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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인황(聖祖仁皇)——강희대제 전기 7

【강희대제】 훌륭한 장수를 중용해 대만 수복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대만 평정은 강희제의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와 선견지명의 큰 지혜를 다시금 드러냈다. 사진은 강옹건 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강희 20년, 강희제는 8년의 시간을 들여 삼번(三藩)의 할거라는 내환(內患)을 깨끗이 해결했다. 밤낮으로 그의 마음속에 걸려 있던 세 가지 큰 일인 삼번, 하무(河務), 조운(漕運) 중 마침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완수한 것이다.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강희제는 횃불 같은 눈빛을 대륙 밖 동남해의 섬 대만으로 고정했다.

삼번을 폐지함으로써 청 왕조의 지방 건제는 통일된 계획을 얻게 되었고, 관리들의 정치를 투명하게 하고 경제를 회복하며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대청 왕조는 진정한 대일통(大一統)은 실현하지 못했으니, 대만을 통치하던 ‘명정(明鄭)’ 정권이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명조가 멸망 후 강남 지역에 건립된 남명 조정은 항청(抗淸)의 주요 역량이 되었다. 융무제(隆武帝 남명 2대 황제) 시기에 명성이 자자한 대장군 정성공(鄭成功)이 나타났는데, 남명 황제로부터 주(朱)씨 성을 하사받고 연평군왕(延平郡王)에 봉해졌기에 세상에서는 ‘국성야(國姓爺)’ 또는 ‘정연평(鄭延平)’이라 불렀다.

순치 2년(1645년), 정성공의 부친 정지룡(鄭芝龍)이 청에 투항하자 그는 부친의 옛 부하들을 이끌고 동남 연해에서 항청 사업을 계속했다. 순치 18년(1661년)에 이르러 전쟁이 순조롭지 않자 정성공은 대만으로 물러나 수비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정성공은 네덜란드 주둔군을 몰아내고 대만을 통치하며 일대(一代)의 영웅이 되었다.

이후 정씨 일가는 줄곧 명조 회복을 사명으로 삼아 해상에 고립된 항청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영력제(永曆帝)와 정성공이 세상을 떠나고 정성공의 아들 정경(鄭經)이 즉위한 후 ‘대만 정씨’ 집단은 사실상 한 지방을 할거하는 우환이 되어 청 조정과 20여 년간 대치했다.

선례후병(先禮後兵)

“나중에 삼번의 난이 평정되고 국가에 오직 정씨만이 대만에 똬리를 틀고 복건 일대에 해를 끼치고 있다. 정씨를 제거하려면 그대 시랑(施琅)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강희제

청 건륭 시기의 《평정대만전도(平定台灣戰圖)》. (공유 영역)

강희제 즉위 초기 청 조정의 정씨에 대한 태도는 초무(招撫) 위주였으며 전후로 총 일곱 차례의 협상을 진행했다. 강희제가 친정하기 전후를 막론하고 청 조정은 정경에게 지극한 성의와 예우를 보였다. 그러나 정경은 상륙하지 않고 변발과 복제를 바꾸지 않겠다는 요구에서 시작해 땅을 떼어주고 군자금을 달라는 등 갈수록 기고만장해졌다. 그리하여 근 20년 동안 협상은 줄곧 교착 상태에 머물렀다.

강희 원년(1662년) 5월, 정성공의 별세와 정경 숙질간의 내홍을 틈타 청 조정은 사신을 보내 정경과 첫 번째 협상을 했다. 정경은 내외의 곤경을 피하고자 거짓으로 사신과 주선하며 남명 황제가 하사한 칙서와 인장, 그리고 군민 토지 대장을 넘겨주어 조정의 신임을 얻었다. 불과 1년 후 내란이 평정되자 정경은 곧바로 말을 바꿔 조선, 유구(琉球 오키나와)의 예를 본떠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바치되 “상륙하지 않고 변발을 하지 않으며 의관을 바꾸지 않겠다”[1]고 요구하며 귀순을 거절했다.

강희 2년 10월, 청 조정은 네덜란드 연합군과 함께 하문, 금문에 있는 정씨의 거점을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 두 번째 초무를 했다. 정경은 여전히 번속국의 대우를 고집하며 “만약 변발하고 상륙하라고 한다면 죽을지언정 허락하지 않겠다”[2]고 공언했다. 이에 청 조정은 연해에 남은 정씨의 마지막 거점인 하문을 격파했고 정경은 대만으로 도망쳤다.

세 번째 화의는 강희 6년(1667년)에 일어났다. 이보다 앞서 청군은 승세를 타고 추격하려 했으나 뜻밖에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부득이 군대를 돌렸다. 이것이 청 조정의 첫 번째 대만 진군이었으며 당시 장군은 시랑(施琅)이었다. 삼번이 제거되지 않았기에 청 조정은 바다에 군사를 쓸 여력이 없어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 협상했다. 정경이 ‘조선의 예’를 고집하여 화친은 다시 실패했다.

강희 7년, 시랑은 강희제에게 비밀리에 상소를 올려 가급적 빨리 정경을 토벌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방략은 “정씨 군대의 병력이 단출하고 주장이 혼용(昏庸)하여 무능하니, 먼저 팽호(澎湖)를 취해 그 목구멍을 억누르면 정씨 군대는 즉시 위급해질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해상의 우세를 믿고 굳게 지킨다면 남북 두 길로 기습 부대를 나누어 항구를 습격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시랑은 이 전투에 자신감이 넘쳐 “대만은 날을 세며 기다리면 평정될 수 있다”[3]고 여겼다. 그러나 조정 내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관리들이 시랑의 건의를 사장시켰고 시랑 본인도 내대신(內大臣)으로 전임되어 경성에 머물게 되었다.

네 번째 초무는 강희제가 대권을 장악한 후 직접 주재했다. 강희제는 정경이 대만을 지키는 것을 허용하며 최대의 양보를 했다. 하지만 정경은 본국인(本國人)이니 번속국의 체제에 따라 귀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정경이 자기 의견을 고집했기에 협상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삼번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정경도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강희 16년(1677년), 청 조정은 다섯 번째 초무를 진행했다. 정경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또다시 땅을 떼어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고 다시 흐지부지되었다.

강희 17년, 강희제는 사신에게 유지를 내려 “정경이 비록 투항할 성의가 없으나 그 수하의 관병과 백성 중 귀순하려는 자가 있다면 여전히 융통성 있게 대응하여 수시로 초무해야 한다”[4]고 했다. 여섯 번째 초무는 복건총독 요계성(姚啟聖)이 주재했다. 정경은 여전히 이전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초무를 거부했다. 그러나 요계성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투항한 장수들을 널리 받아들이고 고관대작의 후한 대우를 해주어 많은 정씨 군대의 옹립을 받았다.

강희 18년, 삼번의 난이 거의 평정되자 강희제는 정경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일곱 번째 화의에서도 정경은 여전히 유구, 조선의 예에 따라 신하를 칭하겠다고 요구했다. 강희제는 역시 단호히 거부했다. “대만의 정씨 군대는 모두 복건 사람인데 유구, 조선 등 국가와 나란히 논할 수 없다.”[5] 정경이 투항할 성의가 없음을 본 강희제는 선례후병으로 대만에 군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때 조정에서 13년간 한직에 있던 시랑이 강희제의 파격적인 발탁을 받아 정씨를 토벌하고 대만을 평정할 주장이 되었다.

노익장

“시랑 장군은 해도의 지형과 인사에 정통하니 모든 일을 반드시 그와 상의해야 한다.” ——강희제

강희제는 시기를 파악하여 군대를 대만으로 휘몰았다. 그는 총독 요계성, 순무 오흥조(吳興祚) 등을 파견하여 기회를 보아 행동하게 하고 팽호와 대만을 취할 준비를 했다. 사진은 청조 정관붕(丁觀鵬) 등 5인이 그린 《평정준부회부득승도(平定准部回部得勝圖)》 중 ‘평정회부헌포(平定回部獻俘)’. (공유 영역)

시랑이라는 인물은 일찍이 정지룡의 대장이었으며 먼저 정지룡을 따라 청에 투항했다가 다시 정성공에게 투항해 항청했다. 당시 그는 젊은 나이에 병법에 통달했으나 성격이 다소 오만하고 곧아 정성공의 눈에 어긋났고, 그로 인해 부친, 동생, 아들, 조카를 포함한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시랑과 대만의 정씨 집단은 피 맺힌 원한을 맺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시 청에 투항하여 복건 수사제독(水師提督)이 되었다.

이후 시랑은 대만 문제에 있어 주전파(主戰派)가 되었다. 시랑은 수전에 능하고 정씨 군대의 내부 사정에 밝으며 대만을 수복해 복수하려는 뜻이 굳건했기에 정씨를 토벌할 최적의 인물이었다. 세 번째 정경 초무가 실패한 후 시랑은 전후로 《변환의정소(邊患宜靖疏)》, 《진진소견소(盡陳所見疏)》를 올려 대만이 복건 연해 일대에 미치는 중요한 영향을 역설하며 정씨를 계속 공격할 것을 청했다.

시랑이 황제의 부름을 받아 입경하여 황제에게 방략을 상세히 설명했으나 그는 바다에서 투항한 장수로서 조정의 신임을 받지 못해 병권을 박탈당했다. 또한 수사제독 직책도 폐지되고 전함도 모두 불태워 조정이 남쪽을 돌아볼 뜻이 없음을 보였다. 한직에 머무는 동안 시랑은 정사(政事)의 여가에 전조(前朝)의 사서들을 두루 섭렵하며 고금 성패의 교훈을 고찰하고 선현 명신들의 언행과 사적을 배워 자신의 재덕(才德)을 닦았다. 동시에 그는 대만이 평정되지 않으면 변방의 근심이 하루도 제거되지 않음을 알았기에 궁곤할수록 더욱 굳세게 행동하고 앉으나 서나 단 하루도 복수의 뜻을 잊지 않았다.[6]

강희 20년(1681년)이 되자 강희제는 요계성 등으로부터 정씨 집단 내부에 중대한 변고가 발생했다는 밀보를 받았다. 정경이 그해 정월에 병사하고 대장 풍석범(馮錫範) 등이 정변을 일으켜 정경의 장남을 목 졸라 죽이고 12세 된 차남 정극상(鄭克塽)을 옹립했다는 것이다.

군왕이 어리니 내부에서 반드시 난이 생길 것이며 지금이야말로 출병의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삼번이 폐지되어 국내가 안정되었기에 강희제는 시기를 파악해 대만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총독 요계성, 순무 오흥조 등을 파견해 기회를 보아 팽호와 대만을 취할 준비를 하게 했으며 그들에게 “초무와 토벌을 병용하여 해안 경계를 안정시키라”고 당부했다.[7]

이어 요계성과 내각학사 이광지(李光地)는 시랑을 다시 기용할 것을 강력히 추천했다. 당시 조정에는 여전히 대만 공격을 반대하고 시랑 중용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강희제는 중론을 물리치고 시랑을 다시 수사제독으로 임명하고 태자소보(太子少保)를 가봉하여 영예를 보여주었다. 시랑은 예순이 넘었으나 복수와 보국의 뜻은 반석처럼 견고하여 백발이 되도록 변치 않았고, 조정 신료들의 의구심에 맞서 청군이 정씨를 공격할 때의 우세와 자신의 필승 신념을 강개하게 진술했다. 강희제도 깊이 감동하여 시랑을 각별히 신임했다.

전선에서 요계성은 훈련이 잘 되고 용맹한 수사를 조직했으며 정씨 군대를 복건, 광동 지역에서 몰아냈다. 선견지명이 있던 시랑은 부임 전 강희제에게 시위 한 명을 수행하게 해달라고 특별히 요청하여 전선과 경성 사이에서 즉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게 했다. 강희 20년 10월 시랑은 복건 하문(廈門)에 도착했다.

작전 전 시랑과 요계성은 모두 군대를 부리는 큰 권한을 쥐고 있었는데 관리들 사이에 서로 제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시랑은 강희제에게 전정(專征) 대권을 부여해달라고 대담하게 요청했으나 당시에는 승인받지 못했다. 다음으로 시랑과 요계성 두 사람은 과연 작전 계획을 두고 이견을 보였는데 한 명은 남풍의 기세를 빌려 팽호도를 치자고 주장했고 한 명은 북풍에 의지해 대만과 팽호를 동시에 공격하자고 주장하여 대군이 좀처럼 출발하지 못했다.

22년 3월과 7월 시랑은 연이어 두 차례 상소를 올려 간곡하게 독자적으로 작전을 지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강희제는 신중히 고려한 후 시랑에게 최대의 신뢰를 주어 정씨 출정의 일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겼다.

팽호 대전

“신은 올해 예순둘이나 기혈이 쇠하지 않아 아직 국가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신에게 기회를 주어 정씨를 멸하게 하지 않으시고 몇 년이 더 지나면 신은 늙어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니 때가 나를 기다려주지 않음을 깊이 두려워하며 이번 출정에서 반드시 적군을 평정하겠습니다.” ——시랑

그림은 청 무명 작가의 《마조(媽祖)기적》 시리즈. (공유 영역)

정씨 측은 강희 20년 9월에 팽호에 중병을 주둔시키고 엄정히 대비했는데 진을 치고 있는 주장은 유국헌(劉國軒)이었다. 정씨 군대는 팽호에서 지리적 우세가 컸는데 배가 상륙하기 가장 쉬운 낭마궁(娘媽宮)에 주둔하며 겹겹이 방어 조치를 설치했다. 해협 저편의 시랑도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며 배가 견고하고 대포가 예리한 반란 진압 수사를 만드는 데 박차를 가했다.

강희 22년 6월 14일, 2만여 명의 청군과 200여 척의 전함이 동산에서 출발하여 팔조도(八罩島)에 모여 정씨 군대를 호시탐탐 노렸다. 16일 새벽, 해풍이 크고 작은 전함들을 밀어내고 징소리와 북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는 가운데 시랑은 당당한 청나라 수사를 이끌고 팽호도(澎湖島)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장수와 병사들의 용맹한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시랑은 크고 작은 전함의 돛에 장수의 이름을 써넣고 매 척의 작전 상황을 고찰하여 상벌의 근거로 삼았다. 처음에는 전투가 매우 처참했다. 시랑의 선봉 부대는 장수 남리(藍理)를 필두로 한 단 7척의 전함으로 정씨 군대로 돌입했다. 이때 바다에 조수가 밀려와 선봉 부대는 급류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졌고 정씨 군대는 양 날개로 반격을 가했다.

시랑은 형세가 불리함을 보고 직접 포위망 속으로 들어가 남리를 구출했다. 격전 중에 남리는 포화에 중상을 입어 배가 터지고 창자가 흘러나왔으나 상처를 간단히 싸맨 후 계속해서 적을 죽이라 외치며 추호도 물러서지 않았다.[8] 시랑도 오른쪽 눈에 화살을 맞아 다쳤다. 다행히 원군이 제때 도착하여 두 사람은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날 밤 시랑은 여전히 팔조도에 주둔하며 휴식을 취했다.

18일 시랑은 갑옷으로 머리를 감싸고 제장들을 소집하여 법에 따라 상벌을 진행했다. 그는 중상을 입은 남리와 원군에게 큰 상을 내리고 전투 중에 움츠러든 장수들을 처단하려 했으나 그들이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자 죄를 씻고 공을 세울 기회를 주었다. 시랑은 작전 계획도 다시 배치했다. 청군의 사기는 다시 진작되었고 곧 호정서(虎井嶼 서는 작은 섬을 말함)를 점령했다.

19일 섬 안에 담수가 부족해지자 시랑은 홀로 배를 몰고 순시하며 수원지를 찾았다. 한참 고찰한 후 그는 장수들에게 우물을 파게 했는데 뜻밖에도 달콤한 샘물이 솟아나왔다. 22일 시랑은 출전에 앞서 맹세를 하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그는 대군을 8대로 나누어 출격시켰는데 각 대마다 7척씩이었고 스스로 한 대를 통솔해 직접 조율했으며 80여 척의 전함을 후원으로 남겨두었다.

출정 전 바다에 갑자기 차가운 북서풍이 불어와 처음 시랑이 남풍을 타고 팽호도를 치려던 계획이 어긋났다. 시작이 불리하자 장수들은 모두 전전긍긍하며 두 다리를 떨 정도로 겁을 먹었다. 시랑은 하늘을 향해 충성스럽게 기도했다. “하늘의 신령님과 황상께서 보우하시어 우리 군대가 순조롭게 적을 이기게 도와주소서!”[9]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풍향이 반전되었고 대군은 신적(神跡)을 직접 목격하고 크게 고무되었다.

구체적인 작전 방식에 있어 시랑은 양군의 실력에 근거해 다수로 소수를 치는 ‘오점매화진(五點梅花陣)’을 채택했는데 즉 전함 5척이 한 대를 이루어 적군의 전함 1척을 집중 공격하는 것이었다. 천시(天時)와 진법(陣法)의 도움이 더해지자 청군은 바다에서 큰 위력을 떨쳤다. 장수와 병사들은 더욱 용맹하게 적을 살상하며 새벽부터 오후까지 쉴 새 없이 격전을 벌였고 바닷물은 피로 물들었다. 결국 정씨 군대는 전면 붕괴되었고 유국헌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작은 배를 타고 대만으로 패주하니 팽호가 평정되었다.

대전이 끝난 후 시랑은 개인적인 원한을 내려놓고 정씨를 계속 추격해 몰살하지 않았으며 강희제의 유지를 받들어 민심을 안무하는 데 주력했다. 몇 차례의 협상 끝에 정극상은 7월 15일에 투항했고 8월 18일에 변발하고 의복을 바꾸니 정씨 정권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시랑은 승전 후 직접 정성공의 종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며 자신이 대만을 정벌한 것은 “조정에 충성하고 부형의 원수를 갚는” 직책에서 나온 것임을 눈물을 흘리며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정씨에 대해 비록 원수가 되었으나 군신의 은의를 잊지 않았기에 정씨 일가를 단 한 명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현지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감개무량하여 말했다. “똑같이 부친의 원수를 갚는 것이나 시랑의 방식은 오자서보다 훨씬 현명하구나.”[10]

오자서는 춘추 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초나라 국왕이 오자서의 부친과 형제를 죽이자 오자서가 천신만고 끝에 초나라를 멸망시켜 복수하고 마지막에는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에 300번 매질을 하고서야 그만두었다. 그러니 시랑이 정씨에게 보여준 태도와 흉금은 매우 감동적인 것이었다.

대만 처리 논쟁

“신의 생각으로는 대만을 포기하면 큰 화가 빚어질 것이며 대만을 지켜야만 변방이 영원히 견고해질 것입니다.” ——시랑

강희제는 시랑을 중용해 대만을 평정했는데 이는 현명한 결정일 뿐만 아니라 신명(神明)의 보우를 받은 정의의 전쟁이었다. 그림은 청 무명 작가의 《마조기적》 시리즈. (공유 영역)

강희 22년(1683년) 6월 22일 천비궁(天妃宮)에 향을 피우러 간 사람들은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천비(天妃)의 옷자락이 흠뻑 젖어 있었고 좌우 두 호법신장의 손에도 물집이 잡혀 있었다. 이 일은 널리 퍼져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런데 바다에서는 바로 시랑이 이끄는 청군이 팽호 대결전을 벌이던 시각이었다. 장수와 병사들도 전투 중에 천비가 마치 하늘 위에서 그들을 보살피는 것을 직접 보았고 이에 모두 정신이 떨쳐 일어나 용맹하게 적을 죽였다.

시랑의 대승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것은 천비 낭랑이 여러 신선을 거느리고 바다에서 신통력을 발휘하여 청군이 승전하도록 보우하신 것임을![11] 천비 낭랑은 바로 마조(媽祖)로 중국 동남 연해 일대에서 신봉하는 신령이며 바다의 보호신으로 여겨진다.

마조의 보우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시랑의 군대가 주둔한 팔조도와 호정서는 원래 담수 자원이 부족했으나 시랑이 매번 조수가 빠질 때 우물을 파면 불과 한 자 남짓에서 달콤한 담수가 솟아나 군대의 보급을 보장했다. 그런데 시랑의 대군이 대만에 진주한 후에는 그곳의 수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팽호를 함락시키기 전 한 관리가 마조가 현성(顯聖)해 그에게 말하는 꿈을 꾸었다. “너희는 21일에 반드시 팽호를 얻을 것이며 7월이면 대만을 평정할 수 있다.”[12] 원래 강희제가 시랑을 중용해 대만을 평정한 것은 영명한 결책일 뿐만 아니라 신령의 보우를 받은 정의의 전쟁이었다.

대만 평정의 승전보가 경성에 전해지자 강희제는 크게 기뻐하며 공을 논해 상을 내릴 때 시랑을 정해장군(靖海將軍)으로 삼고 정해후(靖海侯)에 봉하며 세습하게 했다. 그 부하들에게는 일반적인 포상 기초 위에 장수는 한 등급 가봉하고 병졸은 다시 한번 포상하여 해전 대승에 대한 특별한 포상을 했다.

다음으로는 대만에 대한 정책 문제였다. 조정 신료들의 대만에 대한 태도는 두 파로 나뉘었는데 한 파는 대만이 바다 멀리 고립되어 도적이 생기기 쉬우니 현지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통치를 포기해야 한다고 여겼다. 시랑은 대만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표명하며 강희 23년(1685년) 말에 《공진대만기류소(恭陳台灣棄留疏)》를 올려 대만의 중요한 전략적 지위와 포기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악영향을 역설했다.

시랑은 대만의 항로가 멀리 돌아가고 지세가 험요하며 또한 ‘배들이 사방으로 통하는’ 특수한 장점을 지니고 있어 강소, 절강, 복건, 광동 4개 성의 문호이자 병풍이라고 여겼다. 또한 현지 인구가 조밀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물산이 풍성하여 매우 풍요롭고 번영한 곳이었다. 세계적인 격국으로 볼 때 대만을 포기하면 반드시 야심만만한 네덜란드인에게 점령당할 것이니 청나라 해안 경계의 안정에 이롭지 않았다.

강희제는 이를 매우 옳게 여겨 군신들을 소집해 대만에 건제(建制)를 세우는 사안을 상의했다. 정씨가 경영하던 기초 위에 강희제는 대만에 1부 3현 즉 대만부(台灣府), 봉산현(鳳山縣), 제라현(諸羅縣) 및 대만현을 설치하고 팽호도에는 순검사(巡檢使)를 설치했다. 이로써 대만은 청조의 판도에 편입되었으며 이는 사람을 알아보는 강희제의 지혜와 선견지명의 큰 지혜를 다시금 드러낸 것이다.

주석:

[1] 《성무기》 권7: 〈강희감정대만기〉.

[2] 《대만외기》 권11.

[3] 《청사고》 권260: 〈시랑전〉.

[4] 《강희조실록》 권70: 강희 17년 정월 경진 조.

[5] 《강희조실록》 권108: 강희 22년 5월 갑자 조.

[6] 《정해기사》 중 〈양장공전〉: 일찍이 조퇴 후 한가할 때 역대 21사를 훑어보며 고금의 성패 및 명신들의 본받을 만한 언행을 하나하나 가슴속에 새겼다. 《증서》: 공이 이미 숙위에 머물면서 정씨의 소굴을 치지 않으면 결국 변방의 화가 될 것임을 미리 알고 자나 깨나 단 하루도 적을 섬멸할 뜻을 잊지 않았다.

[7] 《강희조실록》 권95: 강희 20년 6월 무자 조.

[8] 《청사고》 권261: 〈남리전〉.

[9][10] 《대만통사》 권30: 〈시랑열전〉.

[11][12] 《천비현성록》: 〈팽호신조득첩〉, 〈역조포봉치제조고〉.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6/n1213831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