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상하오천년〗 운(運)에 따라 일어난 통일 왕조 명조(元朝) (4)

(1368년—1644년)

심연(心緣)

【정견망】

연왕이 제위에 오르는 것에 대한 예언

명 태조 주원장이 사망한 후 손자인 건문제가 즉위하자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삭번(削藩 번국을 삭감)에 착수했다. 세력이 비교적 작은 제후왕 여럿을 제거한 후,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연왕 주체(朱棣)를 겨냥했다. 주체는 원래 북방으로 달아난 몽골을 막아내는 중책을 맡고 있어 비중이 큰 제후왕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미친 척을 해도 삭번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연왕 주체는 군사를 일으켜 건문제를 물리치고 남경을 점령해 황제가 되었다.

《명사·오행지(五行志)》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건문제가 삭번을 진행하던 기간에 한 미친 도사가 거리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제비를 쫓지 말라, 제비를 쫓으면 날마다 높이 날아,
높이 날아 상제의 도읍에 이르리라!”

(莫逐燕,逐燕日高飛,高飛上帝畿!)

나중에 사람들은 ‘제비를 쫓지 말라(莫逐燕)’는 말이 연왕을 겁박하지 말라는 뜻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연왕이 필시 높이 날아 결국 황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위 노래에 담긴 의미이다.

《추배도》 제28상에서는 이 시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그림에는 건문제가 황궁을 불태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참에 이르길

“풀머리에 불발이요,
궁궐은 재가 되어 날아간다.
집안에 새가 있으니,
교외에 승려가 있도다”

草頭火腳
宮闕灰飛
家中有鳥
郊外有尼

여기서 ‘풀머리에 불발(草頭火腳)’은 연왕 주체가 궁을 압박하는 거사를 일으킬 것임을 의미하며(‘燕’이란 글자를 파자한 것), ‘궁궐은 재가 되어 날아간다(宮闕灰飛)’는 건문제가 주체의 공격에 밀려 황궁을 불태운 것을 가리킨다. 뒤의 두 구절은 주체가 황제가 되고 건문제는 교외로 흘러들어 승려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송에서는

“깃털이 차서 높이 날아오르는 날,
고움을 다투는 이씨 꽃이 있도다.
진룡은 사해를 노닐고,
세속 바깥이 내 집이로다”

羽滿高飛日
爭妍有李花
真龍遊四海
方外是吾家

앞의 두 구절은 주체가 황제가 될 때 건문제의 대장군 이경륭(이씨 꽃)조차 그에게 아양을 떨었음을 가리킨다. 뒤의 두 구절은 건문제가 스님이 되어 사해를 집으로 삼았음을 말해준다.

또한 북송 《매화시》 제4절의 세 번째 구절인 “날아드는 제비는 흔한 일이니(飛來燕子尋常事)” 역시 이 역사적 사실을 예언했다.

‘날아드는 제비는 흔한 일이니’는 연경(燕京)에 웅거하던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 연왕 주체가 제위를 빼앗은 역사를 가리킨다. 연왕이 천하를 얻은 것은 자세히 생각해 보면 과연 ‘흔한 일(尋常事)’이자 이치가 있는 것이니, 당 태종 이세민의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과 매우 유사했다.

명대 유백온의 예언인 《소병가》에서도 당연히 이 사건에 대한 예측이 담겨 있다.

“비록 태자가 적통의 후손이나,
문성이 높이 치솟았으나 날마다 서쪽을 방비해야 하리.
이 성을 어가가 모두 친정하리니,
온 집안 강산이 영락이 평정하리라”

雖然太子是嫡裔
文星高拱日防西
此城禦駕盡親征
一院河山永樂平

이 말은 건문제가 즉위한 후 비록 문관들의 옹립을 받았으나 서쪽(연왕을 가리킴)의 위협을 방비해야 함을 뜻한다. 영락(永樂 영원히 즐거움)은 주체가 황위를 빼앗은 후 사용한 연호로, 영락 시기에 사회가 비교적 안정될 것임을 암시한다.

명 성조 주체의 ‘영락의 치(治)’

주체는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명사》에서는 그를 “지혜롭고 용맹하며 큰 지략이 있었고”, “지모가 남달라 선제(先帝 태조)와 매우 닮았다”라고 평가했다. 주원장 역시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 건문제가 삭번을 실시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일으켜 건문제 정권을 뒤집고 1403년 공식적으로 제위에 올라 명조 3대 황제이자 탁월한 업적을 남긴 황제가 되었으니, 연호는 영락(永樂)이라 했다. 이 사람이 바로 명 성조(明 成祖)다.

최고 통치자로서 주체는 부지런하고 절약하며 백성을 사랑한 주원장의 장점을 계승하였으나, 부친의 의심 많고 외고집에 독단적인 단점은 지니지 않았다. 그는 “법은 마땅히 관대해야 하고”, “사람을 대함은 마땅히 성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수성(守城)에 주의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힘써 명조에서 영락 연간을 번영하고 찬란한 시기가 되도록 이끌었다.

주체는 황제에 오른 후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첫째, 제후왕의 실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계속 시행해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그는 제왕(齊王) 주부(朱榑)를 폐해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주왕(周王), 요왕(遼王) 주식(朱植), 민왕(岷王) 주편(朱楩)의 3호위(護衛)를 박탈했으며, 영왕(寧王) 주권(朱權)을 남창(南昌)으로 옮겨서 봉하고, 곡왕(穀王) 주혜(朱橞)를 장사(長沙)로 옮겼다. 이로써 군정(軍政) 대권이 한층 더 황제의 손에 집중되었다.

둘째, 변방 방어를 강화했다. 원대 몽골 잔당 세력을 방비하기 위해 성조는 정치 및 군사 중심을 남방에서 북방으로 점차 옮겼다. 1421년(영락 19년), 성조는 북경으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북방과 동북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강화했다. 오늘날 북경 자금성이 바로 명조 영락 연간에 착공되어 건립된 것이다.

성조는 재위 기간 동안 5차례나 직접 친정(親征)을 나아가 사막을 건너 몽골 각 부락을 추격해 변방의 위협을 잠시나마 해소했다.

셋째, 주변 다른 국가들과의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예컨대 그는 1403년부터 사신을 안남(安南, 베트남), 섬라(暹羅, 태국), 고려(高麗), 자바 등의 국에 파견하여 방문하게 하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 시기의 정화(鄭和)의 원양 항해는 해외 각국에 명조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했으니, 《명사》의 말을 빌리면 “중국의 부강(富强)함을 보여준 것”이었고, 명 성조의 말을 빌리면 “해외 여러 번국에 교화(敎化)를 펼친 것”이었다.

정화의 본래 성은 마씨(馬氏)이고 소명(小名)은 삼보(三保)이며 회족(回族) 사람으로 조상은 운남 곤양주(昆陽州 지금의 진녕晉寧)에 거주했다. 명 태조가 운남을 통일한 후 정화는 환관이 되어 궁에 들어왔으며, 정난의 역(役)에서 연왕이 군사를 일으킬 때 공을 세워 주체가 그에게 정씨(鄭氏) 성을 하사하고 내관감(內官監 황실내 기물이나 건축 등을 담당하던 환관 관청) 태감(太監)으로 발탁했다.

1405년(영락 3년)부터 1433년(선덕 8년)까지 정화는 전후 7차례 서양으로 내려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대한 업적을 이뤘다. 그는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중국 남해 여러 섬을 지나 아시아와 아프리카 두 대륙을 넘나들며 점성(占城, 베트남 남부), 진랍(真臘, 캄보디아), 섬라(태국), 말라카, 팽형(彭亨, 말레이시아), 소문달라(蘇門答臘, 수마트라), 구항(舊港), 조와(인도네시아 자바), 방갈라(榜葛剌, 방글라데시), 고리(古裏, 인도 서남해안 캘리컷), 코친(柯枝), 소리(瑣裏), 가이륵(加異勒, 인도반도), 스리랑카, 몰디브, 호루무즈(忽魯謨斯, 페르시아만 입구), 조법아(祖法兒), 아단(阿丹, 아라비아반도), 모가디슈(木骨都束), 바라와(卜剌哇), 소말리아, 마림(麻林, 케냐의 말린디) 등 수십 개 국가와 지역을 방문하며 우호를 다졌다.

정화의 첫 번째 항해에는 배 62척과 선원(水手), 선사(船師 선장이나 도선사), 위병, 장인, 의사, 통역 등 총 2만 7천 여 명이 참가했다. 가장 큰 배는 길이가 44장(丈 약 140m), 넓이가 18장으로 1천 여 명을 수용할 수 있어 당시 바다를 항해하던 가장 큰 배였다. 배 위에는 항해지도, 나침반이 갖추어져 있어 당시 세계적으로 선진적인 항해 설비와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화의 선단은 중국의 도자기, 찻잎, 철기, 농기구, 비단, 금은 등 각종 상품을 가득 실어 아시아·아프리카 각국의 특산물인 상아, 향료, 보석 등 해외의 희귀 보물을 교환해 왔으므로 사람들은 이 배들을 ‘보물선(寶船)’이라 불렀다.

정화의 아시아·아프리카 원양 항해는 정치, 경제, 과학문화 측면에서 모두 깊고 먼 영향을 미쳤다. 정화의 항해 이후 아시아의 많은 국가가 잇따라 사절을 파견해 명나라와 무역했다. 1423년(영락 21년), 고리 등 16개 국의 사절과 상인이 남경에 왔는데 한 번에 1,200여 명에 달했으며, 발니(浡泥,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와 말라카 두 나라의 국왕과 왕후도 남경에 찾아와 명 성조가 연회를 베풀어 대접했다. 당시 술루(蘇祿, 필리핀 남부 술탄국) 사절단은 동(東)·서(西)·동(峒) 세 왕이 340여 명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해 성대한 국빈 대우를 받았다. 동아프리카의 마림 왕 와래돈(哇來頓)은 직접 무리를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가 안타깝게도 복주(福州)에 이르러 병사했다. 모가디슈와 바라와(소말리아 남부의 해안 도시) 역시 여러 차례 사절을 파견해 중국을 방문하며 교류를 이어갔다.

정화의 7차례에 걸친 장거리 항해는 세계 항해사에서 전무후무한 장거였다. 그가 아프리카 적도 이남 동해안 지역에 도달한 것은 이탈리아인 콜럼버스나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가 신항로를 발견한 것보다 반세기 이상 앞선 것이었다.

정화의 원양 항해는 외교 관계를 발전시켰고 중원과 주변 민족 간의 관계도 매우 화목하게 하여 각 민족 간의 경제와 문화 교류를 촉진시켰으며, 명조의 정령(政令) 역시 외흥안령(外興安嶺) 안팎과 천산(天山) 남북, 티베트(西藏) 지역에까지 널리 미쳤다.

넷째, 경제 방면에서 성조는 태조 시기의 경제 정책을 계속 시행했다. 이 외에도 남방의 식량을 북경으로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해 성조는 쿠빌라이 때 개착한 대운하의 부선(副線), 즉 산동성 서부의 제녕(濟寧) 구간 운하를 확장했다. 1430년부터 매년 운하를 통해 북쪽으로 수송되는 식량이 300만 석 이상에 달했다. 또한 남북 간의 상업도 경사(京師, 북경)와 대운하의 발전에 따라 번창해졌다.

다섯째, 문화적으로 성조는 태조 때의 정책을 계승한 외에도 문학·예술을 제창하고 장려했다. 1407년, 전대(前代)의 정치, 역사, 윤리, 지리 등 제반 분야의 모든 중요 저작을 포괄한 《영락대전(永樂大典)》이 완성되었으며, 이후 200년 동안 각종 서적과 문장이 대량으로 간행되어 학술상 새로운 번영기가 출현했다.

명 성조의 치세 아래 명나라는 전성기로 들어서 ‘영락의 치(永樂之治)’가 나타났다. 경제와 문화가 번영으로 향하고 중화 문명이 해외로 더욱 멀리 퍼져나갔다.

이 시기 면방직업, 제자업(制瓷業, 도자기 제조업), 광야업(礦冶業, 광산 및 제련업), 조선업 등의 발전이 매우 신속했다. 1419년(영락 17년), 명 조정이 징수한 면포만 총 1,206,887필이었다. 이로써 전국적으로 총생산량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락·선덕 연간은 명대 도자기 제조업의 전성기였다. 강서성 경덕진(景德鎮)은 여전히 전국 도자기 제조업의 중심지였다. 이곳 인구는 약 10만 명으로, 홍무 연간에는 관요(官窯)가 20곳이었으나 선덕 연간에는 58곳으로 발전했다. 경덕진 도자기는 생산량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품질도 뛰어났으며 도자기 제작 공예 측면에서 많은 새로운 성취를 이뤄냈다.

광야업 측면에서는 홍무 연간에 전국의 관영 철광이 13곳에 불과했으나 민영 광야업이 차츰 발전해 나갔다. 1403년(영락 원년)부터 1434년(선덕 9년)까지의 30년 동안 생산량이 약 120만 근에서 830만 여 근으로 늘어나 7배 이상 증가했다. 이 외에도 명 초기의 조선업 역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남경성 북쪽의 용강(龍江, 용만龍灣이라고도 함)과 태창(太倉)의 유가항(劉家港)이 당시 조선업의 기지였다. 정화가 항해할 때 사용한 배는 대부분 용강에서 건조한 것이었다. 기타 각지의 조선업도 매우 발달했다. 각지에서 건조한 배의 종류도 많아서 차양조(遮洋造 해상 운반선), 비왜조(備倭造), 전선(戰船), 천선(淺船), 풍쾌선(風快船), 황선(黃船) 등이 있었다. 그중 해상으로 세곡을 수송하는 차양조가 가장 컸으니, 식량 4~5백 석을 적재할 수 있었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은 명 초기 상업과 도시 경제의 번영도 촉진하여 제녕, 회안(淮安), 양주(揚州) 등 많은 상업 항구도시가 출현했다. 남경의 인구는 약 20만 명에 달했다.

성조 영락제에 대한 평가

《명사》는 성조에 대해 “문황(文皇, 성조)은 어릴 때부터 군사를 익혔고 뛰어난 지리적 조건을 가진 유연(幽燕 북경 일대) 일대에 웅거하다가 건문제가 문약한 것을 틈타 몰 군대를 안으로 동원해 천하를 차지했다. 즉위한 후에는 몸소 절검을 행하고 수재나 가뭄이 있으면 아침에 보고받고 저녁에 진휼하여 막히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잘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등용하고 안팎으로 통달하였으니 웅무(雄武)한 지략이 고조(高祖 주원장)와 부합했다. 천자의 군대를 여러 차례 출동시켜 막북(漠北)의 먼지를 깨끗이 청소했다. 말년에 이르러 위엄과 덕이 멀리까지 미치어 사방이 굴복하였으니 조공을 바쳐온 곳이 거의 30개 국에 달했다. 영역의 광대함은 한 대나 당대를 멀리 앞질렀으니 이룩한 공덕이 그지없이 성대했도다. 그러나 정난의 변 시기에 도리에 어긋난 짓을 했으니 그 부끄러운 덕을 어찌 가릴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마땅히 사리에 맞는 공정한 평가라 하겠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