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220년)
심연
【정견망】
화하(華夏) 역사상 굵직한 한 획을 그은 서한 왕조는 후세를 위해 광활한 영토를 남겼고, 중국과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나아가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개척했으며, 상당히 안정되고 성숙한 통치 모델과 패러다임을 남긴 후 역사라는 큰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영웅호걸들이 무대에 등장해 이 성세 왕조에서 자유롭게 역량을 발휘하며 수많은 아름다운 풍경을 구축했던가. 예컨대 고조 유방, 문제 유항, 무제 유철, 장군 한신, 문신 소하와 장량, 그리고 문학가 가의, 사마상여 등등이 있었다. 우리가 아직 끝없는 회상과 여운에 잠겨 있을 때, 한실을 부흥시키려는 한 바탕 큰 연극이 이미 조용히 막을 올리고 있었다.
왕망이 서한 정권을 찬탈한 후 천하 곳곳에서 군사를 일으켜 한실(漢室) 천하의 부흥을 바랐다. 혼란스러운 대무대 위에서 유수(劉秀)라는 한실 종친이 독특한 안목과 탁월한 재능으로 천하를 얻었고, 한실 천하는 이로써 진정으로 부흥할 수 있었다. 유수가 건립한 한나라는 낙양에 도읍을 정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를 ‘동한(東漢)’이라 부르며, ‘후한(後漢)’이라고도 한다.
동한은 광무제(光武帝) 유수로부터 시작해 근 200년 동안 이어지다 쇠망했다. 동한의 많은 제도는 서한의 것을 받아들였으나 새로운 발전도 있었다. 그사이에도 수많은 다채로운 장면과 여러 영웅호걸이 출현했으니, 예컨대 광무제 유수, 명제 유장(劉莊), 장군 반초(班超), 과학자 장형(張衡) 등이 있다. 그러나 서한과 비교하면 동한의 강성함은 그래도 다소 손색이 있었다. 아울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천하를 편안하게 함만 못하고, 천하를 편안하게 함은 천하와 더불어 편안함만 못하다”라는 사상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동한은 서한의 기초 위에서 서역에 대한 통치를 계속 공고히 했다. 한조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교류는 실크로드를 따라 내륙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후세 수많은 중국인의 신앙에 영향을 준 불교가 바로 실크로드를 따라 서한 말년에 중국으로 전해졌다. 동한의 두 번째 황제인 명제(明帝) 때, 그는 서역에 신이 있어 그 이름을 불(佛)이라 한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천축으로 보내 그 책과 사문(沙門)을 구해왔으며, 낙양에 중국 최초의 불교 사찰인 백마사(白馬寺)를 건립했다. 이때부터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동한의 건립
*유수의 신분과 이상
동한 왕조의 개창자인 유수는 남양 채양(蔡陽 지금의 호북 조양 신야 서남) 사람으로, 장사정왕(長沙定王) 유발(劉發)의 아들인 용릉절후(舂陵節侯) 유매(劉買)의 후예다.
《후한서》에 따르면, 유수가 막 태어났을 때 붉은 빛이 방 안에 비추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매우 기이하게 여겨 점쟁이를 불렀는데, 점쟁이는 “이 징조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길하다”라고 했다. 이 해에 그의 아버지가 있던 현에서 한 줄기에 아홉 개의 이삭이 패는 벼가 자라났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광무(光武)라 짓고 자를 수(秀)라고 했다.
유수는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뜻이 컸으며 고생을 잘 견뎠다. 그는 9세에 아버지를 여읜 후 숙부 유량(劉良)의 양육을 받았으며, 13세 때 왕망이 서한 정권을 찬탈했다. 20세 때는 장안에 가서 태학(太學)에 입학해 공부하며 “《상서》를 배워 대의를 대략 통했다.” 이후 태학을 졸업하고 남양으로 돌아왔으나, 연루된 일로 인해 신야(新野 지금의 하남 신야)로 도망쳤다가 한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출옥 후 남양 고향으로 돌아와 계속 농사를 짓고 독서하며 친구를 사귀는 생활을 했다.
성인이 된 유수는 키가 7척 3촌이었고, 수염과 눈썹이 아름다웠으며, 입이 크고 코가 높았으며 이마가 도톰했다. 당시 한 완성 사람이 《하도(河圖)》를 가지고 유수에게 점을 치며 말하기를 “유씨가 다시 일어나고 이씨(李氏)가 보필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씨란 동한의 대신 이양李陽을 가리킴) 처음에 유수는 자신이 이 중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형 유연(劉演)은 의협심이 강하고 현사(賢士)를 사귀기를 좋아했다. 이에 유수는 유연과 함께 용릉 유씨 종실 자제들을 골간으로 한 ‘용릉병(舂陵兵)’을 조직했고, 한실 부흥을 내건 녹림군(綠林軍)에 참가해 그중 중요한 역량이 되었다. 그해 유수의 나이는 28세였다.
*한실 부흥
당시 거사한 이들은 녹림군 외에도 평림(平林)인 진목(陳牧)이 이끄는 ‘평림병’이 있었다. 장사 왕의 일족인 유현(劉玄)도 평림병에 참가했다.
23년 2월, 녹림군은 한실 후예인 유현을 황제로 옹립하고 연호를 ‘경시(更始)’로 고쳤다. 공원 24년 2월, 유현은 장안으로 천도했고 유연을 대사도에 임명하고 유수는 태상편장군(太常偏將軍)에 임명했다. 유현은 황제가 된 후 유연에게 남양(南陽)을 공격하게 했고, 또 왕봉(王鳳)과 유수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곤양(昆陽)을 공격하게 했다. 유수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위기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초인적인 담략과 뛰어난 군사 지휘 능력으로 의군(義軍)을 이끌고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겨 왕망의 주력 군사 42만을 대파하고 ‘곤양대첩(昆陽大捷)’을 거두었다.
곤양대전 이후 유연, 유수 형제와 경시 정권의 모순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경시제 유현은 참언을 듣고 유연 형제가 자신과 황위(皇位)를 다툴까 염려해 핑계를 대고 유연을 살해했다. 유수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힘이 부족함을 알기에 아픔을 참으며 주동적으로 유현에게 죄를 청했다. 이해 10월, 유현은 유수를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 행대사마(行大司馬)라는 직함으로 “부절을 지니고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주군(州郡)을 진무하라”라고 명했다. 이 기회를 빌려 유수는 경시 제장들의 직접적인 감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의 길로 나아갔다.
유수는 부하인 풍이(馮異)의 “맺힌 원한을 풀어주고 은혜를 베풀라”라는 건의와 등우(鄧禹)의 “영웅을 초빙해 민심을 기쁘게 하는 데 힘쓰라”라는 건의를 받아들여 하북에 도착한 후 현지 상황을 상세히 고찰하고, 왕망의 가혹한 정치를 폐지했으며 죄수들을 석방하고 한가(漢家)의 관명과 제도를 회복시켰다. 이에 현지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며 “다투어 소와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했다.”
유수는 현지 관료와 백성들의 지지 속에서 먼저 한 성제의 아들을 사칭한 유자여(劉子輿)가 한단(邯鄲)에서 할거해 황제를 칭하던 왕랑(王郎) 세력을 소멸시켰다.
유수가 하북에서 세력을 확장하자 경시제는 불안해졌고, 이에 유수를 소왕(蕭王)으로 봉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유수와 그 부장들에게 장안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를 보내 유수를 공격하게ㅜ했다. 유수는 이미 자신의 깃털이 풍성해졌음을 자각하고 경시를 벗어나기로 결심한 후 “하북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는 구실로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이어 군사를 보내 경시군을 격퇴했다. 그사이 또 하북의 동마군(銅馬軍) 30만 명을 격파하고 흡수해 신속히 세력을 확대했다. 때문에 관서(關西)에서는 광무제를 ‘동마제(銅馬帝)’라 불렀다. 이 기간의 몇 차례 전투는 모두 유수의 탁월한 군사 지휘와 모략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때 하북의 형세는 이미 점차 명확해졌다. 반면 경시 정권은 무능하고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현량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충언과 직간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관작을 남발했기에, 아직 안정되지 않은 천하가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신흥 적미군(赤眉軍)이 관중으로 서진하여 경시 정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수는 이에 근거해 새로운 배치를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지모가 뛰어난 등우를 전장군(前將軍)으로 삼아 정병 2만을 이끌고 진남(晉南)에서 관중(關中)으로 가게 하여 기회를 보아 장안을 취하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풍이를 맹진(孟津)장군으로 삼아 황하 나루터를 굳게 지키게 함으로써 낙양에 주둔한 경시의 군대가 북쪽으로 건너오는 것을 방지했다. 동시에 하북을 더욱 공고히 하여 최종적으로 하북을 통제하는 목표를 실현했다.
25년 6월 기미일, 유수는 여러 장수들의 간곡한 옹립과 권고 속에 호(鎬 지금의 하북성 백향柏鄉현)에서 고천(告天) 의식을 거행하고 정식으로 즉위해 황제가 되었으니, 국호는 ‘한(漢)’이라 하고 연호를 ‘건무(建武) 원년’으로 고쳤으며 낙양에 도읍을 정했다.
유수는 하늘에 고하는 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천상제(皇天上帝)와 후토신지(後土神只)시여, 저희를 보살피고 명을 내리시어 이 유수(劉秀)에게 백성들을 맡기시고 그들의 부모가 되라 하셨으나, 저 유수는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휘하의 모든 신하와 제후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한목소리로 말하기를, ‘왕망(王莽)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했을 때 분연히 의병을 일으키셨습니다. 곤양 전투에서 왕심과 왕읍을 격파하셨고, 하북 땅에서 왕랑과 동마군을 토벌해 천하를 평정하시니 온 세상이 그 은혜를 입었습니다. 위로는 천지의 마음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수많은 백성이 귀순하는 바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언서인 참기(讖記)에 이르기를, ‘유수가 군대를 일으켜 도리에 어긋난 자들을 붙잡을 것이며, 묘금(卯金: 劉 씨를 뜻함)이 덕을 닦아 천자가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 유수는 두 번, 세 번 완강히 사양하였습니다. 그러자 휘하의 무리들이 일제히 말하기를, ‘황천의 크신 명령은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제가 어찌 경외하는 마음으로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부터 유수는 경시 정권에서 탈피했다. 그리하여 중국 역사는 다시 유씨의 한가(漢家) 천하를 회복하고 동한 시기로 진입했으니, 후한 시기라고도 한다.
*천하 통일 대업의 완성
유수가 한을 부흥시키고 황제를 칭할 당시, 서쪽에는 경시 정권이 있었고 동쪽에는 적미군이 있었으며, 이 외에도 유영(劉永)이 예동(豫東 예주 동쪽)과 완북(皖北 안휘 북부)을 할거했고, 외효(隗囂)가 서북 감섬(甘陝 감숙 섬서)과 내몽골 일대를 할거했으며, 공손술(公孫述)이 파촉(巴蜀)과 한중(漢中)을 할거했고 그 외에 크고 작은 할거 세력들이 있었다. 따라서 유수가 직면한 가장 첫 번째 문제는 통일 대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유수가 하북을 평정하는 동시에, 대장 등우도 관중에서 중대한 진전을 거두어 건무 원년 1월부터 7월까지 안읍(安邑)과 아현(衙縣)에 있는 경시의 주력을 연파하고 상군(上郡), 북지(北地), 안정(安定)을 통제하여 기회를 보아 장안으로 남하할 배치를 완료했다. 그리고 또 다른 대장 풍이도 등우의 행동에 적극 협조해 하동 13개 현으로 남하해 경시군 10여 만 명의 항복을 받아내고 이어 낙양을 압박했다. 이후 유수는 유인 항복 책략을 써서 낙양의 30만 명이 싸우지 않고 항복하게 했다.
이때 적미군은 이미 경시 정권을 무너뜨렸고, 동시에 한 황실의 후예인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립하여 연호를 ‘건세(建世) 원년’으로 고쳤다. 그러나 적미군은 경시 정권을 대체한 후 역시 천하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몰랐고, 법기(法紀) 패괴되었으며 폭행이 끊이지 않아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건무 2년(26년), 관중 방면의 형세에 불리한 국면이 나타났으니, 등우가 적미군과 반복해서 혼전을 벌여 적미의 역량을 크게 약화시켰으나 한군(漢軍) 역시 몇 차례 위기를 겪었다. 이에 유수는 등우 대신 풍이로 바꾸어 관중의 군사를 주재하게 했다. 풍이는 신속히 배치를 조정해 이듬해 윤2월, 적을 유인해 매복 공격하는 전법으로 효저(崤底) 대전의 승리를 거두어 적미군 8만 여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나머지 적미군 10여 만 명이 동쪽 의양(宜陽)으로 갈 때, 이미 “적미군은 양식이 없으니 스스로 마땅히 동쪽으로 올 것이다”라고 단정하고 엄중히 대기하고 있던 유수에게 차단당해 10여 만 명이 전부 항복했다. 이로써 유수는 관중 지역 전체를 획득했다.
하북이 처음 평정되고 관중이 장차 평정되려 할 때, 유수는 군웅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시작하며 전국을 통일할 전략적 배치를 실행했다. 당시 각 할거 세력의 지리적 위치와 그 역량의 강약에 따라 유수는 가까운 곳부터 먼 곳으로, 동쪽을 먼저 하고 서쪽을 나중에 하며 하나씩 격파하는 전략 방침을 제정했다. 관중 세력을 격파하기 위해 유수는 농(隴) 지역과 연합해 촉(蜀) 지역을 제어하는 책략을 취함으로써, 한군이 편사(偏師 별동부대)로 관중을 지키게 하고 주력은 동방을 대처하는 데 사용했다.
건무 2년부터 6년(26~30년)까지 유수는 5년의 시간을 들여 관동의 적을 하나씩 소멸했고, 천하를 넷으로 나누었을 때 그중 셋을 차지하는 국면을 형성했다.
동방이 평정된 후 한과 농의 연합이 와해되었다. 농 지역의 외효는 한군이 공격할 다음 목표가 되었다. 유수는 하서(河西)의 두융(竇融)과 한 종실과의 특수한 관계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두융을 끌어들여 외효를 전후로 적을 맞이하는 처지에 놓이게 했다. 건무 8년(32년) 봄, 유수는 정예 2,000명을 보내 장거리 침투를 통해 농우(隴右)의 군사 요충지인 약양(略陽)을 습격해 점령함으로써 외효의 수만 정병을 단단히 붙잡아 두었다. 같은 해 여름, 유수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농을 공격해 두융의 하서군과 양면에서 협공해 농군을 대패시켰다. 건무 10년(34년) 10월, 외씨 집단을 철저히 격파하고 농우를 병탄했다.
유수는 농을 획득한 후 단기간의 휴식을 거쳐 건무 11년(35년) 봄, 군사를 보내 촉을 토벌하게 했다. 유수는 장안에 머물며 친히 전쟁 과정을 지휘했다. 건무 12년(36년) 11월, 한군은 성도로 처들어 가 공손술을 죽였고 촉 땅은 한실로 돌아왔다.
유수는 전후로 10여 년의 시간을 써서 마침내 36년 중국 역사상 세 번째 대통일을 실현했다. 유씨 종족이 한가 천하를 부흥시키려던 계획은 이로써 마침내 최종적인 완성을 선고했다.
유수가 최종적으로 통일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가 군사를 잘 부려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고 기이한 계책으로 승리하는 데 능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신료들을 대할 때 “마음을 열어 성실함을 보여주고” 옛 잘못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나 상벌이 엄명하여,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고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으니 숙원이 있던 주유를 중용한 것이 그러하다.
셋째는 책략을 가구하는 데 주의하여 공벌 중에서 더 많은 지지를 얻기 위해 한편으로는 군기를 엄정히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비와 형도를 석방하며 부세와 형법을 감면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개인적으로 볼 때 유수는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니, 역사에서는 그의 재능이 문무(文武)를 겸비했다고 전한다.
현명한 광무제와 “건무성세(建武盛世)”
서한이 멸망하고 왕망이 찬위한 때로부터 유수가 한을 부흥시키고 황제를 칭하며 전국을 통일하기까지 천하는 극도로 피폐해졌고 백성들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려웠으므로 휴양생식이 아주 필요했다.
민간에서 백성의 질고를 알고 아랫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며 너그럽고 흉금이 컸을 뿐만 아니라 절약을 힘껏 실행했다. 또 간언을 잘 듣고 정사에 부지런한 성명(聖明)한 현군(賢君)으로서, 광무제 유수는 전전긍긍하며 정사에 부지런하여 “매일 아침 조회를 보면 날이 기울어서야 마쳤으며, 자주 공경낭장(公卿郎將)들을 이끌고 경륜을 의논하다 밤중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는 일련의 적극적인 정책을 채택해 사회 경제를 발전시키고 주변 소수민족을 안무(安撫)하는 데 주력했으며 한가의 성세를 다시 떨치고자 힘썼다.
첫째로, 유수는 “공신을 퇴진시키고 문관을 등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유수는 그의 공신들이 대부분 무장 출신이라 전장(典章) 제도를 잘 모르고 국가를 다스릴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공이 높음을 스스로 믿고 명령을 듣지 않거나 법기(法紀)를 지키지 않았다. 그들의 공훈을 표창하고 그들의 사람 마음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유수는 그중 공로가 가장 큰 360여 명을 열후(列侯)로 봉하고 그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으나 실제 권력은 없앴다. 고밀후(高密侯) 등우, 고시후(固始侯) 이통(李通), 교동후(膠東侯) 가복(賈複) 세 사람이 군국 대사에 참여해 의논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대다수 열후는 한직이 되어 단지 “열후로서 조정의 큰 행사에 참여할” 뿐이었다. 이들 열후의 봉읍 수량은 등우, 오한(吳漢) 두 사람은 4개 현이었고 나머지는 현후(縣侯), 향후(鄉侯), 정후(亭侯)였으며 작은 자는 겨우 수백 호에 불과했다. 총체적으로 말해 서한보다 훨씬 적었으며 백성들의 세금으로 먹고 살 뿐이었다.
그러나 유수는 산림에 은거하며 왕망에게 벼슬하지 않은 선비들을 오히려 매우 중시했다. 그는 이들이 전장 제도에 익숙해 국가를 다스릴 줄 알고, 또 정조(情操)가 고상해 권세에 아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방면으로 방문하며 정중한 예로 초빙했다. 평제(平帝) 때의 고밀령(高密令) 탁무(卓茂)가 왕망에게 벼슬하지 않자 유수는 태부(太傅)로 초빙했고, 명유 복잠(伏湛)을 상서(上書)로 초빙했다. 그리고 상서의 권력은 매우 컸다.
둘째로, 유수는 건국한 후 서한 시기 권신이 정권을 잡고 외척이 찬권한 것과 지방의 권력이 비대했던 교훈을 거울삼아 상서의 직권을 강화하고 삼공(三公)의 권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중앙집권, 즉 황권(皇權)을 강화했다.
중국의 수보(首輔) 제도에서 승상은 한초 제도에서 백관(百官)의 우두머리라 할 만했다. 한무제 때부터 상서, 시중 등 내관(內官)을 중용해 조정의 정사를 직접 처리하기 시작하자 승상 등 외조(外朝)의 관리들은 정책을 결정할 기회를 잃기 시작했고 단지 명령을 받들어 일할 뿐이었다. 상서대(尚書台)는 원래 공문서 발송을 관리하는 기구였고 부임하는 관리는 연치가 비교적 얕았다. 상서령(尙書令), 상서(尙書)는 겨우 천석, 육백석의 중하급 관리에 불과해 상서랑(尚書郎)은 일반 사대부들에게 경시받았다. 내조의 대두로 인해 외조 관리들은 시중(侍中), 급사중(給事中 역주: 궐내에서 황제를 모시고 일을 한다는 뜻) 등의 직함을 더한 후에야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서한의 삼공이 실권함으로 인해 초래된 화를 거울삼아 유수는 승상을 두지 않았고 “비록 삼공을 두었으나” “일은 대각(台閣)으로 귀결”되게 했으니, 즉 한편으로는 삼공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서대의 조직을 확대해 직권을 강화했다. 모든 정무는 더 이상 삼공을 거쳐 관리되지 않아 삼공은 이름만 남아있을 뿐 실질이 없어졌다. 상서대는 황제가 명령을 내리는 집행 기구가 되었고 모든 권력은 황제 한 몸에 집중되었으니, 유수는 조정의 대신들에 대해 “엄격한 법으로 감독하고 문책하는 술을 시행했다.”
《후한서·신도강전(申屠剛傳)》에서는 “당시 내외의 여러 관리는 황제가 친히 선발한 경우가 많았고, 게다가 법리로 엄밀히 감찰하고 직무가 너무 고되어 상서 등 근신(近臣)들은 심지어 앞에서 매질을 당하고 끌려가기도 하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바른 말을 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역사에서는 “이로부터 대신들이 재상(相)의 임무를 맡아 지내기가 어려워졌다”라고 전한다.
이와 동시에 유수는 종실 제왕(諸王)들에 대한 통제도 강화해, 왕자와 제왕들이 빈객과 교통하며 붕당을 지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금지했다. 건무 28년(52년) 그는 구실을 대고 왕후의 빈객들을 수색해 체포했는데 “연좌되어 죽은 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
셋째로, 유수는 서한 초년의 백성과 더불어 휴식하는 정책을 계승해 선후로 6차례에 걸쳐 명령을 발표하여 노예를 석방하고 노비를 잔혹하게 대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또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죄수들을 석방해 서민으로 삼았다. 그는 요역과 부세를 줄이고 농경을 장려해 수리를 일으키는 정책을 실행해, 전조(田租)를 10분의 1에서 서한 초의 30분의 1로 회복시켰고 또 조서를 내려 노인과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 과부, 고아나 독거노인)한 가난한 이들을 구제했다.
넷째로, 왕망의 엄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비교적 관용적인 법치(法治)를 실행했다. 광무제는 일찍이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근래 감옥에 억울한 사람이 많고 형벌을 쓰는 것이 가혹하니 짐이 매우 가련하게 여긴다. 공자께서 이르시길 ‘형벌이 알맞지 않으면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다’라고 하셨으니, 중이천석(中二千石), 여러 대부, 박사, 의랑과 더불어 형법을 줄이는 것을 의논하라”라고 했다. 그는 또한 관원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고 번잡한 관원을 축소하며 인재를 널리 선발해 현능(賢能)한 이를 임용했다.
다섯째로,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진한 이래로 지방 정권 기구는 군현(郡縣)의 2급제였고 서한 말에는 총 103개의 군국(郡國)과 1,587개의 현읍도후국(縣邑道侯國)이 개설되어 있었다. 수많은 군현에 대해 어떻게 중앙의 통일적인 관리를 강화할 것인가는 큰 문제였다. 지방의 실적을 감찰하기 위해 한무제 때 이미 주(州)별로 자사(刺史)를 파견해 시찰하게 한 바 있었다. 유수는 지방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자사를 주(州)의 일급 지방 장관으로 고정했다. 자사가 지방 정무를 처리할 때는 삼공을 통하지 않고 직접 황제에게 상주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방 군현 역시 직접 황제의 통제 아래 두게 했다.
여섯째로, 군사 면에서 중앙군을 강화하는 한편 지방군을 약화시켰다.
예컨대 “군국의 도위(都尉)를 폐지”하여 군현의 전직 무관(武官)을 취소하고 태수가 병권을 겸하게 했으며, “도시의 역[都試之役 역주: 지방 군사 사열 및 훈련]을 폐지해” 지방에서 정기적으로 거행하던 군사 훈련을 취소했고, “경차(輕車 기동력이 뛰어난 전차), 기사(騎士 기병), 재관(材官 보병), 누선사(樓船士 해군) 및 군가리(軍假吏 실무를 담담하는 하급군관)를 폐지하여 백성의 대열로 돌려보내라” 했으니 즉 정병을 간소화 해서 인원을 대량으로 감축하고 군사들을 토지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그리고 정식으로 지방에서의 갱수역(更戍役 돌아가며서 변방에 가서 병역에 복무하는 것) 제도를 폐지했다. 유수는 지방의 병권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점차 중앙 군대를 확대했고 중요한 변방 지역에는 변방군을 두어 중앙 군대의 일부분으로 삼았다. 상술한 조치들은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지방 군대의 취소는 지방 호강(豪强) 지주의 전장 내부에서 부곡가병제(部曲家兵制 지방의 유력 호족이 부곡에 속한 인원을 개인 사병처럼 부리는 제도)가 발전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부곡가병은 지방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훗날 중앙의 통제 역량이 점차 약화됨에 따라 호강지주의 부곡가병이 신속히 발전해 크고 작은 지방 세력이 출현했고 마침내 동한 말년의 혼전 국면을 초래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를 감찰하는 감군(監軍) 제도를 강화했다. 감군의 기원은 비교적 일러 춘추 시대에 이미 출현했으나 감군 제도의 최종적인 확립은 마땅히 동한 초년이라 해야 한다. 예컨대 “북군중후(北軍中候)”를 두어 오영(五營)을 감독하게 했고, 장수가 출정할 때마다 황제가 심복이나 근신(近臣)에게 군대를 따라가 감독하게 하는 등등이 그것이다. 목적은 장수가 딴마음을 품는 것을 방지하고 중앙 군대의 신뢰성과 안전 지수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일곱째로, 변방 문제에서 변방 군의 갱수역(更戍役) 제도를 폐지했으니 이른바 “변방 군의 정후(亭侯)와 리졸(吏卒)을 폐지”하고 대량으로 형도병(刑徒兵 죄수들로 만든 부대)과 이병(夷兵 이민족 부대)으로 변방 역량을 충실히 했다. 동시에 변방 건설을 강화해 끊임없이 정후와 봉수를 수축하고 방어 체계를 완비했다. 이 조치의 목적은 변방 백성을 휴식하며 국가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광무제는 또 자주 스스로 반성했다. 한번은 일식이 일어나자 자책하며 말하길 “짐의 덕이 엷어 재앙을 불렀고 해와 달에 나타났으니, 전률하고 공포스러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지금 바야흐로 허물을 생각하여 그 재앙이 소멸되기를 바라노라. 유사(有司)들로 하여금 각기 직임에 힘쓰고 법도를 받들어 준수하며 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라. 여러 신료들은 각기 밀봉된 상소를 올려 꺼리는 바가 없게 하라. 글을 올리는 자는 성(聖)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라”라고 했다. 또 한번은 지진이 발생하자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 지진이 발생한 책임은 임금인 자신에게 있으며, 자신이 덕이 없어 백성들에게까지 누를 끼쳤다고 했다.
어느 해 여름에는 낙양에 단샘이 솟아나 병든 사람들이 샘물을 마시고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또 붉은 풀[赤草]이 물가에 자라났다. 이에 어떤 대신들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후토의 영험이 응하여 붉은 풀이 무리지어 생겨났습니다. 효선제께서는 상서로운 징조가 있을 때마다 연호를 고치셨으니 신작(神爵), 오봉(五鳳), 감로(甘露), 황룡(黃龍)을 연기로 삼으신 것은 대개 신기(神祗)를 감동시켜 덕과 신의를 표창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로써 교화가 승평에 이르러 중흥(中興)이라 일컬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청명하고 안녕하여 영물이 거듭 내렸습니다. 폐하께서 겸손을 존중하시어 미루고 자처하지 않으시니, 어찌 상서로운 징조를 묻히게 하여 소문이 없게 하겠습니까? 마땅히 태사에게 편찬하여 모으게 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채택하지 않았다. 그는 늘 자신에게 무슨 덕행이 있겠느냐며 겸손했다. 그래서 당시 사서에는 이 방면의 기재가 매우 적다.
유수는 또 근검절약을 제창하여 임종 시 유조(遺詔)에서 이르기를 “짐은 백성에게 이익을 준 것이 없으니, 장례는 모두 효문황제의 제도처럼 하여 반드시 검약함을 따르라. 자사와 이천석 장리들은 모두 성곽을 떠나지 말고 관리들을 보내거나 우편으로 상소하지 말라”라고 했다. 문제가 장사 지낼 때 사용한 것은 모두 와기(瓦器 기와 그릇)였고 금, 은, 동, 주석으로 장식하지 않았으며 분묘를 일으키지 않았다.
광무제 유수의 여정도치(勵精圖治 정성을 다해 나라를 잘 다스림)로 인해 건무(建武) 시기에는 서한 말년의 전란으로 파괴되었던 사회 경제가 비교적 빠르게 회복되었고 사회 모순이 완화되었으며, 전란의 고통을 겪었던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고 유씨의 한가 천하가 완전히 회복, 발전 및 중흥되어 사회 발전이 번창하고 활력이 넘치는 기상이 나타났다.
광무제 유수는 25년에 황제를 칭한 때로부터 57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33년간 재위했다. 처음 31년은 ‘건무’란 연호를 사용했고 뒤의 2년은 ‘건무중원(建武中元)’ 연호로 고쳐 사용했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중국의 국세는 창성하고 번영해 “건무성세”라 일컬어진다.
《후한서》의 저자 범엽(范曄)은 유수를 평가하여 이르기를 “비록 몸소 대업을 이루었으나 전정긍긍하며 미치지 못할까 여겼기에, 정치체제를 밝히고 신중히 하여 권력을 총람하고 시세를 헤아리고 역량을 저울질하여 일을 행함에 과실이 없었다. 공신을 물리치고 문관을 등용했으며, 활과 화살을 거두고 말과 소를 풀어주었으니, 비록 도(道)가 고대와 나란히 하지는 못할지라도 이 역시 전쟁을 멈추게 한 지과지무(止戈之武)라 하겠다”라고 했다.
유수의 “건무성세”는 훗날의 “명장(明章)의 치” 및 약 200년에 걸친 동한 유씨 왕조의 통치를 위해 견고한 기초를 다져놓았다.
건무중원 2년(57년) 2월 무술일, 유수는 낙양에서 병으로 서거하니 향년 63세였고 원릉(原陵 지금의 하남 맹진현 사촌謝村)에 장사 지냈으며, 묘호는 세조(世祖)이고 시호는 광무황제(光武皇帝)라 했다. 유수의 네 번째 아들 유장(劉莊)이 황위를 계승하니 이가 바로 한명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3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