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공(蘭工)
【정견망】
사람이 문제를 볼 때 종종 표면에만 머무르기 쉽고 사물의 진정한 내함을 소홀히 한다. 심지어 많은 경우 그 진실한 가치를 분명히 알면서도 사람의 마음과 이익 때문에 고의로 귀머거리와 벙어리 행세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배후에는 사실 더욱 깊은 사회적 현실과 인생의 비애가 숨겨져 있다.
명조 유백원이 쓴 《욱리자(鬱離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공지교(工之僑)가 질 좋은 오동나무를 얻어 그것으로 거문고를 하나 만들었다. 거문고 줄을 매어 연주하니 거문고 소리가 맑고 은은하여 마치 금과 옥이 서로 부딪히며 아름답게 화답하는 듯했다. 그는 스스로 이것이 천하에서 가장 좋은 거문고라 생각하여 예악을 관장하는 관부(官府)에 거문고를 바쳤다. 악관이 나라의 유명한 악사에게 감정하게 하니 악사는 그저 “충분히 고풍스럽지 않다”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거문고를 돌려보냈다.
공지교가 거문고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후 칠장이와 의논하여 거문고 몸체에 갈라지고 얼룩진 문양을 칠했다. 또 각수에게 부탁하여 옛날 글자를 새겼으며, 거문고를 상자에 넣어 흙 속에 묻었다. 1년이 지난 후 그는 거문고를 파내어 안고 시장으로 갔다. 마침 한 권세가가 지나가다가 이 거문고를 보고 뜻밖에 거금을 주고 사서 조정에 바쳤다. 조정의 악관들이 앞다투어 전하며 보더니 모두 “참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보배로다”라며 찬탄했다.
공지교가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가련하구나, 이 세상이여! 어찌 오직 이 거문고 한 장뿐이겠는가? 천하 만사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욱리자》)
사실 사람이 진정으로 들어야 할 것은 거문고 소리지, 거문고 표면의 얼룩과 낡은 흔적이 아니다. 음악의 진정한 가치는 소리가 담고 있는 정감, 의경과 내함에 있는 것이지 외표가 ‘낡았는가(古舊)’에 있지 않다. 그러나 똑같은 거문고가 단지 외관이 ‘골동품처럼’ 변했다는 이유만으로 즉시 몸값이 백 배나 뛰고 많은 사람이 추종했다. 이는 아마도 많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음악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저 고상한 체하기를 좋아함을 설명할 것이다.
오늘날 사회의 수많은 이른바 예술 감상가들도 사실 종종 이와 같다. 진정으로 예술을 알고 내함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지만, 진실한 감상 능력이 없는 일부 사람들은 그저 명성만 보고 지위만 보며 포장만 본다. 특히 권세와 명망 앞에서는 더욱 서로 아첨하고 맹목적으로 부화뇌동하기 쉽다.
유백원이 말한 것은 사실 결코 거문고 하나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당시 조정에도 아마 진정으로 음악을 아는 사람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단지 많은 사람이 명철보신(明哲保身)을 위해 감히 진실한 말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봉건 왕조에서 말 한마디를 잘못하면 가볍게는 권세가에게 죄를 짓고 무겁게는 죽음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은 권세에 순응하여 말할지언정 진실한 판단을 고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백원이 공지교의 입을 빌려 탄식한 것은 예술 감상의 황당함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 풍조의 비애다.
이것은 사실 명조 판 ‘지록위마(指鹿爲馬)’와 매우 흡사하다. 황제와 고관이 인정한 것이기만 하면 모두가 앞다투어 동조하지만, 일반 백성이 하는 말은 비록 도리가 있더라도 경시되고 폄하되며 심지어 짓밟힌다.
유백온은 사람이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많은 경우 정말로 알아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장난을 치기 때문임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저 표상만 중시하고 내함은 중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때로는 내함을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고의로 침묵한다.
황제가 말하면 곧 옳은 것이고 큰 관리가 작은 관리 앞에서 말해도 또한 옳은 것이다. 일반 백성이 말하는 것은 종종 자연히 틀린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사람의 눈에 시비를 가리는 기준은 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말하는가에 있다. 본말이 전도된 이런 현상이 어찌 유백온을 감개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포를 말하자면 사람의 문화에는 일정한 역사과정이 있었고, 연주해낸 매 음표는 모두 민족적인 특성과 개인의 인생과 정회(情懷)의 내포가 있다. 매 한 단락의 곡에는 모두 연주인이 표현하려는 경지가 있고 그 음표의 운용에는 당연히 내포의 표현이 있을 것인데, 배음의 운용을 포함한다. 이는 이 방면에서 당신 개인의 감수이다.”(《음악과 미술 창작회 설법》 〈음악 창작회 설법〉)
사실 단지 음악 자체로만 보더라도 그것은 단지 기교와 소리의 문제가 아니며, 그 속에는 민족 문화, 인생 경험과 정감 경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음악이 신이 사람에게 전한 문화인 이상 그 배후에는 더욱 세속을 초월한 깊은 내함이 존재한다.
특히 오늘날은 정법 시기로 대법 사부님께서 음악을 통해 중생을 구도하고 계신다. 사람들이 오늘날 보는 션윈(神韻) 예술은 바로 순정한 예술로 사람의 내심 깊은 곳에 있는 전통에 대한 기억, 선량함에 대한 기억, 신성에 대한 기억을 깨우고 있다.
사실 진정으로 위대한 음악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그저 사람의 집착과 관념을 내려놓기만 하면 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래 신전문화(神傳文化)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며, 이것은 생명 깊은 곳에 선천적으로 지닌 감응이다.
오늘날 중공의 독해 아래에 있는 대륙 중국인들을 구도하기 위해 신(神)은 이미 인류 역사 속에서 길고도 치밀한 배치를 하셨다. 모든 신전문화는 모두 오늘날 사람이 법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닦은 것이다. 인류 문명의 존재는 본래 오늘날의 정법을 위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이 세상에 온 진짜 목적을 이미 잊어버린 채 명리와 정욕 속에 미혹되어 돌아올 줄 모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가장 큰 비극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6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