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
【정견망】
현존 《장자》 33편 중 잡편에 《어부(漁父)》라는 글이 있다. 이는 하나의 우언으로, 공자가 이름 없는 한 어부에게 가르침을 받는 이야기를 빌려 유가와 도가의 변론 속에 담긴 이치를 기탁하고 있다. ‘어부’라는 형상은 아마도 장자의 붓 끝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어부’라는 형상은 고정되었으며 동시에 세속 밖의 은사(隱士)나 도를 얻은 고인(高人)이라는 함의가 부여되었다.
《어부》 편의 도입부에서는 공자와 어부가 만나게 된 연유를 소개한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을 데리고 노나라 도성 동문 밖의 울창한 숲으로 놀러 갔는데, 학생들은 풀밭에 흩어져 앉아 책을 읽고 공자는 홀로 행단(杏壇)에 앉아 노래하며 거문고를 탔다.
한 곡조가 다 끝나기도 전에 강변 작은 배 위의 어부가 그 소리를 듣고 뭍으로 올라왔다. 이 어부는 눈썹과 수염이 모두 하얗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긴 소매를 휘날리며 의태가 소탈했다. 그는 높은 단 근처에 멈춰 서서 왼손으로 무릎을 치고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경청했다.
연주가 끝나자 그는 자공과 자로 두 사람에게 공자의 내력을 물었다.
자공이 대답하기를 “공씨(孔氏)라는 분은 천성적으로 충성과 신의를 지키고 몸소 인의를 행하며, 예악을 꾸미고 인륜을 정하십니다. 위로는 세상의 군주에게 충성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교화하여 천하를 이롭게 하려 하시니, 이것이 공씨가 다스리는 바입니다”라고 했다.
어부가 다시 묻기를 “그는 영토를 가진 군주인가?” 하니 자공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또 묻기를 “그는 제왕의 경상(卿相)인가?” 하니 자공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돌아가며 말하기를 “어질기는 어질겠지만, 아마도 그 몸을 보존하기는 어려울 것이로다.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형체를 고달프게 하여 그 참됨(眞)을 위태롭게 하니, 아아! 도(道)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왔구나!”라고 했다.
자공이 돌아와 공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공자는 곧 거문고를 밀어 놓고 일어나 강가로 나갔다. 어부가 막 노를 저어 떠나려 할 때 돌아보며 공자를 보았고, 공자는 뒤로 물러나 예의를 갖춘 후 허심탄회하게 어부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저 구(丘)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아 지금까지 69세가 되었으나 지극한 가르침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허심탄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부는 당신이 종사하는 것은 인간 세상의 속된 일이다. 천자, 제후, 대부, 평민 이 네 부류가 각기 직분을 다하고 자기 분수 내의 일을 걱정하며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면 다스림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했다.
“지금 당신은 위로는 군주나 유사(有司 각 부서를 맡은 대신)의 권력이 없고 아래로는 대신이나 관리의 직무도 없으면서, 멋대로 예악을 손질하고 인륜(人倫)을 정해 백성을 교화하려 하니 괜히 일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 당신은 인의(仁義)의 구분에 대해 탐구하고 같고 다름의 구별을 살펴보았으며 동정(動靜)의 변화를 연구했고, 물건을 주고받을 때의 예절을 익혔으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다스리고, 기뻐하고 화내는 감정을 알맞게 조절했고. 때문에 그런 어리석음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오. 삼사 선생의 몸을 닦고 신중히 그 참됨을 지켜 남에게 돌려준다면 얽매이는 바가 없을 것이오. 지금 자신을 수양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면 그 역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소?”
어부의 이 말은, 직책도 책임도 권한도 없으면서 헛되이 마음을 쓰며 예악으로 사회 질서를 규범화하고 윤리로 백성을 교화하려 하니 어찌 참견이 심한 것이 아니겠냐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부는 이렇게 할 때 발생하는 ‘여덟 가지 나쁜 습관(八疵)’과 ‘네 가지 병폐(四患)’를 상세히 열거하며, 이것이 “밖으로는 남을 어지럽히고 안으로는 몸을 상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어부는 공자를 비판하며, 인의의 관계를 밝히고 동정의 변화를 살피는 등 애를 쓰지만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만약 “삼가 몸을 닦고 신중히 그 참됨을 지키며(謹修而身, 慎守其真)” 남에게 은혜를 베푼다면 연루될 것이 없을 것인데, 지금 당신은 심신을 수양하지 않고 도리어 다른 사람을 위해 규칙을 세우려 하니 너무 분수에 넘친다는 것이다.
공자는 안색이 엄숙해지고 두려워하며 물었다.
“청컨대 무엇을 참됨(眞)이라 합니까?”
어부가 대답하기를 “참됨이란 정성과 지극함이 이르는 곳이오. …… 참됨이 안에 있으면 신령함이 밖으로 움직이니, 이것이 참됨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오. 그것이 인륜의 이치에 쓰일 때 어버이를 섬기면 자애롭고 효성스러우며 군주를 섬기면 충성스럽고 곧게 되어. …… 예(禮)라는 것은 세속이 만드는 것이요, 참됨(眞)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니 자연스러워 바꿀 수 없는 것이오. 그러므로 성인은 하늘을 본받고 참됨을 귀하게 여기며 세속에 구애받지 않소. 어리석은 자는 이와 반대로 하늘을 본받지 못하고 사람의 일을 근심하며, 참됨을 귀하게 여길 줄 몰라 번잡하게 세속의 변화를 받아들이니 만족함이 없소. 안타깝구려, 당신이 너무 일찍 인위(人偽)에 빠져 대도(大道)를 너무 늦게 들은 것이!”라고 했다.
이는 참된 성품이란 천연적인 것이라 자연히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성인은 자연을 본받아 진실함을 소중히 여기며 세속의 구속을 받지 않으나, 어리석은 자는 인사(人事)에 골몰하여 본성의 소중함을 모르고 세속에 휩쓸린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공자가 어부에게 도를 배우기를 청했으나, 어부는 “함께 갈 수 있는 자와는 묘한 도(道)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겠지만, 함께 할 수 없는 자는 그 도를 알지 못하니 신중히 하여 함께 하지 않아야 몸에 허물이 없을 것이오. 선생은 노력하시오, 나는 이제 가겠소!”라고 말한 뒤 배를 저어 갈대 우거진 물결 사이로 멀어져 갔다.
즉 공자는 “그 도를 알지 못하며” 동행할 사람이 아니니 알아서 잘하라는 뜻이다.
장자 《어부》 편의 논술에서 볼 수 있듯이, 장자가 말하는 ‘참됨’의 기점은 “삼가 몸을 닦고 신중히 그 참됨을 지키는 것”이며 “하늘을 본받고 참됨을 귀하게 여기며 세속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즉 내면의 참됨을 귀하게 여겨 흔들리지 않고, 밖으로 움직일 때는 인륜의 상례를 따르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동시에 각종 ‘인위적인 거짓’의 폐단과 미혹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위적인 거짓’일까?
장자는 공자가 “백성을 교화하려 하는” 인의(仁義)가 바로 그것이라고 보았다. 왜 그러한가? 이는 반본귀진(返本歸眞)하려는 수도(修道) 차원의 사람에게 있어 목표는 출세간(出世)이므로, 더 이상 세간의 교화하는 이치의 지도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덕경》 제38장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도를 잃은 뒤에 덕이 나타나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나타나고, 인을 잃은 뒤에 의가 나타나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나타난다. 무릇 예라는 것은 충성과 신의가 옅어진 것이니 혼란의 우두머리다”라고 했다.
이로써 인류 사회의 발전 과정은 점차 하락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인류는 하락 속에서 도(道)와 점점 멀어졌고, 도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내심은 아직 도덕의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하락하여 덕도 이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인(仁)이나 의(義)로 교화할 수 있었고, 인의마저 담박해졌을 때는 오직 예법(禮法)으로 외형을 구속하게 되었으니 이때가 바로 예악이 무너지는 화란(禍亂)의 시작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바로 인간 세상에서 하락 중인 인류에게 남겨준 전통적인 가치이며, 만민(萬民)을 교화하여 인류 도덕이 하락하는 속도를 늦춰 저지하는 것이다. 만약 출세간의 도를 깨닫지 못하는 대다수의 대중에게 촛불처럼 밝은 도덕적 마음의 인도와 강상윤리(綱常倫理 삼강오륜)의 행위 규범 구속이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섭고 혼란스러운 사회 상태겠는가.
공자 사상의 핵심은 본래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인에 의지하고, 예능에서 노닌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논어·술이》)”는 것으로, 그 가치의 지향점은 출세간의 도이지 세간의 경세치용이 아니다. 후대에 발전하고 형성된 유가 사상 체계나 신유학은 공자의 제자들과 유학자들이 서로 다른 경계에서 세운 이론과 변천, 편차의 산물이며, 명백히 공자가 처했던 경계와 심태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도달하지 못했다. 이는 장자의 《어부》에서 언급된 여러 가지 폐단의 표현과 같다. 공자 역시 같은 의미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을 멀리한다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중용》 제13장)”
《어부》는 또한 장자가 출세간의 도라는 경계에 서서 공자가 인간 세상에 나타난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장자보다 20여 세 어린 굴원(屈原)이 지은 《초사·어부》가 있는데, 이 두 편의 《어부》는 출세간과 입세간(入世)의 판이한 경계를 보여준다.
《초사·어부》에서 굴원은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 홀로 맑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 쫓겨났다”라고 했다.
이에 어부는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과 더불어 옮겨가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흐리다면 어찌 그 진흙탕을 휘저어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가?”라고 했다.
이곳의 어부는 굴원에게 “세상과 더불어 옮겨가고”, “풍속에 따라 둥글게 살며”, “그 풍속을 따르라”고 권한다. 이는 그 속에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가치 지향이 결여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5천 년 인류 문명사의 마지막, 즉 말법(末法) 말겁(末劫)의 시기에 인류 사회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각 생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의 양심에 비추어 선악의 가치 선택이라는 답안지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로써 각 생명의 미래 향방, 즉 생존과 훼멸, 광명과 어둠이 결정되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0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