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년—1368년)
심연(心緣)
【정견망】
과학기술 편
수학
송·원 시대 중국의 수학 연구는 세계의 최전선에 서서 휘황찬란한 성취를 거두었다. 원대 수학자 주세걸(朱世傑)이 1303년에 발표한 《사원옥감(四元玉鑒)》이라는 책(3권)이 바로 대표작이다.
주세걸은 자가 한경(漢卿), 호는 송정(松庭)으로 《산학계몽(算學啟蒙)》 3권도 저술했다. 그는 다차원 고차 방정식의 해법, 고차 등차급수와 초차술(招差術 계차 보간법)의 연구 면에서 모두 독보적이었다.
원대에는 또 주산(珠算)이 탄생했다. 산판(算盤)의 사용과 전파로 인해 중국 수학은 주산을 주요 계산 도구로 삼는 새로운 시대에 진입했다.
이 밖에 늦어도 뭉케 시기에 중국 수학계는 이미 유클리드의 《기하원본(幾何原本)》을 접했다. 이 외에 아랍의 수학 지식도 중국에 전해졌다.
천문학
1267년(지원 4년), 원조 정부는 서역인 자말앗딘(劄馬魯丁)을 시켜 역법(曆法)을 수정하게 했다. 자말앗딘은 회회역법에 근거하여 ‘만년력(萬年曆)’을 제정했으나 정확하지 못했다. 지원 12년에 남송을 멸망시킨 후에 다시 곽수경(郭守敬), 왕순(王恂) 및 허형(許衡) 등으로 하여금 새로운 역법을 다시 수정하게 했다.
곽수경(1231년~1316년)은 자가 약사(若思), 순덕(順德) 형대(邢台) 사람으로 천문, 수리, 수학 등 여러 방면에서 성취가 있었다. 그는 측정을 통해 새로운 역법을 만들 것을 주장했으며 정부에 감후관(監候官)을 14명 설치해 전국 27개의 관측소에 나누어 보내 실측을 진행하게 할 것을 청구했다. 이렇게 자세한 실측을 거친 후에 다시 정밀한 계산과 종합 연구를 이어 나갔으며, 송대 《통천력(統天曆)》의 기초 위에서 1280년(지원 17년)에 역법의 개조를 완료하였고 새 역법의 이름을 《수시력(授時曆)》이라 명명했다.
곽수경이 제정한 《수시력》은 365.2425일을 1년으로 삼았으니 실제 공전주기와 비교하면 겨우 26초 차이가 날 뿐이며, 현재 세상에서 공용하는 양력(그레고리력)의 1년 주기와 동일하다. 그레고리력은 1582년에 제정되었으나 곽수경의 《수시력》은 그보다 300년이나 앞섰다. 《수시력》은 명조 말기까지 364년 동안 시행되었으며 중국 고대에 사용한 역법 중 계산이 가장 정밀하고 사용 기간이 가장 긴 역법이었다.
곽수경은 천상을 관측하기 위하여 간의(簡儀), 앙의(仰儀), 고표(高表), 후극의(候極儀), 영롱의(玲瓏儀), 경부(景符) 등 10여 가지 천문 기기를 만들었다. 그중 간의의 정밀도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선진적이었다.
지리학
원조가 중국을 통일한 후 그 드넓은 판도의 뛰어난 교통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형세는 지리학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1280년(지원 17년), 쿠빌라이는 각 지방 언어를 많이 아는 여진인 도실(都實)을 파견해 황하의 근원을 탐사하게 했다. 도실은 일찍이 세 차례나 티베트에 도달했으며 중국 역사상 뛰어난 소수민족 여행가 중 한 사람이다.
도실이 서쪽으로 가면서 직접 답사한 노선은 현재의 영하 회족 자치주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감남(甘南) 티베트족 자치주를 거쳐 다시 청해 궈뤄(果洛) 티베트족 자치주에 이르는 것으로, 4개월여의 세월이 걸려 마침내 황하의 근원인 ‘훠둔나오얼(火敦腦兒, 즉 별자리 바다)’을 발견했다. 연우(延祐) 2년인 1315년 한림학사 반앙소(潘昂霄)가 코코추의 구술에 근거해 《하원지(河源志)》 한 부를 저술했다. 이 기록은 중국에 현존하는 황하 근원 탐사와 관련된 최초의 보고이며, 《한서·서역전》에서 서술한 황하의 원류가 복류중원(伏流重源 땅속으로 흘러들어 다시 근원을 이룬다는 설)이라는 설을 바로잡았다.
주사본(朱思本)의 《여지도(輿地圖)》 역시 원대 지리학 상의 중대한 성취이다. 비록 그의 지도가 여전히 ‘계리획방(計里劃方 격자를 그려 거리와 면적을 측정하는 것)’의 작도법을 사용하긴 했으나 정밀도는 이전의 지도를 훨씬 초과했다. 지도 속에는 또 당시 하원 탐측의 최신 성취가 반영되어 비교적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주사본은 또 《구역지(九域志)》 80권본을 저술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일실되었다.
원대의 지리 저서로는 또 주달관(周達觀)의 《진랍풍토기(真臘風土記)》와 왕대연의 《도이지략(島夷志略)》이 있다. 《진랍풍토기》 1권은 원나라와 진랍(真臘 고대 크메루 왕국)의 교류 상황 및 이 나라의 풍토와 인정을 기록했다. 《도이지략》 1권은 당시 중국과 동남아시아 및 아랍 지역 간의 해상 교류를 기록하였으며 매우 가치가 높은 중서 교통사 자료다.
기계학
기계학은 기계 설계 방면에서 왕정(王禎)의 《농서(農書)》에 수력으로 움직이는 방직 기계인 ‘수전대방차(水轉大紡車)’가 실려 있다. 유럽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동일한 설계가 나타났다.
금 말 원 초 산서 만천현(萬泉縣)의 목수 설경석(薛景石)이 《재인유제(梓人遺制)》 한 부를 썼으니 이는 중국 최초의 입직기(立織機), 제화직기(提花織機), 나직기(羅織機) 등 방직 기계 제조에 관한 전문 서적이다. 이 책은 《영락대전(永樂大典)》에 선집된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다.
1295년 전후로 황도파(黃道婆)는 다시 면화 씨빼기부터 직포에 이르는 일련의 기계와 기술을 개량했다.
농학
원세조 때 사농사(司農司)에서 편찬한 《농상집요(農桑輯要)》는 13세기 이전 중국 농업 생산 경험을 총결한 것으로 총 7권이며 통속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보급서였.
왕정이 편저한 《농서》는 원대의 중요한 농업 과학 저서이다. 왕정은 자가 백선(伯善)이고, 동 동평(東平) 사람이다. 《농서》는 전서가 대략 13만 6천여 자이며 삽화가 281폭이고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농상통결(農桑通訣)》로 중국 농업 발전의 전모를 총술하고
둘째 《백곡보(百穀譜)》로 각종 농작물 재배의 방법을 나누어 서술했으며
셋째 《농기도보(農器圖譜)》로 각종 농기구, 수리(水利) 기계, 수공업 가공 도구 등에 대해 상세한 그림과 설명을 덧붙였다. 이는 전국적인 범위에서 전체 농업에 대해 계통적인 연구를 진행한 농학사상 거작이다.
의약학
원대의 의약학은 중국 전통 의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아주 큰 성취를 거두었으며, 골과(骨科 정골), 상한과(傷寒科), 영양학, 침구학 등 방면에서 많은 성취가 있었다.
위역림(危亦林, 1277년~1347년)은 강서 남풍(南豐) 사람으로 집안 대대로 의업에 종사해 여러 대에 걸친 경험을 쌓았고 《세의득효방(世醫得效方)》 19권을 저술해 1345년에 간행했다. 이 책은 내용이 매우 풍부한데 그중 마취 약물의 사용에 관한 기록은 현재 세상에서 알려진 전신 마취에 관한 가장 이른 문헌이다.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 금원시기 유명했던 4명의 의사) 중의 한 사람인 주진형(朱震亨)은 절강 의오(義烏) 사람으로 호는 단계이며, 《격치여론(格致餘論)》, 《국방발휘(局方發揮)》 등의 책을 저술했고 임증(臨症) 시 약을 쓰는 것은 유연해야 하며 “병에 따라 처방(方)을 제정한다”고 주장하고 당시 의사들이 ‘국방(局方)’을 고루하게 지키던 작법에 반대했다. 그의 학설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일본 한의 중의 단계학파를 형성했다.
원대 음선태의(飮膳太醫) 홀사혜(忽思慧)가 편저한 《음선정요(飮膳正要)》 3권은 영양과 식료를 중시하는 저서로 양생, 금기(避忌), 임신, 음식 금기(食忌), 고영양 조리, 영양 요법, 음식 위생 등에 대해 두루 논술했으며 중국 각 민족이 조리 방면에서 거둔 소중한 경험을 기록했다.
원대에 이르러 국내외 교통의 발달과 대외 관계의 발전으로 인해 각 민족 및 각국 간의 의약 경험이 광범위하게 교류되었다. 예컨대 1270년 새로운 의료 기관인 광혜사(廣惠司)의 설치는 아랍식 병원 조직의 이식이었다. 1292년에 대도와 상도에 회회약물원(回回藥物院)을 설치하였고 《회회약방(回回藥方)》 등 의약 전문서를 번역하여 회족의 일부 의약 경험이 교류되도록 했다. 동시에 중국의 의약 또한 아랍 및 아시아·아프리카의 수많은 지역에 전해졌다.
면방직업
면방직업 역시 원대에 매우 높은 성취를 거두었다. 송강(松江 지금의 상해 송강현) 오니경(烏泥涇)은 당시 면방직업의 중심이었다. 이렇게 중심지가 생긴 것은 원초의 면방직 혁신가 황도파의 공헌과 떼어놓을 수 없다.
황도파는 오니경 사람으로 어린 시절 “애주(崖州 지금의 해남도)로 몰락(淪落)”하여 여족(黎族) 부인들로부터 선진적인 면방직 기술을 배웠다. 1295년 전후로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한족 지역의 삼(麻) 방직 경험을 면방직에 응용하였고 씨 제거부터 직포에 이르는 일련의 면직 생산 도구를 개량했다. 예컨대 원래 탄화(彈花)에는 작은 대나무 활과 손가락을 사용하여 “일이 아주 힘들었는데”, 그녀는 큰 활을 써서 부수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원래 방사(紡紗)에는 단탄(單綻) 방차를 사용했는데 그녀는 삼탄(三綻) 방차로 바꾸었다; 직염(織染) 방면에서는 또 착사(錯紗 여러 가지 실을 교차해서 짜는 것), 배색(配色), 종선(綜線 날줄을 통과시키는 실 고리 장치), 꽃무늬를 짜고 각종 아름다운 도안을 짜내어 당시 면방직업 발전의 수요에 부응했고, 그리하여 송강 일대 면방직업의 발전을 추동했다. 당시 “송군의 면포가 천하에 옷을 입힌다(松郡棉布,衣被天下)”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도자기업(製瓷業)
원대의 도자기업은 송·금의 기초 위에서 발전이 있었다. 남쪽의 경덕전(景德鎮)이 점차 전국 최대의 도자기 제작 중심이 되었으며 고품질의 청자와 백자 생산을 위주로 했다. 채색 유약(色釉)에는 청화(靑花), 유리홍(釉裏紅), 홍유(紅釉), 남유(藍釉) 등의 품종이 있었는데 이 시기의 중요한 성취이며 그중에서도 청화자기가 가장 두드러졌다.
원 정부는 경덕전에 부량자국(浮梁瓷局)을 설치해 관요(官窯)를 관리하고 궁중에 납품하는 어기(御器)를 구워냈다. 그릇 안에는 모두 ‘추부(樞府)’라는 글자를 남겼기 때문에 ‘추부요(樞府窯)’라고도 한다. 민간의 요에 대해서는 세금을 매겼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300여 개의 가마가 생산에 종사했다. 절강에는 용천요(龍泉窯)가 있었고 주로 청자를 위주로 제작했다. 북방의 도자기 제작업 발전도 매우 신속했다. 균요(鈞窯), 정요(定窯)가 계속 발전을 거듭한 것 외에 하북, 하남의 옛 기초 위에서 또 새로운 가마가 더해졌고 산서의 포주(蒲州), 노안(潞安), 곽주(霍州)에 모두 한 무리의 새 가마가 생산에 투입되었다. 각지의 가마가 생겨남에 따라 도자기의 생산량은 해마다 상승했으며 국내 수요를 공급하는 것 외에 제품은 또 일본, 조선, 남양 및 중앙아시아 각지로 멀리 수출되었다.
인쇄업
원대의 인쇄업 또한 상당히 보급되어 남북 각지에서 모두 수많은 인쇄 중심이 생겨났다. 남쪽의 항주, 건안(建安), 복주의 인쇄업이 계속하여 발전했다. 북쪽은 1236년 야율초재가 평양(지금의 산서 임분)에 경적소(經籍所)를 세울 것을 청한 이후 “평수각(平水刻 역주: 당시 평양을 평수부라 칭했음)”이 성행해 극에 달했고 서방(書坊 책방)이 운집했으며 사설 서점이 끊임없이 출현했다. 각지 사인(私人) 인쇄업의 흥기는 당시의 문화 발전에 촉진 작용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