명한다.

* 치도(馳道) 축조

진나라 통일 후 즉시 예전 각국이 쌓았던 관문과 요새, 보루 등 장애물을 철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전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기원전 220년(진시황 27년) 수도 함양을 중심으로 하는 치도(馳道)를 건설했다. 주요 간선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동쪽으로 연, 제에 직통하고 하나는 남쪽으로 오, 초에 직달했다. 이들 치도는 폭이 50보였고 길가에는 3장마다 청송 한 그루씩을 심었다.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몽염에게 명하여 함양에서 북쪽으로 뻗어 나가는 직도(直道)를 닦게 했는데 운양, 상군을 거쳐 구원에 직달하며 전장의 길이는 1,800여 리에 달했다. 이 ‘직도’의 유적은 지금도 식별할 수 있다. 그 밖에 지금의 운귀 지역에는 ‘오척도(五尺道)’를 닦았다. 또한 지금의 호남, 강서, 광동, 광서 사이에 오령을 넘는 ‘신도(新道)’를 축조했다. 이처럼 함양을 중심으로 사통팔달한 교통망이 전국 각지를 하나로 연결했다. 동시에 수레 궤도의 폭을 6척으로 통일하여 차량 소통에 막힘이 없게 보장했다.

진시황의 업적

* 순행과 각석(刻石)

기원전 220년, 진시황이 농서(隴西), 북지(北地)를 순시하고 계두산(雞頭山)을 지나 회중(回中)을 거쳐 갔다. 이에 위수(渭水) 남면에 신궁(新宮)을 건조했다. 얼마 후 다시 신궁의 이름을 극묘(極廟)로 고쳐 천극(天極 하늘의 극)에 처한 북극성을 상징하게 했다. 또 극묘에서 도로를 개통하여 여산(驪山)에 직접 도달하게 했고 감천전전(甘泉前殿)을 수축했다. 또한 양옆에 담을 쌓은 용도(甬道)를 만들어 함양에서 여산까지 연결했다. 이 해에 황제의 순행을 위한 전국 각지로 통하는 치도를 축조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19년, 시황이 동방으로 군현을 순시하다 추현(鄒縣)의 역산(嶧山)에 올랐다. 산에 석비를 세우고 노나라 유생들과 상의하여 각석을 통해 진나라의 덕업(德業)을 찬양하고자 했으며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양보산에서 땅에 제사 지내는 것과 명산대천에 멀리 제사 지내는 일을 논의했다. 이에 태산에 올라 석비를 세우고 토단을 쌓아 제천 성전(祭天盛典)을 거행했다. 산을 내려올 때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일자 시황이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으므로 그 나무에 ‘오대부’라는 작위를 하사했다.

이어 양보산에서 제지 전례(祭地典禮)를 거행하고 석비에 비문을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황제께서 제위에 임하시어 제도를 지으시고 법을 밝히시니 신하들은 몸을 정결히 하고 언행을 삼갔다. 즉위 26년, 처음으로 천하를 아우르니 엎드려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친히 먼 지방의 여민(黎民 백성)들까지 순시하시고, 이제 태산에 올라 동쪽 끝까지 두루 둘러보시었다. 따르는 신하들이 공적을 생각하고, 사업(事業)의 본원을 돌아보아 공덕을 공경하고 칭송하였다. 다스림의 도가 운행(運行)되어 산업이 적합하게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법식(法式)을 갖추었다. 대의(大義)는 아름답고 밝으며, 후세에 전해져 순서대로 계승되어 변함이 없으리라. 황제께서 몸소 성덕을 베풀어 천하를 평정하시고 다스림에 게을리함이 없으시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에 드시니 장대한 이로움을 건설(建設)하시어 오로지 드높은 가르침을 펼치시었다. 귀천(貴賤)이 분명(分明)해지고 남녀(男女)가 예에 순응하며 삼가 직분과 일을 지켰다. 안팎을 밝게 구분하여 청결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베풂이 후사에 미치리라. 교화가 무궁(無窮)할지니, 유조(遺詔)를 받들어 영원히 승계되도록 거듭 삼가라.”

그 후 시황은 발해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황현, 추현을 거쳐 성산(成山)의 꼭대기에 오르고 다시 지부산에 올라 석비를 세워 진나라의 공덕을 노래한 후 떠났다. 다시 남쪽으로 가 낭야산에 올라 매우 기뻐하며 그곳에서 세 달 동안 머물렀다. 나중에 3만 호의 백성을 낭야산 아래로 이주시켜 거주하게 하고 12년 동안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었다. 시황은 낭야대를 축조하고 돌에 글을 새겨 진나라의 공덕을 찬양하며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져 만족스러운 심경을 표명했다.

비문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다.

“28년, 황제라고 처음 이름 지으셨다. 법도(法度)를 바로잡으니 만물(萬物)의 기강이 생겨났다. 인사(人事)를 밝히시니 아버지와 아들이 화목해지고. 성스런 지혜와 인의(仁義)가 도리(道理)를 명백히 드러내시었다. 동토(東土)를 어루만지시어, 군사(卒士)들을 살피셨다. 큰일을 다 이루시고 바닷가에 임하시었다. 황제의 공은 본사(本事)를 부지런히 노력하신 것이다. 농업을 높이 여기고 말업을 억제하시니, 백성(黔首)이 부유해졌다. 널리 천하 백성이 모두 뜻을 모았다. 기계(器械)의 도량형을 통일하시고, 책의 문자를 같게 하시었다. 일월(日月)이 비추는 곳에는 배와 수레가 다니도록 하였다. 모두가 수명대로 살고 죽으니, 뜻을 이루지 못함이 없었다. 움직임의 시기에 응하여 다스리시니, 이는 오직 황제뿐이시다. 다른 풍속을 바로잡으시니, 물과 땅을 건너시었다. 백성을 가엽게 여기시어, 조석(朝夕)으로 소홀함이 없으시었다. 의심을 제거하시고 법을 바로잡으시니, 모두가 피해야 할 바를 알게 되었다. 방백(方伯)이 직분을 나누니 모든 다스림이 간략해졌다. 모든 조치가 마땅해지니, 계획한 바와 같지 않음이 없었다.

황제의 밝으심으로 사방(四方)을 널리 살피시었다.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에 차등을 주지 않으셨다. 간사함을 용납하지 않으니 모두가 곧고 어질고자 힘썼다. 작고 큰 일 모두 진력(盡力)을 다하시었고, 감히 게으르거나 태만함이 없으시었다. 멀거나 가깝거나 외진 곳이라도, 엄숙하고 장중하게 온 힘을 다하시었다. 바르고 정직하고 충직하고 온후하니, 사업(事業)에 변함이 없으셨다. 황제의 덕으로, 사해 끝(四極)까지 바로잡혔다. 난(亂)을 일으킨 자드를 정벌하여 해악을 제거하고, 이로움(利)을 일으켜 복(福)을 이루셨다. 시기에 맞추어 노역을 줄이시니 모든 산물이 번성했다. 백성들이 편안해지니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육친(六親)이 서로 보살피니 마침내 도둑이 없게 되었다. 기꺼이 교화를 받드니 모두가 법령과 제도를 알게 되었다. 천지와 사방이 모두 황제의 영토가 되었다. 서로는 유사(流沙)를 건너고, 남으로는 북호(北戶)에 다다랐다. 동으로는 동해를 차지하고, 북으로는 대하(大夏)를 지났다. 인적이 이르는 곳이라면 신하가 아닌 곳이 없었다. 공적이 오제(五帝)를 덮었고, 은택이 우마(牛馬)에까지 미쳤다. 은덕을 입지 않은 이 없으니, 각자가 그 집에서 편안하였다.”

오직 진왕(秦王)만이 천하를 겸유(兼有)하였으므로, 황제라 불렀다.

동토(東土)를 어루만지고 낭야(瑯邪)에 이르렀다.

열후(列侯) 무성후(武城侯) 왕리(王離), 열후 통무후(通武侯) 왕분(王賁), 윤후(倫侯) 건성후(建成侯) 조해(趙亥), 윤후 창무후(昌武侯) 성(成), 윤후 무신후(武信侯) 풍무택(馮毋擇), 승상 외림(隗林), 승상 왕관(王綰), 경(卿) 이사(李斯), 경(卿) 왕무(王戊), 오대부(五大夫) 조영(趙嬰), 오대부 양규(楊樛)가 따르며, 바닷가에서 시황의 공적을 논의하였다.

“옛날의 임금으로 말하자면, 땅이 사방 천 리에 불과하였고, 제후(諸侯)는 각자 그들의 봉역(封域)을 지키며 조회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였고, 서로 난폭하게 침략하며 잔혹한 정벌(殘伐)을 그치지 않았고, 오히려 금석(金石)에 새겨 이를 기념하였다. 옛날의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은 지식과 가르침이 같지 않았고, 법도(法度)가 밝지 않았으며, 귀신의 위세를 빌려 먼 지방을 기만하였으니, 실질과 이름이 걸맞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하였다. 그 몸이 미처 죽기도 전에 제후가 배반하고, 법령은 행해지지 못하였다. 이제 황제께서 해내(海內)를 하나로 아울러 군현으로 삼으시니, 천하가 화평(和平)해졌다. 종묘(宗廟)를 밝게 밝히시고, 몸소 도를 이루고 덕을 행하니, 존호(尊號)가 대성(大成)하였다. 군신(群臣)은 함께 황제의 공덕(功德)을 칭송하고, 이를 금석에 새겨 본보기로 삼는다.”

각석하는 일이 끝나자 시황이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팽성을 지나며 재계하고 기도하고는 사수에서 물에 빠진 주정(周鼎)을 건지려 했다. 천 명을 물속으로 들여보내 찾게 했으나 얻지 못했다.

이에 남서쪽으로 회하를 건너 항산, 남군으로 향했다.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와 상산사(湘山祠)에 이르렀다. 큰 바람을 만나 하마터면 강을 건너지 못할 뻔했다.

황제가 박사에게 “상군(湘君)은 어떤 신인가?” 물으니

박사가 대답했다. “요임금의 딸이자 순임금의 아내로 이곳에 묻혔다고 들었습니다.“

시황이 매우 화가 나서 죄를 지은 복역수 3,000명을 보내 상산의 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리게 했는데, 그곳이 붉은 흙이라 산이 벌건 색으로 변했다. 황제는 남군에서 무관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기원전 218년, 시황이 동방으로 순유를 떠났다. 양무현(陽武縣) 박랑사(博浪沙)에 이르렀을 때 장량(張良)과 한 역사의 저격을 받았으나 저격범이 부거(부수레)를 잘못 맞히는 바람에 시황은 깜짝 놀랐을 뿐이었다. 자객을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하자 전국에 10일간 대규모 수색령을 내렸다. 그는 지부산과 동관에 올라 각각 석비를 세우고 자신의 공적을 노래했다. 얼마 후 시황은 낭야로 갔다가 상당을 거쳐 함양으로 돌아왔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