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년—1368년)
심연(心緣)
【정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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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편
문인화와 산수화
원대 회화에서 문인화(文人畵)가 화단의 주류를 차지했다. 이들의 창작은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주로 자신의 생활 환경, 취향과 이상을 표현했다. 산수, 고목(枯木), 죽석(竹石), 매란(梅蘭) 등의 소재가 대량으로 나타났고 사회 생활을 직접 반영한 인물화는 줄어들었다. 작품은 문학성과 필묵의 운치를 강조했으며, 그림에도 서예 방식을 구사해 시(詩)·서(書)·화(畵)의 삼위일체를 중시했다. 창작 사상 면에서는 북송 말년 문동(文同), 소식(蘇軾), 미불(米芾) 등의 문인화 이론을 계승하여 모양보다는 정신을 추구할 것(遺貌求神)을 제창하였고 간일(簡逸)을 으뜸으로 삼아 고의(古意)와 사기(士氣)를 추구했으며 주관적인 의흥(意興)의 발산을 중시했다.
원대는 불과 90여 년의 짧은 기간에 화단의 명가들이 배출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조맹부(趙孟頫), 전선(錢選), 고극공(高克恭), 왕연(王淵) 등과 ‘원사가(元四家)’라 불리는 황공왕(黃公望), 오진(吳鎮), 예찬(倪瓚), 왕몽(王蒙)이 가장 명성이 높았다.
원대 회화는 산수화가 가장 성황을 이루었으며, 그 창작 사상, 예술적 추구, 풍격 면모가 모두 화단의 주요 성향을 반영하였고 후세에 미친 영향도 가장 심원했다.
원초 산수 화가로는 전선, 조맹부, 고극공을 대표로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전통 산수화에 대해 진지한 탐색을 진행했으며 옛 것에 의지해 새로운 길을 찾았다.
전선은 청록산수를 잘 그렸고 당대 이사훈(李思訓)·이소도(李昭道) 부자와 남송의 조백구(趙伯駒)를 사법(師法)으로 삼았으며 문인화의 필의와 기운을 융화시켜 일종의 소박한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고극공은 미불, 동원(董源), 이성(李成) 사이를 변화 출입하여 은은하고 장엄하면서도 윤기가 있는 독특한 풍격을 형성하였으며 원초(元初)에 조맹부, 전선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원대 중후기에 이르러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오진(吳鎮), 예찬(倪瓚)이라는 이 4대가가 등장했다. 사대가는 각자 혁신적인 풍격과 간단하면서도 세련괴고 초탈(超脫)한 예술 수법으로 중국 산수화를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켜 이 시기 산수화 발전의 주류를 대표했다.
원대에는 또 한 무리의 산수화가들이 있었는데 각각 스승의 전수가 있어 특색을 갖춰 회화사에서도 명성이 꽤 높다. 그중 조맹부의 영향을 받아 이성과 곽희(郭熙)의 화법을 겸하여 종합한 화가로는 성무(盛懋), 상기(商琦), 조지백(曹知白), 주덕윤(朱德潤), 당체(唐棣) 등이 있다.
황공망과 왕몽의 영향을 받아 동원과 거연(巨然)을 스승으로 삼은 이들로는 육광(陸廣), 마완(馬琬), 진여언(陳汝言), 방종의(方從義), 조원(趙原) 등이 있다.
남송 원체(院體) 산수 화법을 학습해 마원(馬遠), 하규(夏圭)의 유풍을 보존한 이로는 손군택(孫君澤), 정야부(丁野夫) 등이 있다. 이 밖에 왕진붕(王振鵬), 이용근(李容瑾), 주옥(朱玉) 등의 산수 누각(樓閣)은 용필이 치밀하며서 세밀하고 계산이 정확해 원대 회화계의 명가였다.
원대 인물화는 산수·화조화의 성황에 비하면 훨씬 미치지 못했다. 첨예하고 복잡한 민족·계급·사회적 모순으로 인해 대다수의 화가는 세상을 도피했고 인생을 소홀히 했다. 특히 문인 사대부 화가들은 주로 산천, 고목, 죽석을 빌려 마음에 품은 뜻을 기탁했지만 인사(人事) 표현에는 소홀했다. 따라서 현실 생활을 직접 반영한 인물화는 지극히 적었다.
그러나 종교가 유행함에 따라 불도(佛道) 인물화 방면에서는 어느 정도 향상이 있었다. 예술 방면에서 일부 화가들은 문인화의 필묵 기교를 흡수해 역시 일정한 성취를 얻었다. 유관도(劉貫道)는 진(晉)·당(唐)을 스승으로 본받고 고인들의 장점을 모았으며 필법이 중후하면서도 탄탄하고 인물의 이미지가 편안한 원 초기의 고수였다.
하징(何澄)은 남송 원체의 법도를 계승해 원대 인물화에서 자유로운 필치의 선구가 되었다.
왕진붕은 이공린(李公麟)을 사법(師法)으로 삼았으며 필법이 매끄럽고 힘차고 인물의 표정이 생동감 있었으며 백묘(白描) 사이에 담묵으로 렌더링(渲染)을 곁들여 일반적인 선묘만 쓰던 형식의 틀을 돌파했다.
전선은 인물화를 진·당에서 배웠는데 옷 무늬는 대부분 고개지(顧愷之)의 고고유사묘(高古遊絲描–예스럽고 신선한 느낌의 가는 실 같은 필선 기법)를 사용하여 은은하면서도 뻣뻣하지 않고 고졸(古拙)함 속에 청수(淸秀)함을 품어 스스로 격조를 이루었다.
임인발(任仁發)은 인물과 안마(鞍馬)를 당인(唐人)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필법이 세밀하면서도 유창하고 밝고 화려해 당인의 전통을 비교적 많이 보존했으나 또한 자신의 풍모도 있어 원초에 조맹부와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
장악(張渥)는 백묘 인물을 잘 그리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고 이공린을 사법으로 삼았으며 용필이 매끄럽고 표일(飄逸)하며 형상이 진실하며 생동감이 넘쳐 “오묘하기로 당세에 절정(妙絕當世)”이라 칭송받았다.
왕역(王繹)은 초상화를 잘 그렸고 필법이 가늘고 힘이 있어 조형이 정확하고 신태가 생동하여 원대 초상화가 중에서 성취가 가장 두드러졌다.
안휘(顏輝)는 종교 인물화 방면에서 명성이 높았으며 그의 용필은 거칠고 윤기가 있으면서 호방해 대체로 남송 양해(梁楷)의 발묵법에 가까웠고 요철 효과를 드러냈다.
문인화의 흥기와 함께 원대의 고목, 죽석, 매란 등을 소재로 한 회화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발전하였고 큰 변화가 일어났다. 소재는 종종 고결하고 고오(孤傲)한 것에 의미를 두고 화가의 사상이나 정서를 기탁했다. 예술적으로는 자연을 추구하였고 화려한 장식을 숭상하지 않았으며 수수하고 깨끗함을 귀하게 여길 것을 제창했다. 주로 수묵 기법으로 표현했다. 그 화풍은 나중에 수묵사의(水墨寫意) 화조화의 선구를 열었다.
전선은 세밀한 기교를 맑고 윤기가 있으면서 우아함으로 바꾸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장식을 빌리지 않는 수묵사의와 채색 몰골(沒骨) 화법을 창조했다.
왕연은 황전(黃荃)을 사법으로 삼았으며 작품은 대부분 수묵법을 사용하여 가지런하고 화려한 것을 간결하고 초탈하면서도 수련하고 담백한 것으로 바꾸었으니 원대에 가장 두드러진 성취를 보인 화조화의 대가이다.
진림(陳琳), 장중(張中)은 필법이 거칠고 소략해 송대 원체 회화의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던 규격을 돌파했다.
대나무와 돌을 소재로 한 죽석(竹石) 화가로 가장 유명한 이로는 고극공(高克恭), 조맹부, 가구사(柯九思), 오진, 고안(顧安), 예찬 등이 있으며 대부분 문동, 소식 혹은 왕정균(王庭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특색이 있었고 수묵법에 능숙했다.
장손張遜)은 쌍구죽(雙鉤竹)을 잘 그렸는데 원대에 거의 절향(絕響)이 되었다. 기타 죽석 명가로는 여전히 이척(李倜), 사정지(謝庭芝) 등이 있었다. 매화 그림으로 유명한 이로는 추복뢰(鄒復雷), 왕면(王冕)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인(仲仁) 화상과 양무구(楊無咎)에게서 배웠다.
벽화
원대 벽화는 당·송과 요·금 벽화의 전통을 계승한 기초 위에서 새로운 변화가 있었고 분포 지역도 매우 넓었으며 아주 높은 예술 성취를 지니고 있었다. 실물 유존과 문헌 기록으로 볼 때 원 사관(寺觀 사찰이나 도곤) 벽화, 묘실 벽화, 황실 궁전과 귀인 저택의 대청 벽화가 있었다. 산수, 죽석, 화조 등의 소재가 증가한 것이 원대 벽화의 현저한 특징 중 하나이다.
예컨대 돈황, 안서(安西) 유림굴(榆林窟, 만불협) 등에 보존된 원대 벽화, 티베트 시가치 데첸포드랑 궁(德欽頗章宮) 속의 벽화, 산서 예성(芮城)의 영락궁 벽화, 산서 홍동(洪洞) 광승사(廣勝寺)의 원대 잡극 벽화 등은 보물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료 가치를 지닌 문물이다. 기록에 나타난 벽화 화가로는 주옥(朱玉), 이시(李時) 등의 명수(名手)가 있었다.
원대 벽화의 성행은 당·송 이래 오도자(吳道子), 무종원(武宗元) 등의 우수한 벽화 전통이 계승되고 발양되도록 만들었으며 중국 회화 상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한다.
조소 예술
조소 방면에서 원대의 대가들은 외래의 기교를 흡수하고 중원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특징은 개성 표현에 힘쓰는 데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유원(劉元)이다.
유원은 자가 병원(秉元)이고, 하북 출신이다. 어린 시절 도사에게 중국의 전통 기법을 배웠고 나중에 또 네팔인 아니기(阿尼哥)에게 “그림, 소조, 쇠를 주조하는 기술(畫·塑·鑄金之藝)”을 배웠으며 “서천범상(西天梵相)”을 빚는 것을 배워 정신과 사생이 묘하게 합쳐지니 절예(絕藝 뛰어난 예술)라 불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