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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운(運)에 따라 일어난 통일 왕조 명조(元朝) (1)

(1368년—1644년)

심연(心緣)

【정견망】

한때 유럽인들을 경악하게 했던 몽골 왕조는 옛 영광을 뒤로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사람들에게 아련한 그리움만 남겨 주었다. 역사의 큰 무대 위에서 펼쳐졌던 어딘가 익숙한 흥망성쇠의 대작들을 돌아보며, 우리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하늘은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신 것일까? 이러한 여러 가지 배후의 암시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고자 하는 걸까?”

이러한 생각 속에서 하늘은 우리를 위해 또 한 편의 화려한 대작을 다시 펼쳐 보이며, 아직 무지한 우리에게 새로운 암시를 전한다.

‘명조(明朝)’라는 이름이 붙은 이 화려하고 큰 연극은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면서 시작되었으며, 30년간의 치세를 거쳐 성조(成祖) 영락 연간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다. 명조 역시 문화와 과학기술 분야에서 후세에 칭송받을 만한 찬란한 유산을 남겼다. 정화(鄭和)의 일곱 차례에 걸친 원양 항해는 중국은 물론 세계 항해사에서 위대한 장거가 되었고,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이 편찬되었다. 중국 4대 명작으로 꼽히는 《삼국연의(三國演義)》, 《서유기(西遊記)》, 《수호전(水滸傳)》의 출간은 중국 문학사에 굵직한 한 줄기를 남겼다. 특히 《서유기》는 당(唐) 초기 승려 현장(玄奘)이 온갖 험난함을 무릅쓰고 천축(天竺, 인도)으로 가서 불경을 가져온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부처의 장엄함과 신성함, 그리고 위대함을 보여 주었다. 또한 16세기 이전 중국 의약학 경험을 집대성한 약전(藥典)인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도 탄생했다.

명조는 1368년 건국되어 1644년 청조(清朝)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전후 총 16명의 황제를 거치며 276년 동안 나라를 유지했다.

명조 건국에 관한 예언

당조의 《추배도(推背圖)》와 송조의 《매화시(梅花詩)》는 일찍이 명조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추배도》 제27상(象)의 그림에 나온 예시는 매우 명확하다. 나무 위에 굽은 잣대(曲尺)가 걸려 있는데, 이는 ‘木(목)’ 자 위에 굽은 기호를 더한 것으로 ‘朱(붉을 주)’ 자가 된다. 그림에 그려진 두 개의 원은 각각 해(日)와 달(月)을 가리키며, 이를 합치면 ‘明(명)’ 자가 된다.

참문(讖文)은

“오직 해와 달이요,
하민의 극이라.
운에 응하여 일어나니,
그 색은 날마다 붉도다”

惟且與月
下民之極
應運而興
其色日赤

“오직 해와 달(惟且與月)”이란 명조의 국호인 ‘明’ 자를 은연중에 암시한다. 명 태조 주원장은 어릴 적 외롭고 의지할 데가 없어 구걸을 하고, 소를 치며, 배가 고파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기 때문에 참문에서 “하민의 극(下民之極)”이라 칭한 것이다. 그러나 승려가 결국 황제가 될 줄을 그 누구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옛사람들은 천의(天意)를 믿었으므로 “운에 응하여 일어났다(應運而興)”고 한 것이다. “운에 응하여 일어나니, 그 색은 날마다 붉도다(應運而興,其色日赤)”는 천한 신분에서 운을 타고 단번에 제업을 이루었음을 뜻하며, 그 특징은 붉은색을 띤다. ‘赤(붉을 적)’은 바로 ‘朱’ 자이자 붉은색으로, 주원장의 성씨를 암시한다. 또한 주원장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의 부대 이름이 홍건군(紅巾軍)으로,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쌌기에 “그 색은 날마다 붉도다”라고 한 것이다.

송문(頌文)은

“가지와 잎마다 금빛을 나타내고,
환하게 사방을 비추도다.
강동 언덕 위에 광명이 일어나니,
공을 말하고 게송을 읊는 곳에 진짜 왕이 있도다”

枝枝葉葉現金光
晃晃朗朗照四方
江東岸上光明起
談空說偈有真王

라고 했다. “가지와 잎마다 금빛을 나타내고, 환하게 사방을 비추도다”는 여전히 ‘명조’를 암시함과 동시에 “강동 언덕 위(江東岸上)”라는 장소를 명시했다. 훗날의 명 태조도 실제로 호주(濠州) 출신이었다. 다음 구절의 “사방을 비추고”와 “광명이 일어난다” 역시 명조의 흥기를 암시한다. 가장 명확한 것은 마지막 구절인 “공을 말하고 게송을 읊는 곳에 진왕이 있도다(談空說偈有真王)”이다. ‘담공설게(談空說偈)’는 스님이 참선을 통해 교리를 깨닫고 공경을 드리는 것을 뜻한다. 이 구절의 의미는 스님들 중에서 진짜 임금인 진명천자(真命天子)이 나온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청년 시절 무려 8년 동안 승려 생활을 했는데, 이는 8~9백 년 전의 이순풍(李淳風)에 의해 이미 예견된 것이다.

송조 《매화시》 제4절에서도 주씨 왕조의 흥망을 예언했다.

“필경 영웅은 평민에서 일어나니,
주씨의 문은 예전의 황토 시골이 아니로다.
날아드는 제비는 흔한 일이니,
이화가 피어날 때 봄은 이미 예전이 아니리라”

畢竟英雄起布衣
朱門不是舊黃畿
飛來燕子尋常事
開到李花春已非

앞의 두 구절은 명조의 흥기를 예언했고, 뒤의 두 구절은 명조의 쇠망에 관한 예언이니 뒤에서 다시 분석하기로 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명 태조 주원장은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몇 년간 승려로 있다 나중에 농민들이 기의한 홍건군에 가담했다. 용맹하고 싸움에 능하여 처음에 일반 병사에서 리더로 뛰어올랐으며, 1368년 지금의 남경(南京)에서 황제에 올랐다. 이로써 ‘주씨의 문(朱門)’은 더 이상 예전의 황토 시골 농가가 아니게 되었다. “필경 영웅은 평민에서 일어나니, 주씨의 문은 예전의 황토 시골이 아니로다”라는 구절은 바로 이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 역사의 진면목을 살펴보기로 하자.

명조의 건국

주원장의 출신과 기이한 현상

주원장의 본적은 남경(南京)이며, 자는 국서(國瑞)이고, 본래 성은 구씨(仇氏)였다. 이른 시기에 그의 할아버지가 온 가족을 이끌고 강북의 사주(泗州)로 이주했다. 이어 그의 아버지도 호주(濠州) 종리현(鐘離縣, 지금의 안휘 安徽 鳳陽)으로 이주해 정착했고, 차례로 네 아이를 낳았는데 주원장은 셋째 아들이었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주원장의 어머니 진씨(陳氏)가 임신했을 때 신선이 약 한 알을 손바닥에 주었는데 빛을 발하는 꿈을 꾸었다. 진씨가 그 약을 삼키고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입안에 여전히 향기가 남아 있었다. 아이를 낳던 날 밤에는 여러 차례 붉은 빛이 피어올라 이웃집에서는 불이 난 줄 알고 황급히 달려와 불을 꺼주려 했다.

주원장은 어릴 적부터 외모가 매우 기이했다고 전해진다. 검은 얼굴에 아래턱이 위턱보다 1인치 이상 더 튀어나왔고, 높은 광대뼈와 큰 코, 큰 귀를 가졌으며, 얼굴형은 마치 가로로 놓인 입체적인 ‘山(뫼 산)’ 자 모양이었다. 자란 후에는 더욱 “용모가 웅걸(雄傑)하고, 기이한 뼈가 정수리까지 이어졌으며, 뜻이 넓고 깊어 아무도 가늠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집안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주원장은 어릴 때부터 남의 소와 양을 쳐 주었다. 그는 아이디어가 많고 의리가 있어 동료들의 신망을 깊이 얻었으며, 동료들은 모두 그를 리더로 모시고 그의 지시를 기꺼이 따랐다. 어릴 적 함께 놀던 이 동료들은 훗날 주원장이 천하를 다툴 때 가장 강력한 조력자가 되었다.

주원장이 17세가 되던 1344년, 그 지역에 가뭄과 메뚜기떼 피해가 발생했고 이어 큰 역병이 돌아 어머니와 아버지, 형들이 차례로 병사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 시신을 묻을 관조차 없었다.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겨진 주원장은 지역에 있던 황각사(皇覺寺)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이후 그는 주지 스님에 의해 흉년을 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절을 떠나 유랑하게 되었다. 주원장은 찢어진 삿갓 하나, 목탁 하나, 바루 하나를 들고 구걸하며 유랑하는 승려가 되었다. 이를 유방승(遊方僧)이라 했는데 유방이란 시주를 구하러 다니는 것으로 사회에서는 구걸이라 불렀다. 몇 년 동안 주원장은 회서(淮西) 지역을 두루 다니며 식견을 크게 넓혔다.

21세 때 주원장은 황각사로 돌아왔다. 이때 원조(元朝) 조정의 부패로 인해 천하가 이미 대란에 빠졌고, 무리를 지어 기의(起義)하는 자들이 많았다. 당시 호주는 이미 곽자흥(郭子興)이 이끄는 홍건군의 점령 아래 있었다. 주원장은 그에게 투항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다가 점을 쳤다. 점괘 결과는 도망치거나 화를 피하는 것은 모두 불길하지만, 의병에 참가하는 것은 “무방하다(不妨)”고 나왔다.

1356년, 주원장은 곽자흥의 문하로 들어가 원에 저항해 싸우는 대열에 합류했다. 체격이 좋고 기억력이 뛰어난 데다 일 처리에서 신중하면서도 과감했기 때문에 전투에서 자주 승리를 거두었다. 더욱 뛰어난 점은 주원장이 전리품을 얻어도 사사로이 챙기지 않았고, 상을 받으면 동료들의 공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곽자흥 역시 그를 오른팔처럼 여겨 모든 일을 그와 상의했고, 수양딸 마씨(馬氏 훗날의 마 황후)를 그와 혼인시켰다.

중용을 받게 된 주원장은 고향으로 돌아가 사람과 말을 모집했고, 어린 시절 동무였던 서달(徐達) 등이 입대하여 훗날 그의 위업을 보좌하게 되었다.

얼마 후 곽자흥이 전사했다. 곽자흥이 죽은 후 주원장은 그의 세력을 흡수하고 몇 가지 새로운 조치를 취했다. 그는 어진 이를 예우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했다. 예컨대 원조 지주 학정(池州學正) 주승(朱升)의 전략인 “성을 높이 쌓고, 식량을 널리 축적하며, 서서히 왕을 칭하는(高築牆、廣積糧、緩稱王)” 정책을 채택했고, 유기(劉基), 송렴(宋濂) 등의 선비를 등용했다. 농업 생산 측면에서는 영전사(營田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또한 장수와 군사들에게 둔전(屯田)을 하게 하여 “경작하면서 싸우게” 했고, “제때 개간하여 땅의 이점을 거둠으로써” 군량 공급을 보장하고 사회 생산을 회복시켰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원장이 군율을 엄격히 정해, 어느 지역에 가든 부하들에게 백성을 괴롭히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의 군대는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명조의 건국과 전국 통일

1368년, 주원장의 북벌군(北伐軍)과 남정군(南征軍)이 파죽지세로 진격하며 천하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 문무백관의 옹립 속에서 주원장은 그해 황제로 즉위하고 응천(應天, 지금의 남경)에 도읍을 정했으며, 국호를 명(明), 연호를 홍무(洪武)라 정하니 이가 바로 역사상의 명 태조(明太祖)이다. 이후로 그는 계속해서 ‘홍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이때부터 명·청 양대의 황제들은 재우 기간에 오직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게 되었으므로, 연호가 특정 황제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주원장을 ‘홍무제(洪武帝)’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호를 ‘대명(大明)’으로 정한 것은 군사(軍師) 유기(劉基 유백온)의 아이디어로, 명조를 창건한 두 세력의 뜻을 절충한 것이다. 홍건군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명교(明教)를 신봉했고 그 수령 한림아(韓林兒)가 소명왕(小明王)이라 칭했던 점을 반영했으며, 사대부의 입장에서는 ‘明’이 밝음이자 해와 달을 뜻하므로 명이 원을 대체하는 것은 밝음으로 어둠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원장은 명조를 세운 후 전국을 통일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남방에서는 명군이 복건(福建), 광동(廣東), 사천(四川)의 할거 세력을 평정한 후, 1382년 대리(大理)를 공략하고 운남(雲南)을 평정했다. 이로써 남방은 기본적으로 통일되었다.

이와 동시에 북벌군 역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원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順帝)는 여색과 방탕함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 1368년 8월, 명의 군대가 대도(大都)로 진격해 들어가면서, 1271년 원 세조(元世祖)가 국호를 세운 이래 98년 동안 중국을 통일 지배했던 원조는 멸망했다. 도망친 원 순제의 아들이 북방 카라코룸(和林) 일대에서 북원(北元)을 세웠으나 이미 세력을 잃었고, 1387년 명조에 항복했다. 주원장은 이로써 전국을 완벽하게 통일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