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춘
【정견망】

명 십삼릉 수채화. (공유 영역)
풍수는 고대에 감여(堪輿)라 불렸으며, 음양오행학, 역학(易學), 지리학, 성상학(星象學), 건축학 등 다방면의 학문을 하나로 집약한 것이다. 풍수의 핵심은 주로 기(氣), 장(場), 형(形), 세(勢), 수(水) 등의 요소에 있으며, 음양 평형, 오행 생극(生剋), 방위 배치, 색상 조화 등을 중시한다.
풍수는 선진(先秦) 시대에 기원해 한진(漢晉)에서 형성되었고, 당대(唐代)에는 궁궐 건축과 황실 묘역의 입지 선정 및 배치에 응용되었으며, 송원(宋元) 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문화를 형성했다. 아래에서는 유명한 감여가 요균경(廖均卿)이 명 성조(成祖 영락제)를 위해 용맥을 찾고 혈자리를 정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명으로 북경에 가서 황실 능침을 감별
“세계의 풍수는 중국을 보고, 중국의 풍수는 강서(江西)를 본다”라는 말이 있듯이, 흥국현(興國縣) 삼료촌(三僚村)은 중국 감여 문화의 발상지다. 삼료의 증(曾)씨와 요(廖)씨 두 가문이 당대 말기 양공(楊公)의 풍수를 전수받은 이래, 그 풍수술은 명청(明淸) 시기에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여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며, 후세에 ‘중국 풍수 문화 제1마을’로 칭송받았다.

당대(唐代) 풍수 조사 양균송(楊筠松) ‘형세파’의 적계 전수자 요균경. (공유 영역)
이중 요균경(廖均卿 1350~1413)은 자가 조보(兆保), 호가 옥봉(玉峰)이며 강서성 흥국현 매교향 삼료촌 사람으로, 《행정기(行程記)》라는 저서를 세상에 남겼다. 풍수 세가(世家 대를 이어 한 분야의 기예를 전한 가문) 요씨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며 역대 국사(國師)를 배출했다. 요균경의 손자 요문정(廖文政)은 명 가정 15년, 조정에서 거행한 전국 풍수술사 과거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장원을 차지함으로써 ‘풍수 장원’이라 불렸으며, 가정 황제를 위해 영릉(永陵)과 그 부모의 현릉(顯陵)을 골랐다.
《흥국의금삼료요씨족보(興國衣錦三僚廖氏族譜)》의 기록에 따르면, 영락 5년(1407년), 서황후(徐皇后)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락제는 북경 천도를 결정하고 서황후의 관을 잠시 남경 황궁 안에 안치했다.
황실의 능침 자리는 황실의 존엄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왕조의 흥망성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기에, 영락제는 예부상서 조공(趙羾) 등 대신들에게 천하의 풍수에 정통한 인사를 두루 찾으라고 명했다. 강서 공주부(贛州府) 흥국현 삼료촌 요균경의 선조 요삼전(廖三傳)이 당대 저명 풍수 대사 양구빈(楊救貧)의 전인(傳人)으로 풍수에 조예가 깊고 명성이 높아 조정의 선택을 받았다.
요균경은 영락제의 부름을 받아 경사(京師)에 도착한 후, 먼저 남경의 효릉(孝陵 태조 주원장의 묘) 풍수를 살피고 나서 북경으로 가서 풍수 명당을 찾아 나섰다. 그는 경서(京西)의 연태역(燕台驛), 옥천산(玉泉山), 담자사(譚柘寺), 향산(香山) 및 경북(京北)의 양산(陽山) 차호령(茶湖嶺)과 회유(懷柔)의 홍라산(紅螺山)과 백엽산(百葉山)을 두루 방문했다. 그 후 다시 신가장(辛家莊), 부구(斧口), 곡산(穀山), 문가장(文家莊), 석문역(石門驛), 탕천(湯泉), 선봉사(禪峰寺) 등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영락 5년 6월 초하루에 창평(昌平) 황토산(黃土山 훗날 천수산天壽山 십삼릉 소재지)으로 가서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았는데, 그곳의 풍수가 절묘하여 다른 곳이 미칠 바가 아님을 발견했다. 이에 지도를 그려 8월 초하루 남경 조정에 올라가 지도와 주장(奏章)을 올렸다. 아울러 영락제에게 직접 황토산에 임해 관찰할 것을 건의하며 “혜안을 높이 뜨시고 황풍(皇風)을 넓게 떨치시어” 만약 황릉을 이곳에 정한다면 “옥촉(玉燭)이 청명해 해, 달, 별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며, 금부(金符)가 호탕해 만고에 길이 보존될 것이니, 국운이 무강하고 국가에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영락제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초여드렛날 길한 시각에 친히 여러 풍수사들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혈자리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영락제는 현지 답사와 비교를 거친 후, 다른 두 명의 저명한 풍수 대사 왕간(王侃)과 무애(巫涯)의 주본(奏本)을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요균경의 방안을 채택해 북경 서교 창평 동북쪽의 황토산을 황실 능역으로 선정했다.
풍수 국사가 십삼릉을 감정한 주장(奏章)
사료에 따르면 ‘국사 요균경이 십삼릉을 감정한 주장’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지리 형세 분석:
요균경은 창평 황토산(후에 ‘천수산’으로 봉함)의 ‘용맥(龍脈)’의 특징을 강조하며, “열여덟 고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사세(四勢)가 상서로움을 드러내고, 형상은 구리 징과 같으며 혈이 중앙에 위치한다”고 하여, 이곳이 ‘사상(四象)이 가지런하고 팔국(八國)이 완비된’ 풍수 격국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요균경은 상소문에서 장릉(長陵)의 물줄기가 ‘천문산(天門山)이 진원(震垣)을 보필하고 지호(地戶)의 물이 수사(囚謝)로 흐르는’ 격국을 형성해, 이곳이 얻기 드문 능 터임을 예시한다고 언급했다.
풍수 현학(玄學)의 관점에서 볼 때, 이곳은 북으로 연산(燕山) 여맥에 의지해 거대한 용이 꿈틀대는 듯하니 용맥이 있는 곳이요, 남으로 화북평원을 바라보며 시야가 탁 트였으니 제왕의 기운이 있다. 동으로는 망산(蟒山 청룡), 서로는 호욕(虎峪 백호)이 있어 좌우 호위의 형세를 형성하니 용(龍), 사(砂), 혈(穴), 수(水)의 길상을 고루 갖추어 ‘사신사(四神砂)’ 풍수 격국에 부합한다.
2. 성상과 오행의 결합:
천수산 주봉이 반룡(盤龍 웅크린 용)의 형상을 띠어 ‘제릉(帝陵) 용맥의 조종’으로 간주되는 것 외에도, 요균경은 ‘소부(小府) 자미(紫微)가 은하 북쪽에서 일어난다’, ‘목화(木火)가 국(局)을 얻었다’ 등의 술어를 사용하여 지형과 천문을 대응시켰다. 능침 선정지가 ‘삼원(三垣)'(즉 자미, 태미, 천시)의 제왕 상징과 부합함을 강조함으로써 이곳이 황실 능침으로서 천명(天命)에 합당함을 더욱 논증했다.
3. 구체적인 점혈(點穴) 건의:
‘향중혈법(響中穴法)’을 제시하며 능혈을 ‘구리 징 형상의 땅’ 중앙에 정하여 소리가 천하에 울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석분석리(石盆石鯉, 돌대야와 돌잉어)’ 등의 길조를 예언했다.
이 주장의 현존 판본은 주로 요씨 가문에서 정리한 《균경태옹흠봉행취삽복황릉급행정회주실록(均卿太翁欽奉行取插蔔皇陵及行程回奏實錄)》에서 유래했는데, 이 책에는 요균경과 영락제의 대화, 두 차례 북경에 가서 능을 감정해 지도를 그리고 헌상하며 혈을 짚은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요균경의 ‘갈산지수(喝山止水)’ 전설과 신적

1404년에 제작되어 현재 포탈라궁에 소장 중인 영락대제 초상화. (공유 영역)
문헌 기록에 따르면, 영락 7년(1409년) 5월 8일, 영락제 주체가 황토산을 천수산(天壽山)으로 봉한다는 조서를 내리고 요균경에게 금 검과 은 삽을 하사하며 능혈을 정하게 했다. 영락제는 무안후(武安侯) 정형(鄭亨)을 보내 공사 시작을 고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고, 무의백(武義伯) 왕통(王通)이 군인과 민간인 및 장인들을 이끌고 조영 공사에 착수했다.
영락 8년에 이르러 성조가 다시 여러 풍수 대사들을 불러 천수산 황릉의 혈자리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었다.
여러 대신이 아뢰기를, “요균경이 조정을 희롱하여 지맥을 파헤쳐 상하게 하니 솟아나는 샘물이 그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영락제가 크게 노하여 요균경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문책했다.
요균경이 대답하기를, “황토산 그 혈에 홍수가 용솟음치는 것은 진룡(眞龍)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혈을 잡은 법에는 누락이 없으니, 성주(聖主)의 제성(帝星) 가마가 도착하면 솟던 샘물이 즉시 그칠 것이옵니다. 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라고 했다.
영락제가 노여움을 거두고 기뻐하며 “그렇다면 길일을 택해 준비하여 내 친히 가보겠다”라고 했다.
그날 채비를 마치고 가마가 황토산에 도착했다. 샘물이 솥에서 끓는 것처럼 용솟음치고 있었다. 황제가 이를 보고 노하여 말했다.
“균경아, 너는 제성이 도착하면 샘물이 곧 그칠 것이라 했는데 어찌하여 더욱 심해지느냐?”
요균경이 아뢰기를, “신이 산을 향해 외치고[喝山], 나경(羅經)을 땅에 내려 비추게 허락해 주시면 솟는 샘물이 즉시 그칠 것입니다”라고 했다.
주체가 “허락하노니, 만약 조금이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네 목숨은 풍전등화일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요균경이 산을 향해 크게 외쳤다.
“산가(山家)의 24향(向), 토지, 천성(天星), 지요(地曜), 28수와 조사 균송(筠松), 문천(文辿), 우공(瑀公)이시여! 지금 균경이 영락 성주(聖主)를 위해 만세의 기틀이자 천 년의 황릉을 세우려 합니다. 이제 금정(金井)에서 홍수가 터져 나와 샘물이 며칠째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만리강산이 모두 성주께 귀속되었거늘 누가 감히 존중하지 않겠습니까! 성주의 난가(鑾駕 황제의 가마)가 친히 이곳에 이르렀으니 홍수는 마땅히 멈춰야 합니다.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이는 천지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기한데 요균경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금정 안의 샘물이 과연 즉시 멈추었다.
영락제가 크게 기뻐하며 포상을 하려는데, 요균경이 다시 아뢰기를 샘물 아래 석 자 지점에 돌대야 하나와 돌잉어 한 쌍이 있으니 폐하께서 즉시 파보고 명을 내려주십사 했다.
영락제가 당장 아래를 파보게 하니, 과연 예상대로 돌대야와 돌잉어가 나왔다.
그제야 영락제는 탄복하며 말했다.
“신묘하구나! 신묘하구나! 균경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며 진실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이 있도다. 산을 향해 외치니 응답이 있고 물을 부르니 즉시 멈추니 참으로 짐의 기이한 만남이로다!”
즉시 요균경을 흠천감 왕관(欽天監王官), 영대랑(靈台郎) 박사(博士) 품계에 실수(實授 실제 관직에 취임)하도록 명했다.
영락 8년 7월 24일 황릉이 완공되자 요균경은 관직과 금을 받기를 원치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영락제가 아쉬워하며 재삼 만류하다가 말했다. “돌아가고자 한다면 부채 한 자루를 줄 터이니 요긴하게 쓰거라.” 하며 어제시(御贈詩)를 내렸다.
강서의 한 노인이여
가슴 속에 북두칠성을 품었구나
금석잉어를 짚어내니
과연 신선의 입이로다
벼슬을 내려도 마다하고
황금을 줘도 받지 않으니
그대에게 맑은 바람 한 줄기 선사하노니
천하를 마음껏 거닐지어다
江西一老叟,腹內藏星鬥;
斷下金石鯉,果中神仙口。
賜官官不要,賜金金不受;
賜爾一清風,任卿天下走。
인류 건축과 자연 결합의 전형

세계문화유산 — 북경 명 십삼릉. (공유 영역)
요균경은 풍수 현학에 대한 깊은 공력을 바탕으로 대명(大明) 왕조를 위해 천수산을 황실 능침지로 선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200여 년 동안 장릉, 헌릉, 경릉, 유릉, 무릉, 태릉, 강릉, 영릉, 소릉, 정릉, 경릉, 덕릉, 사릉이 차례로 축조되어 중국 최대 규모의 황실 묘역군이 되었다.
십삼릉의 전체 배치는 형파(形派) 풍수의 정점으로 간주된다. 고대 감여술, 성상 지리와 황권(皇權) 윤리를 융합한 것으로서 명대 제왕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을 집중적으로 체현했으며, 후세 황실 능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명말청초의 학자 고염무(顧炎武)는 일찍이 “여러 산이 남쪽에서 오니 형세가 마치 교룡(蛟龍)이 나는 듯하고, 동쪽 발치는 노룡(盧龍)에 머물고 서쪽 등줄기는 태행산으로 치달으며, 뒤쪽은 황화(黃花 황화진)에 앉고 앞쪽은 신경(神京)을 임하고 있다. 그 가운데 만년의 집이 있으니 이름하여 강가장(康家莊)이라 한다. 백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명당이 활짝 열려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십삼릉의 입지는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 건축과 자연 결합의 전형’으로 인정받았다.
요균경의 이름은 또한 명 십삼릉이라는 천고에 빛날 풍수 작품으로 인해 역사의 긴 강물 속에 뚜렷한 한 획을 남겼다. 이후 북경 고궁 자금성의 측량 또한 풍수 대사인 요균경의 손을 거쳤으며, 이때부터 형세파[形勢派 만두파(巒頭派)라고도 함]의 풍수술은 중국 풍수의 주류 유파가 되었다.
그러나 서구에서 온 사악한 유령인 중국 공산당이 신주(神州) 대지를 점거한 후, 세계문화유산인 명 십삼릉에까지 검은 손을 뻗쳐 중화민족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서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귀중한 역사 유물이 되돌릴 수 없는 파손을 입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5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