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2년—서기 8년)
심연
【정견망】
서한은 ‘문경의 치’를 거친 후, 무제 시기에 전성기에 이르렀다. 그 인문 예술, 자연 과학, 수공업, 제지업, 상업, 수리는 화하(華夏) 인문 과학기술사에 극히 찬란한 한 장을 써 내려갔다.
인문 예술 방면에서는 가의(賈誼), 사마상여(司馬相如) 등 한부(漢賦)와 악부시(樂府詩)의 대가가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중국 최초의 기전체 통사이자 후인들에게 “사가(史家)의 절창이요, 운이 없는 이소(離騷)”라고 찬탄받는 《사기》를 완성한 사학 대가 사마천이 있었다. 그리고 서한의 회화, 조각 등 예술 수준도 상당히 높은 정도에 이르렀는데, 최근 몇 년 동안 한대 무덤에서 출토된 일부 유물을 보면 그 정교한 솜씨와 고증된 공예는 오늘날 사람들도 탄복해 마지않는다.
자연 과학 방면에서도 서한은 천문학, 수학 등 영역에서 모두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예컨대 서한 시기의 천상(天象) 기록은 상당히 풍부하며, 이미 태양 흑점에 대한 기재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수학 저작인 《주비산경(周髀算經)》은 기원전 1세기경에 책으로 엮어졌다. 수공업 영역에서는 완성품에 가까운 자수 기계가 출현하여 생산율을 크게 높였다. 게다가 일찍이 서한 시기에 중국은 제지술을 발명했다. 이외에도 실크로드의 개척은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무역망을 형성했으며,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외교 및 상무 등 여러 방면의 교류를 시작했다.
문학
*한부와 악부시
서한의 문학 성취는 주로 한부와 악부시 방면에 체현되었다. 한부(漢賦)는 초사(楚辭)에서 발전해 온 일종의 장편 운문(韻文)이다. 그것은 통상 화려한 사조와 과장된 수법으로 서한 상층 사회의 번화한 정경을 묘사함으로써 한대의 통일과 강력함을 반영하고 천자의 위엄을 과시했다. 한부는 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소체부(騷體賦)로 한조 초기에 비교적 성행했다.
다른 하나는 산체대부(散體大賦)로 한조 초기에 형성되어 중엽에 흥성했으며 소체부의 지위를 대체했다. 한나라 초기의 소체부 작가는 가의와 매승(枚乘)이 대표적이다. 가의의 《조굴원부(吊屈原賦)》는 굴원을 빙자해 자신의 마음속 분망함을 토로한 것으로, 매우 훌륭한 서정부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붕조부(鵬鳥賦)》 역시 비장한 감정을 토로한 작품으로 서한 산체부의 시초가 열었다. 경제 때 매승이 지은 《칠발(七發)》도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무제부터 성제 연간은 산체대부의 전성기였다. 유명한 부가로는 사마상여, 양웅(揚雄), 동방삭(東方朔) 등이 있었는데, 그중 사마상여가 가장 명성을 떨쳤다. 그의 작품으로는 《자허부(子虛賦)》, 《상림부(上林賦)》 등이 있다. 이러한 부는 대개 사냥을 소재로 하여 황궁의 웅장한 위엄과 장려함, 원유(園囿)의 그윽함과 짐승의 많음, 사냥 대오의 장관, 그리고 음악과 미녀 등을 묘사했으며, 편말에는 풍자하고 간하는 말을 조금 더해 장식했다.
‘악부(樂府)’는 맨 처음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을 가리켰으며 진(秦)에서 시작되었다. 서한 무제 때에 이르러 궁정 오락과 묘당 제사를 위해 대규모로 각지의 민가를 채집하기 시작했는데, 고취곡사, 상화가사, 잡곡가사 등을 포함하며 한족의 가곡뿐만 아니라 소수 민족과 변경 지역의 가곡도 있었다. 이러한 가창에 쓰이는 가사를 악부시(樂府詩)라고 불렀다. 이 시가들은 언어가 소박하고 형상이 선명하여 한대 사회생활의 거울이며,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한대 악부시의 체재는 삼언, 사언, 오언, 칠언이 있어 형식이 생동하고 유연한데, 그중 오언이 가장 많아 동한 이후 오언시의 선구가 되었다. 역대로 성취가 있는 시인들은 모두 한대 악부시의 영향을 받았다.
서한의 산문 역시 매우 두드러졌다. 가의의 《과진론(過秦論)》과 《치안책(治安策)》, 조조(晁錯)의 《현량대책(賢良對策)》 및 유향의 《설원(說苑)》 등은 모두 서한의 산문 명편이다. 가의의 정론문은 의론이 명백하고 감정이 격앙되는데, 특히 《과진론》은 언어가 생동하고 층층이 깊이 들어가 진(秦)의 흥망을 명쾌하게 분석했다.
*사학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 첫 번째 기전체 통사인 《사기》는 후인들에게 “사가의 절창이요, 운이 없는 이소”라고 찬탄받았다. 사마천의 자는 자장(子長)이며, 그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한무제 건원, 원봉 연간에 태사령이 되어 문사, 성력(星曆), 황실 도서를 관장했다. 일찍이 고금의 통사를 편찬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사마천에게 그 유지를 이을 것을 당부했다. 원봉(元封) 3년(전 108), 사마천은 부친의 직책을 이어받아 태초 원년(전 104) 《태초력》 제정에 참가한 후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10여 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이 책을 완성했다.
《사기》의 기사는 전설 속의 황제에서 시작하여 한무제에서 끝나니 그 역사가 3천여 년에 달한다. 《태시공자서》의 기재에 따르면 전서 130편으로 12본기, 10표, 8서, 30세가, 70열전을 포함하여 총 52만 6천 5백 자이다. ‘본기(本紀)’는 책 전체의 강령으로 연월에 따라 제왕의 언행과 정적을 기술하고 아울러 각 방면의 중대한 사건을 기록했다. 그중 선진(先秦)의 여러 편은 왕조별로 편을 구성했고, 진한(秦漢)의 여러 기는 제왕별로 편을 구성했다. 항우는 비록 제왕은 아니었지만 그가 한때 천하를 주재하고 후왕(侯王)을 분봉하여 정치가 항우에게서 나왔으므로 항우 역시 본기에 실었다.
‘표’는 도표 형식을 채택하여 세계, 인물과 사사를 간략히 나열함으로써 맥락을 명확히 했다. 여기에는 세표, 월표와 각종 연표가 포함된다. ‘서’는 각종 제도의 연혁을 서술했는데 내용이 예악 제도, 천문, 병률(兵律), 사회 경제, 하거(河渠) 지리 등에 미친다. ‘세가’는 자손이 세습한 왕후 봉국의 사적을 기록했고, 아울러 개별 지위가 후왕에 상당하는 저명한 인물도 다루었다. ‘열전’은 주로 사회 각 계층 대표 인물의 전기이다. 소수 편장은 중국 소수 민족 및 중국과 왕래한 일부 국가와 지역의 역사 기록이다. 본기와 열전은 전서의 주요 부분으로 표, 서, 세가와 상호 보완하며 일체를 이루었다.
《사기》는 소재가 풍부하여 《좌전》, 《국어》, 《세본》, 《전국책》, 《초한춘추》 및 제자백가의 관련 사료를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국가에서 수장한 문서, 민간에 보존된 고문서 전을 이용했고 친히 채방하고 실지 조사한 재료를 보탰다. 저자는 저술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허황되게 하지 않고, 악함을 숨기지 않는다” 하여 실사구시를 힘써 구했다.
한대 이전에도 여러 가지 체재의 역사 저작이 출현했으나 기사의 장구함, 내용의 광범함, 사사의 상세함, 재료의 계통성, 조직의 완비성으로 볼 때 모두 《사기》만 못하다. 중국 사학 발전사에서 이 책은 가히 규모가 거대하고 체제가 완비된 첫 번째 중국 통사라 할 만하다. 그것이 남긴 사서 기전체의 영향은 심원하여 훗날 역대의 ‘정사(正史)’는 모두 이 체재를 채택했다. 그것의 대부분 문자는 생동하고 정련되었으며, 사람을 쓰고 일을 서술함이 형상이 선명하여 중국 후세의 산문과 전기 문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사마천이 죽은 후 이 책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선제 때 사마천의 외손 양운(楊惲)이 그 책을 이어받아 세상에 공포함으로써 이때부터 유전되기 시작했다. 동한 때 이미 잔결(殘缺)이 있었는데, 반고는 《한서・사마천전》에서 10편이 부족하여 목록은 있으나 책은 없다고 했다. 후세에 많은 사람이 이 책에 주석을 달았다. 현존하는 조기 판본 중 하나는 남송 황선부(黃善夫) 가숙(家塾) 각본으로 선본(善本)으로 공인받고 있다.
예술
*회화
서한 예술 영역의 주요 성취는 회화, 조각과 음악 방면에 체현된다. 서한 시기 경제의 발전에 따라 제왕, 관료, 지주의 궁전, 주택, 무덤의 장식품 중 하나인 벽화도 발전했다. 한무제 때의 노령광전(魯靈光殿)에는 서한에서 가장 유명한 대폭 벽화가 있었는데 내용이 극히 풍부했으나 안타깝게도 보존되지 못했다. 당시 상층 사회는 건축물 위에 그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견백(絹帛 비단), 칠기, 도기 등 공예품 위에도 그림을 그렸는데 채회(彩繪), 수묵화, 각루화(刻縷畫 정교한 조각에 그림을 그린 것)가 있었으며, 내용은 신화 전설, 역사 이야기와 더불어 낚시와 사냥, 농사, 연회, 가무(歌舞) 등 생활 정경에 미쳐 소재가 광범하고 그림에 담긴 뜻이 높고 뛰어났다.
1972년 장사 마왕퇴(馬王堆) 한대 무덤에서 출토된 채회 백화는 서한 회화 예술의 높은 성취를 반영한다. 이 백화는 전장 205센티미터, 상부 너비 92센티미터, 하부 너비 47.7센티미터로 화면 내용이 매우 풍부하여 인물, 일월, 사람 몸에 뱀 꼬리의 신상(神像)뿐만 아니라 용, 뱀, 거북, 호랑이, 말과 각종 기이한 금수가 있어 묘사가 생동하고 색채가 선명하다. 중국 고대의 걸출한 회화 작품이자 세계 예술사에서도 보기 드문 진품이다. 또한 강소 한강(邗江) 등지에서 출토된 채회 칠기는 제작이 정교하고 각종 인물과 동물 회화가 극히 생동하고 우아하다.
*조각
한대 조각 예술은 회화와 더불어 병행되었다. 귀족들은 통상 석각으로 궁실, 능묘를 장식하여 호화로움을 자랑하고 위엄을 과시했다. 예컨대 섬서 흥평현 곽거병(霍去病) 묘 앞의 석인(石人), 석마(石馬), 석우(石牛), 석호(石虎) 등은 조형이 생동하고 표정이 아주 사실적이다. 이 거대한 조상들은 2천여 년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표정이 생동하고 생생해 매우 높은 예술적 가치가 있다.
*음악
진나라 때 출현한 ‘악부’는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이었다. 서한 무제 때에 이르러 ‘악부’는 궁정 오락과 묘당 제사를 위해 대규모로 각지의 민가를 채집하기 시작했는데, 고취(鼓吹)곡사, 상화(相和)가사, 잡곡(雜曲)가사 등을 포함하며 한족의 가곡뿐만 아니라 소수 민족과 변경 지역의 가곡도 있었다. 악부는 나중에 다시 음악 가사로 만들어지거나 또는 만들어지지 않은 각종 가사를 범칭하는 것으로 뜻이 넓어졌으며, 심지어 일부 희곡(戱曲)과 기악 역시 악부라고 칭했다.
한대의 주요 가곡 형식은 상화가였다. 그것은 최초의 “한 사람이 부르고 세 사람이 화답하는” 청창(清唱)에서 점차 거문고, 대금 등의 악기 반주가 있는 ‘상화대곡(相和大曲)’으로 발전했으며, ‘염—추—란(豔–趨–亂)’의 곡체 구조를 갖추었다. 한대에는 서북 변경에서 고취악도 흥기했다. 그것은 서로 다른 편성의 관악기와 타악기로 여러 가지 고취 형식을 구성했는데, 횡취(橫吹), 기취(騎吹), 황문고취(黃門鼓吹) 등이 있었다. 그것들은 말 위에서 연주되거나 행진 중에 연주되어 군악 예의, 궁정 연음 및 민간 오락에 사용되었다. 오늘날 서북 일부 지방에 상존하는 민간 취타악에는 한대(漢代) 고취(鼓吹)의 유풍이 남아있다.
한대에는 ‘백희(百戲)’도 출현했는데, 이는 가무, 잡기(雜技), 각저(角觝 씨름)를 한데 모아 공연하는 종목이었다. 한대 율학(律學)상의 성취는 경방(京房)이 삼분손익(三分損益)의 방법으로 8도 음정을 60율로 나눈 것이다. 그것은 율학 사유의 정미성을 체현했다. 이론상으로 53평균율의 효과에 도달했다.
*복식
한조 초기에 백성과 더불어 휴식하기 위해 일반 제도는 그리 큰 변화가 없었으며 관복 제도 역시 대개 진나라 제도를 답습했다.
서한 시기 200년 동안 복식은 ‘심의제(深衣制)’를 실시했다. 그 특징은 매미관(蟬冠), 주의(朱衣 주황색 상의), 방심(方心 장식용 목걸이), 전령(田領 네모난 옷깃), 옥패(玉佩), 주리(朱履 주황색 신발)이다. 입는 옷을 총칭하여 ‘선의(禪衣)’라 했다. 선의는 단층의 겉옷이다. 조복(朝服)은 검은색을 사용했고, 제복(祭服)으로 쓸 때는 빨간색 선을 두르는 것으로 제한했다.
형식상 관리와 백성의 복용에 차별은 없었으나 원료와 색상에서는 확연히 등급의 다름을 표시할 수 있었다. 옷깃으로 분류하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곡거선의(曲裾禪衣)로 즉 옷깃이 목에서부터 겨드랑이 아래로 비스듬히 열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거선의(直裾禪衣)로 옷깃이 목에서부터 아래로 수직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러한 복식은 길고도 넓어 남자들이 입는 것이 비교적 보편적이었다. 한대 부녀의 일상 복장은 상의하군(上衣下裙)이었다.
서한은 대체로 사계절 절기에 따라 복색의 구별을 두었으니, 예컨대 봄은 청색, 여름은 적색, 가을은 황색, 겨울은 검은색이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4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