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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한실 천하를 부흥한 동한(東漢) (2)

(25년—220년)

심연

【정견망】

명장의 치[明章之治]

* 개명하게 천하를 다스린 명제(明帝)

57년 2월 무술일, 광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넷째 아들이자 태자였던 유장(劉莊)이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고, 연호를 ‘영평(永平)’으로 고쳤으니 이가 한명제(漢明帝)다.

명제 유장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고 배움을 좋아하며 독서에 힘써, 10세에 《춘추》를 읽고 이해했으며 후에는 《상서》 등 유가 경전에 정통했다. 광무제 유수가 매우 기이하게 여겨 그를 특별히 총애했다. 비록 역대로 황위 계승자는 적자나 장자를 세우는 것이었으나, 유수는 최종적으로 재능이 출중한 이 아들을 황태자로 바꾸어 세워 황위를 계승하게 했다.

광무제 통치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상대적 안정을 이루었고 사회 경제도 일정하게 발전했다. 명제가 즉위한 후에는 모든 것을 광무제의 제도에 따라 받들어 행함으로써 이러한 국면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명제는 백성과 더불어 휴식하는 개명(開明)한 정책을 계속 실행했다. 정치적으로는 형리(刑理 형벌과 이치)로 나라를 다스리고 법령을 분명히 했으며, 관리들을 엄정히 다스려 불법 관리를 엄벌하고, “유사(有司)들에게 시정에 힘써 따르고 형벌을 공평하게 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후비(后妃)의 집안이 후로 봉해지거나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고, 귀척(貴戚)과 공신들도 다방면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막았다.

예컨대 상서 염장(閻章)은 두 여동생이 귀인(貴人)이었기에 요직에 등용되지 못했고, 누나인 관도(館陶)공주가 아들을 위해 낭(郎) 자리를 구했으나 명제는 허락하지 않고 단지 돈 천만 전을 주었을 뿐이다. 공신 두융의 자손들이 교만하고 법을 어기자 영평 5년(공원 62) 조서를 내려 두씨 성을 가진 자로 낭리(郎吏)가 된 자들은 모두 가속을 데리고 고향 군으로 돌아가게 했으며, 후에 두융의 장자 목(穆), 손자 훈(勳)과 선(宣)은 모두 죄로 인해 감옥에 갇혔다가 처형당했다. 영평 14년 초왕 영(英)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을 때, 연루되어 죽거나 유배되고 감옥에 갇힌 경사의 귀척과 제후가 수천 명에 달했다.

범엽은 《후한서》에서 명제를 평가하기를 “형리(刑理)를 잘 다스려 법령이 분명했다. 늦은 시간까지 조회를 보아 억울함이 반드시 도달하게 했다. 내외에 요행이나 치우친 사사로움이 없었고, 위에서 교만하거나 과시하는 기색이 없었다. 옥사를 결단함에 진정을 얻으니 앞선 시대 12명의 황제들과 나란히 할만하다. 그러므로 후세에 일을 말하는 자들이 모두 건무와 영평의 정치를 먼저 꼽았다”라고 했다.

명제는 또 신하들에게 일을 아뢸 때 반드시 실사구시(實事求是)해야 하며, 허황되게 과장하는 말을 쓰지 말라고 요구했다.

사회 경제 방면에서는 부세를 경감하고 농상(農桑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며 수리(水利)를 일으켰다. 그는 황하 물이 백성들에게 가져다주는 재앙을 보고 근심 걱정을 금치 못해, 대신들을 소집해 하천을 다스리는 도(道)를 의논했다. 69년, 그는 수리 전문가 왕경(王景)을 파견해 황하를 다스리게 했다. 왕경이 변거(汴渠 변수의 수로) 수리 공사를 완공한 후, 서한 평제(平帝) 이래 황하와 변수(汴水 황하의 지류) 둑이 터지고 변거가 동쪽으로 침범하던 해를 제거했고 이로부터 황하가 900여 년 동안 중대한 수로 변경이 발상하지 않게 했다. 그는 또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유민들을 초무(招撫)하고, 군국(郡國)의 공전(公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 종자와 양식을 대여해 주었다. 영평 9년부터 12년까지 해마다 풍년이 들어, 조 한 섬에 30전이 되고 소와 양이 들판에 가득한 번영한 국면이 나타났다.

사상 문화 방면에서 명제는 유학을 제창하여, 황태자와 여러 왕후(王侯) 및 대신의 자제, 공신의 자손들에게 경서를 익히게 했다. 또 외척인 번(樊)씨, 곽(郭)씨, 음(陰)씨, 마(馬)씨의 여러 자제들을 위해 남궁(南宮)에 학교를 세우니 이름을 ‘사성소학(四姓小學)’이라 했고, ‘오경사(五經師)’를 두어 학업을 가르치게 했다. 그는 또 친히 벽옹(辟雍 국립대학인 태학)에 임해 대학생들에게 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명제는 또 불교를 좋아하여 서역에 신이 있어 그 이름을 부처라 한다는 말을 듣고, 68년 채음(蔡愔)과 진경(秦景) 등을 파견해 천축(天竺 지금의 인도)으로 가서 불경(佛經)과 불법(佛法)을 구하게 했으며, 이듬해 낙양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불교 사찰인 백마사(白馬寺)를 건립했다. 명제는 천축의 고승을 이곳에 초빙해 경전을 번역하고 교를 전하게 함으로써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는 것을 촉진했다.

대외 방면에서 한명제는 군사를 적게 일으켰고 민족 단결 정책을 실행하여, 한족과 소수민족의 우호 관계가 회복되고 발전되었다.

영평(永平) 원년, 서쪽으로는 무위(武威)로부터 동쪽으로 현도(玄菟)에 이르는 새외(塞外)의 여러 종족이 모두 와서 내부하니 변경의 둔병(屯兵)을 줄이거나 폐지할 수 있었다. 영평 12년, 서남이(西南夷) 중의 애뢰왕(哀牢王) 류모(柳貌)가 그 백성 5만 여 호를 거느리고 귀부했다. 16년에 이르러서는 문산(汶山) 서쪽의 백랑(白狼) 등 100여 나라가 모두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바쳤다.

영평 16년(73년), 명제는 장군 두고(竇固)와 경충(耿忠) 등을 파견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북흉노를 정벌하게 했다. 한군(漢軍)은 주천(酒泉)을 나와 천산(天山)에 진격하여 호연왕(呼衍王)을 치고 1,000여 급의 목을 베었으며, 포류해(蒲類海 지금의 신강 바리쿤호)까지 추격해 이오로(伊吾盧 지금의 신강 하미) 땅을 취했다. 명제는 조서를 내려 의화(宜禾)도위(都尉)를 두고 관리와 군사들을 머무르게 해 이오로성에서 둔전하게 했다. 73년, 그는 또 반초(班超)를 파견해 서역에 사신으로 가게 하고 서역도호(西域都護)를 설치하니, 서역의 여러 나라가 모두 아들을 보내 와 모시게 함으로써 서역과 중원의 연락을 더욱 강화했다. 9년부터 이때까지 서역과 중원의 관계가 단절된 지 65년 만에 다시 정상적인 교류를 회복했다.

명제는 겸손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황제였다. 매번 천재(天災)를 만날 때마다 명제는 자주 조서를 내려 자신을 책망했다. 한번은 일식이 일어났는데 명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덕이 없어 대업을 받들었으나 아래로는 사람들의 원망을 남겼고 위로는 삼광(三光 해 달 별)을 움직였노라. 일식의 변괴는 그 재앙이 더욱 크니, 춘추 도참(圖讖)에서 지극히 책망하는 바다. 길게 그 허물을 생각하니 책임은 나 한 사람에게 있노라. 유사(有司)들은 직무를 힘써 닦고 꺼림 없이 극언을 꺼리지 말라”라고 했다. 이에 대신들이 분분히 상서를 올려 정사의 득실을 논했다. 명제는 이를 본 후 깊이 스스로 허물을 끌어안았다.

명제 17년 봄 정월, 감로(甘露)가 감릉(甘陵)에 내렸다. 같은 해에 감로가 다시 내렸고 나뭇가지가 안으로 굽었으며 지초(芝草)가 대전 앞에 자라났고 신기한 오색 새들이 경사(京師)에 모여들었다. 이에 대신들이 명제의 위덕(威德)이 먼 곳까지 품어 상서(祥瑞)로운 물건들이 영험하게 응한 것이라 하여, 조정에 함께 모여 명제에게 축하를 올렸다. 그러나 명제는 이는 한 고조와 광무제의 성덕(聖德)으로 인한 것이지 자신에게는 아무런 덕행이 없다고 말했다.

명제의 재위 기간에 공직 기강이 청명(淸明)하고 경내(境內)가 안정되었다. 《후한서》에서는 “천하가 편안해 요역이 없었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부유했으며, 조 한 섬에 30전이 되었고 소와 양이 들판에 가득했다”라고 했다. 번영하고 창성한 장면이 나타난 것이다. 사서에 기록되기를 당시 백성들은 그 생업을 편안히 여겼고 호구(戶口)가 증가했다. 광무제 말년에 전국 호적에 등재된 인구는 2,100여 만 명이었으나, 명제 말년에 이르러서는 20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무려 3,400여 만 명에 달했다.

그러므로 명제 및 그 뒤를 이은 장제(章帝)의 재위 기간을 역사에서는 ‘명장(明章)의 치(治)’라 부른다.

명제는 재위 19년 만인 75년 8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48세였고 현절릉(顯節陵 지금의 낙양시 동남쪽)에 장사 지냈으며, 묘호는 현종(顯宗)이고 시호는 효명(孝明)황제라 했다. 명제의 다섯 번째 아들 유달(劉炟)이 황위를 계승하니 곧 한장제(漢章帝)다.

* 천하에 인정(仁政)을 베푼 장제

한장제 유달은 56년에 태어나 네 살 때인 영평 3년(60년)에 황태자로 세워졌다. 영평 18년(75년) 명제가 서거한 후 즉위하니 이때 나이 19세였다. 즉위 이듬해에 연호를 건초(建初 76년~84년 7월)로 세웠고, 나중에 다시 원화(元和 84년 8월~87년 7월), 장화(章和 87년 8월~88년)로 고쳤으며 재위 기간은 총 13년이다.

장제 유달은 사람됨이 인후(仁厚)하고 너그러웠으며 유학을 좋아해 젊어서부터 명제의 중시를 받았고, 즉위한 후에는 기본적으로 광무제와 명제 때의 규장(奎章) 제도와 정책을 준수하며 정사에 힘써 한실(漢室)을 크게 빛냈다.

재위 기간에 장제는 농업 생산을 중시해 “왕자(王者)는 여덟 가지 정사 중 먹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라고 제기하고 친히 농토를 갈아 격려했다. 또 요역을 공평히 하고 부세를 가볍게 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하고 황무지 개간을 장려함으로써 사회 경제의 발전을 촉진했다. 그는 백성들의 질고(疾苦)에 큰 관심을 두어, 어느 해 가을비가 마땅치 않아 봄가뭄이 들자 장제는 매우 초조해하며 조서를 내려 스스로를 책망했다. 자신이 덕이 없어 백성들이 고통을 받으니 이 때문에 “마음이 괴롭고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이에 장제는 관리들에게 명령해 억울한 감옥사를 정리하고 형벌을 가볍게 처분하게 했으며, 동시에 천지산천(天地山川)에 기도하여 상천이 비를 내려주기를 기구했다.

내정 면에서 그는 동한 초기의 가혹한 정치를 전면 쇄신했다. 잔인한 형벌 조항 50여 개를 과감히 삭제하고, 인자하고 너그러운 정치인 ‘인정(仁政)’과 ‘관정(寬政)’을 펼쳤다. 그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법에는 ‘죄인을 심문할 때 채찍질, 회초리질, 벌 세우기만 허용한다’고 되어 있다. 또한 시행령(병령)에도 고문용 몽둥이의 규격(길이와 굵기)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지난번 대규모 옥사가 발생한 이후로 죄인을 고문하는 방식이 너무나 잔혹해졌다. 송곳으로 찌르고 살을 베어내는 등 차마 눈 두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 그들이 겪는 고통과 신음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몹시 아프고 떨린다. 《서경》에서 ‘채찍을 형벌로 삼는다’고 한 것이 어찌 이토록 잔인하게 하라는 뜻이겠는가? 마땅히 다가오는 가을과 겨울에 재판을 진행할 때, 이러한 잔혹한 고문을 엄격히 금지하도록 하라.”

사상 문화 방면에서 한장제는 79년 백호관(白虎觀)에 여러 유학자들을 소집해 《오경》의 이동(異同)을 토론하게 하고 직접 토론를 주재했으며, 또 반고에게 명령해 토론 결과를 기록하고 정리하여 《백호통의(白虎通義)》라는 책을 만들게 함으로써 유학을 체계화하고 신학(神學)화하여, 이로써 중국 역대 왕조의 정치 법률 제도, 사상 의식, 윤리 도덕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장제는 경학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초서를 잘 썼는데 후세에 유행한 ‘장초(章草)’는 바로 한장제의 애호로 인해 형성된 일종의 서체라고 한다.

장제 시기에 동한의 사회 경제, 사상 문화는 모두 광무제와 명제 성세(盛世)의 기초 위에서 더욱 큰 발전을 이루어, 동한 왕조의 발전은 이로써 정점 단계에 도달했으니 역사상 명제와 장제 시기를 명장의 치라 일컫는다.

한장제는 88년에 병으로 서거하니 향년 겨우 31세였고 경릉(敬陵 낙양시 동남쪽)에 장사 지냈으며, 묘호는 숙종(肅宗)이고 시호는 효장(孝章)황제라 했다. 장제의 네 번째 아들 유조(劉肇)가 황위를 계승하니 곧 한화제(漢和帝)다.

명장의 치

명제와 장제 두 황제의 통치 시기가 동한 왕조의 전성시기였다. 이들은 광무제 때의 각 항목 정책을 준수할 수 있었고, 사회 경제의 회복과 발전을 적극적으로 도모했으며 통일된 다민족 국가를 공고히 하여 한실을 중흥시켰다. 명제와 장제는 동한에서 광무제의 뒤를 이어 비교적 업적이 있는 황제라 할 수 있다. 역대 사학자들이 모두 이를 인정했으나 인정하는 각도는 다소 달랐다.

대체로 명제는 엄명(嚴明)하다고 지칭되었고 장제는 관후(寬厚)함으로 지칭되었다. 범엽은 《후한서》 논에서 “위문제(魏文帝)께서 이르시길 한 명제는 살피고 살폈으며 장제는 장자(長者)라 하셨다. 장제는 평소 사람들이 명제의 가혹함을 싫어함을 알았기에 일을 관후함에 따랐다”라고 했다.

설영(薛瑩)의 《한기(漢紀)》에서도 장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장제는 가혹한 법률을 폐지하고 구리 유통 금지령을 풀었으니, 과연 인자하고 현명한 군주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범엽과 설영, 이 두 사학자는 명제가 법을 너무 엄격하게 집행하여 생긴 폐단만 보았을 뿐, 장제가 법을 지나치게 관대하게 적용하여 발생한 실책은 보지 못했다.

반면 원산송(袁山松)의 《후한서(後漢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했다.

“효장황제는 너그럽고 여유는 있었으나, 명석하고 결단력 있는 면모가 부족했다. 이로 인해 후궁에서는 참소와 의혹이 일어났고, 외척들은 권력을 독점하며 방자하게 굴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명제와 장제, 이 두 군주가 각자 넘치는 부분은 덜어내고 부족한 점을 서로 보완했더라면, 옛 성현들이 말하는 현군(賢君)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제가 법을 유지함이 너무 너그러웠던 실책은, 그가 광무제와 명제가 엄격히 금지했던 외척과 환관이 조정 정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변경해 황후 두씨(竇氏)를 총애하고 두황후의 오빠인 두헌(竇憲)을 중용했으며 또 환관을 우대했던 데 있다. 이로부터 외척과 환관이라는 두 갈래 세력이 다시 한가(漢家) 왕조의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동한 왕조의 개명(開明)한 정치는 이로부터 끝이 났고, 한가 천하도 성세에서 쇠퇴로 나아가게 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