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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삼대 성세천조의 첫째 서한 (2)

–(기원전 202년—서기 8년)

심연

【정견망】

서한 왕조 정식 건립

기원전 201년 정월, 제후 및 장상들이 공동으로 한왕(漢王)을 높여 황제로 청했다.

한왕이 말했다.

“내가 듣기로 황제의 존호는 현능(賢能)한 사람이라야 차지할 수 있다고 했다. 빈말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니 황제의 존호를 감당할 수 없소.”

그러자 대신들이 모두 말했다.

“대왕께서는 평민에서 일어나 포악한 역도를 주벌하고 사해를 평정하셨으며, 공이 있는 이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왕후(王侯)로 봉하셨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황제 존호를 칭하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이 대왕의 봉상을 모두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 무리는 죽음으로써 청하고자 합니다.”

한왕이 재삼 사양하다가 비로소 사수(汜水) 북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했다. 황제에 오른 후 고조는 이성왕(異姓王)을 분봉하기 시작했다. 제왕(齊王) 한신을 초왕(楚王)으로 봉하고 하비(下邳 지금의 강소 서주)에 도읍하게 했다. 건성후(建成侯) 팽월(彭越)을 양왕(梁王)으로 봉하고 정도(定陶 지금의 산동 하택)에 도읍하게 했다. 원래의 한왕(韓王) 신(信)은 여전히 한왕으로 삼고 양적(陽翟 지금의 하남 우주禹州)에 도읍하게 했다.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를 장사왕(長沙王)으로 고쳐 봉하고 임상(臨湘 지금의 호남 임상시)에 도읍하게 했다. 회남왕(淮南王) 경포(鯨布), 연왕(燕王) 장도(臧荼), 조왕(趙王) 장오(張敖)의 봉호는 모두 바꾸지 않았다.

* 고조가 성패의 원인을 논하다

고조가 낙양 남궁(南宮)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술자리에서 고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천하를 얻고 항우가 천하를 잃은 이유를 물었다. 대신 고기(高起), 왕릉(王陵)은 “고조께서 천하를 얻은 원인이 천하 사람들과 이익을 함께 나누고자 했기 때문인 반면, 항우는 현능한 사람을 시기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공이 있으면 남을 시기하고 재능이 있으면 남을 의심했으며, 승전해도 사람들에게 공을 주지 않고 토지를 빼앗아도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천하를 잃은 원인”이라 여겼다.

그러자 고조가 말했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오. 만약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내어 천리 밖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라면 나는 장자방(張子房 장량)만 못하오. 국가를 진수(鎭守)하고 백성을 안무(按撫)하며 군량을 공급하고 식량이 끊기지 않게 보장하는 것이라면 나는 소하(蕭何)만 못하오. 백만 대군을 통솔하여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것이라면 나는 한신만 못하오. 이 세 사람은 모두 사람 중의 준걸(俊傑)인데 내가 이들을 임용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원인이오. 항우는 비록 범증(范增) 한 사람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임용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그가 내게 사로잡힌 원인이오.”

* 한초(漢初) 고조가 취한 조치

고조는 황제를 칭한 후, 여전히 견고하지 못한 강산과 전화를 겪으며 평화를 기원하는 백성들을 마주하여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첫째는 관중(關中)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당시의 이유는 관중의 지세가 험고하고 면적이 비교적 넓으며 자원이 풍부하여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렵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이성(異性) 제후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동성왕(同性王)을 분봉한 것이다. 고조는 먼저 군대를 이끌고 연왕 장도와 항우의 옛 장수 이기(利幾)의 반란을 평정했다. 이후 한신(韓信)의 권력을 박탈할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기원전 201년 12월,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 초왕 한신이 모반을 꾀한다고 보고하자 고조는 좌우 대신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결국 고조는 진평의 계책을 채용하여 거짓으로 운몽택을 유람하러 간다고 하고 진현에서 제후들을 소집했으며, 초왕 한신이 마중을 나왔을 때 기회를 틈타 그를 구금했다.

한신이 말했다.

“과연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뛰어난 사냥개는 삶겨 죽고,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소장되며, 적국이 파멸하면 모신(謀臣)은 죽는다’고 하더니, 이제 천하가 이미 평안해졌으니 내가 본래 삶겨 죽는 것이 마땅하구나!” 했다.

고조가 말했다.

“누군가 그대가 모반했다고 고발했소.” 그리고는 곧 한신에게 형구를 채웠다. 낙양에 이르러 한신의 죄를 사면하고 회음후(淮陰侯)로 고쳐 봉했으며, 그의 원래 봉지를 두 개의 제후국(侯國)으로 나누었다. 한신은 한왕이 자신의 재능을 꺼리고 시기함을 알고 자주 병을 핑계로 조회나 행사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한신은 밤낮으로 원망하며 집에서 우울하게 지냈고, 자신이 강후(絳侯) 주발이나 관영과 동등한 지위에 처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동시에 고조는 동성왕을 분봉하기 시작하여 장군 유가(劉賈 유방의 사촌 형제)를 형왕(荊王)으로 봉하고 회수 동쪽을 통치하게 했다. 또 자신의 이복 동생인 유교(劉交)를 초왕(楚王)으로 봉하여 회수 서쪽을 통치하게 했다. 황자 유비(劉肥)를 제왕(齊王)으로 봉하고 70여 개의 성을 통할하게 하니, 백성 중 제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자는 모두 제나라에 속하게 했다. 그리고 한왕 신은 태원군(太原郡)으로 천도하게 했다.

기원전 200년, 한왕 신이 태원에서 흉노와 함께 모반했다. 고조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듬해 반란을 평정했다.

고조가 군대를 돌려 장안에 도착했다. 이때 장안의 장락궁(長樂宮)이 이미 완공되어 승상 소하 이하의 관원들이 모두 장안으로 옮겨와 정무를 보았다. 승상 소하가 미앙궁(未央宮) 건설을 주관했는데, 미앙궁은 동궐(東闕), 북궐(北闕), 전전(前殿), 무고(武庫), 태창(太倉)을 포함한다.

고조가 돌아와 궁전이 매우 장관인 것을 보고 크게 노해 소하에게 말했다.

“천하가 동탕하고 분란하여 고통스럽게 전쟁한 지 몇 년인데, 성패를 아직 확실히 알 수 없거늘 어찌하여 궁전을 이토록 과도하게 호화롭고 아름답게 지었는가?”

소하가 대답했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이용해 궁전을 완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천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으니 궁전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천자의 위엄을 세울 방법이 없고, 또한 후세가 초과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자 고조가 그제야 기뻐했다.

이해에 고조는 원래 초나라의 귀족인 소씨(昭氏), 굴씨(屈氏), 경씨(景氏), 회씨(懷氏)와 원래 제나라 귀족인 전씨(田氏) 등 귀족들을 모두 관중으로 이주시켰다.

기원전 197년, 조나라 상국 진희(陳豨)가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조가 친히 병마를 이끌고 가는데 한신은 병을 핑계로 수종하지 않았다. 몰래 진희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그대가 기병하기만 하면 내가 여기에서 당신을 돕겠소.”라고 했다. 한신은 가신들과 상의하여 밤에 거짓 조서를 전해 각 관부에서 복역하는 죄수들과 노예들을 사면하고, 이들을 동원해 여후와 태자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배치를 마치고 진희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의 가신 중 한 사람이 한신에게 죄를 지었는데 한신이 그를 구금하고 죽이려 했다. 그의 동생이 글을 올려 사변을 고하여 여후에게 한신이 반란을 준비하는 정황을 고발했다. 여후는 곧 소하와 모의하여 한신을 속여 궁중으로 유인한 후 죽였다. 이어서 한신의 삼족을 멸했다.

기원전 196년 여름, 양왕 팽월이 모반하자 고조는 그의 왕위를 폐하고 그를 촉 땅으로 유배 보냈다. 얼마 후 그가 다시 모반하려 하자 삼족을 멸했다. 고조는 황자 유회(劉恢)를 양왕으로 세우고 황자 유우(劉友)를 회양왕(淮陽王)으로 세웠다.

7월에 회남왕 경포가 반란을 일으켜 동쪽으로 형왕 유가의 지반을 삼키고 다시 북쪽으로 회하를 건너니, 초왕 유교는 핍박에 의해 설국(薛國)으로 도망쳤다. 고조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황자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세웠다.

이듬해 10월, 고조는 경포의 군대를 격패시켰고 경포가 도망치자 고조는 별장(別將)을 보내 계속 추격하게 하여 후에 그를 죽였다. 그 후 패후(沛侯) 유비(劉濞)를 오왕(吳王)으로 봉하고 황자 유건(劉建)을 연왕(燕王)으로 세웠다.

이로써 대부분의 이성왕이 기본적으로 소멸되고 동성의 왕으로 대체되었으니 천하는 비로소 진정으로 유씨의 천하가 되었다.

고조가 취한 세 번째 조치는 율령(律令)을 제정한 것이다. 당년 관중에 들어가 진나라를 망하게 했을 때 유방은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하고 관중 부로(父老)들과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맺었으나, 그것은 단지 임시 방편이었으므로 오랫동안 시행할 수는 없었다.

서한이 건립된 후 고조는 곧 승상 소하에게 명하여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게 했는데, 그가 제정한 법률은 거의 진대(秦代)의 원래 율령이어었다. 또 원래 진의 박사였던 숙손통(叔孫通)에게 명하여 조의(朝儀 조례의식)를 제정하게 하니 이 역시 진대의 조의와 차이가 없었다. 요컨대 서한 초의 율령 제도는 기본적으로 진 조정의 옛 율(律)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그중 아주 가혹한 부분만 폐지했다. 이외에도 고조는 얼마간 ‘백성과 더불어 휴식하는’ 정책을 취하여 일부 지방 백성들의 부세(賦稅) 등을 면제해 주었다.

고조가 취한 상술한 조치들은 훗날 서한의 발전을 위해 기초를 다져놓았다.

* 고조의 죽음

고조가 경포를 토벌할 때 날아온 화살에 맞은 적이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병이 났다. 병이 매우 위중해지자 여후(呂后)가 그를 위해 좋은 의사를 청해왔다.

의사가 궁에 들어와 알현하자 고조가 의사에게 병세가 어떠한지 물었다.

의사가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고조가 그를 꾸짖어 말했다.

“나 같은 일개 평민이 석 자 검을 손에 쥐고 마침내 천하를 얻었으니 이것이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결정되는 법이거늘 비록 네가 편작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을 마치고는 그에게 병을 치료하지 못하게 하고 황금 오십 근을 상으로 주어 내보냈다.

기원전 195년 4월 갑진일, 고조가 장락궁에서 서거했다. 병인일에 장릉(長陵)에 고조를 안장하고 관을 내려 안장하기를 마치자 태자가 태상황묘에 왔다.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고조께서는 평민에서 일어나 난세를 다스리고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하셨으며 천하를 평정하셨으니 한조의 개국 황제이시니 공로가 가장 높으십니다.” 하고 존호를 올려 고(高)황제라 칭했다. 태자가 황제의 호를 계승하니 바로 효혜제(孝惠帝)다. 또 명령을 내려 각 군국 제후들이 모두 고조묘를 세우고 매년 제때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효혜제의 무위이치(無爲而治)

고조가 세상을 떠난 후 여후가 낳은 아들이 즉위하니 곧 효혜제다. 효혜제는 사람됨이 충후하고 인자했으나 성격이 다소 연약했다.

여후는 시기심이 강한 여인으로, 그녀는 고조의 총애를 받았던 척희(戚姬)를 심하게 질투했다. 이 때문에 고조가 죽은 후 척희와 그녀의 아들인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를 제거하고자 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조왕을 서울로 불렀으나 모두 조왕 수하의 승상인 건평후 주창(周昌)에게 가로막혔다. 여후가 매우 노하여 사람을 보내 주창을 소환했다. 주창이 장안에 소환된 후 여후는 다시 사람을 보내 조왕을 불렀다. 조왕이 서울로 출발했다. 인자한 효혜제는 태후가 조왕을 미워함을 알고 친히 패상(霸上)까지 마중 나갔으며 그와 함께 궁으로 돌아와 친히 보호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잤다. 때문에 태후가 조왕을 죽이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효혜 원년(기원전 194) 12월 어느 날 이른 아침, 혜제가 밖으로 활을 쏘러 나갔다. 조왕은 나이가 어려 일찍 일어날 수 없었다. 태후는 조왕이 홀로 궁중에 있음을 알고 사람을 보내 독주를 가져다 마시게 했다. 혜제가 궁으로 돌아왔을 때는 조왕이 이미 죽어 있었다. 이에 곧 회양왕 유우(劉友)를 옮겨 조왕으로 삼았다.

여태후는 즉시 사람을 보내 척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눈을 파내며 귀를 그을려 먹게 하고 벙어리 약을 먹인 뒤 돼지우리에 던져놓고 그녀를 ‘인저(人豬)’라 부르게 했다. 며칠 후 태후가 혜제를 불러 인저를 보게 했다. 혜제가 보고 누구인지 묻고 나서야 비로소 이가 척부인임을 알고 이에 대곡하다가 이로부터 병이 나 일 년 남짓 일어나지 못했다.

혜제가 사람을 보내 태후에게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저는 태후의 아들로서 더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혜제는 이때부터 매일 술을 마시고 놀면서 방종했고 조정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줄곧 병을 앓았다.

혜제 7년(기원전 188) 가을 8월 무인일, 효혜제가 서거했다.

효혜제가 재위할 때 백성들은 막 전국 시기의 고난에서 벗어났으므로 군신이 모두 무위이치(無爲而治)를 통해 쉬면서 휴양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혜제는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맞잡은 채 한가하고 무위했다. 형벌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매우 적었다. 백성들은 전심으로 농경에 종사하여 의식도 점점 풍족해졌다.

여씨 전권(專權) 시기

여태후는 질투심이 매우 강하고 성격이 비교적 잔인하고 악독한 외에도 권력욕이 매우 심했다. 효혜제가 재위하는 기간에는 그녀가 권력을 탈취하는 것에 오히려 기꺼함이 있었으나, 효혜제가 세상을 떠난 후 여태후는 먼저 여태(呂台), 여산(呂産), 여록(呂祿)을 장군으로 삼아 양궁(兩宮) 호위대와 남북 이군(二軍)을 지휘하게 했으며 여씨 일가들을 궁중에 들이니 여씨 가문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태자가 즉위하여 황제가 되어 고조묘에 가 전례(典禮)를 거행하고 고조에게 품고했다. 소제(少帝) 원년(기원전 187), 조정의 호령이 완전히 태후에게서 나왔다. 태후가 황제의 직권을 행한 후 대신들을 소집해 상의하며 여러 여씨를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

우승상 왕릉이 말했다.

“고제께서 일찍이 백마를 잡아 대신들과 맹세를 세우시기를 ‘유씨 자제가 아닌데 왕을 칭하는 자는 천하가 공동으로 그를 주살한다’ 하셨습니다. 지금 만약 여씨를 왕으로 봉한다면 이는 약속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태후가 매우 불쾌해했다. 다시 우승상 진평(陳平)과 강후 주발(周勃)에게 물었다. 주발 등은 대한(大漢)의 천하를 보전하고 유씨 후대를 안정시키기 위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11월, 태후가 왕릉을 파면하고자 하여 그를 황제의 태부(太傅)로 임명하고 우승상의 실권을 박탈했다. 왕릉은 이에 병을 칭하고 사직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후는 좌승상 진평을 우승상으로 삼고 자신의 심복인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롤 좌승상으로 삼았다. 심이기는 원래 태후의 사인(舍人)으로 일찍이 태후를 따라 항우 군중에 떨어진 적이 있어 매우 총신(寵信)을 얻었다. 이 때문에 조정 대신들이 정무를 처리할 때 모두 그를 통해 결정해야 했다.

기원전 186년 4월, 태후는 여러 여씨를 왕으로 분봉했다.

소제는 효혜 황후가 친히 낳은 자식이 아니었다. 당시 효혜 황후는 아들이 없어 거짓으로 임신한 척하다가 후궁이 낳은 아이를 데려와 자신이 낳은 아이라고 말하고 아이의 생모를 죽인 뒤 그를 태자로 세웠다. 혜제가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황제로 올랐다.

훗날 황제가 대략 철이 들었을 때 우연히 자신의 어머니가 이미 죽었고 자신은 황후의 친아들이 아님을 듣고는 곧 원망의 말을 입에 담아 말하기를 “황후가 어찌 내 어머니를 죽이고 나를 자신의 아들이라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지금은 아직 어리지만 장성한 후에는 내가 반란을 일으키겠다.” 했다. 태후가 이 일을 들은 후 그가 장래에 난을 일으킬까 매우 염려하여 그를 영항궁(永巷宮)에 가두고 황제가 중병에 걸렸다고 하면서 좌우 대신 중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훗날 다시 이를 빌미로 그의 제위를 폐하고 몰래 죽였다.

5월 병진일, 태후는 상산왕(常山王) 유의(劉義)를 황제로 세우고 이름을 유홍(劉弘)으로 고쳤다. 원년(元年)으로 고치지 않은 것은 태후가 황제의 직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후(軹侯) 유조(劉朝)를 상산왕으로 고쳐 봉했다. 태위(太尉)의 관직을 설치하여 강후 주발이 태위가 되었다.

7년(기원전 181) 정월, 태후가 조왕 유우(劉友)를 서울로 불렀다. 유우의 왕후는 여씨의 딸이었는데 유우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다른 희첩들을 좋아하니 여씨의 딸이 매우 질투하여 노한 끝에 집을 떠나 여후 앞에서 유우를 비방했기 때문이다. 태후가 대노해 조왕을 서울로 불러 가두고 결국 굶겨 죽였다. 조왕이 죽은 후 평민의 장례에 따라 그를 장안 백성들의 무덤 곁에 묻었다. 기축일에 일식이 발생하여 대낮이 밤과 같이 변했다. 태후가 매우 혐오하고 마음속으로 우울해하며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나 때문이로다.” 했다.

2월, 양왕 유회(劉恢)를 조왕으로 고쳐 봉했다. 여왕(呂王) 여산은 고쳐서 양왕이 되었다. 양왕 유회가 조왕으로 고쳐 봉해진 후 마음속으로 기뻐하지 않았다. 훗날 총희가 태후의 딸이자 자신의 왕후에 의해 해를 입어 죽자 조왕은 내심 비통해 하며 자살했다. 태후는 이 일을 안 후 조왕이 여인을 위해 종묘를 제사 지내는 예의조차 버렸다고 여겨 이에 그의 후대의 왕위 계승권을 폐지했다.

기원전 179년 3월 중순, 태후가 재앙을 없애고 복을 구하는 불제(祓除)를 거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도정(軹道亭)을 지나다가 한 물건이 마치 검은 개와 같은 것을 보았는데 갑자기 그녀의 겨드랑이를 들이받고는 문득 다시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점치게 하니 조왕 유여의가일으킨 짓이라 하였고, 이때부터 태후는 겨드랑이가 아픈 병을 얻었다.

7월 중순, 태후의 병이 위중해지자 여씨 형제들에게 반드시 병권(兵權)을 쥐고 있어야 한다고 고했다.

태후가 세상을 떠난 후 고조의 아들들과 노신 주발, 관영, 진평 등은 한바탕 모의를 거쳐 여씨 세력을 하나하나 소멸시켰다. 여씨 일족을 소멸한 후 조정의 대신들이 함께 비밀리 상의하여, 인효(仁孝)하고 관후(寬厚)하며 외가가 근신하고 선량한 고조의 아들 중 연장자인 대왕(代王) 유항(劉恒)을 천자로 받들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소제(少帝)는 죽임을 당했다.

이로부터 대왕이 천자로 세워졌으니 죽은 후의 시호는 효문(孝文)황제다.

여후가 전권할 때 비록 황제 직권을 대행했으나 효혜제 때와 마찬가지로 농업 생산을 중시하고 기본적으로 무위이치했으므로 백성들은 계속 휴양 생식할 수 있었고 천하도 기본적으로 편안하고 무사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