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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인황(聖祖仁皇)——강희대제 전기 17

【강희대제】 강희 만년과 옹정의 제위 계승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강희제는 청 왕조의 가장 영명한 제왕으로, 당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를 통치하며 한당(漢唐)에 비견될 만한 황금시대를 열었다. 사진은 강옹건 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황태자를 두 번 폐위하고 복위시킨 풍파는 강희제 만년의 큰 사건이었다. 재능이 뛰어났던 여러 황자는 자의든 타의든 후계자 쟁탈전에 휘말렸고, 이는 형제들이 서로 등지는 비극을 낳았다.

강희제는 황권과 후계자, 그리고 황자들 사이의 갈등을 처리하며 태자를 미리 책봉하는 일의 폐단을 더욱 깊이 체감했다. 결국 그는 유조(遺詔)로 후계자를 세우는 방식을 택해 황실의 갈등을 해소하고 황권의 평화로운 이양과 성세의 지속을 이끌어냈다. 그의 대책은 하나의 창거(創擧)가 되어 청 왕조 비밀 건저(秘密建儲)의 효시가 되었다.

세웠다 다시 폐해

“사람은 어릴 때는 교육할 수 있지만, 성인이 되어 일단 당여의 유혹을 받으면 각자 제 갈 길을 가려 하니 다시는 그를 구속하거나 제어할 수 없다.” —— 강희제

강희 51년 9월, 강희제는 태자를 다시 폐위하고 여전히 윤잉을 구금해 감시하게 했다. 그림은 청 원요(袁耀 款)의 《한궁추월입축(漢宮秋月立軸)》 부분. (공유 영역)

강희 47년(1708년)은 실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폐태자 윤잉이 실성한 듯 넋을 놓고 있을 때, 감시를 맡았던 황장자 윤제가 강희제에게 윤잉을 무고하며 살의를 드러냈다.

강희제는 또한 윤제가 황팔자 윤사와 결탁하여 폐태자를 죽이려 모의했음을 알아냈다. 윤제는 심지어 몰래 몽골 라마를 불러 무속으로 윤잉을 저주했으며, 현장에서는 저주용 물건 10여 곳이 발견되기도 했다. 윤사 쪽은 심계가 더욱 깊어 큰 뜻을 품고 조정 신료들과 결탁했다. 그는 내무부 총관(內務府總管)을 지낼 때 강희제의 은덕을 베푸는 정책을 종종 자신의 공으로 돌려 명망을 얻었다.

두 아들의 후계자 다툼을 끊기 위해 강희제는 황장자를 세울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죄에 따라 왕작(王爵)을 박탈하여 부중(府中)에 유폐했다. 동시에 그는 여러 황자를 불러 훈계했다. “여러 아가(阿哥) 중 만약 황태자의 지위를 얻으려 수작을 부리는 자가 있다면 이는 국적(國賊)이니 법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1] 이어 즉시 윤사를 잡아 의정처(議政處)에서 심리하게 했다.

폐태자의 처지는 가련했고 황자들 간의 싸움은 심신을 지치게 했다. 게다가 강희제는 태자의 죄명 중 상당수가 모함에 의한 것임을 발견하고 점차 태자를 다시 세울 생각을 품게 되었다. 10월, 강희제는 황자들과 대신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황태자를 세우는 일은 짐의 마음속에 구상이 있으나 대신들에게 알리지 않고 대중에게도 알리지 않겠다. 그때가 되면 너희는 오직 짐의 뜻에 따라 행하기만 하면 된다.”[2]

강희제는 폐태자를 위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달 남원(南苑)을 순행(巡行)할 때 과거 태자와 여러 황자가 수행하며 떠들썩했던 일을 떠올리고는 풍경을 대하며 우울함에 병이 났다. 궁으로 돌아온 뒤 강희제는 윤잉과 윤사를 불러 접견하고 나서야 마음이 다소 평온해졌다. 특히 여러 차례 윤잉을 만난 뒤 강희제는 “이제부터 다시는 태자를 폐위했던 지난 일을 거론하지 말라”는 유지를 내리고 유폐를 안양(安養 쉬면서 휴양)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는 또한 “다시 윤잉을 만나니 가슴속에 맺혔던 것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며 기뻐했다.[3]

11월,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의 문무대신을 불러 이르기를, 황장자를 제외하고 여러 아가 중에서 황태자 후보 한 명을 추천하라고 했다. 뜻밖에도 몇몇 대신이 사전에 짜고 일제히 황팔자 윤사를 천거했다. 강희제는 크게 진노하며 그가 세상 물정에 어둡고 최근에 죄를 지었으며 생모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제의를 거절했다. 동시에 윤잉을 다시 태자로 세우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다음 날 강희제는 태자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유지를 공포하고, 48년(1709년) 3월에 태자 복위(復位) 대례를 거행했다. 그러나 일은 강희제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복위된 윤잉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성품을 고치지 못했고 부자간의 간극은 더욱 깊어졌다.

강희 50년(1711년), 강희제는 보군통령(步軍統領) 탁화제(托和齊)가 관리들과 결탁해 태자의 즉위를 보장하라는 상소를 올리는 것을 모의했고 윤잉도 이에 연루되었다. 이에 강희제는 모의에 가담한 태자당을 엄벌하고 다시 태자를 폐위하기로 했다. 이듬해 9월, 그는 새외(塞外) 순시를 마치고 상경하여 태자 폐위 유지를 선포하고 여전히 윤잉을 구금하여 감시하게 했다.

비밀 건저(建儲)

“황태자의 신분은 관계가 중대하다. 짐이 사서를 두루 살펴보건대 어찌 소홀히 하거나 가볍게 결정할 이치가 있겠는가.” —— 강희제

청 성조 강희제 조복상. (공유 영역)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 않듯, 여러 황자의 후계자 쟁탈전은 더욱 격렬해졌다. 황장자, 폐태자, 황팔자가 물과 불처럼 대립한 것 외에도 황삼자 윤지, 황사자 윤진(胤禛 훗날의 옹정제)이 한 파벌을 이루었고, 황구자 윤당(胤禟), 황십자 윤아(胤䄉), 황십사자 윤제(胤禵)는 황팔자를 지지했으며, 황십삼자 윤상(胤祥)은 황사자를 지지하여 ‘구자탈적(九子奪嫡)’의 국면이 형성되었다.

태자를 두 번째 폐위할 때 강희제는 지난번처럼 슬퍼하지 않고 자신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웃으며 대한다”라고 했으나, 마음고생으로 병을 얻기도 했다. 이 사건과 여러 황자의 행태는 강희제의 건저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어떤 관리가 태자를 세울 것을 청하자 강희제는 대신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태자를 세우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태자를 세우는 것이 나라의 근본이지만 쉽게 결정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 황태자를 세우고자 한다면 반드시 짐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자라야 세울 수 있으니 어찌 경솔히 하겠는가?”[4]

윤잉만 보더라도 어릴 때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아 용모와 학문, 재능이 모두 뛰어났으나 장성한 후 나쁜 길로 빠져 포학하고 광기 어리게 변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복위된 후에도 성정을 바꾸지 못해 부득이 다시 폐출되었다. 이제 황자들의 세력이 점차 커지고 각자 관서(官署)를 거느리고 있으니, 누구를 태자로 세우든 각 파벌 간의 싸움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뼈아픈 반성 끝에 생전에 다시는 태자를 책봉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들 앞에서 태자를 세우지 않겠다는 뜻을 여러 번 천명했다. 강희 56년(1717년) 봄여름 이후 강희제의 건강이 계속 좋지 않자 군신들이 다시 태자를 세울 것을 제의했다. 강희제는 한 조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대신이 태자를 세워 정사를 보필하라고 청하는 것은 짐에게 갑작스러운 변고가 생길까 걱정해서일 것이다. 생사는 정상적인 이치이니 짐은 결코 기피하지 않는다. 다만 천하의 대권은 마땅히 황제 한 사람에게 통일되어야 한다.”[5]

이듬해 초, 강희제는 다시 군신들에게 효유했다. “짐은 어려서부터 병을 잘 견뎌냈기에 기거를 평소처럼 하며 여전히 정무를 처리하고 있다. 지금 온천에서 조양(調養)하니 안색이 회복되고 정신이 크게 고양됨을 느낀다.” 또한 태자를 세우는 일에 대해 말하기를, 과거 색액도가 황태자의 예의를 제정하는 바람에 폐태자의 심성이 변하고 행실이 어그러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정 태자를 세우기를 원한다면 먼저 태자의 모든 예의를 상의한 뒤에 다시 상소하라고 했다. 강희제는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없듯이 백성에게 두 왕이 없으니,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다”라고 강조했다.[6]

태자를 세우지 않은 것은 조정과 황실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동시에 강희제는 내색하지 않고 신중하게 후계자를 선택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물은 “짐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자”, 즉 자신처럼 왕조의 기틀을 위해 정무에 힘쓰고 온 마음을 다할 황제였다. 그는 이 기준에 따라 매 황자를 묵묵히 관찰하여 현명한 자를 선택해 세우되 비밀에 부쳤고, 임종 직전에야 황위 계승자를 공포했다. 강희제의 이러한 방식은 청나라 비밀 건저의 전통을 열었다.

비밀 건저란 황제가 생전에 황위 계승자의 이름을 유조로 써서 밀봉함에 담아 건청궁 정전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숨겨두는 방식이다. 황제가 붕어한 후 종실 대신들이 유조를 꺼내어 새 황제를 공포하게 된다.

이 방식의 장점은 황권이 통일되어 황제와 후계자 사이의 권력 다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황자들이 태자 자리를 다투며 내분을 벌이지 않고 정무에 전념하며 재능을 기를 수 있으며, 전조(前朝)나 후궁(後宮)이 당여를 만들어 사리사욕을 챙기는 폐단을 막을 수 있다. 청조 12명의 황제 중 4명이 실제로 비밀 건저 방식으로 선출되었다.

옹정의 황위 계승

“옹친왕이자 황사자인 윤진은 인품이 단정하고 듬직해 짐을 매우 닮았으니 반드시 대통(大統)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짐을 이어 등극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라.” —— 강희제 전위 유조

청 세종 옹정제 화상. (공유 영역)

강희제는 만년에 여러 차례 건저는 국가 대사이며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 여러 황자 중 그는 점차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기른 넷째 아들 윤진에게 눈길을 돌렸다. 초기에 윤진은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강희제를 따라 출정하고 순행하며 재능을 익혔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권력을 다투고 폐태자가 부친의 병세와 아우의 죽음에 무관심할 때, 윤진은 스스로 ‘천하 제일의 한가한 사람’이라 자처하면서도 효성과 우애의 미덕을 보여 강희제의 신임과 찬사를 얻었다.

강희제는 일찍이 그를 평가하기를 “사아가(四阿哥)는 짐이 친히 길렀는데, 어릴 때는 희노애락이 일정하지 않다고 느꼈으나 지금은 짐의 뜻을 잘 헤아린다. 짐을 보살피는 정성이 간절하니 가히 정성스러운 효자라 할 만하다”라고 했다.[7] 태자가 폐위되어 구금되었을 때 궁 안에서 오직 윤진만이 형을 위해 구명을 청했다. 강희제는 다시 그를 “도량이 남다르고 대의를 깊이 안다”라고 칭찬했다.[8]

강희제 만년에 윤진은 여러 중요한 사무에 참여했는데, 이는 강희제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중용했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강희 51년(1712년) 윤진은 태자당 심문에 참여했고, 54년 준가르부의 반란 때는 강희제가 그에게 의견을 물었으며, 56년에는 명릉(明陵) 도굴 사건 조사에 참여하고 제례를 주관했다. 57년에는 강희제를 대신해 황태후릉에 가서 제사를 올렸고, 60년에는 명을 받아 성경(盛京) 삼릉, 태묘 후전(太廟後殿), 원구(圜丘) 등지의 제사를 주관하고 과거 답안지 복사(複查) 작업에 참여했다. 61년에는 정부 쌀창고의 출납 상황을 조사하고 개혁 방안을 제시했으며, 같은 해 다시 명을 받아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강희 47년(1708년) 이래로 강희제는 태자 폐위 문제로 심신이 고달파 건강이 예전만 못했다. 54년(1715년) 강희제는 오른손에 병이 들어 글씨를 쓸 수 없게 되었고, 황자들의 활쏘기를 관람할 때도 더 이상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겨울에 들어선 뒤로는 자주 정신이 황홀해지고 어지러움을 느꼈으며 거동할 때도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57년(1718년) 봄, 강희제는 어느 날 아침 일어났을 때 갑자기 불편함을 느껴 “손이 떨리고 살이 떨려 보기에 좋지 않았으며, 가슴이 뛸 때면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9]

강희 61년(1722년) 10월 21일, 강희제는 여느 때처럼 남원으로 사냥을 나갔다. 11월 7일까지는 건강이 괜찮았으나 9일에 병이 나자 윤진에게 남교의 동지 제천 대례를 대신 행하게 했다. 10일부터 12일까지 윤진은 매일 사람을 장춘원(長春園)으로 보내 안부를 물었고 강희제는 그때마다 “짐의 몸이 조금 나아졌다”라고 전하게 했다.[10] 하지만 13일이 되자 강희제는 스스로 병세가 중함을 느끼고 급히 윤진을 궁으로 불렀다.

그 후 그는 황삼자, 칠자, 팔자, 구자, 십자, 십이자, 십삼자와 보군통령 융과다(隆科多)를 침상 앞으로 불러 유조를 낭독하게 하여 황위 계승자의 답을 공개했으니, 바로 황사자 윤진이었다.

윤진은 조령을 받은 후 화급히 강희제의 침궁으로 달려와 세 차례 문안했다. 강희제는 아직 윤진과 대화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병세가 날로 심해져 곧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술시(19~21시), 강희제는 장춘원에서 69세를 일기로 붕어했다.

20일, 윤진은 태화전에서 정식으로 황제에 등극하고 연호를 ‘옹정(雍正)’이라 하니 이가 바로 ‘옹정제’이다. 그는 강희제의 시호를 ‘인(仁)’, 묘호를 ‘성조(聖祖)’라 정하고 친히 성대한 장례를 주관했다. 풍운을 일으켰던 강희제의 열정적인 일생은 끝났으나 그가 일구어 놓은 강희 성세는 자손들에게 이어져 청조 역사상 가장 휘황한 강옹건 성세가 되었다.

강희제 중년 조복상(왼쪽)과 청 《만국내조도(萬國來朝圖)》(오른쪽). (공유 영역/에포크타임스 합성)

맺음말

강희제는 청 왕조의 가장 영명한 제왕으로, 당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를 통치하며 한당(漢唐)에 비견될 만한 황금시대를 열었다. 《청사고》는 그에 대해 “문무를 겸비하여 온 세상을 통일했으니, 비록 수성(守成)이라 하나 실로 창업과 같도다. 성학(聖學)이 높고 깊어 유교를 숭상하고 도를 중시했다. 여가에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천인(天人)의 도를 꿰뚫었으니 더욱이 고금에 보기 드문 바다. 도가 오래되어 교화가 이루어지고 풍속이 바뀌어 천하가 화락하고 태평함에 이르렀다. 그 옹희(雍熙)로운 광경은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워하고 머물게 하여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게 한다!”라고 찬사했다.

강희제의 일생을 돌이켜볼 때 재위 61년 동안 인심(仁心)과 인정(仁政)을 베풀었으니 공덕이 융성했다.

무공(武功) 면에서 그는 안으로 큰 난리를 평정하여 왕조의 기틀을 다졌고, 밖으로 강적을 물리쳐 제국의 군위를 떨쳤다.

정무(政務) 면에서 그는 어문청정(禦門聽政)하며 정사에 힘썼고 조세와 부역을 가볍게 하여 백성을 쉬게 함으로써 사해(四海)가 태평한 번영의 풍경을 맞이했다.

문화 면에서 그는 화하(華夏) 문화를 흠모하여 한족 유학자들을 중용하고 시문을 장려했으며 만주족을 교화해 문학의 융성기를 이끌었다.

학술 면에서는 더욱 학문에 뜻을 두어 추위와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부를 멈추지 않았으며, 동서양의 학문에 통달하고 실천을 중시하여 역사상 가장 박학하고 재주가 많은 황제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 백여 년의 태평성세를 회상하며 여전히 그리워하고 칭송해 마지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시리즈 완결)

주석:
[1]《康熙朝實錄》卷233: 康熙四十七年九月戊戌條。
[2]《康熙朝實錄》卷234: 康熙四十七年十月癸卯條。
[3]《康熙朝實錄》卷234: 康熙四十七年十月乙醜條。
[4]出自《皇朝通典》卷53。
[5]《康熙朝實錄》卷274: 康熙五十六年十一月辛未條。
[6]《康熙朝實錄》卷277: 康熙五十七年正月庚午條。
[7]《康熙朝實錄》卷224: 康熙四十七年十一月戊子條。
[8]《康熙朝實錄》卷224: 康熙四十七年十一月辛卯條。
[9]《康熙起居注》:康熙五十七年二月二十六日乙巳條。
[10]《康熙朝實錄》卷299: 康熙六十一年十一月辛卯條、壬辰條、癸巳條。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6/4/n1216221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