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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인황(聖祖仁皇)——강희대제 전기 5

【강희대제】 친정(親政) 초기 정치 조치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강희제는 궁궐 기둥에 삼번(三藩), 하무(河務), 조운(漕運)이라는 세 가지 큰일을 써 붙이고, 밤낮으로 스스로를 일깨우며 정사를 돌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사진은 강옹건 성세를 창조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소년 강희제는 탁월한 지혜와 담력으로 오배를 제거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아 인간 세상의 지고(至高)한 권력을 장악했다. 동시에 그는 놀라운 의지로 전통 유학과 제왕의 도(道)를 연마해 혜안과 학식을 쌓았다. 강희제는 마침내 진정한 제왕의 신분으로 중화의 끝없는 강산을 바라보며 태평성대와 강성한 제국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소년 천자가 가장 주목한 나랏일은 무엇이었을까? 수년간 정사를 듣고 배우면서 그는 대청 왕조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난제를 냉철하게 인식했다. 그리하여 그는 궁궐 기둥에 삼번(三藩), 하무(河務), 조운(漕運)이라는 세 가지 큰일을 써 붙이고, 밤낮으로 스스로를 일깨우며 정사를 돌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삼번은 모든 대사 중의 대사였다.

삼번의 난

“오삼계(吳三桂) 등은 송조의 개국 공신과는 다르며, 당조 번진(藩鎭)과 같은 할거 세력이다.” —강희제

(출처: “오삼계 등은 송나라 공신에 비할 바가 아니요, 곧 당나라 번진의 무리이다.” ——《강희조실록》)

吴周开国皇帝吴三桂画像。(公有领域)

오주(吳周) 개국 황제 오삼계 초상화. (공유 영역)

삼번은 청나라 건국 초기의 세 명의 한인 번왕을 말하며, 그들은 각각 평서왕(平西王) 오삼계,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정충(耿精忠)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세 왕은 서남 지역을 장악한 할거 세력으로, 모두 명조 말기에 청에 투항한 장수들이었다.

숭정(崇禎) 17년(1644년), 숭정제가 자결하여 순국했을 때 나라 안에는 이자성의 대순(大順) 정권, 장헌충의 대서(大西) 정권, 그리고 명조 종실과 문무대신들이 남하하여 세운 남명(南明)이 있었다. 청조가 산해관을 넘어 중국을 통일하려면 이들 투항한 장수들의 힘을 빌려야 했기에 청 조정은 이들에게 큰 상을 내리고 은총을 베풀었다.

청 숭덕(崇德) 원년(1636년), 홍타이지가 황제를 칭하며 귀순한 공유덕(孔有德), 경중명(耿仲明 그 아들이 경계무이고 손자가 경정충이다), 상가희를 왕으로 봉하며 선례를 남겼다.

명 숭정 17년(1644년), 오삼계가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넘은 뒤 그 역시 왕으로 봉해졌다.

이들 네 명의 한족 왕은 청 군대를 따라 남하해 각지의 반청 세력을 평정하며 군공을 세웠고 고관대작의 녹봉을 누렸다. 최종적으로 오삼계, 상가희, 경정충이 각각 청의 변경 지역인 운남, 광동, 복건에 주둔하며 한 지역을 전제적으로 다스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 왕은 군대를 끼고 자중하며 권세가 날로 커져 제어하기 힘든 형국이 되었다.

가장 먼저 닥친 것은 군사적 압박과 위협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경정충과 상가희는 “장년 남자 인구가 각각 2만 명”이었고, 오삼계는 사방으로 전쟁을 치르며 각지의 정예병을 거두어 자신의 수하로 삼았으니 그 수가 총 5만여 명에 달했다. 삼번의 강력한 병력은 국가 통일의 걸림돌일 뿐만 아니라 그 막대한 군비(軍費)는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운남 한 성의 봉급과 군량만 해도 1년에 9백여만 전이 넘어, 천하의 재물 절반이 삼번에서 소모되는 국면이 나타났다.[1]

정치적으로 삼번의 권력은 조정과 지방의 각급 관리들 위에 군림했다. 청 초기 조정은 18개 성을 두어 성마다 순무(巡撫) 한 명, 2~3개 성마다 총독(總督) 한 명을 두어 현지의 군사와 정무 등 모든 사무를 책임지게 했지만 변방의 번지(蕃地 번왕의 땅)는 예외였다. 오삼계의 경우 운남과 귀주 두 성의 대소사를 총괄하며 조정 내외의 관리들이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강희 2년(1663년) 오삼계는 운귀독무(雲貴督撫)의 임명장에 왕의 통제를 받는다는 의미의 “청왕절제(聽王節制)” 네 글자를 써달라고 청하기까지 했다.[2] 그는 또한 관리 임용권까지 장악해 자기 부하와 측근들을 다른 성의 관직에 수시로 선발해 보냈는데, 이를 서선(西選)이라 불렀으며 서선의 관리가 천하에 가득하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3]

경제적으로 오삼계는 가혹한 수탈을 일삼았다. 남명(南明) 황제의 오화산(五華山) 옛 궁궐을 번왕의 저택으로 삼아 사치스럽게 꾸몄고, 명조 목(沐)씨 가문의 장원 700경(頃)을 모두 번왕의 장원으로 편입했다. 성벽과 수로를 쌓는다는 핑계로 재물을 긁어모으고 마음대로 토지를 점유하며 명조 말기의 온갖 가혹한 세금을 부활시켰다.

동시에 오삼계는 티베트, 몽골과 무역을 터서 해마다 수많은 양마(良馬)를 거두어들였다. 그의 아들 오응웅(吳應熊)은 부마의 신분으로 조정에 볼모로 머물며 수시로 수도의 소식을 전했다. 10여 년 동안 오삼계는 밤낮으로 군마를 조련하고 전국에 심복을 심어놓았으니 그의 야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두 왕은 오삼계만큼 실력이 두텁지는 않았으나 마찬가지로 군정 대권을 독점하고 무거운 세금과 폭정으로 지방에서 횡포를 부렸는데, 그 영향은 오배가 조정에서 권력을 휘두른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리하여 소년 강희제는 삼번을 대청 강산의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했다. 삼번 왕들이 탐욕스럽게 재물을 모으고 전횡을 일삼는 동안 강희제 또한 삼번을 철폐할 대계(大計)를 구상하고 있었다.

농가성진(弄假成眞)

“짐은 젊었을 때 삼번의 권세가 날로 커지니 철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희제

(출처: “짐은 어릴 적부터 삼번의 세력이 날로 치성하여 철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강희조실록》)

《청년 강희 출수도》 부분. (공유 영역)

진시황이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한 이래 역대 왕조의 군신들은 번왕의 할거 세력을 대일통(大一統) 제업의 위협으로 여겼다. 한무제의 추은령(推恩令)이나 송태조의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술자리에서 평화적으로 병권을 회수) 등 번진의 병화(兵禍)를 면하기 위한 조치들도 있었다. 청 조정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세 명의 번왕을 세웠고 그들이 통일에 기여한 바도 있었으나, 국가에 위협이 되었을 때 철번(撤藩)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보정(輔政) 시기부터 조정은 이미 오삼계를 필두로 한 세 왕을 겨냥해 점진적으로 번왕의 권한을 깎아나갔다. 강희 2년(1663년), 강희제는 순치 연간에 오삼계가 운귀 지역을 정벌하며 하사받았던 대장군인(大將軍印)을 회수했다. 이어 번국의 병력을 감축하고 식량과 군비를 백여만 점 줄이라는 조서를 내렸으며, 왕공(王公)과 독무(督撫) 등이 번왕의 권세를 등에 업고 폭리를 취하는 것을 엄금했다. 또한 독무와 관련 관리들에게 운귀 지역의 모든 사무를 관장하도록 명령했다.

삼번의 권력이 단계적으로 축소되던 중, 진정한 철번 행동은 강희 12년(1673년) 초에 시작되었다. 도성에 아직 초봄의 추위가 가시지 않았을 때 영남에서 상가희(尙可喜)의 명의로 된 상소문이 올라와 조정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상가희는 70세에 가까운 나이였는데,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로 2만여 명의 관병과 백성들을 데리고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게 해달라고 강희제에게 요청했다. 그의 왕위는 아들 상지신(尙之信)에게 물려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상가희의 상소는 철번의 계획과 일치했다. 강희제는 기뻐하며 의정대신들을 소집해 논의했으나 철번에 반대하는 자들이 다수였다. 강희제는 깊이 생각한 끝에 “삼번이 병권을 쥐고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 화근이 생겨 뜻밖의 일이 벌어질까 두렵다”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단호히 철번하라는 결정을 내렸다.[4]

강희제는 상가희에게 답하는 조서에서 “요동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내려 하니 그 뜻이 간절하고, 태도가 공손하며 신중하여 대체를 아는구나”라고 찬양했다.[5] 동시에 한인(漢人)들로 구성된 녹기병(綠旗兵) 두 진영만 광동에 남기고 상가희의 친족과 부하들을 모두 요동으로 옮기게 했다. 즉, 강희제는 광동에서 처음으로 철번 계획을 실시한 것이다.[6]

노쇠한 상가희는 철번의 현실을 받아들였으나, 강희제의 이 조치는 나머지 두 번왕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오삼계와 경정충은 밤낮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왕위를 포기하기는 아까웠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조정의 의심을 살 것이 분명했다. 특히 오삼계는 일찍이 누군가 혈서로 모반을 부추기고 일부러 소문을 퍼뜨려 조정의 의심이 가장 깊은 상태였다. 결국 두 번왕은 앞다투어 철번 신청서를 보냈다. 그들의 생각은 강희제가 분명 위로하며 만류하는 조서를 내릴 것이고, 그러면 명나라 목(沐)씨 가문처럼 영원히 변방을 지킬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역주: 여기서 말하는 명조의 목씨란 명 개국공신이자 주원장의 양자였던 목영(沐英) 일가를 말하는데 280년간 대를 이어가며 운남지역을 통치했다. 이들 가문은 끝까지 명조에 대한 충성을 지켜 남명 정권을 도왔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삼번이 강력하다 해도 그들이 상대하는 이는 웅재대략(雄才大略)을 지닌 강희제였다. 오삼계가 상소를 올리기 전 그의 모사(謀士)가 만류하며 “황제는 진작에 왕을 제거하고 싶어 했으나 입을 떼기 어려웠을 뿐입니다. 왕께서 지금 상소를 올리면 즉시 철폐될 것입니다”라고 조언했다.[7] 오삼계는 여전히 환상을 품고 듣지 않았다. 과연 강희제는 상소를 받은 후 이를 역이용하여 즉시 두 왕의 행보를 찬양하는 조서를 내리고, 관리들을 파견해 철번 사무를 처리하게 했다.

오삼계와 경정충이 철번 소식을 들었을 때 그 경악과 분노, 그리고 꾀를 부리다 일을 그르친 후회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오삼계는 겉으로는 시간을 끌며 떠나지 않으려 했고 속으로는 군사를 일으킬 반란을 모의했다.

남강(南疆)에서 일어난 화란

“오삼계 등은 오랫동안 모의해 왔으니 서둘러 제거하지 않으면 큰 화가 될 것이다. 오늘 철번해도 그들은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철번하지 않아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먼저 손을 쓰는 것이 낫다.” ——강희제

(출처: “삼계 등은 오래전부터 모의했으니 일찍 제거하지 않으면 병을 키워 화를 부를 것이다. 오늘 철폐해도 반역할 것이요 철폐하지 않아도 반역할 것이니 선수를 치는 것만 못하다.” ——《청사고》)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자 강희제는 토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사진은 청 낭세녕이 그린 《강희수렵도》 일부. (공유 영역)

조서가 정식으로 내려지기 전, 강희제는 철번 여부를 두고 신하들의 논의를 거쳤다. 호부상서 미사한(米思翰), 형부상서 막락(莫洛), 병부상서 명주(明珠) 등 소수 관리만 찬성했을 뿐 대부분은 삼번의 기세에 겁을 먹고 침묵했다. 사실 신하들의 찬반 여부와 상관없이 강희제와 그들 모두가 공감하는 바가 있었으니, 그것은 번왕들이 이 일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었다. 다만 소년 강희제는 승부수를 던져 삼번이라는 악성 종양을 단번에 뽑아버리기로 결심했다.

이어 청조 역사상 8년에 걸친 반란 진압 과정이 시작되었다. 강희 12년 12월 21일,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 운남으로 파견되었던 관리가 밤을 새워 달려와 강희제에게 중대한 소식을 보고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었다!

자세한 정황은 이러했다. 오삼계는 9월에 철번 명령을 받았으나 11월 말 수하 번병을 동원해 반란을 거부하는 운남순무 주국치(朱國治)를 살해하고 조서를 가져온 사신을 구금했다. 오삼계는 스스로 “천하도초토병마대원수(天下都招討兵馬大元帥)”라 칭하고 그럴싸한 《반청격문(反清檄文)》을 발표해 예전에 자신이 청에 투항했던 행위를 변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반청복명(反清複明)의 기치를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오삼계의 군대는 귀주(貴州) 전역을 점령했다. 그는 경정충과 상가희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반란할 것을 권유했고 광서의 손연령(孫延齡), 대만의 정(鄭)씨 정권 등 반청 세력과 연합했다. 한때 반란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사천과 호남 등지를 직격했다.

조정 또한 혼란에 빠졌다. 대신들은 서한 시기 한경제가 조조(晁錯)를 죽여 7국의 난을 가라앉히려 했던 것처럼, 철번을 주장한 관리들을 처벌해 반란군을 달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어찌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서 그 허물을 대신들에게 미루겠는가?”라고 말했다.[8]

이러한 책임감 있는 제왕의 기개는 충신들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문무백관이 적개심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강희제는 출병하여 반란을 평정하고 천하를 깨끗이 하기로 결심했다. 강희 13년부터 15년(1674~1676년)까지 진압군은 방어 단계에 머물렀다. 강희제는 전쟁터가 운남, 귀주, 호남, 호북 지역에 집중되기를 바랐기에 주요 요충지에 군대를 더 배치해 반란군의 진격을 막았다.

초기 전황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사천의 관병들이 오삼계에게 항복하면서 사천을 잃었고 이어 섬서(陝西)와 호북(湖北)까지 위험해졌다. 호남과 호북 지역에서도 오삼계 군대는 상덕, 예주, 형주, 악주, 장사 등을 함락시켰다. 동시에 경정충이 군사를 일으켜 복건에서 반란을 꾀하며 절강 남부를 점령했다. 순식간에 운남, 귀주, 광서, 사천, 호남, 복건의 6개 성과 절강, 강서의 대부분이 오삼계의 손에 넘어갔다. 그럼에도 강희제는 침착하게 군사를 남하시켜 원조하게 했으며 강남과 광동 일대에서 반란군과 대치했다.

이때 오삼계는 화친할 마음이 생겨 13년 4월에 구금했던 사신을 돌려보내며 청 조정과 남북으로 땅을 나누어 다스리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강희제의 삼번 평정 의지는 확고했다. 토벌하거나 항복을 받을지언정 영토를 떼어주어 구차하게 안일을 구하지 않았으며 조상들 힘들게 일군 대일통 왕조가 분열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의정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응웅과 그 장남을 처형했다. 땅을 나누어 패권을 차지하려던 오삼계의 꿈은 완전히 깨졌고 조정과 백성들의 진압 의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당시 청 군대의 실력은 반란군과 대치할 정도일 뿐 진격하기는 어려웠고 각지의 병력이 분산되어 서로 협조가 되지 않았다. 오삼계는 악주(岳州)에 정예병력을 집결시키고 북상하거나 동진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강희제는 13년 6월부터 다섯 명의 종실 대장군을 증파하여 악주, 절강, 사천(실제로는 섬서까지만 도달), 강남, 광동에 주둔하게 했다. 이미 대장군이 주둔하던 형주까지 포함해 총 6대 전선이 형성되었다. 각 군대는 벨러나 친왕이 대장군을 맡아 팔기군의 정예병을 이끌고 현지 관병을 통솔하니 그 진용이 막강했다. 강희제의 이러한 배치는 군대의 작전 및 대응 능력을 크게 끌어올렸다.

13년 말, 섬서제독 왕보신(王輔臣)이 반란을 일으켜 감숙 동부와 섬서 북부를 점령했다. 이듬해 본래 사천으로 진군하려던 청 군대가 왕보신을 토벌하여 반년 만에 대승을 거두니 서북 지역이 안정되었다. 이후 강희제는 초무(剿撫) 병행 전략을 써서 경정충과 상가희의 군대를 투항시키고 복건과 광동도 평정했다. 이때부터 전기가 마련되어 반란 진압의 두 번째 단계인 반격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8년 만에 번왕 평정

“강친왕(康親王)이 복건에서 반란군을 소탕하며 자주 승전보를 보내오지만 짐은 진심으로 기쁘지 않다. 오삼계가 우두머리이니 악주와 예주를 함락해야 진정으로 경하할 만하다.” ——강희제

(출처: “강친왕이 복건의 적을 토벌하여 비록 승전을 거듭 보고하나 짐은 기뻐하지 않는다. 오삼계가 적의 괴수이니 오직 악주와 예주를 깨뜨려야 비로소 기쁠 것이다.” ——《강희조실록》)

만주족과 한족 장수들이 피땀 흘려 싸운 끝에 오삼계 군대를 대파했다. (공유 영역)

전선의 장수들이 청조의 기업(基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강희제는 도성에 앉아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강희 16년부터 20년(1677~1681년)까지는 청 군대가 적을 제압하고 승리하는 단계였다. 강희제는 오삼계가 최대의 적이며 그가 버티고 있는 호남이 제1의 전장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호남의 전황을 매우 중시했고 진압군의 주력을 호남 전선에 배치했다.

강희제는 대국적인 관점에서 섬서의 정예병을 호남으로 보내 다릉(茶陵), 유현(攸縣), 안인(安仁), 침주(郴州), 계양(桂陽) 등 10여 개 성읍을 잇달아 수복했다. 당시 오삼계는 형주에 머물며 광동을 침범하려 했으나 청 군대의 연이은 승리는 오삼계의 군사 계획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패퇴를 거듭하는 국면에서 오삼계는 사기를 돋우기 위해 강희 17년(1678년) 3월에 형주(衡州)에서 억지로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만에 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손자 오세번(吳世璠)이 뒤를 이었다. 오삼계의 죽음은 이미 흩어진 반란군의 군심(軍心)을 붕괴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강희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륙 양군에 협공을 명하여 악주를 신속히 취하게 했고 강희 18년(1679년) 정식으로 수복했다. 곧이어 호남 전역이 청 군대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후 강희제는 사천과 운귀 지역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 사천 전선에서는 한인(漢人) 장군을 중용하여 한인들로 구성된 녹기병을 주력으로 삼았고, 만주족 장수들은 후방 지원과 군량 운송을 맡으며 함께 작전하게 했다. 10월에 한 갈래 청 군대가 한중부(漢中府)를 수복하고 사천과 섬서 접경의 청석관(靑石關)에 다다랐으며, 또 다른 갈래는 약양(略陽)에 도착해 양평관(陽平關)을 취했다. 강희제의 치밀한 배치 아래 두 군대가 합류한 후 12월에 갈라져 사천으로 진군하니 그 기세가 대단하여 오삼계 군대를 대파했다. 19년 정월, 사천의 대부분이 평정되었다.

이제 두 군대는 운귀(雲貴) 지역을 압박했다. 격전 중 만주족 장군의 작전 실패로 오삼계 군대가 다시 사천을 침범하며 전황이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이를 기회로 삼아 오삼계 군대가 병력을 분산시켰으니 운남의 방어력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양광(兩廣 광동과 광서)을 평정한 군대를 집결시켜 운귀를 공략하게 했다.

강희 20년 초, 오세번은 사천의 병력을 운남으로 불러들여 마지막 발악을 하려 했다. 강희제는 여러 장군에게 즉시 진군해 오세번의 군대가 오기 전에 운남을 점령하라고 명했다. 동시에 한인 군대를 한 축으로 삼아 사천을 먼저 안정시킨 뒤 운남을 취하는 전략을 썼다. 3월에 이 정예부대가 사천 반란군을 추격했고 5월에 노주 등을 수복했으며 7월에 운남 무정주(武定州)에 진입했다. 9월에는 곤명(昆明)에 도착해 최종 결전을 기다렸다.

이때 강희제는 운남성 성곽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다. 만주족과 한족 장수들이 피땀 흘려 사흘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마침내 오삼계 군대를 대파했다. 9월 28일 오세번이 자살하고 반란군은 성 밖으로 나와 항복했다. 이로써 8년에 걸친 반란 진압 전쟁이 끝났다. 깊은 밤 승전보가 궁궐에 전해지자 강희제는 기뻐하며 《전평(滇平)-운남 평정》이라는 시를 지어 기념했다.

“이해와 곤지의 길 험난하더니
밤중에 승전보 장안에 닿았구나.
삼묘가 감화된 것 자랑 않으니
육조 땅 넓어진 것 잠시 기뻐하네.

洱海昆池道路難
捷書夜半到長安
未矜幹羽三苗格
乍喜征輸六詔寛

하늘 끝 금마애 멀리 거두고
군중에선 갓 벗은 철갑의 한기 녹이네.
몇 해를 노심초사하던 마음 되새기니
오늘에야 만국과 더불어 즐겁구나.

天末遠收金馬隘
軍中新解鐡衣寒
回思幾載焦勞意
此日方同萬國歡”[9]

반란군을 제거하자 철번 행동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삼번 중 오삼계의 번은 대역무도한 죄로 구족(九族)을 멸했고 남은 무리는 관노나 역부로 삼았다. 경정충과 상가희 두 왕은 항복한 점을 참작해 죄 있는 자는 처벌하고 충의로운 자는 관용을 베풀었다. 이로써 강희제는 삼번을 완전히 폐지하고 지방 제도를 통일했다.

주석:
[1][3] 《성무기(聖武記)》 권2: 《강희감정삼번기(康熙戡定三藩記)》.
[2] 《강희조실록》 권7: 강희 2년 2월 정사조.
[4][8] 《강희조실록》 권98: 강희 20년 12월 계사조.
[5] 《강희조실록》 권40: 강희 12년 3월 임오조.
[6] 《강희조실록》 권98: 강희 12년 3월 정유조.
[7] 《청조야사대관》 권5: 《유현초》.
[9] 《성조인황제어제문집》 권35: 《전평》.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6/n1213808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