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2년—서기 8년)
심연
【정견망】
과학기술
*수학
약 기원전 1세기 책으로 엮어진 《주비산경》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수학 저작이다. 그리고 《구장산술(九章算術)》은 서한 이래 많은 수학자가 연구한 결정체다. 서한 전기의 유명한 수학자 장창(張蒼), 경수창(耿壽昌) 등이 일찍이 이를 추가했다. 전서는 총 아홉 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246개 수학 문제의 풀이법을 수집했다. 그중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분수의 사칙연산과 비례 계산법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각종 면적, 체적의 계산법과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해 측량하는 문제, 그리고 제곱근과 세제곱근을 구하는 방법이 있으며, 특히 세계 수학사상 처음으로 음수(負數) 개념과 양수 음수의 가감법 운산 법칙을 기재했다. 이 책은 중국 고대 수학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이 조선, 일본에까지 미쳐 여러 가지 문자로 번역되었다.
*천문역법
서한 시기에는 천문학이 매우 발달했다. 당시의 천상 기록은 상당히 풍부했다. 일찍이 《회남자》라는 책에 이미 태양 흑점에 관한 기재가 있다. 《한서・오행지》에는 이에 대해 더욱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하평(河平) 원년(기원전 28년) 3월 을미(18일), “해가 뜰 때 황색이었고, 동전만 한 검은 기운이 해 중앙에 있었다.” 이것은 현재 세계가 공인하는 가장 오래된 흑점 기록이다. 유럽은 807년 8월 19일에야 비로소 흑점 기록이 나타나니, 중국보다 900여 년이나 늦었다. 갈릴레오는 1610년에야 비로소 흑점을 보았다. 마왕퇴 한대 무덤에서 발굴된 백서 《五星占》에는 다섯 가지 큰 행성의 운행에 관한 기재가 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학 저작이다.
서한 시기에는 상세한 천상 기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문학 연구도 한때 크게 성행했다. 한무제 때 낙하굉(落下閎)이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으며, 태초(太初) 3년에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세워 28수의 위치를 구했다. 선제 때 경수창은 구리로 상(像)을 주조하여 천상을 관측했다. 이로 보아 중국은 당시 세계에서 천문학이 가장 발달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 초기에는 여전히 진조(秦朝)의 《전욱력(顓頊曆)》을 사용해 10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1972년 산동 임기(臨沂) 은작산(銀雀山) 한대 무덤에서 기원전 134년의 역보(曆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완전한 역보이다. 이에 근거해 추산하면 이 역보는 진조의 역법과 같아, 무제 태초 이전에는 여전히 《전욱력》을 채택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전욱력》은 정밀하지 못해 한무제 때에 이르러 이미 혼란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한무제는 사마천, 낙하굉, 등평(鄧平) 등에게 《전욱력》을 수정하여 《태초력》을 짓게 했다. 정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고 농사철에 유리한 24절기를 채택했으며, 중기가 없는 달에는 윤달을 끼워 넣어 태양의 공전 주기와 음력의 월이 서로 합치되지 않는 모순을 조정함으로써 초하루, 보름, 그믐, 반달을 비교적 정확하게 맞추었으니, 중국 역법상 한 획을 그은 발전이었다. 천문학이 끊임없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역법에서도 날로 정밀함을 구했다. 성제 때 유흠(劉歆)이 다시 《태초력》에 의거해 《삼통력(三統曆)》을 지었는데, 1년은 일, 1달은 일로 규정하고 19년에 7번의 윤달을 두었으니 이는 당시 가장 정밀한 역법이었다.
*의학
서한 시기에는 주로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사람의 생리 현상과 병리 현상을 설명하고, 이러한 이론으로 변증 치료를 진행했다. 서한의 명의 순우의(淳于意)는 사람의 병을 치료할 때 “반드시 먼저 그 맥을 짚어보고 치료했다.” 이로 보아 당시 맥학(脈學)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사기・창공전》에는 그가 기재한 25개의 ‘진료 기록’이 있으니, 이는 병력 기록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호북 강릉 봉황산 한대 무덤과 호남 장사 마왕퇴 1호 한대 무덤에서 출토된 서한 초기의 시체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매우 완전하게 보존되어 피하 조직에 아직 탄력이 있고 내장도 잘 보존되어 있으니, 당시 이미 상당한 선진적인 시체 방부 기술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마왕퇴 3호 한대 무덤에서 출토된 기원전 168년 무렵의 백서 의서 중에는 맥법, 구경(灸經)과 의방(醫方 처방) 등에 관한 저작이 있다. 백서 의방 중에는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등 50여 가지 질병의 280여 개 의방과 240여 가지 약품이 실려 있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방이다.
1962년 하북 만성(滿城)에서 발견된 서한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 부부의 무덤에서는 ‘의공(醫工 의료기술자)’ 전용 동대야, 동약숟가락 등 의료 전용 기구뿐만 아니라 금침 네 개, 은침 다섯 개가 발견되었으며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제지술
일찍이 서한 시기에 중국은 제지술을 발명했으며, 8세기가 되어서야 아랍인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서한의 종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재는 《한서・효성조황후전》에 있다. 1933년 신강 로브노르 한대 봉수 유적에서 마지(麻紙 삼베로 만든 종이) 잔편(殘片) 한 조각이 발견되었다. 1957년 섬서 서안시에서 패교지(灞橋紙) 잔편이 출토되었고, 1973년 감숙에서 금관지가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서한의 고분에서 나왔으며 그중 패교지가 가장 원시적이다. 1986년 감숙 천수 서한 고분에서는 종이 지도 한 장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로 보아 서한 시대에 중국인은 이미 제지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서한 시기에는 종이의 사용이 아직 보편적이지 않았을 것이며, 고고학적 발견에서 서한의 대량의 죽목간과 백서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견백과 죽목간이 여전히 주요한 서사 도구였을 것이다.
*수공업
서한 수공업의 발전은 주로 뛰어난 수공예 수준에서 나타난다.
1968년 하북 만성(滿城) 서한 중산정왕 유승 부부의 무덤에서 대량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물이 발굴되었다. 예컨대 출토된 ‘장신궁등(長信宮燈)’은 한 궁녀가 양손으로 등불을 받쳐 든 형상으로 매우 생동하며, 설계가 더욱 정교하여 분해할 수 있고 등잔판은 회전할 수 있으며 등갓은 여닫을 수 있어 등불의 밝기와 조사 각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궁녀의 머리 부분은 분해할 수 있고 몸 안은 비어 있으며 오른팔은 연도(煙道 연기 통로)와 통한다. 연도를 통해 나오는 촛불의 연기가 몸 안으로 수용되므로 실내의 청결을 유지할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덤 속 두 벌의 완전한 ‘금루옥의(金縷玉衣)’인데, 2000여 개의 옥 조각과 황금으로 만든 실로 엮어 만든 것으로 그 제작 공예가 정묘하기 이를 데 없다.
‘장신궁등’
*칠기업
서한의 칠기업 역시 매우 큰 발전이 있었다. 서한 왕조는 촉군(蜀郡 성도)과 광한(廣漢) 등지에 공관을 설치해 칠기 제조를 감독했다. 당시 상층 가정에서는 모두 칠기를 사용했으니, 장사 마왕퇴 한대 무덤에서 대량의 칠기가 출토되었다. 칠기의 종류는 매우 많아 이배(耳杯), 반(盤), 호(壺), 합(盒), 분(盆), 작(勺), 침(枕), 렴(奩), 병풍 등이 있다. 출토된 서한의 칠기, 특히 마왕퇴의 기물들은 대부분 색채가 선명하고 광택이 나며 정교하고 아름답다. 특히 칠기 위의 채회(彩繪 채색 회화)는 기교가 더욱 높아 화법이 쇄락하고 생동하며 분방하고 힘이 있고 선이 깔끔하고 유려하다.
*제철업
한대의 제철업은 작업장이 많고 규모가 컸다. 1950년대 이후 하남, 산동, 북경, 강소 등지에서 많은 한대 제철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하남 공현(鞏縣) 철생구촌(鐵生溝村)과 남양 북관 와방장(北關瓦房莊) 등지의 유적 규모가 가장 크다. 이러한 유적들을 통해 서한의 제련 공정이 집중되어 있었고 설비가 완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남 공현 철생구촌에서는 초강로(炒鋼爐) 한 좌(座)가 출토되었다. 초강이라는 이 신선하고 고효율적인 선진 기술의 출현은 강철 제련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의미를 지닌다.
[역주: 쇳물을 마치 음식을 볶듯이 휘저어 가며 탄소를 제거하는 유기적인 제련 방식. 이 방법을 쓰면 단단하면서도 신축성이 뛰어난 철을 만들 수 있다.]
서한 시기에는 철제 장검, 장창, 환수대도(環首大刀)를 생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 용품과 잡용 도구도 철제를 광범위하게 사용했으니 등(燈), 솥, 화로, 가위 등이 이미 서한 중기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한대 철기의 사용이 이미 상당히 광범위했음을 설명한다.
* 수리(水利)
한무제 때 관중에 몇 개의 비교적 큰 관개 수로를 팠다. 하나는 기원전 129년에 판 조거(漕渠)인데, 주로 관동에서 서쪽으로 운반하는 조운을 이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거는 위하(渭河)의 남쪽 기슭에 있으며 동쪽으로 황하로 흘러들며 길이가 100여 킬로미터에 달했다. 수로가 완성된 후 이 구간의 조운 시간이 절반으로 단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로 양안에서 약 만 여 경(頃 역주: 1경은 약 2만 평이다)의 땅이 혜택을 입었다.
또 하나는 용수거(龍首渠)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지하 수로다. 그것은 지금의 섬서 징성현 상두촌(狀頭村)에서 낙수(洛水)를 끌어들여 지금의 섬서 포성(蒲城), 대려(大荔) 일대의 논밭을 관개했다. 수로가 지나가는 한 산의 토질이 느슨하여 수로 기슭이 무너지기 쉬웠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정거법(井渠法)’을 발명해 용수거가 지하로 통과하게 했다.
기원전 111년, 무제는 정국거(鄭國渠) 상류에 여섯 개의 보조 수로를 닦으라 명했으니 이를 육보거(六輔渠)라 한다. 기원전 95년에는 다시 중산구(仲山口 지금의 섬서 경양涇陽 서북)에서 경하(涇河)를 끌어들여 역양(櫟陽 지금의 섬서 임동 역양진)에 이르는 백거(白渠)를 닦았다. 백거는 전장이 약 200리로 농경지 4500여 경을 관개했으며, 물속의 진흙은 다시 밭을 기름지게 할 수 있었다.
서한 때 신축된 관중 지역의 또 다른 중요한 농경지 수리 공정은 성국거(成國渠)다. 그것이 어느 해에 세워졌고 누가 이 공정을 주재했는지는 사서에 명문의 기재가 없으며 단지 무제 재위 기간에 세워졌다고만 전한다. 이것은 위수(渭水)를 수원으로 하는 대형 관개 수로로 위수 북면에 위치했다. 성국거의 길이는 백거보다 약간 작았으나 관개 면적은 약 만 경 안팎으로 백거의 배 이상이었다. 훗날 한때 관중에서 가장 주요한 관개 수로로 발전하기도 했다.
상림원(上林園)은 함양 서쪽면에 있으며 둘레가 300리로 위수 남북에 걸쳐 있었으니 진한 시기 제왕들이 활을 쏘고 사냥하며 놀던 곳이다. 몽롱거(蒙蘢渠)는 황실 원림 중의 수도(水道 물길)에 속하여 원림에 물을 대고 배를 띄우는 등의 용도에 제공되었다.
긴 역사의 장하 속에서 관중 수리는 줄곧 세 가지 큰 수로 계통으로 구성되었으니,
즉 경수를 수원으로 경거계통, 위수를 수원으로 하는 위거계통, 낙수를 수원으로 하는 낙거 계통이다.
서한 시기에 이 세 가지 큰 수로 계통이 이미 기본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일련의 유명한 관개 공정 외에도 무제 때에는 지금의 산동 태산 아래에서 문수(汶水)를 끌어들여 농경지를 관개했고, 감숙 경내에서 황하 물을 끌어들여 밭에 물을 대었으며, 지금의 안휘 경내에서 회수(淮水)를 끌어들여 관개하는 등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