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대제】 러시아를 물리쳐 용흥 지역을 수호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강희제가 성장함에 따라 그는 곳곳의 전란을 평정하고 혁혁한 무공을 세워 변방을 공고히 하고 사방이 귀순하게 했다. 사진은 강옹건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화하(華夏) 동북방,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에는 ‘만주(滿洲)’라는 복지(福地)가 있으니, 천 리에 펼쳐진 비옥한 들판과 풍부한 물산을 자랑한다. 만주족의 선조들이 그곳에서 번성하며 살아왔고, 금과 청조(淸朝)의 기업(基業)이 이곳에서 잉태되어 일어났다. 만주족의 마음속에 만주는 길상과 평안이라는 아름다운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더욱이 제국이 발상한 용흥(龍興)의 성지다.
그러나 청조 초기 만주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태평하고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청조가 중원을 차지하려 힘쓰는 틈을 타서, 더 북쪽의 유라시아 국가인 러시아——명청 시기에는 ‘나찰국(羅刹國)’으로 번역되었다——가 원정군을 보내 만주의 흑룡강 유역을 침입하여 야만적인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강희제가 계승한 기업(基業)은 사실 풍전등화와 같고 위기가 도처에 깔린 격동의 제국이었다. 남쪽에는 삼번(三藩)이 할거하고, 바다 너머에는 정씨 일가가 항청(抗淸)을 지속했으며, 북쪽에는 러시아인이 살육과 약탈을 일삼고, 서쪽에는 갈단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강희제가 성장함에 따라 그는 곳곳의 전란을 평정하고 혁혁한 무공을 세워 변방을 공고히 하고 사방이 귀순하게 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러시아 침략자들을 몰아냈을까?
변방 수비 강화
“와이카(瓦爾喀), 호이합(胡爾哈) 등 부족민들은 모두 흉포하고 간사한 무리이니, 바하이(巴海)는 영고탑(寧古塔) 장군으로서 반드시 교화를 잘 베풀어 먼 곳의 사람을 안무하려는 짐의 뜻에 부합하게 하라.” ——강희제

청 옹정 연간의 중국 지도. (공유 영역)
즉위 이래 강희제는 늘 근심 속에서 생활하며 각종 까다로운 난제와 위기를 처리해 왔다. 오배를 제거하고 삼번을 철폐하며 대만을 수복하기까지, 조정에서 지방으로, 내륙에서 해안 국경에 이르기까지 강희제가 마주한 시련은 끊임없이 격상되었으나, 그 덕분에 그는 더욱 강대하고 성숙하게 단련되었다. 이때 그는 이미 이립(而立 서른)의 나이를 지나 진정한 왕이 되어 있었으나, 동시에 또 다른 제국이 보내온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순치 연간에 러시아인이 침입하자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청군과 현지 백성들이 힘을 합쳐 러시아인을 흑룡강 중하류 지역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청조 내부에 우환이 겹쳐 북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게 되자 러시아 침략자들은 곧 권토중래했다. 강희 4년(1665년)에 이르러 러시아인은 상류의 니부초(尼布楚), 즉 오늘날 러시아의 네르친스크를 점령하고 동쪽과 남쪽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중러 접경지대 일대에서 러시아인은 니부초와 그 동쪽의 야크사(雅克薩, 알바진), 남쪽의 초고백흥(楚庫柏興, 셀렝긴스크)에 3대 침략 거점을 구축하고 흑룡강 중하류에 산재한 작은 거점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이 거점들을 이용해 현지의 여러 부족 백성을 끊임없이 침범하고 약탈하여, “자녀와 인삼, 담비(貂)를 거의 다 빼앗아 갔다.” [1]
이때 부족장이 반란하여 도주하는 사건도 발생하여 중러 간의 모순이 더욱 격화되었다. 다우르족의 추장 근특목이(根特木爾)는 러시아인의 침범을 피하고자 대대로 거주하던 니부초 일대에서 남쪽 청나라로 이주하여 팔기 구성원이 되었다. 그러나 강희 6년, 그는 갑자기 러시아에 투항해 니부초로 잠입해 도망쳤다. 강희 12년과 13년에도 계속해서 러시아로 도주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러시아인의 온갖 침략 행위를 마주한 강희제는 그들이 용흥지(龍興地 왕조가 발생한 터전)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내란을 처리하는 동시에 그는 북방 국경의 방어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단숨에 러시아인을 격퇴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방어 면에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신만주(新滿洲)’와 ‘포특합(布特哈) 팔기(八旗)’를 편성한 것이었다.
신만주란 입관(入關) 후에 기적(旗籍)에 편입된 병사들을 말하는데, 강희 원년(1662년)부터 조정은 신만주 조직에 공헌한 자들에게 군공에 따라 상을 내렸다. 강희 10년(1671년), 강희제는 조상의 능에 제사를 올리고 직접 성경(盛京, 심양)에 갔으며, 이후 북상하여 엽혁(葉赫, 지금의 길림성 사평四平시 철동鐵東구)에 이르러 영고탑 장군 바하이를 접견하고 영고탑 및 각 부족 백성의 풍토 인정을 물었다. 그는 또한 바하이에게 교화를 잘 베풀어 먼 곳의 사람을 안무하고, 병사들을 훈련하며 변방 수비를 강화하여 러시아인의 침범을 막으라고 명했다.
강희 12년(1673년), 관외에 대대로 살며 공물을 바쳐온 혁철족(赫哲族)이 청나라의 비호를 구하며 자발적으로 국경 내로 이주할 것을 요청하자, 바하이는 강희제의 유지에 따라 그들을 영고탑 부근으로 옮기고 인원수에 따라 40좌령(佐領)을 편성했다. 좌령이란 팔기의 기본 편성 단위로, 시기에 따라 관할 인원이 100여 명에서 300명에 이르렀다. 이후 혁철족은 신만주의 구성원이 되었고, 그 외에 고아랍족(庫雅拉族)도 신만주에 편입되었다. 최종적으로 신만주는 길림, 영고탑, 성경, 금주 등지에 분포했으며 총 85좌령, 인원은 1만 명 이상이었다.
포특합 팔기는 흑룡강 중상류 지역의 에벤키, 다우르, 오로촌족을 말하며, 이들을 통칭하여 ‘소론부(索倫部)’라 했다. 사냥에 능했기에 만주어로 ‘사냥’을 뜻하는 ‘포특합’으로 이름을 붙였다. 청나라 입관 전, 소론부는 러시아인의 침범을 피하고자 눈강 부근으로 이주했다. 강희제 즉위 초기에 그들을 새로 좌령으로 편성하고 우두머리를 두었으며, 소론 부도통(副都統)을 두어 통합 관리하게 했는데 이것이 포특합 팔기의 유래다.
청조에 의지한 이 부족들은 조정에서 하사한 가옥과 토지 등 재산을 소유하여 추운 관외에서 대대로 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경제를 번영시키는 백성인 동시에 변방 수비를 강화하는 병원(兵源)이 되어, 변방을 지키고 러시아인을 몰아내는 주요 역량이 되었다.
동북을 영원히 수호
“짐이 13세에 친정(親政)한 이후로 흑룡강 유역의 상황에 관심을 두고 그 토지의 지세, 도로의 원근 및 인물의 성정을 세밀히 살펴왔다.” ——강희제

청군이 아이훈(璦琿)성에 도착한 후 즉시 병사를 두어 방어하고, 규모가 더 크고 방어력이 더 강한 흑룡강 신성을 확충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청 낭세녕이 그린 《아옥석지모탕구도(阿玉錫持矛蕩寇圖)–아옥석이 창을 들고 적을 물리치는 그림》. (공유 영역)
어진 정치로 나라를 다스린 강희제는 침입한 러시아인에 대해서도 화합을 귀하게 여기고 선례후병(先禮後兵)의 전략을 취했다. 친정할 때부터 강희제는 러시아 측과 최소 여섯 차례의 교섭이나 협상을 진행했다.
첫째는 러시아인이 국경 분쟁을 멈추고 청조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한 것이고,
둘째는 도망친 추장 근특목이를 돌려받아 대청제국의 법도와 존엄을 지키려 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두 나라가 평등하게 무역하고 양호한 외교 관계를 맺기를 바라는 뜻을 전하며 명군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러시아 사절단은 강희제의 도량과 성의를 무시하고 차일피일 미루었으며, 러시아군은 북방에서 니부초와 야크사를 거점으로 삼아 정기리강(精奇裏江)과 액이고납하(額爾古納河) 일대까지 마수를 뻗쳤다. 이에 강희제는 의로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너희가 만약 국경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중러 양국은 곧 국경에서 대전을 치르게 될 것이며, 짐은 반드시 대군을 소집해 너희를 몰아낼 것이니 그때 후회해도 늦으리라.”[2] 여러 차례의 교섭과 협상, 경고조차 무효가 되자 강희제는 더는 참지 않기로 결정했고, 고향을 지키기 위한 대전이 곧 다가왔다.
강희 20년(1681년), 삼번의 난이 평정되자 강희제는 더 많은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청조 동북방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군사적 전쟁과 외교적 협상, 방어 시설 구축을 병행하는 전략을 따르며 세심한 준비 작업을 마쳤다. 21년 상반기에 강희제는 다시 동방을 순행하여 성경에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린 후 북상하며 직접 변방 배치를 시찰했다. 9월에는 부도통 낭담(郎談), 팽춘(彭春)에게 사슴 사냥을 명분으로 수백 명을 이끌고 야크사에 가서 지리 형세와 교통을 정탐하게 했다.
곧 낭담 등이 경성으로 돌아와 보고했다. “나찰(러시아인)을 취하는 것은 매우 쉬우니 병사 3,000명이면 족합니다.” [3] 그러면서 조속히 출병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충분한 방어 작업을 하는 것이 성급하게 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에 다음과 같이 안배했다. 영고탑 장군 바하이는 남아서 지키게 하고, 살포소(薩布素)와 와리호(瓦禮祜)를 영고탑 부도통으로 임명하여 병사 1,500명을 조발했다. 전함을 건조하고 홍이포와 조총 등 각종 무기를 갖추어 흑룡강(원 아이훈성)과 호마이(呼馬爾) 두 성을 지키게 했다. 영고탑 군대는 그곳에 목성(木城)을 쌓고 땅을 일구며 러시아와 대치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강희 22년(1683년), 영고탑 장졸들과 그 가족들이 차례로 두 성(호마이는 후에 액소리로 바뀌었으며 지금 러시아 경내에 있음)으로 이주했다. 최종 배치는 각 성에 1,000명씩이었다. 강희제는 청군이 흑룡강에 성을 쌓고 영원히 지키며, 변방 수비와 둔전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승리를 지켜내는 장기적인 목표를 실현하기를 바랐다.
청군이 아이훈성에 도착한 후 즉시 병사를 두어 방어하고 규모가 더 크고 방어력이 더 강한 흑룡강 신성(新城)을 확충하기 시작했다. 살포소는 흑룡강 장군으로 승진했는데, 이 새로운 직위는 성경(盛京) 장군, 영고탑(寧古塔) 장군(후에 길림 장군으로 변경)과 함께 훗날 동북 3성의 기초를 닦았다. 살포소는 또한 장졸들을 이끌고 둔전하여 식량을 저축하고 현지 농사를 감독하여 충분한 식량 공급을 보장했다. 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조정은 배 만드는 공장을 세우고 역참을 증설하며 물자 운송 노선을 개척하여 전쟁의 조건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다.
강희제가 병사를 보내 변방을 지키게 한 것은 러시아인이 흑룡강 중하류로 확장하는 것을 강력히 저지했다. 이와 병행해 그는 강력한 외교 공세를 펼쳤다. 강희제는 러시아에 글을 보내 청군이 변방을 지키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결심을 표명했다. 흑룡강 상류의 요충지이자 전략적 요지인 야크사는 청군이 최우선으로 공략해야 할 성읍이 되었다.
야크사 결전
“우리 군대는 병마가 강성하고 배와 대포가 예리하니 러시아는 상대가 되지 못하며, 반드시 점령지를 돌려주고 항복할 것이다. 너희는 그때 단 한 사람도 죽이지 말고 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 짐의 회유수원(懷柔綏遠 이민족을 무력 진압보다 덕으로 포용하고 달래려는 마음)하는 마음을 드러내라.” ——강희제

청군의 야크사성 공격. (공유 영역)
러시아인을 무력으로 정벌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강희제는 여전히 인의(仁義)와 자비의 마음을 품어 러시아 포로들을 우대했다. 또한 그들을 러시아 정부에 보내 자신의 뜻을 전달하게 하여 러시아인이 동북 영토에서 철수하여 전쟁을 피하기를 바랐다. 강희 24년(1685년) 정월, 강희제는 조서를 내려 정식으로 야크사에 군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조서에서 러시아인이 국경을 침범하고 도망자를 거두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잔혹한 행위를 낱낱이 열거했다. 만약 러시아인이 제때 철군하고 도망자를 돌려보낸다면 두 나라는 아고(雅庫 지금의 러시아 야쿠츠크)를 경계로 화친하고 무역을 통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청군이 기회를 보아 행동할 것이라 했다.
4월, 팽춘(彭春)이 이끄는 3,000명의 청군이 어명을 받들어 야크사로 달려갔다. 그동안 조정은 러시아 포로 6명을 귀국시켜 강희제의 고심 어린 훈계를 전하게 했다. 만약 러시아군이 신속히 철수한다면 강희제는 즉시 청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여 두 나라 국경이 전란을 면하고 백성이 평안을 누리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약 한 달 후 청군이 야크사성 아래 이르러 먼저 포로를 성안으로 보내 공문 두 통을 전달하며 러시아군에 마지막 경고를 했다. 러시아군은 성이 견고함을 믿고 오만한 말로 철수를 거부했고, 청군은 공격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5월 23일, 청군은 수로와 육로로 나누어 진을 쳤고 24일 밤에는 진 앞에 각종 화기를 배치했다. 25일 새벽 포화가 일제히 터지며 청군은 맹렬한 공성전을 시작했다. 야크사성은 즉시 포연이 자욱해지고 불길이 치솟으며 혼란에 빠졌다. 러시아군은 크게 놀라 곧 갈 곳을 잃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사전 준비가 충분했기 때문인지 제1차 야크사 수복전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러시아 독군(督軍)은 심지어 평생 다시는 야크사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팽춘은 “단 한 사람도 죽이지 말고 고국으로 돌려보내라” [4]는 강희제의 유지를 받들어 700여 명의 포로를 풀어주었으며, 그들이 자신의 무기와 재산을 가지고 가게 허용했다. 또한 귀국을 원치 않는 40여 명은 적절히 안치했다. 그 외에 팽춘은 성안에 잡혀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러한 전후의 선행은 모두 강희제의 가상을 받았다.
6월, 강희제는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며 전선의 장졸들에게 야크사의 방어 작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아가면 저들이 물러나고 내가 물러나면 저들이 나아오니, 양측이 싸움을 반복하여 전쟁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9월에 강희제는 청군에 성을 수리하고 역참을 세워 동북과 경성 사이에 막힘없는 통신 노선을 구축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팽춘 등은 어명을 따르지 않고 야크사를 불태운 후 멋대로 철군했다. 간사한 러시아인은 이 소식을 듣고 두 달 후 800여 명의 러시아군이 다시 야크사를 점령했다.
강희 25년(1686년) 2월에야 강희제는 러시아군이 다시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제2차 야크사 수복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번 출정의 통령(統領)은 흑룡강 장군 살포소가 맡았다. 5월에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야크사로 직행하여 남북 양로에서 맹공을 퍼부어 적 100여 명을 죽이고 러시아군을 성안으로 몰아넣어 굳게 지키게 했다.
양군은 대치 국면에 빠졌고, 과도한 사상을 피하고자 살포소는 포위전을 택하기로 했다. 성 주위에 보루를 쌓고 참호를 파서 야크사를 고립된 성으로 만들었다. 러시아군은 겹겹이 포위되어 시일이 지나자 군량과 탄약이 바닥나는 두려운 지경에 처했다. 죽기만을 기다리던 800여 명 중 마지막에 남은 자는 불과 66명뿐이었으니 성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제야 러시아 정부는 후회하며 9월에 사절단을 밤낮으로 달려 북경으로 보내 중러 국경에 대해 협상할 것에 동의하며, 청군이 야크사 포위를 멈추고 고로빈 백작의 사절단이 경성에 도착하기를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강희제는 예우를 갖춰 접대하고 즉시 포위를 풀라는 명을 내려 성안의 러시아인이 자유롭게 출입하게 함으로써 어진 임금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제2차 야크사 전쟁이 끝나고 중러 관계는 화친 협상으로 나아갔다.
니부초 조약
“짐은 니부초, 야크사, 흑룡강 유역 및 이 강으로 통하는 하천과 시내가 모두 우리 청나라의 영토라고 생각하며, 러시아인에게 단 한 치도 내어줄 수 없다.” ——강희제
협상 과정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청 조정의 거듭된 재촉 끝에 고로빈의 사절단은 강희 27년(1688년)에야 북경에 도착했고 협상 장소를 셀렝게(色棱額)로 정했다. 5월에 청 조정을 대표하는 협상 사절단이 출발했으나 가이카 몽골 지역에서 갈단의 병란을 만나 부득이 되돌아와야 했고 다시 회담 장소를 정했다.
28년 4월 러시아 사신이 다시 입경하자 대신 색액도(索額圖)가 나서 접대하고 새로운 회담 장소를 니부초로 변경했다. 이번 청 조정의 사절단에는 색액도, 동국강(佟國綱), 낭담, 살포소 등 많은 명신과 명장이 모였다. 월말에 청 사절단이 다시 길을 떠났다. 협상의 가장 이상적인 결과는 만주 지역과 점령당한 니부초, 야크사 등지가 모두 대청(大淸)의 소유가 되어 조금도 내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갈단의 잠재적 위협을 예견하고 있었기에, 화친이 결렬되어 양면으로 적을 맞는 상황을 피하고자 사신에게 당부했다. “협상을 시작할 때는 니부초를 경계로 삼되, 만약 러시아인이 니부초를 간청하면 에르구네(額爾古納)를 경계로 삼아라.” [5]
탐욕스러운 러시아 측은 흑룡강 북안 전체를 점거하려 망동했다. 청 사절단은 강희제의 유지에 따라 이치로써 다투었고, 마침내 28년 7월 24일 양측은 합의에 도달하여 《중러 니부초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중러 동부 국경과 무역 문제가 확정되었다.
니부초 조약에 따라 고르비차강(格爾必齊河), 외흥안령, 에르구네강 선이 중러 양국의 국경선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군은 야크사 및 기타 청조 경내 지역에서 철수해야 했고 니부초는 러시아 소유가 되었다. 강희제는 국경 일대에 경계비를 세우고 만주어, 러시아어, 라틴어로 조약 내용을 새겨 정기적으로 순시하게 했다. 또한 흑룡강 유역에 초소를 증설하고 정기적으로 국경을 순찰하여 러시아인이 경계를 넘어 침범하는 것을 방지했다.
《니부초 조약》은 중국이 러시아는 물론 외국과 맺은 첫 번째 조약이라 할 수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이른 국제법 조약 중 하나이다. 공식 텍스트는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며 중문과 러시아어 판본도 있다. 청나라에 있어 이 조약의 의미는 중대했다. 이후 170여 년 동안 중러 양국은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동북 지역도 오랫동안 안정과 평화를 회복하여 청 왕조에 안정되고 풍요로운 대후방(大後方)을 제공했다. 뒤이어 나타난 청조의 번영과 강건성세의 출현은 모두 이 조약의 성립 덕분이었다.
강희제는 일찍이 “짐은 어짊으로 천하를 다스리며 평소 살생을 즐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6] 중화민족은 예로부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숭상해 왔으며, 강희제는 러시아 침략자를 물리치는 과정에서도 전통적인 미덕을 보여주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러시아군을 훈계하여 두 나라의 전쟁을 해소하려 노력했으니 인(仁)이요, 포로를 선대하고 이웃 나라를 대우하며 고립된 성의 남은 군사를 구해주었으니 의(義)요, 여러 번 글을 보낸 후에 군사를 써서 협상의 성의를 표했으니 예(禮)요, 전략을 세우고 깊이 생각하여 공격과 방어에 빈틈이 없었으니 지(智)요, 한 말은 반드시 지키고 맹약을 준수하며 국토를 굳게 지켜 화하의 국위를 널리 떨쳤으니 신(信)이다.
또한 《니부초 조약》은 ‘중국’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함의를 부여하여 동북과 몽골 지역을 포함한 청 왕조를 가리키게 되었는데, 이는 ‘중국’을 사용하여 청나라를 지칭한 최초의 국제법 문서이기도 하다. 중국은 초기 ‘중원’이나 중화 정통 왕조 등 모호한 개념에서 국가 주권의 의미를 지닌 어휘로 전환되었으니 곧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국의 개념이다.
주석:
[1] 《광양잡기》 권2.
[2] 《명견대신선유나찰퇴환침지탐피정형(命遣大臣宣諭羅刹退還侵地探彼情形)》: “너희는 마땅히 너희 사람들을 옮겨야 하며, 만약 옮기지 않으면 국경에 다툼이 일어날 것이니, 내가 무력으로 반드시 너희를 몰아낼 것이라, 그때 후회해도 소용없으리라.”
[3] 《강희조실록》 권105: 강희 21년 12월 경자 조.
[4][6] 《강희조실록》 권120: 강희 24년 5월 계사 조.
[5] 《강희조실록》 권139: 강희 28년 4월 임진 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6/n12138633.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