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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삼대 성세천조(盛世天朝)의 첫째 서한(西漢) (1)

–(기원전 202년—서기 8년)

심연

【정견망】

단명한 진조(秦朝)가 막을 내린 후, 천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미 멸망했던 전국시대 각 제후국의 후예들이 앞다투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천하를 다투는 전쟁에 가담했다. 이때 항우와 유방의 실력이 가장 강했으며 호소력 또한 가장 컸다. 이로 인해 역사라는 큰 무대에는 홍문연(鴻門宴), 소하(蕭何)가 달밤에 한신(韓信)을 쫓아간 일, 패왕별희(霸王別姬), 해하(垓下)의 포위, 사면초가(四面楚歌) 등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들이 남게 되었다.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지닌 한신의 도움으로 상창(上蒼)은 결국 사람을 알아보고 잘 기용하며 인의(仁義)를 행할 줄 아는 유방을 선택해 천하를 통일하게 했다. 이로써 또 하나의 찬란하고 다채로운 왕조(王朝)의 서막이 열렸다.

진 제국이 불과 15년 만에 멸망한 것은 거울로 삼기에 멀지 않았다. 때문에 한조 개국 군왕은 이로 인해 근심과 우려가 깊었으며,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무력으로 타국을 정복할 수는 있으나 나라를 보존하는 데는 덕치(德治)에 의지해야 함을 깨달았다. 고조 유방은 보위에 오른 후 신하들과 함께 자신이 승리한 원인에 대해 토론했다. 때문에 한대(漢代)는 매우 ‘자각적’으로 대일통(大一統) 제국을 창립했다. 황제부터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진나라는 왜 멸망했는가? 한가(漢家)의 천하는 어떻게 흥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견고한 한조를 건립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한초의 가의는 《과진론(過秦論)》을 지어 진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한조 통치자들에게 포학한 진을 거울로 삼아 인정을 베풀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한 《논정사소(論政事疏)》를 써서 문제(文帝)에게 여러 제후왕들을 억제하고 흉노를 방어하라고 조언했는데, 그 목적은 모두 국가의 장기적인 다스림과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대책을 헌상하는 데 있었다. 태사공 사마천이 《사기》를 지은 목적 또한 ‘성패와 흥망의 이치를 상고하기 위함’에 있었다.

이외에도 사상적으로 서한 초기의 혜제, 문제, 경제는 황로(黃老)의 도(道)를 매우 숭상하여 무위(無爲)의 방식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이로 인해 천하는 풍족해지고 예의가 흥성했으며 백성들은 편안히 살며 생업을 즐겼다. 무제 때에 이르러 그는 한편으로는 신선과 도를 구하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독존유술(獨尊儒術)’을 채택했다. 이로써 사상은 점차 유가 사상으로 통일되었다. 수도(修道)와 존유(尊儒)는 이처럼 아무런 충돌 없이 무제 한 몸에 집중되었다. 도가와 유가 역시 각자 다른 궤적을 따라 발전해 나갔다.

사실 중국의 문치와 무공, 전장 제도 및 중국인들의 많은 관념의 형성, 즉 이른바 중국 문화의 저력은 모두 양한(兩漢)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즉 기원 전후 200년 사이다. 중국은 서한(西漢) 시기에 비교적 긴 번영기를 맞이했는데, 문경(文景)의 치(治)부터 한무제의 강성함에 이르기까지 중국인과 한인(漢人)을 등식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한인(漢人), 한자(漢字), 한족(漢族)’이라는 말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한조는 왕망(王莽)의 찬탈로 인해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전한은 장안에 도읍했기에 사가들은 서한이라 부르고, 후한은 낙양에 도읍했기에 동한이라 부른다.

서한의 건립

* 고조의 신분과 특이한 용모

고조 유방(劉邦)의 자는 계(季)이며 패군(沛郡) 풍읍(豐邑)현 중양(中陽)리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공(太公)이고 어머니는 유온(劉媼)이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유온이 큰 늪가에서 쉬고 있을 때 번개와 천둥이 치고 하늘이 어두워졌는데, 마침 태공이 그녀를 보러 갔다가 그녀의 몸 위에 교룡(蛟龍)이 있는 것을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온은 태기가 있어 고조를 낳았다.

유방은 성인이 된 후 보통 사람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사기》에 따르면 그는 큰 사업을 할 만한 기개와 도량이 있어 평범한 집안의 생산 노동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한번은 진시황이 순행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길게 탄식하며 “대장부라면 마땅히 저래야지!”라고 말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유방은 평소 술을 좋아했는데, 자주 외상술을 마시고 만취하곤 했다고 한다. 사수정(泗水亭) 정장(亭長)으로 있을 때는 관아의 관리들을 골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유방은 사람됨이 매우 활달하고 너그러워 사람들을 아꼈으며 베풀기를 즐겼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는 코가 높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왼쪽 다리에 72개의 검은 점이 있어 용상(龍相)을 갖추고 있었다. 옛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용상을 지닌 자는 반드시 귀하게 되어 천자가 된다고 했다.

《사기》에는 유방의 비범한 운명을 증명하는 몇 가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여공(呂公)이 유방의 관상을 본 후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딸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는 것인데, 그녀가 바로 훗날의 여후(呂后)다.

다른 하나는 한 노인이 유방의 집을 지나다 유방과 여후의 관상을 보고 둘 다 말할 수 없이 귀해질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백제(白帝)의 아들이 적제(赤帝)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한번은 유방이 정장의 신분으로 패현의 백성들을 이끌고 여산(驪山)으로 가고 있었는데, 도중에 도망치는 자들이 많았다. 유방은 여산에 도착할 때쯤이면 모두 도망칠 것이라 예상하고 풍서 대택(大澤)에 이르렀을 때 술을 마시고는 밤을 틈타 백성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백성 중 장사 10여 명이 그를 따르기로 했다. 그들이 지름길로 늪지대를 통과할 때 큰 뱀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유방은 술기운에 칼을 뽑아 뱀을 두 토막 냈다. 몇 리를 더 가다 유방은 몹시 취해 땅에 누워 잠이 들었다. 뒤에 오던 사람이 뱀을 벤 곳에 이르니 한 노파가 울고 있었다. 왜 우느냐고 묻자 노파는 “내 아들은 백제의 아들인데 뱀으로 변해 길을 막고 있다가 지금 적제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소. 그 때문에 우는 것이오”라고 답했다. 사람들은 노파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때리려 했으나 노파는 갑자기 사라졌다. 뒤에 온 사람들이 잠에서 깬 유방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말해주니 유방은 속으로 기뻐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그를 경외하기 시작했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동방을 순행한 원인 중 하나가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느껴 이를 누르려 했던 것이라는 기록도 있다. 유방은 자신에게 그 기운이 있을까 의심하여 밖으로 도망쳐 숨어 지냈다. 그런데 여후는 매번 그를 찾아냈다.

고조가 이상하게 여겨 어떻게 찾았느냐고 묻자 여후는 “당신이 있는 곳 상공에는 항상 구름 기운이 서려 있어 그것을 따라가면 당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고조는 마음속으로 더욱 기뻐했다. 패현의 젊은이 중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이 많아져 많은 사람이 그에게 의탁하려 했다.

이러한 이야기가 정말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방이 천자의 상을 가졌다는 것은 헛된 말이 아닐 것이다.

* 고조가 인의(仁義)를 행하여 관중에서 왕을 칭하다

진 이세 원년 가을, 진승(陳勝) 등이 기현(蘄縣)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초(張楚)’라 정하자 많은 군현에서 장관을 죽이고 진승에게 호응했다. 패현 백성들은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추대하여 패공으로 삼은 후 거병했다. 소하(蕭何), 조참(曹參), 번쾌(樊噲) 등이 패공을 위해 패현의 젊은이들을 모집하니 공히 2~3천 명에 달했다.

진 이세 2년(기원전 208년), 연(燕), 조(趙), 제(齊), 위(魏)나라가 각각 자립하여 왕이 되었고, 전국시대 초나라 명장 항연(項燕)의 후손인 항량(項梁)과 항우(項羽)가 오현(吳縣)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진조의 병력이 여전히 강했기에 진나라 장수 장한(章邯)이 진승과 새로 즉위한 위왕을 잇달아 격파했다. 패공은 진의 군대와 교전했으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항량에게 귀순했다. 패공이 항량을 따른 지 한 달여 만에 항량은 각 로(路)의 장령들을 설현(薛縣)으로 소집하여 초 회왕의 손자 웅심(熊心)을 초왕(楚王)으로 세우고 우태(盱台)에 도읍했다. 항량은 무신군(武信君)이라 칭했다. 이후 항량은 진군을 두 차례 격파하고 교만한 기색을 보이다가 진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이때 패공과 항우는 진류(陳留)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항량의 전사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여신(呂臣) 장군과 함께 동쪽으로 진군했다. 여신의 군대는 팽성 동쪽에, 항우의 군대는 팽성 서쪽에, 패공의 군대는 탕현(碭縣)에 주둔했다. 초왕은 항량의 군대가 패한 것을 보고 매우 두려워하며 도읍을 우태에서 팽성으로 옮기고 여신과 항우의 군대를 합쳐 자신이 직접 거느렸다. 패공을 탕군(碭郡)태수로 임명하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해 탕군의 부대를 통솔하게 했다. 항우는 또 장안후(長安侯)에 봉하고 노공(魯公)이라 칭했다. 여신은 사도(司徒)가 되었고 그의 아버지 여청(呂青)은 영윤(令尹 재상)이 되었다.

한편 진나라 장수 장한은 항량의 군대를 격파한 후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조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조나라가 여러 차례 초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회왕은 송의(宋義)를 상장군, 항우를 차장, 범증(范增)을 말장으로 임명하여 북쪽으로 보내 조나라를 구하게 했다. 동시에 패공에게는 서쪽으로 땅을 취하여 관중으로 진군하게 했다. 회왕은 제장들과 약속하기를, 누구든 먼저 함곡관에 들어가 관중을 평정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했다.

이때 제장 중 오직 항우만이 진군(秦軍)에 대한 원한 때문에 패공과 함께 서쪽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회왕 수하의 노장들은 회왕에게 간언했다.

“항우라는 사람은 민첩하고 용맹하나 간사하고 사람을 해칩니다. 항우는 일찍이 양성(襄城)을 함락했을 때 군민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산채로 묻어버렸습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파괴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차라리 충직하고 노련한 사람을 보내 인의를 베풀고 서진하며 진나라 백성들에게 도리를 설명하는 편이 낫습니다. 진나라 백성들은 군주의 폭정으로 고통받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정말 충직한 사람이 가서 백성을 압박하지 않는다면 진나라는 복종할 것입니다. 항우는 용맹할 뿐이니 보낼 수 없습니다. 현재 오직 패공만이 평소 충직하고 노련하니 그를 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이에 회왕은 결국 패공에게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게 했다.

패공이 군사를 이끌고 서진하여 고양(高陽)을 지날 때 역이기(酈食其)라는 문지기가 말했다.

“이곳을 지나간 많은 사람 중 패공만이 덕행이 높고 충직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패공을 뵙기를 청했다. 당시 패공은 침상에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 발을 씻고 있었다. 역이기는 이를 보고도 절하지 않고 몸을 약간 굽혀 읍하며 말했다.

“덕정(德政)이 없는 폭진(暴秦)을 멸하려 하신다면 노인을 앉아서 접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패공은 즉시 일어나 옷을 정돈하고 사과한 후 그를 상석에 모셨다. 역이기는 패공에게 진류를 습격하여 진군이 비축한 식량을 확보하라고 권했다. 패공은 그 말을 따라 진류를 함락했다. 이후 패공은 백마(白馬), 곡우(曲遇), 영양(穎陽)에서 잇달아 진군을 격파하고 한(韓)나라의 신원험도(抻轅險道)를 점령했다.

관중에 가장 먼저 도착하기 위해 패공은 서진의 속도를 높였다. 그는 먼저 남양군(南陽郡)을 취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완성(宛城)을 항복시켰다. 이후 지나는 성읍마다 항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때 조고가 진 이세를 죽이고 사람을 보내 패공을 만나 관중의 땅을 나누어 왕이 되기로 약속했다. 패공은 속임수가 있을까 의심하여 모사 장량의 계책을 써서 역생(酈生)과 육가(陸賈)를 보내 진나라 장수들을 설득하고 재물로 유인한 뒤, 그 틈을 타 무관(武關)을 기습했다. 동시에 전군에 명하여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을 금지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매우 기뻐했다. 이로 인해 패공은 결국 진군을 대파했다. 이때 진나라 장수 장한은 이미 조나라 땅에서 군사를 이끌고 항우에게 투항한 상태였고, 많은 제후도 항우에게 귀부했다.

기원전 206년 10월, 패공의 군대가 먼저 패상(霸上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동쪽)에 도착했다. 진왕 자영(子嬰)이 흰 수레와 백마를 타고 목에 끈을 맨 채 황제의 어새와 부절을 가지고 나와 항복했다. 어떤 장령들은 진왕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패공은 “애당초 회왕께서 나를 보내 관중을 치게 한 것은 내가 관대하게 사람을 포용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항복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라고 말하며 진왕을 주관 관리에게 넘기고 서쪽으로 함양에 들어갔다. 패공은 진나라 궁궐의 귀중한 보물과 재물, 창고를 모두 봉인한 뒤 다시 패상으로 물러나 주둔하며 다른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패공은 각 현의 백성과 덕망 있는 인사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나는 제후들과 약속하기를, 누구든 먼저 관중에 들어온 자가 이곳의 왕이 되기로 했으므로 내가 관중왕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이제 여러분과 약속하건대, 법은 오직 세 가지만 두겠습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도둑질한 자는 법에 따라 처벌합니다. 그 외 진나라의 법은 모두 폐지합니다. 모든 관리와 백성은 예전처럼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결론적으로 내가 여기 온 것은 여러분을 위해 해를 제거하려는 것이지 결코 해치려는 것이 아니니 두려워 마십시오!”

곧이어 패공은 사람을 보내 진나라 관리들과 함께 각 마을을 순시하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진나라 백성들은 매우 기뻐하며 앞다투어 소와 양, 술과 음식을 가져와 병사들을 위로했다. 패공은 사양하며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사람들은 더욱 기뻐하며 유방이 관중왕이 되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진나라 멸망 후 천하 형세

진나라 멸망 후 천하 군웅 중 항우의 실력이 가장 강했고 유방이 그다음이었다. 그러나 유방을 포함한 제후들은 모두 천하를 쟁탈하려 했다. 이후 5년 동안 초한(楚漢)전쟁 시기에 들어선다. 유방은 사람을 잘 기용하여 문(文)으로는 소하와 장량 같은 모신이 있었고, 무(武)로는 한신이 그를 위해 천하를 쳤기에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그중 한신의 공로가 가장 컸다. 한고조 유방이 만약 웅재대략(雄才大略)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가진 한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천하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개국사는 한신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며, 유방, 한신, 항우 세 인물을 중심으로 쟁패전을 서술한다.

패공이 관중에 들어가 자영의 항복을 받은 후, 어떤 이가 권하기를 관중에서 왕이 되려면 반드시 함곡관(函谷關)을 지켜 제후군의 진입을 막고 점차 관중의 병력을 모아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패공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11월 중순, 항우가 과연 제후군을 이끌고 서진했다. 항우는 패공이 이미 관중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 경포(鯨布) 등을 보내 함곡관을 함락했다. 12월 중순, 희수에 도착하여 패공과 회전을 준비했다. 이때 항우의 병력은 40만(자칭 100만)이었고 패공의 병력은 10만(자칭 20만)으로 항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침 항우의 숙부 항백이 장량을 구하기 위해 개전 전날 밤 패공의 군영을 찾아가 장량을 만났다. 항우의 의구심을 풀기 위해 다음 날 패공은 10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홍문에 가서 항우를 만나 사과했다. 패공은 번쾌와 장량을 대동했기에 탈출하여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홍문연(鴻門宴)’ 이야기의 유래다.

항우는 계속 서쪽으로 행진하며 도륙을 일삼고 함양성 내의 진나라 궁실을 불태웠다. 진나라 백성들은 항우에게 크게 실망했으나 두려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우는 회왕이 처음에 자신을 패공과 함께 서진하게 하지 않고 북쪽으로 보내 조나라를 구하게 한 결과 먼저 입관하지 못한 것을 원망했다. 그래서 겉으로는 회왕을 의제(義帝)로 추대했으나 실제로는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훗날 그를 시해했다.

기원전 205년 정월,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西楚霸王)이 되어 양지와 초지의 9개 군을 통치하고 팽성에 도읍했다. 또한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패공을 한왕(漢王)으로 고쳐 세워 파촉(巴蜀)과 한중(漢中) 땅을 다스리게 하고 남정(南鄭)에 도읍하게 했다. 관중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진나라의 세 투항 장수에게 봉했다.

4월, 각로 제후들은 항우의 대장군기 아래에서 군사를 거두고 각자의 봉국으로 돌아갔다. 한왕도 봉국으로 향했는데, 항우가 보낸 3만 병사와 초나라 및 제후국 중 한왕을 흠모하여 따르는 자 수만 명이 함께했다. 그들은 두현(杜縣)에서 남쪽으로 식지(蝕地)의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군대가 지나간 뒤 벼랑에 가설된 잔도를 모두 불태웠는데, 이는 제후나 강도의 기습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항우에게 동진할 뜻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남정에 도착했을 때 많은 부하와 병사가 도중에 도망쳐 돌아갔으며, 병사들은 노래를 부르며 동쪽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이때 막 한왕에게 귀순한 한신이 병사들의 귀향 열망을 이용해 동진하여 제후들과 천하를 다투라고 권했다. 이때부터 한신의 도움으로 유방은 단계적으로 천하를 얻게 된다.

* 한신이 유방을 도와 한실 천하를 얻다

한신은 회음(淮陰) 사람이다. 평민이었을 때도 뜻이 남달랐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胯下之辱)’을 참아낸 이야기는 그에게 대인(大忍)의 마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진말(秦末) 군웅이 일어났을 때 한신은 먼저 항량을 따랐으나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했다. 항량이 패한 후 항우에게 소속되어 낭중이 되었다. 한신은 항우에게 여러 차례 계책을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한왕 유방이 촉으로 들어갈 때 한신은 초군을 탈출해 한왕에게 귀순했다. 명성이 없었기에 빈객을 접대하는 소관(小官)에 머물렀다.

이후 한신은 소하와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었고, 소하는 그를 기재(奇才)라 여겨 한왕에게 여러 번 추천했으나 한왕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신은 중용되지 못할 것을 알고 혼란을 틈타 도망쳤다. 소하는 한신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왕에게 보고할 겨를도 없이 직접 쫓아가 그를 데려왔다. 한왕은 소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소하는 한왕에게 천하를 다투는 데 한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천하에 한신 같은 걸출한 인물은 다시 없다고 설득했다. 한왕은 소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길일을 택해 직접 목욕재계하고 높은 단을 설치하여 한신을 대장군으로 제수했다.

대장군으로 임명된 후 한신은 한왕과 천하를 논했다. 한왕은 스스로 용맹, 강인함, 인후함, 병력 면에서 항우보다 못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한신은 항우의 약점을 분석했다.

첫째, 항우는 부녀자의 인(仁)만 있을 뿐이다.

둘째, 관중의 유리한 지형을 포기하고 팽성에 도읍했다.

셋째, 의제와의 약속을 어기고 측근들을 왕으로 봉해 제후들의 불만을 샀다.

넷째,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파괴를 일삼아 민심을 잃고 백성들이 두려움 때문에 마지못해 복종하고 있다.

다섯째, 관중에 봉한 세 왕은 진나라 장수들로서 진나라 자제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기에 진나라 백성들이 그들을 뼛속까지 원망하고 있다.

이어 한신은 한왕의 강점을 분석했다.

첫째, 천하의 영웅들을 임용하고 성읍을 공신들에게 나누어주면 거칠 것이 없다.

둘째, 정의(正義)의 군대로서 동쪽으로 돌아가려는 장졸들의 마음을 따르면 이기지 못할 싸움이 없다.

셋째, 한왕이 무관에 들어왔을 때 백성들을 해치지 않고 가혹한 법을 폐지하여 백성들이 한왕을 원하고 있다.

넷째, 원래의 약속대로라면 한왕이 관중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관중 백성들이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동진한다면 문서 한 장으로 삼진(三秦)의 땅을 평정할 수 있다.

한왕은 한신의 분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소하의 말을 믿게 되었고 한신을 늦게 얻은 것을 후회했다. 이때부터 한신의 계책을 따라 제장들을 배치했다. 이 천하론은 한신의 웅재대략과 고견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8월, 한왕은 진창(陳倉)을 거쳐 동진하여 삼진(三秦)을 평정했다. 기원전 205년, 한왕은 계속해서 땅을 취했고 일부 왕들이 귀항했다. 이해 2월, 한왕은 진나라의 사직을 폐하고 한나라의 사직을 세웠다.

4월, 한군이 팽성에서 패하여 흩어졌다. 동시에 항우는 패현에서 한왕의 부모와 처자를 포로로 잡아 인질로 삼았다. 제후들은 초군이 강해지고 한군이 패하자 한왕을 배반하고 초왕을 도왔다.

한왕은 패배 후 하읍(下邑)에 주둔한 여후의 오라버니 여후(呂侯)에게 의탁했다. 도중에 가솔을 찾았으나 아들 효혜(孝惠)만을 찾았다. 6월에 효혜를 태자로 세웠다. 하읍에서 한왕은 점차 병졸을 모아 항우와 다시 결전할 준비를 했다.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구강왕(九江王) 경포를 설득해 초나라에 반기를 들게 했다. 초군은 용저(龍且)를 보내 그를 치게 했고, 경포는 패한 뒤 한왕에게 귀순했다. 이때 한왕의 세력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고, 한신은 흩어진 병마를 모아 형양(滎陽)에서 한왕과 합류하여 경현(京縣)과 소정(索亭) 사이에서 초군을 꺾었다. 이로 인해 초군은 서진하지 못했다.

이해 8월, 한왕은 한신을 좌승상(左丞相)에 임명해 반란을 일으킨 위왕 표(豹)를 공격하게 했다. 한신은 계책을 써서 승리하고 위나라 땅을 평정해 하동군(河東郡)으로 개편했다. 이어 한왕은 장이(張耳)와 한신을 보내 북쪽으로 조나라와 대(代)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대나라를 무너뜨린 후 한왕은 한신의 정예 부대를 형양으로 불러들여 초군을 방어하게 했다.

한신의 탁월하고 기이한 군사적 재능은 몇 차례 중대한 전투에서 나타났다.

첫째는 정형(井陘) 전투다. 조나라를 치기 위해 한신과 장이는 수십만 인마를 이끌고 정형구를 돌파해야 했다. 한신은 경기병 2천 명을 선발하여 각자 붉은 깃발을 들게 하고 “조나라 군대가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성벽을 비우고 쫓아올 것이다. 그때 성벽으로 들어가 조나라 깃발을 뽑고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워라”고 명했다. 또한 당일 승리 후 잔치를 벌이자고 명하니 장졸들이 의아해했다. 이어 1만 명의 선봉대를 보내 ‘배수진(背水陣)’을 치게 했다. 강을 등지고 진을 치는 것은 병법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적군도 이를 보고 크게 웃었다. 이어 한신은 대장군의 깃발을 내걸고 위풍당당하게 정형구를 나섰다.

양군이 맞붙자 조군은 과연 성을 비우고 한신을 공격했다. 한신은 거짓으로 패한 척 깃발과 북을 버리고 도망갔고, 조군이 이를 쫓는 사이 복병으로 둔 기병들이 비어있는 성에 들어가 붉은 깃발을 꽂았다. 한신이 필사적으로 반격하고 조군이 성으로 돌아가려 하자 “성벽이 온통 한나라의 붉은 깃발인 것을 보고 대경실색하여 한나라가 조왕과 장수들을 모두 잡은 줄로 여겼다. 이에 군대가 혼란에 빠져 달아났다. 조나라 장수가 베며 막으려 했으나 금할 수 없었다.

한군이 협공하여 조군을 대파하고 성안군(成安君)을 저수에서 베었으며 조왕 헐(歇)을 사로잡았다.” 이것은 한신이 말한 바와 같다. “사지에 몰아넣어야 비로소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게 되는 법이다. 사지를 주지 않았다면 모두 달아났을 것인데 어찌 부릴 수 있었겠는가!” 이는 한신이 지피지기하여 병법을 유연하게 운용한 결과이며 그의 도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전역이 바로 역사상의 ‘배수의 일전(背水一戰)’이다.

조군을 격파한 후 한신은 성안군 수하의 모사 광무군(廣武君)을 산채로 잡으라는 명을 내렸고, 직접 그의 포박을 풀어주며 스승의 예로 대접하고 연나라와 제나라를 공격할 방도를 물었다. 광무군은 한신의 정성에 감동하여 정세를 분석해주었다. 그는 상책으로 군사를 멈추고 조나라의 질서를 안정시키며 전몰 장병의 고아를 위로하고 장졸들을 포상하라고 했다. 동시에 연나라를 공격할 기세를 보이면서 서신을 보내 전략적 우위를 과시하면 연나라는 복종할 것이고, 그 후 제나라를 설득하면 제나라도 항복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신은 이 계책을 따랐다.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니 소문을 들은 연나라가 즉시 항복했다. 이에 한왕에게 보고하고 장이를 조왕으로 세워 조나라를 진정시키길 청하니 한왕이 허락했다.

이때 한왕의 군대는 형양 남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식량 운반을 위해 황하 남안까지 통로를 만들고 항우와 1년 넘게 대치했다. 항우가 자주 통로를 끊어 한군의 식량이 부족해졌고 결국 한왕을 포위했다. 한왕은 형양 서쪽 지역을 갖는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했으나 항우는 거절했다. 한왕은 진평(陳平)의 계책을 써서 항우와 범증 사이를 이간질했다. 아부 범증은 항우에게 반드시 형양을 함락하라고 권했으나, 시기심 많은 항우는 범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범증은 분노하여 관직을 버리고 떠나다 팽성에 이르기도 전에 죽었다.

초나라는 자주 기병을 보내 황하를 건너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의 장이와 한신은 오가며 구원하고 성읍을 안정시키며 한왕을 지원했다. 초군이 한왕을 형양에 가두자 한왕은 남쪽으로 돌파하여 완현, 엽현(葉縣) 일대에서 경포를 받아들이고 성고(成皐)로 들어갔으나 초군이 다시 성고를 포위했다.

6월, 한왕은 성고를 탈출해 등공(滕公)만을 데리고 황하를 건너 수무에 있는 장이의 주둔지로 갔다. 다음 날 아침, 한왕은 사신이라 칭하며 조군 영루(營壘)로 들어갔다. 한신과 장이가 아직 깨지 않았을 때 한왕은 그들의 인신과 병부를 빼앗고 군기로 장수들을 소집해 직무를 변경했다. 잠에서 깬 한신과 장이는 한왕이 온 것을 알고 경악했다. 한왕은 두 사람의 군권을 장악한 뒤 장이에게 조나라 땅을 지키게 하고 한신을 국상(國相)에 임명해 조나라 군사를 모아 제나라를 치게 했다.

한신이 군사를 이끌고 동진하여 평원진(平原津)을 건너기도 전에 한왕이 보낸 역이기의 설득으로 제왕이 귀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신은 진군을 멈추려 했으나 괴통(蒯通 원 이름은 괴철이다)이라는 설객의 권유에 따라 제나라를 계속 공격했다. 초나라는 용저에게 20만 병마를 주어 제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한신은 용저와 유수(濰水)에서 회전을 벌였다. 이 전역은 한신의 지혜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용저는 간언을 듣지 않고 고집스럽게 위수를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신은 밤새 모래주머니 만여 개를 만들어 위수 상류를 막게 한 뒤, 군사 절반을 이끌고 강을 건너 용저를 공격하다 거짓으로 패해 달아났다. 용저는 기뻐하며 “한신이 겁쟁이인 줄 원래 알고 있었다”며 위수를 건너 추격했다. 이때 한신이 모래주머니를 치우게 하니 강물이 거세게 밀려왔고, 초군 태반이 건너지 못한 상태에서 한신이 회군하여 맹렬히 반격해 용저를 죽였다. 한신은 초군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기원전 203년, 한신은 제나라 전체를 평정했다. 그는 한왕에게 상소를 올려 “현재의 국면에 유리하도록 제가 임시 제왕(假齊王) 역할을 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마침 형양에서 고전하던 한왕은 서신을 읽고 격노하여 “내가 여기서 포위되어 밤낮으로 도움을 기다리는데 제 놈이 왕이 되려 한단 말이냐!”라고 욕했다. 장량과 진평이 슬며시 한왕의 발을 밟으며 귓속말로 “현재 형세가 불리한데 어찌 한신의 왕위 계승을 금하겠습니까? 차라리 이 기회에 그를 왕으로 세워 잘 대접하고 제나라를 지키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변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조언했다.

한왕은 깨닫고 다시 짐짓 욕하며 “대장부가 제후를 평정했으면 진짜 왕이 되어야지 어찌 가짜 왕을 한단 말이냐!”라고 말하며 장량을 보내 한신을 제왕으로 책봉하고 그의 군대를 징발해 초군을 치게 했다.

용저를 잃은 항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내 한신이 한왕을 배반하고 초와 연합해 천하를 삼분하여 왕이 되라고 권했다. 한신은 거절하며 말했다. “내가 항왕을 모실 때는 관직이 랑중에 불과했고 지위는 창을 든 위병이었으며 내 말과 계책은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를 버리고 한에 귀순한 것입니다. 한왕은 나에게 상장군의 인신을 주시고 수만 인마를 맡기셨으며, 입고 계신 옷을 벗어 입혀주시고 음식을 나눠주셨으며 내 말을 들어주셨기에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이토록 친근히 믿어주는데 배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며 죽을 때까지 마음을 변치 않을 것입니다. 항왕의 성의는 사양하겠습니다!”

제나라 사람 괴통은 천하 승부의 관건이 한신에게 있음을 알고 기이한 계책으로 그를 움직이려 했다. 그는 관상쟁이의 신분으로 한신에게 초, 한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여 솥의 발처럼 정립(鼎立)하라고 권했다. 그것이 천하 백성에게 유익하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한신은 여전히 한왕을 배반하려 하지 않으며 말했다. “한왕은 나를 극진히 대접해 자신의 수레에 태워주고 옷을 주고 음식을 주셨소.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그 사람의 재앙을 나누어 가져야 하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그 사람의 근심을 생각해야 하며, 남의 음식을 먹는 자는 그 사람의 일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들었소. 내 어찌 사리사욕을 위해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의 공훈이 높으니 한왕이 끝내 제나라를 빼앗지 않을 것이라 믿고 괴통의 권유를 사양했다.

훗날 한왕이 고릉(固陵)에서 포위되었을 때 장량의 계책을 써서 한신을 소집하며 제나라 땅이 한신의 명의임을 약속했다. 이에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해하(垓下)에서 한왕과 합류했다.

기원전 202년, 고조와 한신 그리고 다른 제후군이 공동으로 초군을 공격하여 항우와 해하에서 결전했다. 수차례 교전 끝에 마침내 초군을 대파했다. 항우의 병사들은 한군이 부르는 초나라 노래를 듣고 한군이 이미 초지를 점령한 줄 알았다. 항우는 패하여 도주했고 초군은 전면 붕괴했다. 한왕은 기장 관영(灌嬰)을 보내 항우를 추격하게 하여 동성(東城)까지 쫓아가 초병 8만 명을 죽이고 마침내 초나라를 평정했다. 오직 노현 사람들만이 항우를 위해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는데, 이는 회왕이 당초 항우를 노공으로 봉했기 때문이다. 한왕이 제후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항우의 머리를 노현의 부로들에게 보여주니 그제야 노인들이 항복했다. 이에 한왕은 노공이라는 봉호의 예우에 따라 항우를 안장한 뒤 군을 돌렸다.

항우를 격파한 후 고조는 기습적인 방법으로 제왕 한신의 군권을 빼앗았다. 한 5년 정월, 제왕 한신을 초왕으로 고쳐 봉하고 하비(下邳)에 도읍하게 했다.

한신은 하비에 도착하여 과거 자신을 모욕하며 가랑이 밑을 기어 지나가게 했던 젊은이를 불러 중위(中尉)로 임명했다. 그리고 장상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장사다. 그가 나를 모욕했을 때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를 죽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에 잠시의 치욕을 참고 오늘의 공업(功業)을 이룬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