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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단명한 통일제국 진조(秦朝) (1) 하

–(기원전 221년—기원전 207년)

심연

【정견망】

* 남으로 육량을 취하고 북으로 흉노를 치며 장성을 축조

흉노족은 북방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 중 하나로, 오랫동안 남쪽으로는 음산,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수 사이에서 활동하며 북방의 강력한 유목 민족이 되었다. 그들은 자주 중원에 침입하여 소란을 피우고 약탈을 일삼았다. 통일 후에도 흉노족의 위협은 여전히 컸다.

흉노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진시황은 기원전 218년 대장 몽염(蒙恬)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오르도스(소위 ‘하남河南’)를 정벌하게 했다.

기원전 215년, 하르도스 남북의 광대한 지역을 수복하고 이 지역에 44개 현을 설치했으며 九原郡을 다시 세웠다.

기원전 213년, 진나라는 과거 진(秦), 조(趙), 연(燕) 세 나라의 장성을 연결하여 서쪽의 임조(감수 민현)에서 동쪽의 요동 갈석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축조했다. 이 장성은 흉노의 침입을 방어하고 내륙 인민의 생산과 생활 안정을 보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밖에도 진시황은 기원전 211년 3만여 호의 주민을 북하(北河), 유중(榆中 지금의 내몽골 이금곽락기伊金霍洛旗 북쪽)으로 이주시켜 밭을 갈고 생산하게 하며 변강(邊疆)을 개척했다.

기원전 214년, 시황은 일찍이 도망쳤던 범죄자들, 부자에게 담보로 잡혀 노예가 된 자들, 주인이 아내를 얻어준 자들, 그리고 상인들을 징발하여 남부의 육량(陸梁) 지역을 탈취하게 하고 계림(桂林), 상군(象郡), 남해(南海) 등의 군을 설치하여 좌천된 사람들을 보내 수비하게 했다. 또 장군 몽염을 파견해 황하를 건너 고궐(高闕), 양산(陽山), 북가(北假) 일대의 땅을 빼앗고 보루를 쌓아 융적(戎狄)을 쫓아내게 했다.

흉노와 월족에 대한 전쟁을 거친 후 진나라의 강역은 전무후무하게 넓어져 동으로는 바다에 닿고 서로는 임조에 이르렀으며 “남으로는 북향호(北向戶)에 이르고 북으로는 황하를 근거로 요새를 삼아 음산을 끼고 요동에 이르니”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가 되었다.

* 함양궁 대토론 및 분서갱유

진시황이 함양궁(咸陽宮)에서 술자리를 베푸니 70명의 박사가 나아가 술을 올리고 축수사(祝壽辭)를 읊었다. 제나라 사람인 박사 순우월(淳于越)은 모든 일에 옛사람을 본받아야 장구할 수 있다고 여겼다. 반면 승상 이사(李斯)는 하, 상, 주 삼대를 본받는 것에 반대하며 “예전에는 제후들이 일제히 일어나 다투었기에 대량의 유세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지금은 천하가 평정되고 법령이 폐하 한 분에게서 나오니 백성은 집에서 농공 생산에 힘써야 하고 글 읽는 사람은 법령과 형금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는 시황에게 사립 학교를 금지할 것을 청하며 “사관에게 명하여 진나라의 전적이 아닌 것은 모두 불태우게 하십시오. 박사 관서에서 관리하는 것 외에 천하에 감히 《시(詩)》, 《서(書)》, 제자백가의 저작을 소장한 자가 있으면 모두 지방관에게 보내 함께 태워버리게 하십시오. 감히 한자리에 모여 《시》, 《서》를 의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 대중에게 보이고 옛것을 빌려 지금을 비판하는 자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내리십시오. 관리로서 알고도 보고하지 않으면 같은 죄로 다스리십시오. 명령이 내려진 지 30일이 지나도록 책을 태우지 않는 자는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경형(黥刑)에 처하고 4년간 성을 쌓는 성단(城旦)형에 처해 변방으로 보내 낮에는 도적을 막고 밤에는 성을 쌓게 하십시오. 폐기하지 않는 것은 의약, 점복(占卜), 농업 등에 관한 책입니다.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진시황은 이에 조서를 내려 각종 전적을 불태우게 했다.

분서가 있은 이듬해, 평소 진시황의 신임을 받던 방사 노생(盧生)과 후생(侯生)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등 뒤에서 진시황이 잔인하고 살생을 좋아한다고 비방했다. 어느 날 밤, 이 두 사람은 관직을 버리고 도망쳤다. 진시황은 이 사실을 알고 매우 노하여 함양의 서생 수백 명을 잡아다 고문하고 신문했다. 이 서생들은 처음에는 모두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하나둘 살가죽이 터지도록 매를 맞자 억지로 거짓 자백을 했다. 진시황은 이 서생들을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공자 부소(扶蘇)가 그들을 위해 간청했으나 오히려 진시황에게 큰 꾸지람을 들었다. 감독관은 진시황의 노기가 충천한 것을 보고 서생들을 모두 깊은 구덩이로 몰아넣은 뒤 돌로 구덩이를 가득 채워 이 서생들을 산 채로 매장하니 총 460여 명이었다.

함양의 서생 460여 명을 파묻어 죽인 후, 진시황은 속으로 천하의 서생들을 모두 죽여 뿌리를 뽑고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 했으나 서생들이 도망갈까 봐 계책을 하나 세웠다. 그는 지방 관리들에게 명하여 각지의 유명한 서생들을 찾아내 등용할 수 있도록 서울로 보내라고 했다. 불과 몇 달 만에 각 지방에서 관리가 되고자 하는 서생 700여 명을 보내왔다. 진시황은 이 700여 명을 모두 낭관으로 삼으니 서생들이 매우 기뻐했다.

그해 겨울, 여산의 마곡(馬谷)에 과실이 주렁주렁 열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모두 이상하게 여기자 진시황은 이 700여 명의 서생들에게 마곡에 가서 보라고 했다. 700여 명의 서생들이 마곡에 가서 보니 과연 과일 몇 개가 아주 신선하게 달려 있었다. 사람들이 논의하고 있을 때 갑자기 큰 소리가 나더니 돌이 빗물처럼 골짜기 위에서 떨어졌고 순식간에 이 700여 서생들은 마곡에서 깔려 죽었다. 소위 과일이라는 것은 마곡 지하에 온천이 있어 사계절이 봄 같았기 때문이었다. 진시황이 심복에게 밀명을 내려 먼저 골짜기 안에 오이를 심게 했고 나중에 정말로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이 서생들은 이렇게 모두 마곡에서 억울하게 죽었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분서갱유’다.

* 아방궁과 여산 능묘 등 대규모 토목공사 일으켜

기원전 212년, 시황이 도로를 축조하여 구원에서 운양까지 이르게 했으며 산봉우리를 깎고 계곡을 메웠다. 이때 시황은 함양 인구가 많고 선왕(先王)의 궁전이 좁다고 여겼는데, 서주 문왕과 무왕이 세운 풍, 호 두 성 사이야말로 제왕의 도성이 있을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위수 남쪽 상림원 안에 조궁(朝宮)을 수축했다. 먼저 아방(阿房)에 전전(前殿)을 세웠는데 동서의 길이가 500보, 남북의 폭이 50장이었으며 궁 안에는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아래에는 5장 높이의 큰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 사방에는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구름다리를 가설하여 궁전 아래에서 남산까지 바로 통하게 했다. 남산의 꼭대기에 문궐을 세워 표지로 삼았다. 또 구름다리를 만들어 아방에서 위수를 가로질러 함양과 연결하니, 이는 천상의 북극성과 각도성(閣道星)이 은하수를 건너 영실성(營室星)에 도달하는 것을 상징했다. 아방에 이 궁을 지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를 아방궁(阿房宮)이라 불렀다.

동시에 시황은 계속해서 여산에 자신을 위한 능묘(陵墓)를 건설했다. 능묘는 땅을 파서 삼중천(三重泉)만큼 깊게 들어가 구리 물을 붓고 틈을 메워 외관을 넣었으며, 다시 궁관을 짓고 백관의 자리를 배치하고 기이한 기물과 보물, 괴석 등을 가득 채워 넣었다. 또한 장인에게 명하여 기관으로 조종되는 활을 만들어 무덤을 파러 다가오는 자가 있으면 쏘아 죽이게 했다. 수은으로 백천, 강하, 대해를 만들고 기계로 서로 따르게 하여 흘려보내게 했으며 천장에는 천문 형상을 갖추고 아래에는 지리 형상을 배치했다. 도룡룡 기름으로 촛불을 만들어 오래도록 꺼지지 않게 했다. 궁형이나 도형을 받은 70여만 명이 각각 아방궁과 여산묘를 짓는 데 동원되었다.

아방궁과 여산묘를 짓는데 사용한 돌은 북산(北山)에서 채굴했고 목재는 촉(蜀)과 형(荊)에서 운반해왔다. 이 두 거대한 공정은 막대한 인력과 재력을 소모했다. 기록에 따르면 여산릉 수축에만 죄수와 노예 70만 명이 동원되었고 흉노 방비에 30만 명, 오령(五嶺) 수비에 50만 명이 투입되었다. 치도를 닦고 운송하는 사람까지 합하면 전국에서 복역하는 인원이 200만 명을 내려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전국 인구가 불과 2,000만 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사람들은 끝없는 노동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게다가 진나라의 형벌은 매우 엄혹하여 한 사람이 법을 어기면 삼족에게 죄가 미쳤고 한 집이 법을 어기면 이웃이 연좌되었다. 호북에서 출토된 진나라 죽간을 보면 자(貲), 태(笞), 천(遷, 유배), 내(耐, 수염 깎기), 곤(髡, 머리카락 깎기), 경(黥, 얼굴에 낙인), 의(劓, 코 베기), 올(鋈, 발자르기), 참좌지(斬左趾 왼발 자르기), 궁(宮또는 부腐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생식기 제거), 육(戮), 책(磔, 사지 찢기), 기시(棄市) 등 형벌의 명칭이 다양하다. 《진율(秦律)》에는 ‘예신(隸臣 노예)’을 겨냥한 조문이 많다. 하지만 진나라가 망할 때까지 아방궁은 완공되지 못했고 결국 전쟁의 불길 속에서 파괴되었다. 그러나 여산묘는 마침내 완성되어 세계적인 기적이 되었다.

* 바다로 사람을 보내 신선을 찾다

제나라 사람 서불(徐市) 등이 상소하여 바다 가운데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라 불리는 세 신산(神山)이 있고 그곳에 신선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에 재계 목욕하고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신선을 찾기를 희망했다. 시황은 서불에게 동남동녀 수천 명을 선발하게 하여 바다로 보내 신선을 찾게 했으나 결과가 없었다.

방사 노생이 시황에게 권했다.

“신 등이 지(芝), 기이한 약, 선자(僊者)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는데, 마치 무언가 방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건대, 인주(人主)께서 때맞춰 미행(微行)을 나가시어 악귀(惡鬼)를 물리치시고, 악귀가 물러나면 진인(眞人)이 올 것입니다. 인주께서 거하시는 곳을 인신(人臣)들이 알면 신을 방해하게 됩니다. 진인이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으며, 구름을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지극해 오래 삽니다. 지금 황상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나, 능히 평안하지는 못하고 계십니다. 원컨대 황상께서 거하시는 궁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연후에는 불사의 약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시황이 말하기를 “나는 신선 진인(真人)을 흠모하니 내 스스로를 ‘진인’이라 부르고 더는 ‘짐’이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어 함양 사방 200리 내의 270개 궁관을 모두 구름다리와 용도로 서로 연결하게 했고 장막, 종고, 미인들을 그 안에 배치하여 모두 등록된 위치에서 이동하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이르는 곳을 발설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했다.

한번은 황제가 양산궁(梁山宮)에 임했는데 산 위에서 승상의 수레와 말이 많은 것을 보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환관 근신 중 누군가가 이 일을 승상에게 알려주자 승상이 이후 수레와 말의 숫자를 줄였다. 시황이 화를 내며 “이는 궁중 누군가가 내 말을 누설한 것이다”라고 했다. 심문했으나 자백하는 자가 없자 당시 곁에 있던 자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그 후로는 아무도 황제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시황이 사무를 처리하고 신하들이 명령을 받는 일은 모두 함양궁에서 이루어졌다.

시황의 죽음에 대한 예언

《사기》에는 시황의 죽음에 관한 두 가지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211년, 화성이 심수(心宿)에 침입했는데 이러한 천상(天象)은 제왕에게 재앙이 있음을 상징한다. 운석 하나가 동군에 떨어졌는데 땅에 떨어진 뒤 돌로 변하며 그 돌 위에 “시황제가 죽고 땅이 나누어진다(始皇帝死而土地分)”는 글자가 새겨졌다. 시황이 이를 듣고 어사를 보내 집집마다 조사하게 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하자 그 돌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다 죽이고 운석을 불태워버렸다. 시황은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아 박사에게 《선진인시(仙真人詩)》를 짓게 했고 천하를 순행할 때 이르는 곳마다 악사에게 연주하고 노래하게 했다.

가을, 사자(使者)가 관동(關東)에서 밤중에 화음(華陰)의 평서(平舒) 길을 지나는데, 벽옥을 쥔 누군가 사자를 가로막으며 말하였다.

“나를 대신해 호지군(滈池君)[52]에게 가져다주시오.”

이어서 말하였다.

“금년에 조룡(祖龍)이 죽을 것이오.”

사자가 그 연고를 묻자,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벽옥을 두고 가버렸다. 사자가 벽옥을 받들고 와서 아뢰었다.

시황이 한참 동안 조용히 있다가 말하였다.

“산귀(山鬼)는 본래 한 해의 일만 알 뿐이다.”

물러나며 말하였다.

“조룡이란 사람의 선조다.”

어부(御府)에게 명해 벽옥을 조사하게 하니 18년에 강(江)을 건너면서 빠트린 그 벽옥이었다.

이에 시황이 이를 점치니, ‘이주하는 것이 길하다’는 괘를 얻었다.

북하(北河)와 유중(榆中)에 3만 가를 이주시키고, 작위를 1급 올려주었다.

《이원(異苑)》에도 시황이 사구(沙丘)에서 죽을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이여,
어찌 그리 강포한가.
내 문을 열고 내 평상에 걸터앉으며,
내 술을 마시고 내 음료를 뱉는구나.
내 밥을 먹어 양식으로 삼고,
내 활을 당겨 동쪽 벽을 쏘는구나.
앞으로 사구에 이르면 마땅히 멸망하리라.”

기원전 210년 10월 계축일, 시황이 순유를 떠났다. 좌승상 이사가 동행했고 막내아들인 호해(胡亥)가 수행했다. 11월, 운몽에 이르러 구의산(九疑山)에서 요순에게 멀리 제사 지냈다. 이어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내려와 적가(籍柯)를 관람하고 해저(海渚)를 건너 단양을 지나 전당에 도착했다. 나중에 회계산에 올라 대우(大禹)에게 제사 지내고 남해를 멀리 바라보았다. 시황은 그곳에 비석을 세워 진나라의 공덕을 찬양하게 했다.

시황이 돌아오는 길에 평원진(平原津)에 이르렀을 때 병이 났다. 시황은 ‘죽음’이라는 글자를 말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에 신하들 중 감히 죽음에 관한 일을 입에 올리는 자가 없었다. 황제의 병이 위중해지자 공자 부소에게 어인(禦印)이 찍힌 편지를 써서 “함양으로 돌아와 장례에 참석하고 함양에 안장하라”고 했다.

편지는 이미 봉해졌으나 중동부령(中東府令)으로 인새(印璽) 사무를 겸하던 조고(趙高)의 사무실에 보관된 채 사자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7월 병인일, 시황은 사구 평대(平臺)에서 서거했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타지에서 서거했으므로 황자들과 각지에서 변고를 일으킬까 두려워 이 일을 비밀로 했고 시황이 붕어한 소식을 발표하지 않았다. 관은 밀폐되면서도 통풍이 되는 온량거(溫凉車)에 안치했고, 예전 시황의 총애를 받던 환관을 배승시켜 가는 곳마다 평소처럼 음식을 올리고 백관이 황제에게 정사를 보고하게 했다. 환관은 온량거 안에서 조서를 내리고 결재했다. 오직 호해, 조고 그리고 대여섯 명의 총애받던 환관만이 황제의 서거를 알았다.

조고는 예전에 호해에게 글자와 옥률 법령 등을 가르친 적이 있어 호해가 사사로이 그를 매우 좋아했다. 조고는 공자 호해, 승상 이사와 비밀리에 공모해 시황이 공자 부소에게 내렸던 봉인된 편지를 뜯고, 이사가 사구에서 시황의 유조를 받았다고 속여 황자 호해를 태자로 세웠다. 또한 공자 부소와 몽염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의 죄상을 열거하며 자결을 명했다. 이러한 일들은 《이사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마침 한여름이라 황제의 시신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이사는 수행 관원들에게 수레에 비린내가 심한 절인 생선을 한 섬씩 싣게 하여 사람들이 시체 냄새와 생선 비린내를 분간하지 못하게 했다.

일행이 나아가 함양에 도착한 뒤에야 부고를 정식 발표했다. 태자 호해가 황위를 계승하니 이가 바로 2세 황제다. 9월에 시황을 여산에 안장했다. 이 일은 모두 《이사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은 일생 동안 비록 많은 놀라운 일을 해내고 통일 국가를 건립했으나, 개인의 지혜만을 믿고 공신을 믿지 않았으며 사민(士民)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인정(仁政)과 왕도를 버리고 엄혹한 형법을 시행했으며 속임수와 권세를 앞세우고 인덕(仁德)과 신의(信義)를 뒤로 했다. 잔혹함과 가혹함으로 천하 통치의 전제로 삼았기에 천하 사람들의 원한을 샀고 자신 또한 좋게 끝맺지 못했다. 생전에 기대했던 만세의 진조(秦朝) 역시 끝내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이로 보건대 인덕으로 천하를 다스리지 않는 자는 결국 하늘에 의해 버림받는 법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