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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운(運)에 따라 일어난 통일 왕조 명조(元朝) (2)

(1368년—1644년)

심연(心緣)

【정견망】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고 백성을 사랑했으나 의심이 많았던 주원장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가장 비천한 신분 출신의 황제이다. 글자를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배움에 힘쓰며 좋아했고 역사서를 즐겨 읽었으며, 그가 쓴 시문과 산문은 모두 독특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작성한 공문 역시 구어체를 많이 사용했다. 예컨대 대장군 서달에게 보낸 친필 명령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대장군에게 알려주노니…… 이것은 내가 집에서 앉아서 말하는 것이라, 군중에서 편할지 편하지 않을지는 모르겠구려……”

홍무 3년 호첩(戶帖)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내린 한 성지(聖旨)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호부(戶部) 관리들에게 알려주노니, 이제 천하가 태평해졌으나 다만 호구가 명확하지 않을 뿐이로다! 중서성(中書省)으로 하여금 천하 호구의 감합문부호첩(勘合文簿戶帖)을 비치하게 하라. 너희 호부에서는 빨리 방을 붙여, 유사(有司) 관리들로 하여금 관할하는 백성들을 모두 관에 등록하게 하고, 그 집의 인구가 얼마인지를 쓰게 하라……”

따라서 명조에서는 구어체 공문이 하나의 큰 특징이 되었다.

아마도 명 태조는 출신이 비천하여 백성들의 삶이 곤궁함을 깊이 알고 있었기에, “천하가 이제 막 정해져 민간의 재력과 기력이 모두 곤핍하니, 오직 휴식과 안정만이 필요하다. 오직 청렴한 자만이 스스로를 절제하여 남을 이롭게 할 수 있으니 힘쓸지어다”라는 교서를 내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탐관오리를 엄벌에 처하고, 원조 말기 이래 부패했던 정치 풍토를 정돈했다. 또한 환관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엄금하고 외척의 전권(專權)을 방지했다. 동시에 백성들이 시정을 제안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장려하고 포상하는 조치를 취했다.

경제 회복 측면에서 태조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고 수자원을 개인 재산으로 인정하는 정책을 폈으며, 지방 관리들의 건의에 따라 인구 밀집 지역의 농민을 황무지로 이주시켜 개간하게 하는 정책을 정했다. 정남(丁男)을 점검하여 토지를 지급하고, 관가에서 소와 종자를 주며, 전부(田賦)를 감면해 주는 우대 조건을 제공하여, 원조 말기의 전란을 겪고 토지가 황폐해져 인구가 적었던 지역으로 계속해서 농민들을 이주시켰다.

명 태조는 또한 1372년(홍무 5년) 교서를 발표하여 과거 전란으로 인해 “남의 노비가 된 자들은 당장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또한 기근으로 인해 팔려간 남녀를 조정에서 대신 대금을 치르고 속량해 주도록 명했다. 동시에 《대명률(大明律)》에서는 관료를 제외하고 “서민의 집에서 노비를 거느리는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하고 즉시 양민으로 풀어준다”고 규정했다.

동시에 호부로 하여금 절강(浙江) 등지의 부호들을 조사하게 하여 그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킴으로써 토지 관계를 조정했다. 태조는 수리(水利) 사업에도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국자감(國子監) 학생들을 각지로 파견하여 수리 시설의 수리를 감독하게 했다. 각지에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피해를 입은 주·현은 조세 감면을 받을 뿐만 아니라 관부의 진휼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백성들의 전부와 차역(差役) 부담을 공평하게 부과하기 위해, 태조는 한편으로는 전국 인구 조사에 따라 《부역황책(賦役黃冊)》을 편찬하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 토지 측량에 따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편찬하게 했다. 황책은 국가가 전부와 차역을 징수하는 근거가 되었고, 어린도책은 토지를 중심으로 토지의 면적과 위치를 기록한 것이었다. 두 장부가 서로 날실과 씨실이 되어 백성들의 부담이 공평해졌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수입도 증가했다.

문화 측면에서 태조는 학교를 널리 설치하도록 명해 가난한 집안의 자제들도 글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명대의 학교는 중앙의 국자학(國子學), 부(府)·주(州)·현(縣)의 학(學), 그리고 시진(市鎮)과 향촌의 민간 소학인 사학(社學)의 세 가지로 나뉘었다. 1382년(홍무 15년), 국자학은 국자감(國子監)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좨주(祭酒), 사업(司業), 박사(博士), 조교(助教), 학정(學正) 등의 학관(學官)을 두었다. 부·주·현 학교[즉 부학, 주학, 현학]에는 각각 훈도(訓導) 외에 부학(府學) 교원은 교수(教授), 주학은 학정(學正), 현학은 교유(教諭)를 두었다. 국자감의 학생은 감생(監生)이라 불렀으며 관생(官生)과 민생(民生) 두 종류로 나뉘었다. 관생은 공신의 자제, 소수민족 토사(土司)의 자제 및 해외 유학생을 가리켰다. 민생은 각지에서 추천된 자들이었다. 감생은 많을 때는 1만 명에 육박했으며, 공부하는 과목으로는 《대고(大誥)》, 《대명률》, 사서(四書), 오경(五經), 《설원(說苑)》 등이 있었다.

태조 시기에는 과거 제도를 계속 시행해 인재를 선발했다. 과거 시험은 현시(縣試), 향시(鄉試), 그리고 경사(京師 수도)에서 치러지는 회시(會試)의 세 단계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최종 합격자는 진사(進士)가 되어 즉시 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다.

태조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천하의 치세는 천하의 현인(賢人)들이 함께 다스리는 것이다. 지금 많은 현사(賢士)들이 바위 굴속에 숨어 있으니, 어찌 유사(有司 관련 관원)가 힘써 권유하지 않은 탓이겠는가, 조정이 예우를 소홀히 한 탓이겠는가, 아니면 내가 덕이 없어 현인을 부르기에 부족한 것인가, 혹은 관직에 있는 자들이 가로막아 위로 전달되지 못하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현사대부들이 어릴 때 배워 어른이 되어 행하고자 함인데 어찌 가만히 세상을 마치려 하겠는가. 천하가 이제 막 안정해졌으니, 나는 여러 선비들과 함께 치도를 논하고자 한다. 나를 도와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유사는 예우를 갖추어 보내도록 하라.”

태조의 이처럼 모든 일에서 백성의 삶을 근본으로 삼는 조치는 백성들의 큰 칭송을 받았으며, 그 역시 정사를 부지런히 돌보고 백성을 사랑한 현군(賢君)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원장은 의심이 매우 많아 남을 믿지 못했으며, 특히 자신과 생사를 함께했던 공신들에게 더욱 엄격했다. 그리하여 그 공신들 중 제 명을 다하고 좋게 끝을 맺은 사람은 거의 없었고, 연좌되어 화(禍)를 입은 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

주원장은 대권이 딴 곳으로 새어 나갈까 염려하여, 1380년 재상 호유용(胡惟庸)이 딴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로 처형한 후, 아예 재상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정사를 자신이 직접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승상(丞相)을 폐지하고 부(府), 부(部), 도찰원(都察院)을 두어 여러 정사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니 사권(事權)이 조정으로 돌아왔도다. 후대의 군주는 승상을 다시 세우지 말라. 신하로서 감히 이를 청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황친(皇親)은 오직 반역죄만을 용서받지 못하고, 나머지 죄는 종친 회의에서 결정해 상재(上裁)를 받으라. 법사(法司)는 오직 고발하여 아뢰기만 할 뿐 사사로이 체포하지 말라. 이를 여러 전장에 규정하여 영원히 준수하게 하라.”

이는 원조의 제도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진(秦)에서 시작되어 당·송을 거쳐 완성 단계에 이르렀던 승상 제도를 폐지하고 군주 독재 체제를 형성한 것이다. 이 체제는 후대 왕조 전제정치의 기초를 다졌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신민(臣民)의 행복은 전적으로 황제가 좋은지 나쁜지에 달려 있었다. 황제가 폭군이라면 자연히 폭정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권의 고도 집중은 주원장을 역사상 가장 바쁜 황제로 만들었다.

주원장은 일찍이 측근 신하들에게 “내가 즉위한 이래 일찍이 부지런함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날이 밝기도 전에 조정에 나아가 늦은 오후에야 궁에 돌아오며, 밤에 누워도 편히 잠들지 못한다”고 말하곤 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의심 때문에 황권을 강화하고 신민(臣民)을 감시하기 위해, 주원장은 감찰 기관인 도찰원 외에 금의위(錦衣衛), 검교(檢校)를 설치하여 특무(特務) 제도를 추진했다. 그는 또한 ‘정장(廷杖)’을 시행했는데, 이는 조정에서 대신들에게 매질을 하는 것이다. 당시 정장으로 맞아 죽은 사람이 상당수였으며, 이로 인해 사대부의 존엄성은 완전히 짓밟혔다.

명대 전체 기간 동안 정장은 공경대신들을 굴복시키고 황권을 유지하는 잔혹한 수단으로 자주 남용되어 “천하가 놀라지 않은 이가 없게” 만들었다. 이 제도는 후대 전제 정권이 그 통치를 유지하는 악법(惡法)의 전례를 열어주었고, 훗날 역사 발전의 어느 한 시기에 이르러 극에 달하게 되었다.

주원장은 또한 엄벌주의 법률인 ‘중전(重典)으로 신하를 다스린다’는 방침을 추진했다. 명조의 율법은 송율(宋律)보다 엄격했다. 1373년(홍무 6년), 형부상서(刑部尚書) 유유겸(劉惟謙)이 칙명을 받아 《대명률(大明律)》을 편찬하자 명 태조가 직접 가감 및 재단했고, 이후 세 차례의 수정 과정을 거쳐 1397년(홍무 30년)에 공식 반포했다. 총 30권 460조로 구성되었다. 《대명률》은 공신과 훈척들이 권세를 믿고 토지를 뇌물로 받는 행위, 허위 문서나 실제 계약을 통해 남의 전택을 매매하거나 침탈하는 행위를 엄금했으며, 간악한 자들이 양민을 유인하거나 매매하여 노비로 삼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무고한 자는 가산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이러한 규정들은 소생산자의 재산과 인신을 보호하고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1385년(홍무 18년), 명 태조는 직접 편찬한 《대고(大誥)》를 반포했고, 이어 《대고속편(大誥續篇)》과 《삼편(三篇)》을 연이어 반포했다. 그중 특정 조목에 대해서는 극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는데, 능지(凌遲), 효수(梟首), 박피(剝皮)와 같은 혹형이 바로 이때 등장했다. 이는 명조 관리들을 공포 분위기 속에 몰아넣었다.

동시에 태조는 종실을 보호하기 위해 제왕(諸王)의 힘을 빌리고자 왕실 자제들을 분봉(分封)했다. 이렇게 분봉된 여러 왕들은 토지와 백성은 없었으나 군사권을 가졌다. 이 왕들이 군사력을 쥐고 독자적인 세력을 지닌 결과, 훗날 연왕(燕王 주체)이 황제를 협박하여 황제 자리를 빼앗는 등 골육상잔의 권력 다툼 사건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주원장의 이러한 조치와 행위는 후대 명조의 통치에 그리 좋지 않은 기반을 다져 놓았으며, 동시에 후대 중국 역사의 여러 악행에 전례를 제공했다.

대체로 태조 재위 기간에 대한 공과 상벌의 평가에는 칭송과 비판이 엇갈리지만, 그가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고 백성을 사랑했기에 정치는 비교적 청명(淸明)했다. 명 초기의 경제 역시 신속히 회복되어 역사상 가장 좋은 수준에 도달했다.

홍무 연간 각 주·현에서 매년 개간한 토지는 적게는 천 무(畝) 단위에서 많게는 20만 무에 달했다. 1391년(홍무 24년), 군둔(軍屯), 말 목장, 그리고 영구히 과세하지 않는 토지를 제외하고, 전국 과세 대상 토지 총수가 387만 4천 여 경(頃)에 달했다. 훗날 이는 416만 여 경으로 더욱 증가했다.

경작지 면적이 확대됨에 따라 곡물과 경제작물의 총생산량도 증가했다. 이는 조세 수입의 증가에서 잘 나타난다. 1381년 전국에서 징수한 밀, 쌀, 콩, 곡식이 2억 6,100만 5,251 석(石)이었으나, 1393년에 이르러서는 3억 2,789만 8,000 석으로 늘어나 12년 사이에 600만 석 이상이 증가했다. 목화 재배 역시 송·원 시대보다 더욱 보편화되었다. 복건(福建), 광동(廣東), 강서(江西), 강남(江南), 호광(湖廣)뿐만 아니라 산동(山東), 하남(河南), 하북(河北) 등지에서도 목화를 대량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경제의 발전으로 백성들은 비로소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명조는 이렇게 흥성하는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