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산(闌珊)
【정견망】
“아호산 아래 벼와 기장이 풍성하고,
돼지우리와 닭둥우리엔 사은문이 반쯤 닫혀 있네.”
(鵝湖山下稻粱肥,豚柵雞棲半掩扉)
강서성 연산현(鉛山縣)의 아호(鵝湖)는 산수가 수려하고 인물이 많이 나는 곳이다. 남송 연간에 이곳에서 중국 철학사상 가장 유명한 토론인 아호의 모임이 있었다.
아호의 모임
송대는 문치를 숭상하고 무치를 억제하여 학문적 분위기가 농후했다. 남송 연간에는 다양한 사상과 학문이 각지에서 일어나 서로 다른 분파를 형성했는데, 주희(朱熹)를 대표로 하는 민학(閩學)과 육구연(陸九淵)을 대표로 하는 심학(心學)이 신유학의 강력한 두 가닥 힘으로 부상했다.
효종 순희(淳熙) 2년(1175년) 봄, 유학의 대가 여조겸(呂祖謙)이 절강에서 복건으로 와서 주희와 한천(寒泉)에서 만났다. 여조겸은 절강 무학(浙江婺學)의 영수였으며, 조상 대대로 8대에 걸쳐 5명의 재상과 17명의 진사를 배출한 명문 가문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온화하여 주희, 장식(張栻)과 함께 ‘동남삼현(東南三賢)’으로 불렸다. 주희와 여조겸 두 사람은 40여 일 동안 주돈이(周敦頤), 정이(程頤), 정호(鄭顥), 장재(張載)의 저작을 연구한 후, 공동으로 중국 사상사 최초의 이학(理學) 선철 어록인 《근사록(近思錄)》을 발췌하여 완성했다.
여조겸이 무주로 돌아갈 때 주희가 그를 배웅했는데, 도중에 강서 상요(上饒)의 아호사(鵝湖寺)를 지나게 되었다. 여조겸은 문득 생각이 떠올라 육구령(陸九齡), 육구연 두 형제를 초청해 주희와 만나게 하고자 했다. 주희와 육씨 형제는 서로 만난 적은 없었으나 모두 상대방의 책을 읽은 바 있었고, 학술적 관점에 큰 견해 차이가 있어 서로 대면하여 절차탁마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여조겸은 주희의 친구이자 육구연의 백락(伯樂 천리마를 감별한 인물로 여기서는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란 의미)으로서 쌍방의 관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조화시키려는 뜻이 있었고, 기연이 성숙하여 이 아름다운 일을 성사시켰다.
주희와 육씨 형제는 각각 무이산(武夷山)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5월 16일, 주희와 여조겸 일행 10여 명은 한천정사에서 출발하여 강서 연산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무이산 구곡계를 지나갈 때 향성암(響聲岩)의 절벽 앞에 그들은 이름을 남기고 이번 여정의 시간을 기록했는데, 이는 무이산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마애석각 중 하나가 되었다. 5월 28일, 일행은 아호에 도착했다. 이때 육구연, 육구령과 제자들도 수로와 육로를 거쳐 아호사로 급히 이동하고 있었다. 형 육구령과 육구연의 사상에는 차이점이 있었으나, 두 사람은 사전에 육구연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기로 합의를 보았다.
6월 3일, 아호사에는 인파로 북적였다. 수많은 독서인과 호기심 많은 이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당대 대유(大儒)들의 흥미진진한 웅변을 직접 보고자 했다. 당시 아호 모임에 참여한 인물 중에는 임천태수(臨川太守) 조경명(趙景明)도 있었다. 아호 모임의 중심 의제는 ‘학문을 하는 방법(爲學之方)’이었다. 문인들의 토론은 문학적 정취가 있어 시 한 수를 읊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이어 사회자인 여조겸이 육씨 형제에게 최근에 “어떤 학문적 새로운 공효가 있었는지” 물었다. 자리가 마련되자 시가 잇달아 나왔는데, 글자 속에 칼날이 감추어져 있고 말 속에 예리함이 축적되어 있었다. 한쪽은 반박하기를 좋아하고 한쪽은 변론에 능하여,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쌍방은 각자의 관점을 명확히 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취약한 부분을 타격하니 설전이 벌어져 긴장감이 넘쳤다.
주희는 리(理)가 만물의 본원이라 여겨 ‘도문학(道問學)’을 위주로 삼았으며, 학문을 하는 방법은 먼저 격물궁리(格物窮理)해야 하고 내면을 방종하게 하거나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행위를 부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심(人心)의 어두운 면을 보았기에 일반인은 성인처럼 본래 고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성현의 책을 읽고 널리 관찰하며 박람하고, 외물에 대해 세밀하게 고찰하고 깊이 연구해야만 비로소 한 걸음씩 성인의 계단에 올라 잠재된 양지(良知)와 지혜를 얻고 인애(仁愛)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육구연은 우주 만물이 심(心)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보아, “먼저 사람의 본심(本心)을 밝힌 후에 널리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은 본래 선하므로 본심의 덕성(德性)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밖으로 구하여 책을 너무 많이 읽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 증거로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무덤을 보면 슬퍼한다는 점과 상고 성인 요순(堯舜)이 독서인이 아니었다는 점을 들어, 학문을 다스림에 반드시 독서를 통해야 한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자구에 얽매이는 것은 사소하여 요령을 얻지 못하고 근본을 잡지 못하는 것이라 말하며, 인심의 강력한 힘을 강조하고 자아 성찰을 추구했다.
셋째 날, 토론은 초점에 도달했다. 육구연은 “우주가 곧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곧 우주다[宇宙便是吾心,吾心即是宇宙]”라고 제기하며 심을 근본으로 삼을 것을 강조했다. 주희는 “천지가 있기 전에도 결국 리(理)가 있었으니, 이 리가 있음에 문득 이 천지가 있는 것이다”라고 제기하며 일반인은 성현이 아니므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수양하여 찌꺼기를 깨끗이 걸러내야 한다고 보았다.
넷째 날에 이르러 끊임없이 세부적으로 설명해 나감에 따라 쌍방은 뜻밖에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매우 평온한 태도를 보여 토론의 이기고 짐을 따지지 않았다. 6월 8일, 여조겸, 주희, 육구연, 육구령 및 제자들이 서로 작별을 고하면서, 중국 철학사에서 ‘천고의 일변(一辯)’이라 불리는 아호의 모임은 막을 내렸다.
주희 등은 돌아가는 길에 무이산의 분수관(分水關)에 이르렀다. 나뉘었다가 합쳐지는 물줄기를 마주하고 주희는 깊은 감회를 느껴 읊조렸다.
“물줄기 흐름엔 이쪽저쪽 없으나,
지세에 따라 서쪽과 동쪽이 있네.
나뉠 때의 다름을 알고자 한다면,
합쳐지는 곳이 같음을 알아야 하리.”
水流無彼此,地勢有西東
欲識分時異,應知合處同
주희는 이후 자신의 학술에 대해 깊이 있는 사색과 총괄을 진행했다.
주희와 육구연, 육구령은 성격이 다르고 학문을 하는 방법 및 얻은 경험이 달랐다. 소질이 다른 사람은 다른 길을 걷기 마련이므로, 이학(理學)과 심학(心學)의 논쟁은 마치 선종의 점오(漸悟)와 돈오(頓悟)의 논쟁과 같아서 모두 개인적 각도에서 출발한 성분이 있어 누구도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은 ‘함께 공맹(孔孟)을 존중하고, 함께 명교(名敎)를 붙들며, 함께 삼강오륜을 세웠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모순되지 않았다. 주희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강조했으나 심성을 함양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니 그는 평생 내면을 수양했다. 육구연이 비록 독서를 강조하지는 않았으나 독서를 부정하지도 않았으니 그 자신도 책을 널리 읽어 학문적 소양이 깊었다.
대유들은 서로를 존중했다. 비록 자신의 학술적 관점을 고수했으나 각자의 장단점을 보았고, 마지막에는 서로의 차이와 공통점을 인정하면서 화이부동(和而不同)(서로 조화를 이루나 같지는 않음)의 너그러운 도량을 보여주어 천추(千秋)에 빛나는 군자의 풍모와 유학자의 규범을 나타냈다. 이 토론은 또한 색다른 학술 교류이자 사상의 충돌이었으며, 남송 전체의 학술 발전에 긍정적인 촉진 작용을 했다.
이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신주자사(信州刺史) 양여려(楊汝礪)는 아호사의 서면에 사현사(四賢寺)를 지었다. 사현이란 여조겸, 주희, 육구연, 육구령 네 선현을 가리킨다. 남송 이종(理宗) 순우(淳祐) 10년에 이르러 조정에서 문종서원(文宗書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했고, 명 대종 경태(景泰) 4년에는 아호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아호서원은 웅장한 건축군을 가지고 있으며 배치가 엄격하여 깊은 문화적 저력을 풍기는데, 지금까지 800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의 유명한 서원이다.
군자의 사귐
주희는 자가 원회(元晦)이고 호는 회암(晦庵) 또는 자양(紫陽)이다. 유년 시절에 신동이라 일컬어질 만하여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넓은 지식을 갈망했다. 네 살 때 이미 아버지에게 하늘에 관한 질문을 던졌고, 다섯 살 때는 《효경》을 독파하며 책에 쓰기를 “만약 이를 해내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주희는 정이, 정호의 삼전(三傳)제자인 이통(李侗)의 제자이며, ‘천리를 보존하고 인간의 욕망을 없앰(存天理,滅人欲)’을 주장하고 ‘격물치지’를 숭상했다.
절강성 학파인 민학(閩學)의 대표 인물이자 유학을 집대성한 이로, 저작에는 《사서장구집주》, 《태극도설해》 등이 있다. 남송 시기의 주류 학자이자 유명한 사상가, 교육가, 철학가, 시인이었으며, 학자들에게 ‘만세종사(萬世宗師)’로 받들어졌다. 공자의 친전제자가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되어 대성전(大成殿) 12철(哲)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의 교육 사상과 이학 체계는 후세에 널리 연구되고 토론되었다.
주희는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변별하며, 도탑게 행한다(博學、審問、慎思、明辨、篤行)”는 학문의 도를 제시했고, 평생 서원 60여 곳을 창건하거나 진흥시켰다. 그가 제정한 《백록동서원게시(白鹿洞書院揭示)》는 중국 고대 교육사에서 최초의 완전한 교칙이자 교육 규정으로 간주된다. 유명한 시구인 “묻노니 저 연못은 어찌 이리 맑은가, 근원에서 활수가 흘러오기 때문이네(問渠哪得清如許,爲有源頭活水來)”,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네(少年易老學難成,一寸光陰不可輕)”, “풍월을 이리저리 노닐며 봄바람을 아노니, 만자천홍이 언제나 봄이로구나(等閑識得東風面,萬紫千紅總是春)” 등은 모두 주희의 가작이다.
주희는 관직에 오래 있으면서 청렴하고 정직하여 백성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였다. 동안주부, 장주지부, 절동순무 등의 직책을 역임했고 벼슬이 환장각대제(煥章閣待制) 겸시강(兼侍講)에 이르러 송 영종(寧宗)에게 학문을 강의했다. 이후 권신 한탁주(韓侂胄)를 반대하다가 ‘경원당금’의 타격을 받았고, 만년에는 건양(建陽)으로 돌아가 학문을 강의하고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육구연은 사람들이 상산(象山)선생이라 불렀다. 건도(乾道) 연간에 진사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관직에 있었고, 나중에 강서 상산서원에서 학문을 강의했다. 육구연 역시 유년 시절에 신동이었는데, 서너 살 때 이미 우주에 관한 문제를 생각했으며 열세 살 때 유가 성인이 되기로 뜻을 세웠다. 그는 심학의 창시자로서 당시에 신진 학자에 속했으며, 남송 시기 가장 개성이 강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였다. 육구연은 형인 육구령과 함께 학문을 강의하며 제자들을 양성했다. 육구연의 심학은 강서 무주(撫州) 일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임안성(臨安城)에 큰 반향을 일으켜 많은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방문했다. 육구연의 사상은 왕양명(王陽明)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후세 사람들은 왕양명의 심학을 ‘육왕심학(陸王心學)’이라 불렀다.
아호의 모임 이후 주희와 육씨 형제는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마음에 앙금을 품지 않았고, 오히려 상대방의 품덕과 재능을 매우 경외하며 서신 왕래를 지속하여 군자의 사귐을 유지했다. 순희 4년, 육구연의 계모 등씨가 세상을 떠나자 육구연은 주희에게 편지를 보내 부제(祔禮 조상의 사당에 합동으로 제사 지내는 예법)에 관한 문제를 문의했고, 주희는 《예기》의 주석을 인용해 설명해 주었다.
순희 5년, 주희가 남강군으로 부임하는 길에 신주에 이르렀을 때 육구령이 방문했다. 두 사람은 아호 모임을 추억했고 주희는 시 한 수를 지었다.
덕과 의리의 풍류는 예전부터 공경하던 바인데,
이별한 지 삼 년이 지나니 더욱 마음 쓰이네.
우연히 청려장 짚고 한곡을 나서니,
또 푸른 가마를 굽혀 먼 고개를 넘어왔구려.
예전 학문을 토론함은 더욱 치밀해졌고,
새로운 지식을 배양함은 더욱 깊어지네.
도리어 말 없는 곳에 이르게 될까 걱정되니,
인간 세상에 고금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구나.
德義風流夙所欽,別離三載更關心。
偶扶藜杖出寒穀,又枉藍輿度遠岑。
舊學商量加邃密,新知培養轉深沉。
卻愁說到無言處,不信人間有古今。
순희 7년 육구령이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2월 육구연은 남강(南康)으로 가서 주희에게 육구령의 묘지명(墓誌銘)을 써 달라고 청했다.
같은 해, 육구연은 다시 남강을 찾아 주희를 방문했다. 당시 주희는 45세였고 육구연은 36세였다. 황혼 무렵 두 사람은 함께 호수에 배를 띄우고 즐겁게 대화하며 술을 마셨다. 주희는 육구연을 ‘귀한 손님’이라 칭하며 그가 학식이 넓고 박학하다 여겨, 자신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학생들에게 강의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육구연 역시 사양하지 않고 당당하게 한 차례 강의를 진행했는데, 주제는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喻於義,小人喻於利)’였다.
육구연의 강의는 정채롭고 깊이가 있어 주희와 학생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고 눈물까지 흘렸다. 주희는 육구연을 크게 찬탄하며 학생들을 데리고 육구연에게 제자의 예를 올리게 했다. 그러면서 “내가 여러 학생과 함께 마땅히 이 가르침을 지켜 육 선생의 훈계를 잊지 않겠다”고 말했으며, 문인들에게 이 일을 기록하게 하여 돌에 새겨 명문으로 남기고 백록동서원에 보존하도록 지시했다. 두 대유(大儒)의 정신적 경지는 사상사의 아름다운 일화가 되었다.
소희(紹熙) 3년(1193년), 육구연이 세상을 떠나자 주희는 소리 내어 통곡하며 제자들을 이끌고 영좌를 마련해 제사를 지냈다.
문화적 포용
역사에 짙은 한 획을 남긴 아호의 모임은 주희와 육구연의 토론 외에도, 13년 후에 있었던 신기질(辛棄疾)과 진량(陳亮)의 만남이 또 한 번 있었다. 진량이 대표하는 것은 사공(事功)학설로, 현실과 구체적인 것을 강조하며 부국강병과 건공입업(建功立業)을 지향했다. 신기질은 문무를 겸비하고 사풍(詞風)이 호방하여 중원을 회복하고 치욕을 씻어 보국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관직 생활이 순탄치 못해 장한 뜻을 다 펴지 못한 상태였다.
신기질과 진량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각자의 주장과 정치적 포부를 진술하며 결국 공감대를 형성했다. 또한 마음을 뒤흔드는 천고의 명편이 탄생했으니, 이것이 바로 신기질이 진량을 위해 지은 《파진자(破陣子)· 진동보를 위해 장쾌한 사를 지어 보내다(爲陳同甫賦壯詞以寄之)》이다.
취중에 등잔불 심지 돋우며 칼을 쳐다보다가,
꿈에서 깨어나니 진영마다 뿔나팔 소리 이어지네.
팔백 리 넓은 군영에서 부하들에게 구운 고기 나누고,
오십 현 거문고는 변방의 소리를 연주하니, 전장에서 가을날 군사를 조련하네.
말은 적로마처럼 번개같이 달리고, 활시위는 벽력처럼 놀라게 울리네.
임금님의 천하 역사를 매듭짓고, 생전과 사후의 이름을 얻고자 하였으나,
가련하게도 백발만 늘었구나.
醉裏挑燈看劍, 夢回吹角連營。
八百里分麾下炙, 五十絃翻塞外聲, 沙場秋點兵。
馬作的盧飛快, 弓如霹靂弦驚。
了卻君王天下事, 贏得生前身後名。
可憐白髮生!
양송 시기 외에도 중국 역사에는 여러 차례 사상 문화의 전성기가 출현했다. 춘추전국시대는 가장 휘황찬란했던 시대로 수많은 유파가 고개를 들었고, 뭇 별들이 모여들 듯 백가쟁명이 일어나 전례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한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름이 전해지는 학파만 189가에 달했으며, 제자백가가 실제로는 수천 가에 달했다는 저작의 기록도 있다. 각 학파 간에는 자유로운 토론이 벌어졌고 다원적 사상이 서로 경쟁했다.
200여 년의 조율을 거치며 많은 유파가 서로 흡수하고 융합되었고, 널리 유포되어 영향력이 컸던 유파는 최종적으로 12가로 좁혀졌다. 즉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병가, 명가, 음양가, 종횡가, 의가, 잡가, 농가, 소설가이다. 한 무제 시기에 이르러 조정에서 ‘파출백가, 독존유술(백가를 내치고 유가 사상만을 존중함)’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공자와 맹자를 대표로 하는 유가 사상이 관방이 추행하는 정통 사상이 되었으나, 다른 유파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현학(玄學)이 일어났고, 당송 시기의 시사가부(詩詞歌賦) 역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중국 문인들에게는 아집(雅集 고상한 풍류를 즐기는 모임)의 습관이 있었으니, 토원지회(兔園之會), 금곡원아집(金穀園雅集), 난정집회(蘭亭集會), 서원아집(西園雅集), 옥산아집(玉山雅集) 등이 그러하다. 몇 명 혹은 십여 명, 나아가 수십 수백 명의 문인묵객(文人墨客)이 한자리에 모여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서화를 교류하며, 시를 품평하고 도를 논하고, 서로 토론하고 함께 감상했다. “문채와 풍류가 한 세상을 비추었으니”, 오늘날에 보아도 부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중국 전통문화는 다양성과 포용성을 지니고 있으며, 박대정심(博大精深)하고 연원이 유장하여 공동으로 중국 전통문화 체계를 구축했다. 그 속에 담긴 지혜와 힘은 화하(華夏) 자손들에게 무궁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6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