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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운(運)에 따라 일어난 통일 왕조 명조(元朝) (3)

(1368년—1644년)

심연(心緣)

【정견망】

명조의 예언가 유기

유기(劉基, 1311-1375년)는 사람들에게 유백온(劉伯溫)이라 불리며, 명조 개국 모신(謀臣)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중국 3대 민간 예언 중 하나인 《소병가(燒餅歌)》가 바로 유백온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유기는 22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했으나, 성품이 강직하고 꼿꼿하며 청렴결백해 벼슬을 살다가 감찰어사(監察御史)의 직무 유기를 고발한 일로 배척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원조 말기 군웅(群雄)이 함께 일어났다. 주원장(朱元璋)이 군사를 일으킨 후 유기는 산에서 나와 그를 따랐고, 결국 주원장이 제왕의 위업을 성취하도록 도왔다.

《명사(明史)》의 기록에 따르면, 유기가 찾아와 투항한 이래 주원장은 자주 그를 찾아와 의견을 물었다. 유기는 당시의 형세를 분석하여 주원장에게, “주공께서 지금 금릉(金陵, 남경)을 점령하고 계신데 형세가 험준하고 용과 호랑이가 웅거하는 뛰어난 지리적 위치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남쪽의 장사성(張士誠)과 서북쪽의 진우량(陳友諒)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맞서고 있으니, 이는 주공께서 북쪽으로 중원(中原)을 평정하는 데 후환이 됩니다. 따라서 반드시 이 두 사람을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주원장이 “이 두 사람의 세력이 매우 큰데 어떻게 상대해야 하겠소?”라고 묻자, 유기는 주원장을 위해 제업(帝業)을 실현할 청사진을 제시한다.

유기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장사성은 안목이 좁고 가슴에 큰 뜻이 없어 단지 자신의 영토만 지키려 할 뿐 큰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니 근심할 가치가 없으며 잠시 그대로 두셔도 됩니다. 그러나 진우량은 다릅니다. 그는 주군을 살해하고 자리를 찬탈하여 야심이 크고 음모가 많아 위험한 상대입니다. 게다가 무창(武昌)을 점령하여 남경의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거대한 군함과 정예병을 거느리고 시시각각 우리를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국에서 우리는 양쪽으로 싸울 수 없으며, 마땅히 먼저 병력을 집중시켜 진우량을 섬멸해야 합니다. 진우량이 망하면 장사성의 세력은 필시 고립무원에 빠져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주공께서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중원을 평정하시고 마침내 원조를 소멸하시면, 그때 주공의 제왕 위업이 실현될 것입니다!”

결국 주원장이 군웅을 평정하고 왕업(王業)을 이룬 과정은 기본적으로 유기가 처음에 기획한 계책에 따라 실현되었다. “유기가 천하를 정하는 데 보좌함에 일 처리가 신과 같았다(基佐定天下,料事如神)”(《명사》). 유기는 명 태조 주원장에게 있어 주 무왕의 강자아(강태공), 한 고조의 장량(張良), 유비의 제갈량(諸葛亮)에 비견되는 존재였다. 그들은 개국 재상이 될 만한 재략(才略)을 지녔으며 동시에 주역의 이치에도 매우 통달해 있었다. 옛사람들은 왕조의 교체에 필시 천의(天意)가 있다고 깊이 믿었다. 유백온은 《소병가》에서 먼 미래를 예언했는데, 당연히 원조의 기운이 이미 다하고 명조가 흥할 것임을 보았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늘으 뜻에 순응했다고 할 수 있다.

주원장이 천하를 얻는 과정에서도 유기는 여러 차례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주원장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왔다. 처음에 진우량의 세력이 상당히 커서 태평(太平)을 공략해 함락시킨 후 남하하려 했다. 주원장의 부하들은 안절부절못하며 혹자는 항복을 주장하고 혹자는 도망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기는 눈을 부릅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원장이 이를 보고 유기를 뒤로 불러 상의하자, 유기는 “항복이나 도망을 주장하는 자들은 처형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주원장이 유기에게 어떤 계책이 있는지 묻자, 유기는 태조에게 진우량이 매우 교만하니 먼저 적을 깊숙이 유인한 후 복병으로 기습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주원장이 유기의 의견에 따라 군사를 쓰니 대승을 거두었다. 나중에 태조가 유기에게 상을 내리려 했으나 유기는 사양했다.

유기는 전략적 안목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도 매우 기지(機智)가 넘쳤다. 주원장이 파양호(鄱陽湖)에서 진우량과 결전을 벌일 때, 양측은 하루 동안 수십 차례 전투를 벌였다. 주원장이 직접 전함에 타 전선을 독전하고 있었고 유기는 그의 곁에 서 있었다. 갑자기 유기가 주원장에게 전함을 떠나라고 요청했고, 군신 일행이 막 다른 전함으로 갈아타 아직 안정을 취하기도 전에 본래 탔던 전함이 적에 의해 파괴되었다. 두 군대가 며칠 동안 대치하자 유기는 먼저 호구(湖口)를 점령해 지킨 후 금목상극(金木相克)의 날을 택해 출전할 것을 건의했다. 그 결과 주원장은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도 유기는 지형적 위치와 오행생극(五行生克)의 관계를 충분히 활용하여 전투를 기획했던 것이다.

유기의 인품에 대해 《명사》에서는 “유기는 곱슬 수염에 용모가 뛰어나고 위엄이 있었으며, 호방하고 큰 절개가 있어 천하의 안위를 논함에 정의가 얼굴에 드러났다”, “급하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용맹함이 발휘되고 계책을 즉시 세우니 사람들이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다”고 적었다. 주원장이 제위에 오른 후 유기는 군위법(軍衛法)을 제정할 것을 청하고 기강을 엄숙히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사람들이 그의 엄격함을 두려워했다.

홍무(洪武) 4년(1371년), 유기는 나이가 들어 고향으로 돌아갔다(태조가 귀향을 허락). 유기는 간악한 것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일부 간사한 자들의 눈밖에 났다. 호유용(胡惟庸)은 명 초기의 으뜸가는 간신이었는데, 유기와 대장군 서달(徐達) 등은 일찍이 태조에게 그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 조언한 적이 있었다. 호유용은 훗날 사람을 시켜 유기가 자신을 위해 왕기(王氣)가 흐르는 묘자리를 선택하여 후대의 영화를 꾀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주원장은 부지런한 군주이기는 했으나 그 흉금은 당 태종(唐 太宗)에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명 태조는 유기의 봉록을 박탈했다. 유기는 무고를 당한 후 어쩔 수 없이 경성에 올라와 죄를 청했고, 태조는 크게 죄를 묻지 않고 훗날 사람을 보내 유기를 호송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유기가 병이 들었을 때 호유용이 사람을 보내 유기의 약에 독을 탔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유기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조정은 마땅히 덕정을 베풀고 형벌을 줄여야 하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호유용이 권세를 쥐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 장차 호유용이 패망한 후 태조께서 나를 떠올리실 터이니, 너는 내 뜻을 황제께 아뢰어라”고 했다. 유기는 또한 “만약 나의 예언이 맞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천하 백성들의 복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 달 후 유기는 사망하니 향년 65세였다. 훗날 호유용은 재상이 되어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수년 후 그의 역모가 탄로 나서 처형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유기는 군사를 쓰고 일을 예측함에 신과 같았으나 여러 차례 간사한 자들의 모함에 빠졌는데, 이는 언뜻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강자아, 제갈량, 유기든, 혹은 장량, 이순풍(李淳風)이든 간에 이들 고대의 유명한 모사들은 ‘천명(知天命)을 아는 것’을 매우 중시했으니, 그들은 자신의 재능으로 자신의 이익과 지위를 꾀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명조 예언 《소병가(燒餅歌)》

군주로서 명 태조 주원장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당연히 자신의 강산을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그는 유백온이 수리(數理)에 통달한 도인(道人)임을 알고 그에게 향후의 일에 대해 물었다. 조대의 교체에는 저마다 정수(定數)가 있으며, 천기(天機)는 함부로 누설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필경 주원장이 제왕이었기에 사양하기 어려웠으므로 유백온은 명백한 듯 아닌 듯 시가 한 편을 지었다. 유백온이 황제를 알현할 때 마침 태조가 소병(燒餅)을 먹고 있었으므로 이를 《소병가(燒餅歌)》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명태조가 어느 날 내전에서 소병(燒餅)을 먹다가 막 한 입을 베어 물었을 때, 갑자기 국사 유기(劉基)가 입궐했다는 보고가 들렸다. 태조는 곧 그릇으로 소병을 덮어 가린 후에 유기를 들게 했다. 예우를 마친 후 황제가 물었다.

“선생은 과거와 미래의 일을 능히 안다고 하니, 이 그릇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겠소?”

유기가 곧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 보고 답했다.

“반은 해와 같고 반은 달과 같은데, 일찍이 금룡(金龍)에게 한 입 베어 먹힌 자국이 있으니 이것은 음식물입니다.”

그릇을 열어보니 과연 그러했다.

황제가 즉시 천하 후세의 일이 어떠할지 물었다.

“주(朱)씨의 천하가 길게 이어지겠소?”

유기가 말했다.

“망망한 천수(天數)에 우리 주군께서는 만자만손(萬子萬孫)을 두실 것이니 어찌 물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역사의 발전이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듯, 명조의 강산은 명 사종(明 思宗) 숭정제(崇禎, 주유검朱由檢)까지 전해졌으며, 그 후는 만주족의 청조(清朝) 천하가 되었다. 숭정 17년(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 기의군이 수도인 북경(北京)을 함락시키자 숭정제가 목을 매 자살하였고 명조는 멸망을 고했다. 숭정제는 바로 명 신종(明 神宗) 만력제 주익균(朱翊鈞)의 손자였다.

유기가 주원장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명백히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명나라 강산이 천추만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아첨의 말이었으나, 실제로는 명나라의 강산이 만력제의 손자인 숭정제에 이르러 끝날 것임을 명확히 예언한 것이었다(“萬子萬孫”에서 ‘萬’은 만력제, ‘孫’은 그의 손자 숭정제를 의미). 여기서 유기의 지혜를 볼 수 있으니, 천자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천자의 물음에 답하고 미래를 예언했던 것이다.

황제가 말했다.

“비록 예로부터 흥망에는 원래 정해진 바가 있고, 더구나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오직 덕이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나, 말해본들 어떠하겠소. 시험 삼아 간략하게나마 말해 보시오.”

유기가 말했다. “천기(天機)를 누설하는 것은 신의 죄가 가볍지 않으니, 폐하께서 신의 만번 죽을 죄를 사해주셔야 비로소 감히 아뢸 수 있겠습니다.”

황제는 즉시 면사금패(免死金牌)를 하사했다.

이처럼 유기는 ‘토목의 변(土木之變)’, ‘환관의 난정(宦官亂政)’, ‘청군의 입관(清軍入關)’, ‘한족의 변발(漢人剃髮)’, ‘강건성세(康乾盛世)’를 비롯해 청조 말기 및 그 이후의 일들까지 향후 수백 년의 일을 예언했으니, 이것이 바로 유명한 소병가의 내용이다.

향후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본 예언 및 《추배도》, 《매화시》를 결합하여 역사의 내재적 발전의 오묘함을 알아볼 것이다.

태조 이후 건문제의 짧은 통치 시기

1398년(홍무 31년), 명 태조가 병사하니 향년 71세였다. 장손인 주윤문(朱允炆)이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 사람이 바로 건문제(建文帝)이다.

건문제는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영민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14세 때 의문태자가 중병에 걸리자 밤낮으로 간병했다. 2년 후 태자가 세상을 떠나자 건문제는 상을 치르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 태조의 깊은 칭찬을 받았다. 태자가 살아있을 때 태조는 일찍이 태자에게 장주(章奏)를 판결하게 했는데, 태자의 성품이 어질고 후덕해 형옥(刑獄)에서 감형하거나 줄여준 것이 많았다. 이에 태조는 태손 건문제로 하여금 보좌하게 했다. 건문제는 “예경(禮經)을 두루 고찰하고 역대 왕조의 형법을 참고하여, 홍무 연간 《대명률》 중 지나치게 무거운 조목 73개를 고쳐 정하니 천하에 그 덕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조가 죽은 후 건문이 제위를 이었으며, 이듬해를 건문 원년으로 삼았다. 건문제는 즉위 초에 천하에 조서를 내려 “버려진 현인을 등용하고, 백성 중 고령자에게 쌀과 고기, 솜과 비단을 하사하였으며, 홀아비·과부·고아·독거노인·장애인은 관가에서 거둬 기르게 했다. 농사와 양잠을 중시하고 학교를 일으켰으며, 관리들을 고찰하고 재해를 입은 빈민을 진휼하고, 절의와 효행을 표창하며, 길가에 노출된 시신을 묻어주고, 황폐한 전토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위소(衛所) 군호(軍戶) 중 대가 끊긴 자들은 모두 징집에서 제외했다. 제후왕들은 문무 관리와 군사를 제지할 수 없도록 조서를 내리고, 내외의 크고 작은 관제를 다시 정했다.”

동시에 그는 대신 제태(齊泰), 황자징(黃子澄)과 함께 삭번(削藩, 제후왕의 세력을 줄임)을 상의했다. 건문제는 황자징의 건의를 받아들여 먼저 세력이 비교적 약한 친왕(親王)들의 관작을 박탈한 후, 나중에 세력이 가장 큰 연왕(燕王) 주체(朱棣)에게 칼을 대고자 했다. 동시에 친왕이 문무 장수를 통제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1399년(건문 원년), 연왕 주체는 제태와 황자징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북평(北平)에서 맹세하고 군사를 일으켜 ‘정난군(靖難軍)’을 조직하고 하북(河北)의 대부분을 빼앗았다. 건문제는 노장 경병문(耿炳文)과 명문의 자제인 이경륭(李景隆)을 차례로 파견해 북벌하게 했으나 모두 연왕의 군대에 패했다. 역사상 ‘정난의 역(靖難之役)’이라 불리는 4년간의 전쟁을 거쳐 주체는 마침내 제위를 찬탈하고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고치니 이 사람이 바로 명 성조(明 成祖) 영락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5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