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도
【정견망】
오늘날 대륙의 중국인들은 공부를 매우 중하게 여기며, 심지어 이를 후대의 운명을 바꾸는 유일한 길로 간주한다. 전자레인지와 전기밥솥을 수리하는 한 수리공은 “아이에게 반드시 공부를 시켜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이에게 좋은 독서 환경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아이의 공부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많이 베풀어도 자신은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첫째는 운명이요, 둘째는 운수며, 셋째는 풍수고, 넷째는 음공(陰功)이며, 다섯째가 공부다.”라는 구절이 있다. 공부는 다섯 번째에 위치한다. 옛사람들의 안목에는 전생에 덕을 쌓은 것이 먼저 있었기에 명중에 있어서 이번 생에 공부를 하든, 관직에 오르든, 장사를 하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덕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전생에 쌓은 덕이 먼저 없다면 이번 생에 교환할 덕이 없어 밥을 빌어먹으려 해도 얻지 못하며, 공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고난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의 안목에는 진정으로 후대를 복되게 하는 비결이 바로 선행을 하고 덕을 쌓는 것이었으며, 덕행이 일정 정도에 이르면 후세 자손이 언젠가는 발달할 때가 있게 된다.
1970년대에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사람들은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이 매우 단순했다. 어느 집에 좋은 일이 생기거나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거나 어느 집이 재물운이 터지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 집 조상이 덕을 쌓았다.”라고 말하며 질투하는 마음이 없었다. 어느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조상이 죄업을 지어 자손에게 미쳤다.”라며 눈 가득 동정을 품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도왔다.
불과 수십 년이 지나 오늘날 대륙 중국인들의 사상은 이미 변이되어 덕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지 못한다. 아이를 교육할 때 품행에서 착수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을 강조하고 교과서 지식을 배우며 각종 기능과 기교의 배양을 중시하니 본말을 전도한 것이다. 여기에 중공 당문화의 독해가 더해져 오늘날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고 반항 심리가 매우 강하며 모두 전통 관념과 상반되는 일만 한다. 자녀 교육은 온 사회가 머리 아파하는 문제가 되었다.
근본 원인은 전통문화의 결핍에 있으며, 중공 당문화의 독해 아래 갈수록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등지고 떠나기 때문이다. 가, 악, 투의 것을 많이 받아들일수록 아이들을 훈육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만약 학부모들이 관념을 바꾸어 자신부터 시작해 전통 가치관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선행을 하고 덕을 쌓아 모범이 되어 좋은 가풍을 전해 준다면 후세 자손들은 틀림없이 갈수록 좋아질 것이다.
수천 년 전의 옛사람들은 행동으로 우리에게 이러한 방면의 이야기를 많이 남겨 주었다. 필자는 전통문화 이야기 중에서 두 가지를 정리하여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도주 조상이 선행을 하고 덕을 쌓다
도주(陶澍)는 자가 자림(子霖)이며 청조 호남 안화(安化)현 사람이다. 빈한하고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가경(嘉慶) 5년 가을 시험에 향시에 합격하고 2년 후 진사가 되었으며, 한림원 서길사로 뽑혔고 관직이 양강(兩江)총독에 이르렀으며 태자태보(太子太保) 직함이 추증되었다.
도주가 이러한 성취를 이룬 것은 조상이 선행을 하고 덕을 쌓은 것과 관계가 있다.
도주의 태고조(太高祖 고조 이전 조상) 백함공(伯含公)은 선행을 하고 덕을 쌓기를 매우 좋아했다. 당시 고향에서 도둑을 잡으면 모두 강에 던져 익사시켰다. 어느 날 백함공이 강가를 지나가는데 한 익사당할 도둑이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저를 구해 주십시오. 제가 맹세코 이후로는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백함공은 가련한 마음이 들어 사람들에게 이 사람을 놓아줄 것을 청했고, 또 이 사람이 본업을 다시 하여 계속 악을 행할까 염려하여 그에게 작은 배 한 척을 주어 나루터에서 배를 저어 생계를 도모하게 했다. 이와 유사한 상황으로 백함공은 평생 전후로 여덟 척의 작은 배를 주었고 이 사람들은 나중에 모두 나쁜 짓을 고치고 바른길로 돌아왔다.
행인들이 부서진 사기그릇과 기와 조각에 다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백함공은 매번 외출할 때마다 몸에 작은 광주리를 지니고 다니며 길 위의 부서진 사기그릇과 기와 조각을 모두 작은 광주리에 주워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그의 빈방 하나에 쌓인 부서진 사기그릇과 기와 조각은 이미 집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도주의 증조 문형공(文衡公)은 매우 관대했다. 어느 날 큰눈이 내렸는데 밤에 문형공 집의 쌀을 누군가 훔쳐 갔다. 문형공은 눈 위의 발자국을 따라 찾아가다가 쌀을 훔친 사람이 원래 자신이 아는 면식 있는 사람임을 발견했다. 문형공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집으로 돌아왔으며 전혀 다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30년이 지나 문형공의 아내가 우연히 자손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야 이 일이 모두에게 알려졌으나, 여전히 고의로 쌀을 훔친 사람의 진짜 성명은 숨기고 공개하지 않았으니 그 관후하고 인자하며 용서하는 마음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강희 무자년 9월, 문형공의 이웃집에 불이 나 모든 가산이 남김없이 타버렸으나 그와 이웃한 문형공의 집은 안전하게 아무 탈이 없었다.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문형공 집의 곡식 창고가 이웃집과 바짝 붙어 있었는데 뜻밖에 조금도 피해가 없었다는 점이다. 와서 불 끄는 것을 도운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큰불이 타오를 때 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긴 소매로 부채를 들고 담장 위에 서서 큰불을 향해 한 번 부치자 그 큰불이 문형공 집의 담장 가에 이르러 문득 멈추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담장이 모두 빨갛게 달아올랐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것이 모두 도가가 평소에 선행을 하고 덕을 쌓았기에 신선의 보호를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웃집이 불에 타 아무것도 없게 되자 문형공의 아내는 자기 집 곡식 창고의 곡식을 전부 이웃에게 주었다.
도주의 조부 인량공(寅亮公)은 성품이 담박했고 집안이 그리 부유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인량공은 강가에서 돈을 좀 주웠다. 그는 그곳에서 줄곧 하루를 기다렸는데 그제야 한 사람이 허둥지둥 오는데 안색이 흙빛이었으며 고개를 숙이고 모래 자갈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인량공이 그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제가 타지에서 남의 일을 해 주며 몇 년 동안 집에 가지 못했습니다. 집에는 노모가 계시는데 오늘 수년간 모은 돈을 가지고 집에 가 노모를 봉양하려다가 뜻밖에 전부 잃어버렸습니다.”라고 했다.
인량공이 그에게 돈을 얼마나 잃어버렸는지 묻자 그 사람이 말한 것이 모두 맞아 인량공은 주운 돈을 고스란히 그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그 사람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 한사코 돈의 절반을 인량공에게 나누어 주려 했으나, 인량공은 웃으며 “내가 만약 당신이 내게 나누어 줄 그 돈을 탐냈다면 내가 여기에서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웃으며 그 사람에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그 사람은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감사를 표하고 떠났다.
도주의 부친 향현공(鄉賢公)이 재물을 아끼지 않고 의를 베푼 일도 매우 많다.
도주 가문 4대 사람이 선행을 하고 덕을 쌓았기에 비로소 도주가 큰 관직을 한 복보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도주 역시 그 선행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순후한 가풍을 이어받아, 그는 재직 기간에 여러 차례 자신의 봉록을 전부 이재민들에게 구제했다. 도광제는 듣고 나서 감동하여 “신하 된 자가 모두 도주처럼 청렴할 수 있다면 어찌 천하가 태평하지 않음을 근심하겠는가!”라며 도주에게 은 3천 냥을 내렸다. 그러나 도주는 여전히 거친 음식과 반찬을 먹으며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전부 빈곤한 고향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썼으며 안화현에 48곳의 의학(義學 무료 학교)을 일으켜 세웠다.
번중이 선행을 하고 덕을 쌓아 자손에게 복보가 가다
번중(樊重)은 자가 군운(君云)이며 서한 남양 호양 사람이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두터웠으며 사람됨이 베풀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 돕기를 좋아했으며 일을 함에 법도를 중시했다. 집안이 3대 동안 분가하지 않고 재물을 공유했으며 자손들이 모두 서로 예의로 공경하여 집안은 항상 관부(官府)처럼 예의를 중시했다.
번중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짓기를 잘했고 또한 장사하기를 좋아했다. 번중은 집안의 산업을 경영함에 매우 법도가 있어 한 점의 손실과 낭비도 없었으며, 종과 고용인을 부릴 때 사람의 재능을 다 발휘하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집안이 상하로 마음과 힘을 합칠 수 있었고 재산과 이윤이 매년 배로 증가하여 나중에는 논밭이 300여 경에 달하게 되었다. 번중의 집은 또한 물고기를 기르고 가축을 길렀는데, 고향에 궁핍하고 다급한 사람이 그의 집에 도움을 청하면 번중은 대개 그들을 만족시켜 주었다.
번중의 재물이 쌓여 수천수만에 이르렀고 그는 자주 본가 동족을 구제하고 고향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번중의 외손 하시 형제들 사이에 약간의 재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자 번중은 그들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겨 그들에게 논밭 두 경을 주어 그들 형제 사이의 분한 마음과 소송을 화해시켰다. 현의 사람들은 모두 번중의 덕행을 찬양하며 그를 ‘삼로’로 추대했다.
번중은 80여 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재물이 수백만에 달했다. 그는 임종 전에 자녀들에게 그 대출과 관련된 문서와 계약서를 전부 불태우라고 당부했다. 그에게 돈을 빌렸던 사람들은 듣고 나서 모두 매우 부끄럽게 여겨 앞다투어 가서 갚으려 했다. 번중의 자녀들은 모두 부친의 유언을 공손히 준수하여 일체 받지 않았다.
번중의 아들 번홍(樊宏)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어질고 후했으며 사람됨이 겸손하고 신중했다. 왕망 말년의 전란 중에 군사들이 번홍의 가족을 죽이려 했으나 번중 부자 두 사람이 평소 예의와 은덕으로 고향에 행했음을 듣고 이에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여 번홍의 가족들은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번홍은 나중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동족 친척들과 모여 살았는데 노약자 천여 가구가 와서 그에게 귀부했다. 당시 적미(赤眉)가 수없이 잔인하게 살육하여 본래 번홍이 거주하는 곳을 공격하려 했으나, 번홍이 평소 인후하고 선행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이에 역시 차마 가서 공격하지 못했다.
번중은 나중에 수장경후(壽張敬侯)로 추봉되었다. 번홍은 광록대부에 임명되고 수장후에 봉해졌으며 세상을 떠난 후 황제는 그의 덕행을 표창하기 위해 돈 천만과 포 만 필을 하사했고 시호를 공후라 했으며 인수를 주고 수레와 말로 친히 장례를 배웅했다. 번중의 다른 아들 번단(樊丹)은 사양후(射陽侯)에 봉해졌다. 한 손자는 평망후에 봉해졌고 다른 한 손자는 현향후에 봉해졌다. 번중의 일가족은 베풀기를 좋아하고 덕을 중시하며 선행을 하여 당시의 큰 명문 가문이 되었다.
파룬궁은 진선인을 이야기하며 선행을 하고 덕을 쌓는 것은 우주의 ‘진선인’ 특성에 부합하는 일종의 미덕이다. 사람이 모두 진선인 요구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선행을 하며 덕을 쌓으면 사회에, 가정에, 가문에 오직 이익만 있을 뿐 한 가지도 해가 없다. 그러나 중공은 인류를 파멸시키려는 하나의 마귀 당이며 그것은 ‘가(假)·악(惡)·투(鬪)’를 이야기하고 사람이 악을 지어 업을 짓도록 종용하니 파룬궁의 요구와 정반대된다. 이것은 또한 인류를 파멸시키려는 중공의 음모를 파괴하므로 중공은 이에 죽기 살기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것이다.
진상을 알고 진상을 명백히 알며 삼퇴를 선택하여 중공 마귀와 결별해야만 비로소 중공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고, 비로소 전통의 길로 돌아갈 수 있으며, 비로소 진선인 요구에 따라 사회와 가정, 가문에 모두 유익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6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