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대제】 한문화(漢文化)를 경모해 시문(詩文)이 전성기를 이뤄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강희제의 화하(華夏) 문화에 대한 경모와 제창은 주변 대신들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정책 실시, 인재 예우, 부지런한 창작 등의 방식을 통해 청초(淸初) 문단이 활발하고 너그러운 환경을 조성했다. 그림은 강옹건 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청조는 마지막 전통 중화 왕조로서 문학사적으로 집대성된 특징을 지니며 고대 문학의 완벽한총결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번성했던 강희조에는 국력의 강성함과 경제적인 번영이 찬란한 문화를 가져왔다. 유학(儒學)과 시문(詩文)을 사랑한 강희제는 마치 개척자와 같이 청초 문단의 국면을 열었으며, 청조 전체적으로 문학의 번영을 결정지었다.
마치 주(周) 천자가 풍속과 민정을 살피고자 하여 《시경》 300편이 세상에 전해졌고, 한무제(漢武帝)가 홍대한 위업을 빛내고자 사부(辭賦)가 크게 빛났으며, 위무제(魏武帝 조조)가 강개하게 시를 읊어 건안(建安) 문학이 흥기했고, 당태종이 시문을 좋아하여 당시(唐詩)가 한 시대의 문학이 되었듯이, 강희제의 화하 문화에 대한 경모와 제창은 주변의 대신들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정책 실시, 인재 예우, 부지런한 창작 등의 방식을 통해 청초 문단이 활발하고 너그러운 환경을 조성했다.
박학홍사(博學鴻詞)
“예부터 조대(朝代)가 일어날 때면 반드시 박학다식한 대유(大儒)가 있어 문단의 운세를 진작시키고, 경사(經史) 전적을 해설하고 발양하며, 문채가 빛나는 시문(詩文)을 지어 고문(顧問)이나 학사의 예비 인재로 삼았다.” ——강희제

청 초기에 학식이 깊고 풍부한 많은 대유(大儒)들이 명조 유민의 신분으로 민족의 기개를 지키며 벼슬길을 끊고 민간에 은거했다. 그림은 송나라 《명류집조책(名流集藻冊)》 중 ‘유송년산관독서(劉松年山館讀書)’ 부분. (공유 영역)
청 초기에 학식이 깊고 풍부한 많은 대유(大儒)들이 명조 유민의 신분으로 민족의 기개를 지키며 벼슬길을 끊고 민간에 은거했다. 강희제는 본래 화하 문화를 경모해 친정 초기부터 천하의 숨은 현인들을 불러들이려 노력했고, 한족 문인에 대한 예우와 존중을 표시하며 청조 문화 번영을 위한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
강희 9년(1670년), 강희제는 천하에 조서를 내려 관리들이 각지에서 재학을 겸비한 문인을 찾아 ‘산림은유(山林隱遺)’의 선비로 천거하게 하여 경성으로 초빙해 등용하게 했다.
강희 17년(1678년), 삼번의 난이 평정되고 나라가 안정되었다. 더 많은 현재(賢才)를 거두기 위해 강희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 인재를 갈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경성의 3품 이상 관리와 지방 독무(督撫 총독과 순무)들에게 ‘학행이 우수하고 문사(文詞)가 탁월한’ 선비를 두루 찾게 했다. 그가 이미 관직에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조정에 추천하게 하여 황제가 친히 시험을 치르고 등용했다. 이것이 바로 강희제가 ‘박학홍사(博學鴻詞)’ 과를 연 것으로 청초 문단의 큰 경사가 되었다.
박학홍사는 당 현종 개원 연간에 시작되어 양송(兩宋) 시기에도 이어졌으며, 문채가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관리로 삼는 데 중점을 두었다. 강희제의 제창 아래 관리들은 다투어 문인 명사들을 경성으로 추천했다. 당시 마침 한겨울이었는데 강희제는 이 문단의 엘리트들을 매우 우대했다. 그는 겨울날 낮이 짧아 답안을 작성하기에 불리하다고 여겨 과거 날짜를 연기하라는 명을 내리고 이듬해 봄 따뜻한 시절에 다시 마련하게 했다. 동시에 예부(禮部) 관리들로 하여금 모든 이의 숙식을 돌보게 하고 돈과 식량을 보내 그들을 적절히 안치하게 했다.
강희 18년(1679년) 3월 초하루, 자금성에는 봄바람이 따스하고 예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인재를 초빙하는 큰 시험이 막 열리려 했다. 143명의 명가(名家)의 대유들이 태화전(太和殿)에 모였고, 일련의 예절을 마친 후 체인각(體仁閣)에 하나둘 자리를 잡고 박학홍사과 시험을 준비했다. 시험 문제는 《선기옥형부(璿璣玉衡賦)》와 《성경시 오언배율 이십윤(省耕詩五言排律二十韻)》 두 편의 시문이었다. 정식 시험 전 강희제는 파격적으로 연회를 베풀어 지극한 예우와 중시를 나타냈다.
열흘 넘는 채점 끝에 강희제는 50명을 뽑았는데, 그중 1등이 20명, 2등이 30명이었으며 각각 한림 시독(侍讀), 시강(侍講), 편수(編修), 검토(檢討) 등의 관직을 제수했다. 유명한 진유숭(陳維崧), 주이존(朱彝尊), 탕빈(湯斌), 왕완(汪琬), 시윤장(施潤章) 등 청초 명사들이 모두 그중의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과거 외에도 강희제는 각지를 순행할 때 현지의 명사(名士)를 찾는 데 주력했다. 출사를 거부한 소수의 숙유(宿儒 원로 유학자)인 손기봉(孫奇逢), 이옹(李顒), 황종희(黃宗羲) 같은 이들에 대해 강희제는 그 뜻에 감동하여 탄식을 금치 못하며 사람을 시켜 그들의 저작을 필사하여 경성 내에 소장하게 했다.
그러나 강희제의 감화로 더 많은 현사들이 새로운 왕조를 인정하며 천자를 위해 힘쓰기를 원했다. 그들은 조정에서 관직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강희자전(康熙字典)》, 《패문운부(珮文韻府)》, 《전당시(全唐詩)》,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등과 같은 대형 편찬 사업에 참여했는데, 이는 모두 중화 문명의 보물 창고에서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모든 문화 서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명사(明史)》를 찬수하는 일이었다. 강희제는 명사관(明史館)을 열고 박학홍사로 뽑힌 이들을 초빙하여 전대(前代) 사서를 편찬하게 했다. 이 한족 문인들은 역사를 고치는 과정에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충의를 글자에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명사》는 24사 중에서도 품질이 상등에 속하며, 특히 후대 사서 중에서 최고라 일컬어진다. 청대 학자 조익(趙翼)은 평가하기를 “근대 여러 사서 중 구양공(歐陽公 구양수)의 《오대사》 외에 《요사》는 간략하고, 《송사》는 번잡하며, 《원사》는 거친데, 오직 《금사》가 문장이 우아하고 깨끗하며 서사가 간결하여 조금 볼만하지만 《명사》만큼 완벽한 것은 없었다”라고 했다.[1]
시문 제창
“주변의 여러 신하를 돌아보니 모두 지위가 높은 중신들로서 정사를 보필하고 직언을 올리며 전적을 관장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그대들은 마땅히 함께 시를 지어 아(雅)와 송(頌)의 시가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강희제 《승평가연시서(升平嘉宴詩序)》

군신 간의 사귐에서 사서는 강희제와 대신들이 시를 지어 화답한 사건을 여러 차례 기록했다. 그림은 청나라 요문한(姚文瀚)의 《자광각사연도권(紫光閣賜宴圖卷)》 부분. (공유 영역)
지위 높은 천자가 문화를 대하는 정책은 종종 한 조대의 문학적 풍향을 이끈다. 강희제는 한문화(漢文化)를 숭상하고 문학지사(文學之士)들을 우대하며 발탁했을 뿐만 아니라, 시문과 사부의 창작을 강력히 제창했다. 그는 한림원 학사들에게 다스림의 도리는 유아(儒雅)함을 으뜸으로 숭상하니 이제 사방이 평정되었으므로 문교를 진작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한림원 관리 중 사부와 서법(書法)에 능한 자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을 올리게 했다.
강희제는 박학홍사과에서만 시문으로 인재를 뽑은 것이 아니라 다른 정책에도 시문 제창을 활용했다. 예를 들어 그는 당시의 최고 대학인 국자감(國子監) 생원들에게 《사서》 공부 외에 시부(詩賦)를 짓게 했고 매년 봄가을로 시가 대회를 열게 했다. 강희제는 44년(1705년) 제5차 남순 기간에 관리들에게 현지 서생들을 소집해 시문 테스트를 진행하게 했고, 우수한 자는 이름을 적어 포상하며 나중에 등용하게 했다.
군신 간의 사귐에서 사서는 강희제와 대신들이 시를 지어 화답한 사건을 여러 차례 기록했다. 강희 21년(1682년) 정월 대보름날, 강희제는 삼번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건청문에서 한림 학사 등 문학 신료를 포함한 백여 명의 군신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석상에서 군신은 마음껏 마시고 웃으며 담소했다. 이튿날 강희제는 《승평가연시서(升平嘉宴詩序)》를 짓고 “빛나는 해와 화창한 바람이 만방에 입혀지네(麗日和風被萬方)”를 선창하자 신하들이 다시 태화전에 모여 ‘백량체(柏梁體)’ 격률에 따라 시를 이어서 지었다.[2] 한 무제와 신하들이 일찍이 백량대에서 시를 이어 지었는데 매 구절 7언이 모두 압운하는 것을 백량체라 한다.
강희 42년(1703년), 강희제의 50세 생신 즈음 신하들이 축하 인사를 올리고 진귀한 보물을 바치겠다고 청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그대들이 이처럼 헌상하면 외지의 독무들이 반드시 본받을 것이니 짐은 결코 받지 않겠다. 짐은 평소 문학을 즐기니 여러 대신 중 시문을 바칠 이가 있다면 남겨두고 감상하겠노라”라고 대답했다.[3] 그 후 대신들은 만수병(萬壽屏)을 만들어 병풍의 글자를 책으로 필사하여 강희제에게 생일 선물로 함께 보냈다. 강희제는 책자만 남기고 병풍은 돌려보냈다.
또한 강희제는 임종하던 해인 61년(1722년) 정월, 건청궁 앞에서 문무대신에게 연회를 베풀고 65세가 넘은 은퇴 관리들까지 초청했다. 그는 먼저 스스로 7언 율시 한 수를 지은 후 참석자들에게 각자 시를 지어 성사(盛事)를 기록하게 했으며 마지막에 《천수연시(千叟宴詩)》로 엮었다.
그 외에도 강희제는 남원(南苑)으로 사냥을 가거나 외국에서 진상한 사자, 코끼리 등 기이한 동물을 받았을 때도 대신들에게 수시로 시를 짓게 했다.
강희제 본인은 문학적 소양이 매우 높아 공로가 있는 문무 관리들에게 시를 하사하여 특별한 가상을 표시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사신(詞臣 시사를 짓는 신하)들과의 유대를 강화했다. 강희제의 ‘어제문집’ 중 시를 하사했다고 명시된 작품만 60수이다. 지방에서는 강희제의 증사(贈賜) 활동이 더욱 빈번했는데, 산서성 한 곳에서만 《산서통지》의 통계에 따르면 산서 출신이나 산서에서 관리 생활을 한 인물들이 받은 강희제 어제시는 총 32수, 어서전현시가(禦書前賢詩歌 황제가 선현의 훌륭한 시를 직접 쓴 것)는 총 36수에 달한다.
이렇게 시문을 제창한 조치들은 방대한 양의 문인(文人) 아운(雅韻)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청초 문단에도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 하사 연회나 경축 대형 행사에는 거의 당대 시문에 능한 모든 재자(才子)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군왕을 보필하는 중신이자 문단을 주도하는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의 창작과 사회적 지위는 천하 문인들에게 격려와 인도 작용을 했다. 동시에 강희제는 지성으로 한족 문인들과 사귀어 군신이 한마음 한뜻이 되는 이상적 경지를 실현했다. 이는 그들이 고국에 대해 가졌던 비애를 해소해 주었으며 문단의 기풍 또한 따라서 변해 성세(盛世)의 소리를 읊게 되었다.
풍부한 저작
“사람이 덕을 쌓고 학업을 닦음은 모든 것이 독서에서 시작된다. 책을 많이 읽으면 욕심이 담백해지고, 욕심이 담백해지면 비용이 줄어들며, 비용이 줄어들면 구하는 것이 적어지고, 구하는 것이 적어지면 품격이 높아진다.” ——강희제 정훈격언(庭訓格言)
강희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황제다. 사서(史書) 기록에 따르면 강희제는 다섯 살 때 독서를 시작하여 종종 한밤중까지 외우고 읽으면서도 즐거워하며 게을리하지 않았다. 17~18세 때는 독서가 너무 고되어 피를 토하면서도 잠시도 쉬려 하지 않았고, 노년에도 여전히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겸손하게 공부하길 좋아했다.
이런 까닭에 강희제는 문치와 무공이 역사에 빛남과 동시에 학식(學識)과 문예(文藝) 영역에서도 세상을 감탄케 했다. 청말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였던 증국번(曾國藩)은 강희제에 대해 “위로는 천상, 지리, 역산(曆算), 음악, 고례(古禮), 병법, 형률(刑律), 농정에서부터 아래로는 활쏘기, 의약, 기문(奇門), 임둔(壬遁 육임과 둔갑), 그리고 만주어, 몽골어, 서역어, 서양 문자와 자모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라고 찬양했다.[4]
탁월한 재능과 뛰어난 기예를 지녔던 강희제는 문학적 흥미가 광범위해서 정사 틈틈이 붓을 들어 끊임없이 글을 썼고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는 유학을 숭상했으며 문학 창작에서도 유가의 문장으로 도를 싣는다는 문이재도(文以載道) 정신을 계승했다. 그의 문학적 주장은 사서 기록 곳곳에 보인다. 먼저 강희제는 문장과 도덕의 통일을 제창했다. 그는 일찍이 “본래 도덕과 문장은 두 가지 일이 아니니, 문장에 능한 선비는 반드시 이치에 밝아야 하고 도를 배우는 사람 또한 문장에 능함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라고 말했다.[5]
유가에서는 형식과 내용을 모두 중시하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을 강조하는데 군자가 글을 짓는 것도 이와 같다. 강희제는 문장을 지을 때 내용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여겨 겉만 화려하고 실속 없는 경박한 문풍에 반대했다. 즉 “도를 밝히는 것을 위주로 하고 화려한 말을 숭상하지 않는다(主於明道, 不尚詞華)”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장 추구한 것은 역시 ‘문질찬연(文質燦然)해서 내용과 문채를 겸비한 가작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신묘하게 깨닫고 뜻이 풀리게 하고 읽고 느끼는 과정에서 시원하고 유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내용(質) 면에서 강희제는 화하 문화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형식(文) 면에서도 끊임없이 기예를 높이며 곁에 있는 문신들에게 겸손하게 가르침을 구했다. 《정좌독서자유(靜坐讀書自喻)》라는 시 서문에서 강희제는 대신들이 만약 그의 작품에 대해 운각(韻脚)이 부적절하거나 평측(平仄)이 맞지 않고, 전고가 확실치 않거나 대구가 우아하지 못하다는 등의 결점을 지적하면 즉시 수정했다고 했다.
《사고전서》 중 강희제의 《성조인황제어제문집(聖祖仁皇帝禦制文集)》은 총 4집 176권에 달하며, 여기에는 시, 사, 문, 부 등 정통 문학 양식과 문예 평론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 산문과 시가가 가장 주요한 양식이다. 그의 산문 서사는 평이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풍격이 소박하고 참신해서 대가다운 면모가 있고, 방대한 양의 시가는 강희제의 예술적 성취를 집중적으로 반영한다. 강희제는 평생 1천여 수의 어제시(御製詩)를 남겼는데 그 수량은 전성기 당대 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다. 이는 그의 시가에 대한 편애와 시문 제창을 위해 쏟은 심혈을 보여준다.
그의 시가 내용은 극히 광범위하여 천지 산천의 풍광과 고금의 치란(治亂) 사적 등이 시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강희제는 시로 뜻을 전하는 전통 가치를 따라 구오지존(九五之尊 존귀한 황제의 자리)으로서 그가 통치하는 시대를 주시했으며, 단련된 시구 속에 치국안방의 이상과 적극적인 세상을 향한 정서를 드러냈다.
다음으로 강희제의 시 두 수를 감상하며 그의 문학적 소양과 내면세계를 살펴보자.
《고북구절구(古北口絶句)》
“험한 산 끊어진 곳 고북구를 넘으니,
석벽이 열려 높고도 멀구나.
지세의 빼어남은 본래 믿기 어려우니,
다스림은 덕에 있지 험준함에 있지 않네.“
斷山逾古北
石壁開峻遠
形勝固難憑
在德不在險
《등성(登城)》
“성벽은 천 길 높이로 산천을 지키고,
호거용반(虎踞龍盤)의 왕기가 가득하네.
수레와 말은 구름 안개 속을 오가는데,
백성의 살림살이가 바로 눈앞에 있구나.“
城高千仭衛山川
虎踞龍盤王氣全
車馬往來雲霧裏
民生休戚在當前
강희제가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읊으며 높고 먼 산과 천 길 성벽을 바라보니 난공불락의 방어 체계가 구축되어 한 제국의 성세 기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강희제는 형상 너머의 생각을 가졌으니, 외적을 막는 것은 요새의 험준함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덕치를 베풀어 사방을 교화하는 데 있으며, 나라의 흥성함은 수레와 말이 북적이는 표면적 번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생계를 눈앞의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시는 필법이 활달하고 경구가 깊은 깨우침을 주며 치국안방(治國安邦)의 근본을 담고 있으니 진정한 제왕의 시라 할 수 있다.
만주족 문학
“납란성덕(納蘭性德)은 시를 잘 지었으며 특히 사(詞)를 짓는 데 능했다. 그는 남당과 북송 사가들의 풍격을 배워 작품이 매우 섬세하고 오묘한 예술미가 넘쳤다.”

청 엽연란(葉衍蘭)의 《청대학자상전(淸代學者像傳)》 중 납란성덕의 초상화. (공유 영역)
화하의 소수민족은 흔히 무용(武勇)은 넘치나 문채(文彩)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들이 중원에 들어와 화하를 통일했을 때는 점차 한문화(漢文化)의 훈도를 받아 말 위의 맹사에서 문무를 겸비한 군자로 변모하기도 했다. 특히 강희조에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을 하나로 보아 한족의 유학과 시문을 크게 추앙했으며 팔기(八旗) 자제들의 문학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강희제의 영향 아래 많은 만주족들이 한족 선비들과 교유하기를 즐겼고 한족 문화를 배우며 한족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어 예절을 밝히고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갔다. 이때부터 만주족 문학이 점차 흥성하여 많은 문학가가 배출되었다.
그중 가장 명성이 높은 인물은 단연 ‘만청(滿淸) 제일의 재자’라 불리는 납란성덕이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만주 정황기(正黃旗)인으로 아버지는 내각 중신 납란명주(納蘭明珠)였다. 그는 17세에 태학에 들어갔고 18세에 향시에 합격했으며 19세에 회시, 22세에 전시를 치러 진사에 급제했다. 강희제는 납란성덕을 매우 아껴 곁에 두고 어전시위(禦前侍衛)로 삼았으며 군신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다.
귀공자 납란성덕은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시사에 정통한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그는 성품이 초탈하고 감정이 풍부하고 섬세하여 사(詞)를 짓는 면에서 성취가 가장 높았다. 그의 사는 주로 감정, 변방과 강남의 풍경, 사물과 역사에 대한 영탄 등을 다루었으며 시구가 맑고 빼어나며 정취가 애절하고 처연하면서도 비개함이 서려 있어 멀리 이욱(李煜), 안기도(晏幾道)의 기풍을 따랐다.
전해지는 사는 300여 수뿐이지만 가작이 속출했다. 납란성덕은 《측모집(側帽集)》, 《음수사(飲水詞)》 두 권의 사집(詞集)을 엮었는데 그의 사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집집마다 다투어 읊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납란성덕은 한족인 주이존, 진유숭과 더불어 ‘청사(淸詞) 삼대가’로 불렸으며 심지어 청나라 ‘건국 초기 제일의 사수(詞手)’라는 칭송을 받았다.
또 다른 성취가 높은 인물은 악단(嶽端)이다. 그는 친왕(親王) 악락(嶽樂)의 아들로 시와 그림에 모두 정통하여 황실 내에서 풍아함을 처음 제창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서산에 구름 생기니 곧 비가 오려 하고, 동풍은 힘이 없어 꽃조차 날리지 못하네”는 그의 아름다운 구절로 당시 ‘동풍거사(東風居士)’라 불렸다. 본래 군왕이었으나 거듭 좌절되어 한산한 종실로 강등되자 뜻을 얻지 못한 우울함을 호방하고 비분강개한 시어로 토해내곤 했다. 시집 《옥지생고(玉池生稿)》 등이 있으며 희곡 《양주몽전기(揚州夢傳奇)》를 지어 만주인 중 희곡 가사를 쓴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주석:
[1]出自《論諸朝正史之優劣》。
[2]出自《清史稿·聖祖本紀》、《東華錄》。
[3]出自《東華錄》。
[4]出自《國朝先正事略序》。
[5]《康熙起居注》康熙二十四年四月辛卯條。@*#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6/4/n12161729.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