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
【정견망】
《사기·관안열전》에 따르면 “안평중 영(晏平仲 嬰)은 내(萊)의 이유(夷維) 사람이다. 제나라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을 섬겼으며, 아껴 쓰고 힘써 실행해 제나라에서 중시되었다. 제나라의 상국(相國)이 된 후에도 밥상에 고기 반찬을 두 가지 이상 놓지 못하게 하고, 첩에게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그가 조정에 있을 때 군주가 물으면 바르고 신중하게 대답했고, 묻지 않으면 조신하게 행동했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명령에 순응했지만, 도가 없으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로써 삼대에 걸쳐 제후들 사이에 이름을 떨쳤다.”
안영의 아버지 안약(晏弱)은 송 목공(穆公)의 증손자로, 송나라의 내란 때문에 제나라로 와서 상대부(上大夫)를 지냈으며 내(萊) 땅을 봉토로 하사받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안영은 키가 작고 용모가 보잘것없었으나 기민하고 변론에 뛰어났다고 한다.
영공 26년(기원전 556년), 안약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안영이 상대부 직을 계승했다. 영공, 장공, 경공의 3대에 걸쳐 50여 년간 보좌했다. ‘최경(崔慶)의 난’ 이후에야 비로소 중용되어 상국을 맡아 제 경공을 보좌했으며, 제나라를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안정적으로 발전하게 이끌었다.
안영은 평소 생활이 검소했고 아랫사람들에게 겸손했다. 안으로는 국정을 보좌하며 제나라 군주에게 누차 간언했다. 안자는 관중 이후 제나라의 또 다른 현상(賢相)으로 여겨지며, 그의 행적과 사상은 《안자춘추(晏子春秋)》라는 책에 집중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안자춘추》의 옛 제목은 ‘춘추시대 안영이 지음’으로 되어 있으나, 후대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제나라 직하(稷下)학파나 다른 후학들이 지은 것으로 보며, 성서 연대는 대략 전국시대로 추정한다. 유종원은 〈변안자춘추(辯晏子春秋)〉라는 글에서 묵자(墨子)의 문도 중 제나라 사람이 쓴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나는 묵자의 무리 중 제나라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묵가는 검소함을 좋아하고 안자는 검소함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기에, 묵자의 무리가 그 일을 높여 기록함으로써 자기 학술의 위상을 높이려 한 것이다.”
묵가는 절검(節儉)을 숭상하는데 안자가 절검으로 유명했기에, 묵자의 문도들이 안자의 사적을 존숭하고 기록하여 묵가 학설을 드높였으며, 또한 “공자를 비판했다.”
안자가 활동한 춘추 말기는 공자가 말한 ‘예악이 붕괴’하는 격동기였다. 한편으로는 주나라의 도(道)가 쇠락하여 제후들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전쟁이 빈번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제후국 내 대부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참월(僭越)하며 정치를 어지럽혔다. 제나라는 관중이 죽은 뒤 제 환공이 만년에 어리석어졌고, 그의 다섯 아들이 보위를 다투며 서로 죽이는 바람에 내란과 장기간의 불안정한 정국이 이어졌다. 안자가 차례로 보좌한 제 영공, 장공, 경공 역시 대체로 어둡고 나약한 군주들이었다.
안자의 민본 사상은 진나라 상대부 숙향(叔向)과의 문답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숙향이 물었다.
“세상이 혼란하여 바른 도를 따르지 않을 때, 도를 올바르게 행하면서 백성을 버려야 합니까, 아니면 백성을 보호하면서 도를 버려야 합니까? 이 두 가지 방법이 도를 행함에 있어 어떠합니까?”
안자가 대답했다.
“영(嬰)이 듣기로, 지위는 낮아도 존엄을 잃지 않고, 자신을 굽히더라도 정직함을 잃지 않는 자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진실로 백성을 붙들고 있다면 어찌 빠뜨린 도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백성을 버린다면 어찌 바른 행실이 있겠습니까?”
안자의 말은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한다면 대도(大道)가 누락될 리 없으며, 백성이 없다면 군주의 바른 도(道)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외에 《안자춘추·내편문하(內篇問下)》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숙향이 안자에게 물었다.
“뜻(意 역주: 德의 오자로 보기도 한다)은 무엇이 높고, 행실(行)은 무엇이 두터운 것입니까?”
안자가 대답했다.
“뜻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愛民)보다 높은 것이 없고, 행실은 백성을 즐겁게 하는 것(樂民)보다 두터운 것이 없습니다.”
숙향이 또 물었다.
“뜻은 무엇이 낮고, 행실은 무엇이 천한 것입니까?”
안자가 대답했다.
“뜻은 백성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보다 낮은 것이 없고, 행실은 백성을 해치는 것[1]보다 천한 것이 없습니다.”
유향은 〈안자서록(晏子敘錄)〉에서 “안자는 박학다식하고 고금에 통달하여 제나라 영공, 장공, 경공을 섬기며 절검하고 힘써 행했다. 충성을 다해 극간(極諫)함으로써 제나라를 인도하니 군주는 행실을 바로잡을 수 있었고 백성은 친히 따르게 되었다. …… 그의 책 6편은 모두 군주에게 충성스럽게 간언한 내용이다. 문장이 볼만하고 의리가 법도로 삼을 만하니 모두 육경(六經)의 뜻에 부합한다”라고 했다.
안영의 뛰어난 간언은 칭송을 받는데, 다른 간신(諫臣)들과 다른 점은 군왕에게 권고할 때 대개 직접적으로 뜻을 강요하는 강간(強諫)보다는 완곡한 곡간(曲諫)과 차근차근 이끄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그의 기지가 잘 드러난다.
《좌전·소공(昭公) 3년》에 진나라 대부 숙향이 안자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공실(公室)조차 이제 말세입니다. 군마는 병거를 끌지 않고 경(卿)은 군대를 이끌지 않습니다. 공실의 수레에는 장수가 없고 군대에는 관장(官長)이 부족합니다. 백성들은 곤궁하고 지쳐 있는데 궁실은 더욱 사치스럽습니다. 길가에는 굶어 죽은 사람이 줄을 잇는데 군주의 총신들 집에는 재물이 넘쳐납니다. 백성들은 국군의 명령을 들으면 마치 원수를 피하듯 도망칩니다. …… 정사가 사가(私家)에서 나오니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군주는 단 하루도 뉘우칠 생각을 하지 않고 과도한 즐거움으로 근심을 대신합니다. 공실의 쇠락이 얼마나 더 남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춘추 말기 난세의 상태였으며, 안자가 처한 제나라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좌전·소공 3년》 기록에 따르면, 경공이 안자를 위해 새로 저택을 지어주려 하며 말했다.
“경의 집이 시장과 가까워 습하고 좁으며 시끄럽고 먼지가 많아 살 곳이 못 되니, 내 경을 위해 높고 밝은 집을 짓게 해주겠소.”
안자가 사양하며 말했다.
“임금님의 선신(先臣)께서 이곳에 사셨습니다. 소신이 조상의 덕을 잇지 못하면서 이곳에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과분합니다. 또한 시장 가까이 살면 아침저녁으로 필요한 물건을 언제든 구할 수 있으니 이는 소신이 얻는 이점입니다. 어찌 감히 이웃들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경공이 웃으며 물었다.
“시장에 가까이 사니 물건의 귀천을 아시오?”
안자가 답했다.
“편리함을 느끼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경공이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하오?”라고 물었다.
이때 경공이 형벌을 남용하고 있어 시장에 의족을 파는 이들이 많았기에 안자가 대답했다.
“의족은 귀하고 신발은 천합니다.”
경공은 이 말을 듣고 형벌을 줄였다. 안자의 말 한마디가 제나라 군주의 형벌을 줄이게 한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군자가 만약 복(祉)이 있다면 화란이 속히 멈추리라(君子如祉, 亂庶遄已)” 한 것과 같다.
안자가 진(晉)나라에 간 사이 제 경공이 그를 위해 새 저택을 지어 놓았는데, 귀국하니 집이 이미 완공되어 있었다. 안자는 경공에게 감사의 절을 한 뒤 새집을 헐어버리고 이웃들의 집을 다시 지어 모두 원래대로 복구해주었다. 그리고 원래의 이웃들을 돌아오게 하며 말했다.
“속담에 ‘집을 지으려 점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점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원래 이웃을 선택하기 위해 점을 쳤는데, 점괘의 결과를 어기는 것은 불길한 일입니다. 군자는 예에 맞지 않는 일을 범하지 않고, 소인은 불길한 일을 범하지 않는 것이 예로부터의 제도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것을 어기겠습니까!”
결국 자신의 옛집 규모로 회복시켰는데, 제 경공이 허락하지 않자 안자가 진환자(陳桓子)를 통해 청탁하여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소식이 “어질도다 안평중이여, 임금을 섬김에 사사로움이 없구나(〈화도영삼량(和陶詠三良)〉)”라고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공자와 안자는 동시대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안자가 약간 앞선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서거했으나 안자의 생몰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사기·공자세가》 기록에 따르면 공자 나이 35세 때 계평자의 난으로 제나라에 갔는데, 고증에 의하면 이때 안자의 나이는 이미 70세가 넘었다고 한다.
《한비자·내저설하》에는 “중니(仲尼 공자)가 노나라에서 정치를 하니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고(道不拾遺), 제 경공이 이를 근심했다”라고 했다.
《안자춘추·외편하》에도 실려 있다. 공자가 노나라 상국이 되자 제 경공이 매우 걱정하며 안자에게 물었다.
“이웃 나라에 성인이 있는 것은 적대국에게는 근심거리요. 지금 공자가 노나라 상국이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안자가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노나라 군주는 나약한 군주이고 공자는 성명(聖明)한 재상입니다. 차라리 은밀히 공자를 존중하는 척하며 가짜로 제나라 상국(相國)에 임명하십시오. 공자가 극력 간언해도 노나라 임금이 듣지 않는다면 이는 반드시 노나라를 교만하게 만들어 제나라와 틈이 생기게 할 것이니, 그때 그를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1년 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향했으나 제 경공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훗날 자공이 초나라로 갔고 초 소왕이 군대를 보내 공자를 맞이한 뒤에야 포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공자가어·정론해(正論解)》에는 정나라 집정 자산(子産)의 ‘애민(愛民)’에 대한 공자의 평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공자 ‘애인(愛人)’ 사상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자유(子遊)가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자산의 은혜를 극찬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 은혜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愛民)에 있을 뿐이다.”
자유가 다시 물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덕교(德教)라 하는데 어찌 단지 은혜를 베푸는 것뿐이겠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자산은 마치 뭇 사람들의 어머니와 같아서 먹일 수는 있으나 가르치지는 못한다.”
자유가 “그 사례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하자 공자가 대답했다.
“자산이 자신이 타는 수레로 겨울에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니, 이는 사랑은 있으나 가르침(德教)은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자산이 수레로 사람들을 건네준 것은 단지 백성에게 혜택을 준 것일 뿐 덕으로써 교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로 보건대 진정한 ‘애인(愛人)’은 사람의 도덕을 승화시키고 선을 쌓고 덕을 행하도록 가르쳐서 복덕(福德)을 쌓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복분이 커지면 자연히 세상에서의 고난이 경감되거나 벗어나게 된다.
공자는 “임금이 맡은 바는 명분으로써 신의를 내고, 신의로써 기물을 지키며, 기물로써 예법을 담고, 예법으로써 의로움을 행하며, 의로움으로써 이로움을 생기게 하고, 이로움으로써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니, 정사의 큰 절개다.(《공자가어·정론해》).”라고 말했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정치를 펴며 덕교를 추진했기 때문에 제나라는 노나라가 강성해져 자신들에게 불리할까 봐 걱정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노나라가 공자를 등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도덕적 교화의 작용이 백성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국력을 드높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본받지 않고 도리어 타국의 발전을 저지하려 했을까? 여기서 안자의 ‘애민·낙민’은 단지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는 수준이며, 제나라와 그 백성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국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질고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널리 중생을 사랑하는(泛愛衆)’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다는 기점 위에 세워진 혜민(惠民)과 이익의 저울질이었던 것이다.
《안자춘추·내편간하(諫下)》에 실린 안자의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두 개의 복숭아로 세 용사를 죽임)’[2]라는 권모술수는 용사들의 마음속 양심과 수치심을 이용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일이다. 이 이야기는 진한(秦漢) 시대에 이미 널리 퍼져 한대 화상석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제갈량은 〈양보음(梁甫吟)〉에서 세 용사를 애도하며 “하루아침에 참소를 입어, 두 복숭아가 세 용사를 죽였네. 누가 이런 계책을 냈는가, 상국인 제나라 안자로다”라고 읊었다.
당대의 이백은 〈구참(懼讒)〉이라는 시에서 “두 복숭아로 세 용사를 죽였으니, 어찌 서리 같은 칼을 빌릴 필요가 있었으랴”라고 했다.
풍몽룡이 지은 《유세명언》에도 이 이야기를 다룬 장이 있다.
“하늘이 공자를 내지 않으셨다면, 만고의 시간이 긴 밤과 같았으리라!(《주자어류》 권93)”
사마천은 《사기·공자세가》에서 공자에 대한 경외심을 이렇게 적었다.
“태사공이 말하기를, 《시경》에 이르기를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고, 큰 길처럼 따라간다’고 했다. 비록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나 마음은 늘 그분을 향해 가고 있다.”
공자는 열국을 유랑하며 제후들을 설득하고 도덕을 강론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志於道, 據於德, 《논어·술어》)” 인선(仁善)과 중용 등 전통 가치 문화를 전파했다.
한유는 일찍이 “만약 옛적에 성인이 없었다면 인류는 멸망한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원도〉)”라고 했으며, 주자는 “요순(堯舜) 이하로 만약 공자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후대 사람들이 어디서 분명한 도리를 찾았겠는가?”라고 했다.
요컨대 안자는 춘추 말기 제나라를 다스린 현명한 재상이었으나, 인류의 도덕이 하락하는 난세 속에서 흐름을 따르거나 혹은 그 흐름을 부추기는 한계를 보였다. 그러나 그 역사적 시기에는 공자가 다져놓은 도덕적 교화뿐만 아니라 노자가 남긴 인류 반본귀진(返本歸眞)의 문화적 방향성도 존재했다. 결국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선도(善道)를 지키고 도덕을 승화시키는 것만이 인류의 복지이며 미래로 향하는 필연적인 길이다.
주석:
[1] 국학 대사(大師) 유사배(劉師培)는 보충 해석하기를, 이 단락의 네 군데 ‘의(意)’ 자는 모두 ‘덕(德)’ 자의 오기라고 했다. ‘덕’의 본자인 ‘悳’이 ‘意’와 모양이 비슷하여 잘못 전해진 것이다. 또한 “행실은 자신을 해치는 것보다 천한 것이 없다”에서 오칙우의 《안자춘추집석》에 따르면 ‘신(身, 자신)’은 ‘민(民, 백성)’의 오기이다.
[2] 춘추시대 제나라 상국 안영이 경공에게 계책을 올려 공손접, 전개강, 고야자 세 용사에게 복숭아 두 개를 내려 공을 논해 나누어 갖게 함으로써 후환을 없애기 위해 서로 죽이게 한 일이다. 결국 세 사람 모두 자살했다. 《안자춘추·내편·간하》에서 유래했으며, 이후 계책을 써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