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
【정견망】
개자추(介子推)는 춘추시대 진(晉)나라 사람이다. 가장 이른 기록인 《좌전(左傳)·희공 24년》( 기원전 636년)에는 그를 개지추(介之推)라 적었으나, 《장자》 이후로는 모두 개자추라고 썼으며, 동한 시대 채옹(蔡邕)이 엮은 《금조(琴操)》에서는 개자수(介子綏)로 변했다. 개자추는 진문공(晉文公) 중이(重耳)가 타국을 유랑할 때의 수행원중 하나였다. 진나라에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한 후 그는 중이를 따라 망명길에 올랐으며 19년 동안 유랑했다. 중이가 귀국하는 것을 보좌한 후, 개자추는 산림으로 은거하기로 결심했다. ‘녹봉을 말하지 않고(不言祿)’ 은거한 그의 품행은 후세 사람들의 추앙과 그리움을 받았다.
《사기·진세가(晉世家)》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진문공 중이는 진헌공(晉獻公)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비를 좋아했는데, 17세 때 현사(賢士) 다섯 명이 있었으니 곧 조최(趙衰), 호언(狐偃 외삼촌) 구범(咎犯), 가타(賈佗), 선진(先軫), 위무자(魏武子)다. 헌공이 태자였을 때 중이는 이미 성인이었다. 헌공이 즉위할 때 중이는 21세였다.
헌공 13년 여희의 이간질로 중이는 포성(蒲城)을 지키며 진(秦)나라에 대비했다.
헌공 21년, 헌공이 태자 신생(申生)을 죽이자 여희가 중이를 참소했고, 중이는 두려워 헌공에게 고하지도 못한 채 포성을 지켰다.
헌공 22년(기원전 655년), 헌공이 환관 발제(勃鞮)를 보내 중이를 죽이게 했다. 중이가 담을 넘으니 환관이 쫓아가 그의 옷소매를 벴다. 중이는 마침내 적(狄)나라로 달아났다. 적나라는 모친의 나라였다. 이때 중이의 나이는 43세였다. 이때부터 다섯 현사를 따르게 하고, 그 밖의 이름 없는 수십 명과 함께 적나라에 이르렀다.”
개자추는 중이를 따라 적나라로 간 ‘다섯 현사’에 포함되지 않았고 이름 없는 수십 명 중 한 명이었으며, 전체 유랑 기간 중 개자추의 행적에 대해서도 특별한 기록이 없다.
《좌전·희공 24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진후(晉侯 진문공)가 망명에 동참한 자들에게 상을 내렸으나 개지추는 녹봉을 말하지 않았고, 녹봉 또한 그에게 미치지 못했다. …… 마침내 은거하다 죽었다. 진후가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면상(綿上)의 밭을 그의 몫으로 봉하며 말하기를 “이로써 나의 과오를 기록하고, 또한 착한 사람을 표창하노라”고 했다.】
진문공이 망명을 함께한 이들에게 상을 내릴 때 개지추가 상과 녹위를 청하지 않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에 어머니와 함께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진문공은 사람을 보내 개지추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면상의 밭을 봉해주며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선인을 표창한다는 징표로 삼았다.
그런데 이 기록에 개자추의 말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개지추가 말하기를 “헌공의 아들 아홉 명 중 오직 우리 임금님(중이)만이 살아 계신다. 혜공(惠公)과 회공(懷公)은 친함이 없어 안팎으로 버림받았다. 하늘이 진나라를 끊지 않으셨으니 반드시 주인이 있을 것인데, 진나라의 제사를 주관할 분이 우리 임금님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이는 실로 하늘이 (임금으로) 세우신 것인데 저 몇몇 사람들이 자기들의 힘이라고 하니 또한 속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도 도둑이라 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공을 탐하여(貪天之功) 자기 힘이라 하겠는가? 아랫사람은 그 죄를 의롭다 여기고 윗사람은 그 간사함에 상을 내리니, 위아래가 서로 속여 함께 지내기 어렵구나!”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탐천지공(貪天之功 하늘의 공을 탐하다)’이란 고사성어가 생긴 근원이다.
한편 개자추의 은거에 대해 《사기·진세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문공 원년 봄, 진(秦)나라가 중이를 하수(河水)까지 배웅했다.
구범이 말하기를 “신이 임금을 따라 천하를 돌아다니며 허물도 많았습니다. 신도 그것을 아는데 하물며 임금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청컨대 여기서 떠나겠습니다”라고 했다.
중이가 말하기를 “만약 귀국하여 자범(子犯, 구범)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하백(河伯)이 지켜볼 것이오!”라 하고 구슬을 강에 던져 자범과 맹세했다.
이때 개자추가 배 안에 함께 있다가 웃으며 말하기를 “하늘이 실로 공자를 도우신 것인데, 자범은 자기 공이라 여기며 임금에게 흥정하려 하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차마 저런 자와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없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스스로 은거하며 강을 건넜다.】
이를 통해 개자추의 눈에는 19년의 망명 생활이 그저 신하로서의 본분을 다한 것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진문공이 귀국해 즉위한 것은 천의(天意)가 이룬 것이지 수행원들의 공로가 아니므로, 하늘의 공을 탐해 자신의 힘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국 길에 황하를 건넌 뒤 바로 공을 세우고 물러나 스스로 은거한 것이지, ‘녹봉이 미치지 못함’에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서가 아니었다.
《좌전》은 풍부한 내용을 지닌 중국 최초의 편년사(編年史)다. 서사가 완비되어 있고 내용이 풍부하다. 역사 서사 방식으로 역사를 전방위적으로 서술했으며, 다양한 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판별해 취사선택했기에 춘추시대 사건 기록이 상세하고 또 믿을 만하다.
당대(唐代) 사학자 유지기(劉知幾)는 “대저 《좌씨(左氏)》의 책은 서사(敍事)가 최고다(《사통(史通)》권8)”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개자추에 관한 기록은 후세에 많은 이야기들이 덧붙여졌다.
《장자·도척(盜蹠)》 편에서는 우언의 방식을 빌려 도척의 입으로 공자의 학설을 비웃으며 ‘할고봉군(割股奉君 허벅지 살을 베어 임금을 봉양하다)’과 ‘나무를 안고 불에 타 죽은(抱木而燔死)’ 줄거리를 가공해냈다.
“개자추는 지극히 충성스러워 스스로 허벅지 살을 베어 문공에게 먹였으나 문공이 훗날 그를 배신하니, 개자추가 노해 떠나 나무를 안고 불에 타 죽었다”라고 한 것이다.
이 글은 공자의 가르침을 폄하하고 이를 극단적으로 연기해, 공자의 가르침이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형체를 고달프게 하여 그 참됨을 위태롭게 한다(《장자·어부》)”는 점을 증명하려 한 의도가 담겨 있다.
《한비자·용인(用人)》에서는 “옛날에 개자추는 작위와 녹봉 없이 의리로 문공을 따랐고, 임금의 굶주림을 차마 보지 못해 인(仁)으로 자신의 살을 베었으니, 군주는 그 덕을 맺고 글과 그림으로 그 이름을 남겼다”라고 했다. 여기서는 허벅지 살을 베어 임금에게 먹인 것을 ‘인(仁)’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한대(漢代) 유향(劉向)이 편찬한 《신서(新序)》에 이르면 산을 불태운 이야기가 추가된다.
“문공이 그를 대우하려 했으나 나오려 하지 않아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산을 태우면 마땅히 나올 것이라 여겨 산을 태웠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타 죽었다”라고 했다. 이로써 개자추가 불에 타 죽은 것은 자발적인 것에서 문공에 의해 타 죽은 것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인의(仁義)와 충(忠)의 함의를 이해함에 있어, 처한 경지나 정면 혹은 반면(反面) 시각에 따라 논술이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중(中)’에서 벗어난 조건 하에서 긍정하거나 부정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통적 가치와 비교하면 서로 다른 방향과 정도로 편차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충(忠)이란 무엇인가?
《대대례기(大戴禮記)·증자대효(曾子大孝)》에 이르기를 “의(義)라는 것은 ‘이것’에 알맞게 하는 것이요, 충(忠)이라는 것은 ‘이것’의 중심을 잡는 것이다.”[義者,宜此者也;忠者,中此者也]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충(忠)이란 “공경함이다. 마음(心)을 따르고 발음이 중(中)이다”라고 풀이했다. 단옥재(段玉裁)는 주석에서 “공경이란 엄숙함이다. 마음을 다하면서 공경하지 않는 자는 없다. …… 마음을 다하는 것을 충이라 한다”라고 했다.
《옥편(玉篇)》에서는 “곧음(直)이다”라고 했고, 《증운(增韻)》에서는 “안으로 그 마음을 다하여 속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소(疏)》에서는 “중심(中心)을 충이라 한다. 중(中) 자 아래에 심(心) 자가 있는 것은 말이 마음에서 나와 모두 충실함을 뜻한다”라고 했다.
《육서정온(六書精蘊)》에서는 “정성을 다하는 것(竭誠)이다”라고 했으며, 《전(傳)》에서는 “윗사람을 섬김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고금의 학자들은 모두 ‘충(忠)’과 ‘중(中)’이 고대에는 뜻이 서로 같으며, ‘충’은 ‘중’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설문해자》는 또한 “중(中)은 안(內)이다”라고 했고, 단옥재는 주석에서 “중이란 겉(外)과 구별되는 말이며, 치우침(偏)과 구별되는 말이고, 또한 마땅함에 부합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훈고학적으로 보면 ‘중’의 옛 의미는 ‘안’이며, 단옥재가 주석한 ‘안’은 곧 ‘밖과 구별되는 것’으로, 나아가 ‘치우치지 않음(不偏)’, ‘알맞음(合宜)’으로 확장되었다. 즉 ‘중’과 동의어인 ‘충’의 최초 함의는 안을 향하는 것이며, 한 사람이 내면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바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마음이 바르고 생각이 사악함이 없으며 중화(中和)하여 치우치지 않고, 몸가짐이 법도를 넘지 않으며 궤도를 따라 마땅해야 한다. 이는 마치 지구가 태양을 주위로 회전하며 만고 이래로 줄곧 그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것과 같다. 겨울의 추위 때문에 속도를 높이지도 않고, 여름의 더위 때문에 궤도의 기울기(황도와 적도가 교차하는 각도)를 바꾸지도 않는다. 사람이 천지 사이에 서 있는 것도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인류가 세상을 살아가며 따르는 상리(常理)의 궤도는 신이 인류에게 수립해 준 생활 방식이자 준칙이다. 사람은 오직 마음속의 선함을 지키고 치우침 없이 상리를 따라 행할 뿐이지, 자신의 호오(好惡)에 따라 궤도를 벗어나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7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