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2년—서기 8년)
심연
【정견망】
문경의 치─효문제가 인덕무위(仁德無爲)로 천하를 다스리다
공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국가를 다스림에는 반드시 삼십 년을 거쳐야 인정(仁政)을 실현할 수 있다. 선인(善人)이 국가를 다스려 백 년을 거치면 잔폭함을 극복하고 형살(刑殺)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정확하다. 한조(漢朝)가 건립된 후 효문제에 이르기까지 사십여 년을 거치며 덕정(德政)이 극성한 지경에 달했다. 한편으로 문제는 노자의 사상 영향을 받아 무위이치(無爲而治)의 방식을 취했고, 다른 한편으로 문제는 사람됨이 매우 어질고 관대해 천하 백성들로 하여금 무궁한 혜택을 입게 했으며 서한 왕조를 점차 강성해지게 했다.
문제 유항(劉恒)은 원래 고조에 의해 대(代) 땅에 봉해져 대왕(代王)이라 했다. 기원전 180년, 여후가 세상을 떠나고 대신들이 공동으로 여러 여씨를 주멸한 후 천자로 옹립되었다.
문제의 인덕(仁德)은 다양한 방면에서 체현되었다.
첫째, 그는 연좌제와 육형(肉刑)을 폐지했다. 문제는 법령이란 국가를 다스리는 준칙이며 폭행을 제지하고 사람들을 선(善)으로 이끄는 도구라 여겼다. 이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죄로 다스렸으니 그들의 죄 없는 부모, 처자, 자녀와 형제들을 연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법령이 공정하면 백성이 충후(忠厚)하고 판결이 합당하면 백성이 심복(心服)한다고 보았다.
훗날 제나라의 태창령(太倉令) 순우공(淳于公)이 죄를 지어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했다. 태창령의 막내 딸 제영(緹縈)이 조정에 글을 올려 아버지의 형벌을 면하기 위해 관부(官府)의 노비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문제는 제영의 효심을 가련히 여기는 동시에 자신의 도덕이 두텁지 못하고 교화가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겨 조서를 내려 경형(黥刑 먹물 자자), 의형(劓刑 코를 베른 형벌), 월형(刖刑 발목을 자르는 형벌) 등의 육형(肉刑)을 폐지하고 태형(笞刑)으로 대신하게 했다. 가혹한 형벌을 취소했기 때문에 문제 때 많은 관리들이 옥사를 가볍게 판단할 수 있었고 정무를 돌봄에 관대함을 위주로 하고 가혹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옥사가 줄어들고 인민이 받는 압박이 진(秦)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둘째, 후계자를 정하는 일에서 문제는 애초 아들이 아니라 성덕(聖德)을 갖춘 사람을 찾아 선양하고자 했다. 일부 대신들이 문제에게 조속히 태자를 세울 것을 권하자 문제는 도리어 자신의 덕이 엷으니 현성(賢聖)하고 덕(德)이 있는 사람을 찾아 천하를 선양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신들은 계승자를 자신의 아들로 확립하는 것은 유래가 오래된 정해진 규정(定規)이라고 여겼다. 만약 마땅히 태자로 세워야 할 사람을 떼어놓고 도리어 제후나 종실 중에서 따로 타인을 고른다면 그것은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문제는 비로소 자신의 아들 계(啓)를 태자로 세우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동시에 전국의 민중 중 마땅히 가업을 계승해야 할 사람들에게 작위(爵位)를 한 등급씩 하사했다.
셋째, 문제는 자기를 미루어 타인에게 미칠 수 있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했다. 3월, 주관 대신이 황제에게 황후를 세울 것을 청했다. 문제는 태자의 어머니를 황후로 세웠다. 황후의 성은 두씨(竇氏)였다. 문제는 황후를 세우면서 천하의 아내가 없는 자, 남편이 없는 자, 아버지가 없는 자, 자식이 없는 궁곤한 사람들과 나이가 여든이 넘은 노인, 아홉 살이 안 된 고아들에게 매인당 약간의 포(布), 백(帛), 쌀, 고기를 주어 이렇게 가난하고 고통받는 세상 사람들이 얼마간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이외에도 문제는 온 천하에 덕혜(德惠)를 베풀고 제후와 사방의 먼 부족들을 안무했으며 공이 있는 대신들을 가봉했다. 때문에 각 방면에서 위아래로 모두 융합하고 즐거웠다.
넷째, 백성들을 고생시키지 않고 재력(財力)을 절약하기 위해 문제 2년(기원전 178) 10월, 장안에 거주하는 열후(列侯)들에게 각자의 봉국(封國)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한편으로는 백성들이 식량을 공급하고 운송하는 노고를 덜어 인력과 재력을 절약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후들도 봉지의 백성들을 가르쳐 이끌고 관리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병권(兵權)을 주거나 군대를 동원하는 동호부(銅虎符 동으로 만든 호랑이 모양 부절)와 사신이 출사할 때 지니는 죽사부(竹使符 대나무로 만든 사자의 부절)를 각 봉국 승상과 각 군 군수에게 발급해 주었다.
다섯째, 문제는 자신에 대해서는 매우 절검(節儉)했다. 문제는 대(代)나라에서 경성으로 와 재위한 지 23년 동안 궁실, 원림, 구마(狗馬 개와 말), 복식, 거가(車駕 수레와 어가) 등 무엇 하나도 증가시키지 않았다. 다만 백성들에게 불편한 일이 있으면 곧 폐지하여 민중을 편리하게 했다.
문제가 일찍이 높은 대를 하나 지으려고 장인을 불러 계산해 보니 조성 비용이 황금 백 근에 달했다 이에 문제는 곧 포기했다. 문제는 평소에 질감이 거칠고 두꺼운 실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총애하는 신(愼)부인에게도 옷이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입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 사용하는 휘장에 화려한 꽃무늬를 수놓는 것을 허락지 않아 검소함을 표시하고 천하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문제는 자신의 능묘인 패릉(霸陵)을 만들면서 모두 기와를 사용하게 하고 금, 은, 동, 주석 등 금속으로 장식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며 높은 무덤을 축조하지 못하게 했다. 절약해야지 백성들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문제는 또 위장군(衛將軍)이 통할하는 자신의 호위 부대를 없애라고 명령했다. 또 태복에게 명령해 소유한 말 중 사용하는 말만 남기고 나머지 말은 전부 역참에 넘겨 사용하게 했다.
여섯째, 법령 중에서 조정을 비방하고 요언(妖言)으로 민중을 미혹 시키는 것 및 백성이 조정을 비평하면 죄가 된다는 죄를 폐지했다. 문제는 고대에 천하를 다스릴 때 조정에 선언(善言)을 들이는 정기(旌旗)와 조정을 비평하는 나무 판을 설치한 것은 치국의 통로를 열어 간언하는 사람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죄는 대신들로 하여금 감히 진실한 말을 완전히 하지 못하게 하여 황제도 자신의 과실을 알 수 있는 길이 없게 만들었다. 뭇 신 하들 중에서 원앙(袁盎) 같은 사람들이 나아가 일을 말함에 비록 직설적이고 격렬했으나 문제는 언제나 관용으로 채납했다.
국가를 다스리는 방면에서 문제는 특히 인덕(仁德)을 근본으로 삼아 “무위(無爲)”의 방식을 취했다. 문제는 농업을 매우 중시했고 그는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라 여겼으므로 즉위한 후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농상(農桑 농사와 양잠)을 중시했고, 호구 비율에 따라 삼로(三老), 효제(孝悌), 역전(力田) 등을 두어 그들에게 상을 주어 농민들이 생산을 발전시키도록 격려했다.
동시에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데 주의하여 전조(田租)와 부세(賦稅)를 낮추고 요역을 경감시켰다. 문제 2년(전 178)과 12년에 두 차례 “전조 세금의 반을 감면해” 주었으니 즉 전조세율을 30분의 1로 줄였고 13년에는 전조를 전부 면제해 주었다. 이 후 30분의 1은 드디어 한대(漢代)의 제도가 되었다.
문제 때 인두세도 1인당 매년 백이십 전에서 사십 전으로 감경했고 요역은 매 삼년에 한 번 복역하는 것으로 감경했다. 문제는 또 “산과 못(山澤)에 대한 금지령을 완화했다.” 즉 원래 국가 소유에 귀속되었던 산림천택을 개방함으로써 농민들의 부업 생산과 민생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염철(鹽鐵) 생산 사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문제 12년에는 또 관문을 지날 때 일종의 통행증인 전(傳)을 사용하는 제도를 폐지하니 이는 상품 유통과 각 지역 간의 경제 연계에 유리했으며 농업 생산의 발전에도 어느 정도 촉진 작용을 했다.
흉노를 대하는 문제에서 문제는 싸우든 화친하든 전적으로 백성들의 이익이란 기점에서 출발했다. 비록 흉노가 여러 차례 약속을 어기고 침입해 약탈했으나 문제는 단지 변방에 대비를 철저히 해서 방어할 것을 명령했을 뿐 흉노 경내로 깊이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번거로움과 노고를 주려 하지 않았다.
동성(同姓)의 제후왕이 반란을 일으킨 상황을 대처함에 있어서도 문제는 덕(德)으로 원한을 갚았다 제북왕 유흥(劉興)의 반란을 평정한 후 문제는 조서를 반포해 제북왕을 따라 가담한 관리와 백성들을 사면했다.
기원전 174년, 주관 대신이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이 선제(先帝)의 법률을 폐기하고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며, 궁실 거처가 규정된 한도를 초과하고 출입하는 마차와 의장이 천자와 비슷했으며, 멋대로 법령을 제정하고 극포후(棘蒲侯)의 태자 진기(陳奇)와 함께 반란을 도모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민월(閩越)과 흉노에 보내 그들의 군대를 동원해 종묘사직을 해치려했다고 보고했다. 군신들이 이 일을 의론하며 모두 말하기를 “유장은 마땅히 거리에서 참수하여 대중에게 보여야 합니다.” 했다. 그러나 문제는 차마 회남왕을 법대로 다스리지 못해 그의 사죄를 면해주고 그의 왕위를 폐지해 더는 제후왕을 하지 못하게 했다.
또 남월왕(南越王) 위타(尉佗)가 자립해 무제(武帝)가 되었으나 문제는 도리어 위타의 형제들을 불러 그들을 부귀하게 만들어 덕으로 보답했다. 위타는 이에 스스로 제호(帝號)를 취소하고 한조(漢朝)의 신하로 복종했다.
신하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문제는 매우 관대해 백관의 과오를 마땅히 자신 한 사람이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고 여겼다. 대신 중에서 장무(張武) 같은 사람들이 타인의 황금을 뇌물로 받았는데 일이 발각되자 문제는 곧 황궁 창고에서 황금을 꺼내 그들에게 줌으로써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의 내심이 부끄럽게 만들었을 뿐 집법(執法) 관리에게 넘겨 처리하지 않았다.
또 사촌형인 오왕 유비(劉濞)가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조회하러 오지 않았지만 문제는 오히려 그에게 궤와 지팡이를 선물해 그가 나이가 많음을 감안해 장안에 들어와 조현하는 예의를 면하게 해주었다.
재위 23년간 문제는 늘 자신을 반성했다. 어떤 해에 몇 차례 일식이 발생하자 문제는 자책하며 말했다.
“내가 듣기로 하늘이 만민(萬民)을 내고 그들을 위해 군주를 설치하여 그들을 어루만져 기르게 하셨소. 만약 군주가 덕이 없어 다스림이 공평하지 못하면 하늘이 곧 재이(災異) 현상을 나타내 그가 잘 다스리지 못함을 경계한다고 했소. 11월 마지막 날에 일식이 발생했으니 하늘의 경고가 천상에 재이 현상으로 표현되어 나타났거늘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소! 짐이 종묘를 모시는 지위를 얻어 미천한 몸으로 억조 백성과 뭇 제후들의 위에 의탁해 있으니, 천하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그 책임이 짐 한 사람에게 달려 있소. 그대들 국정을 주관하는 대신들은 마치 나의 좌우 팔다리와 같소. 짐은 아래로 백성을 잘 다스리고 기르지 못했고 위로는 또 삼광(三光 해 달 별)에 누가 되었으니 부덕함이 실로 크오. 조령이 도착한 후 그대들은 모두 짐의 과실 및 그대들이 알고 보고 생각한 짐이 잘하지 못한 곳을 진지하게 생각하여 알려주기 바라어. 또한 현명하고 선량하며 정직해서 직언과 극언(極言)할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해 짐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바로잡고자 하오.”
기원전 159년, 천하가 가물고 황충의 재해가 발생했다. 문제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제후들은 조정에 헌공하지 말 것이며, 민중이 산림과 호박을 개발하는 금령을 해제하고 궁중의 각종 복식, 거야와 구마를 감소하며, 조정 관리의 인수를 재감하고 식량 창고를 열어 빈고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민간에서 작위를 매매하는 것을 허락하라고 조령을 내렸다.
문제는 한마음으로 어진 덕으로 신민(臣民)을 감화하고 무위이치(無爲而治)하는 데 전력했으므로 천하가 풍요로워지고 예의가 흥성해졌다.
후원(後元) 7년 6월 기해일, 문제는 미앙궁에서 붕어했다. 유조에 말하기를 “전국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조령을 내리노니 조령이 도달한 후 사흘만 곡을 하고 곧 상복을 벗어라. 아내를 얻고 딸을 시집보내며 제사 지내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지 말라. 마땅히 상사에 참가하고 복상하며 곡을 해야 할 사람들은 모두 맨발로 하지 말라. 복상의 삼베 띠 너비는 세 치를 초과하지 말고 차마와 병기를 진열하지 말며, 민간의 남녀를 동원해 궁전에 와서 곡하게 하지 말라. 궁중에서 마땅히 곡을 해야 할 사람들은 모두 아침과 저녁에 각각 열다섯 번 소리 내어 울고 행례를 마치면 중지하라. 아침과 저녁으로 곡하는 시간이 아니면 함부로 울지 말라. 하장한 이후 상복 제도에 따라 아홉 달 동안 대공을 입어야 하는 자는 보름만 입고, 다섯 달 동안 소공을 입어야 하는 자는 14일만 입으며, 석 달 동안 시마를 입어야 하는 자는 7일만 입고 기한이 차면 상복을 벗어라. 기타 이 조령에 있지 않은 사의들은 모두 이 조령을 참조하여 처리하라. 이 조령을 천하에 통고하여 천하 사람들이 모두 명백히 짐의 뜻을 알게 하라. 짐을 장사 지낼 패릉 주위의 산수는 그 원래의 모양을 보류하여 바꾸는 바가 없게 하라. 후궁 부인 이하 직소사까지 전부 친정으로 돌아가게 하라.” 했다.
을사일, 문제를 패릉에 장사 지내니 군신들이 머리를 땅에 조아려 시호를 올려 효문황제라 존칭했다.
우리는 한 경제(景帝)의 말을 인용해 문제(文帝)의 일생을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효경황제 원년(기원전 156년) 10월, 경제는 어사(御史)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내가 듣기로 고대 제왕 중 천하를 얻은 공이 있는 이를 ‘조(祖)’라 하고, 천하를 잘 다스린 덕이 있는 이를 ‘종(宗)’이라 칭하며, 예의와 음악을 제정함에는 각기 그에 걸맞은 근거가 있다고 했다. 또한 노래는 덕행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요, 춤은 공적을 현창하기 위한 것이라 들었다. 고조(高祖)의 사당에 술을 올리고 제사를 지낼 때는 《무덕(武德)》, 《문시(文始)》, 《오행(五行)》 등의 가무를 연주하고, 효혜황제(孝惠皇帝)의 사당에 제사를 지낼 때는 《문시》, 《오행》 등의 가무를 연주한다.
효문황제(孝文皇帝)께서는 천하를 다스리실 제, 관문과 다리를 개방하여 변방의 먼 지역에 이르기까지 어디든 막힘없이 통하게 하셨다. 조정을 비방하는 죄를 다스리던 법령을 폐지하고 육형(肉刑)을 없애셨으며, 노인들에게 상을 내리고 고아와 홀로 된 노인 등 빈고한 이들을 거두어 보살핌으로써 천하의 모든 백성을 기르셨다. 또한 온갖 욕심을 끊고 신하들이 바치는 공물을 받지 않으셨으며,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으셨다. 죄인을 처벌할 때는 그 가족에게 죄를 연좌하지 않으셨고, 죄 없는 이를 벌하지 않으셨다. 궁형(宮刑)을 폐지하고 후궁의 미녀들을 풀어주셨으며, 사람의 대가 끊기게 하는 일을 매우 엄중하게 보셨다.
내가 총명하지 못해 효문황제의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으나, 이 모든 것은 고대의 제왕들도 미처 해내지 못한 일들로 효문황제께서 친히 실천하신 바이다. 그분의 공덕은 하늘과 땅에 비길 만큼 현학하고, 베푸신 은혜는 온 세상에 널리 퍼져 그 혜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다. 그분의 광휘는 해와 달과 같으나, 제사 때 쓰는 가무가 그에 걸맞지 않으니 내 마음이 심히 편치 않다. 마땅히 효문황제의 사당을 위해 《소덕(昭德)》이라는 춤을 제정하여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널리 기리도록 하라.”
경제의 이 같은 포폄과 찬양의 말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
문경의 치(文景之治) ─ 전대를 잇고 후대를 연 효경제
효경제 유계(劉啓)는 제위에 오른 후, 기본적으로 문제 시절의 통치 정책을 그대로 따르며 서한(西漢)의 경제를 전례 없는 번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역사학자들은 문제와 경제의 통치 기간을 합쳐 ‘문경의 치’라 부른다. 이는 훗날 무제가 대외 확장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견고한 발판이 되었다.
경제 분야에서 경제는 즉위 초부터 농민들이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휴양생식(修養生息)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했다. 제위에 오르자마자 전국의 백성 중 한 가구의 주인을 뜻하는 호주(戶主)들에게 작위 1급을 내렸고, 토지세인 전조(田租)를 절반으로 줄이라는 조서를 내렸다.
경제 2년(기원전 155년)에는 진(秦) 때부터 이어져 온 부역 등록 연령을 17세에서 20세로 늦추어 백성들의 노동력 부담을 덜어주었다. 기원전 149년에도 다시 한번 호주들에게 작위 1급을 하사했다.
기원전 142년 정월에는 내사(內史)와 각 군(郡)에 곡물로 말을 기르지 못하게 명했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말을 관가에서 몰수했다. 또한 죄수와 노비들에게는 거친 삼베옷만 입도록 규정했고, 말에게 디딜방아를 찧게 하는 일을 금지했다. 이해에 흉년이 들자 경제는 온 나라에 식량을 절약하라는 조서를 내리고, 수확기 전에 미리 식량을 모두 먹어 치우는 일을 엄격히 금했다.
정치적 측면에서도 문제 시절과 마찬가지로 규제를 완화하는 ‘개방 정책(除禁錮)’과 제후들을 봉국으로 돌려보내는 등 검소한 조치를 취했다. 상인이나 데릴사위는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 했던 법령과, 죄를 지은 관리가 다시 임용되지 못하게 막았던 규정도 모두 폐지했다. 태형(笞刑)의 강도를 낮추는 등 형벌을 한층 더 경감해 주기도 했다. 또한, 재위 기간 중 일어난 ‘오초칠국의 난’을 과감하게 평정했다.
한조가 흥성한 이래 효문황제가 은덕을 널리 베푼 덕분에 천하는 평온했다. 경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성(異姓) 제후왕들의 반란 걱정은 사라졌으나, 동성(同姓) 제후왕들 중 여전히 딴마음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이에 어사대부 조조(晁錯)는 동성 제후왕들의 봉지를 대대적으로 삭감하라고 건의했다.
결국 기원전 154년, 오나라와 초나라를 비롯한 일곱 제후국이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조정을 향해 서쪽으로 진격했다. 경제는 반란을 일으킨 제후왕들을 달래기 위해 일단 조조를 처형하고 원앙(袁盎)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으나, 그들은 군사를 거두지 않고 계속 서진하여 양(梁 양왕 유무가 경제의 친동생이라 반란군에 저항)나라를 포위했다. 이에 경제는 대장군 두영(竇嬰)과 태위 주아부(周亞夫)를 파견해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반란을 평정했다.
이 반란은 기본적으로 제후들의 세력이 너무 강성했던 데다, 조조가 점진적인 삭감 방안을 쓰지 않고 조급하게 서두른 탓에 일어났다. 경제 역시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치밀하게 계책을 세우지 못한 책임이 있다. 훗날 무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제후왕이 자신의 자제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후(侯)로 봉할 수 있게 한 주부언(主父偃)의 ‘추은령(推恩令)’을 받아들이면서 제후들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천하는 비로소 완전히 안정되었다.
대외 관계에서 경제는 침입을 일삼던 흉남과 화친 조약을 맺는 방식을 주로 취했고, 이 덕분에 변방은 잠시나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경제 7년(기원전 150년) 정사(丁巳)일, 경제는 교동왕(膠東王) 유철(劉徹)을 태자로 책봉했다.
기원전 140년, 경제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조(遺詔)를 통해 제후왕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가업을 이을 사람들에게 각각 작위 1급을 내렸고, 전국의 모든 가구에 100전씩을 지급했다. 또한 후궁들을 궁 밖으로 내보내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으며, 이들의 평생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후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한무제(漢武帝)다.
‘문경의 치’가 가져온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농업의 신속한 회복이었다. 농업이 발전하면서 곡물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 문제 초년에는 곡식 한 섬(당 수십 전에서 십여 전까지 내려갔다.
《한서·식화지》의 기록에 따르면, 한조 초기부터 무제가 즉위하기까지 약 70년 동안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수재나 가뭄 같은 큰 재해만 없으면 백성들은 언제나 풍족한 생활을 누렸고, 군국(郡國)의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 쌓였다. 나라의 창고인 태창(太倉)의 곡식은 해마다 쌓여 썩어 나가는 바람에 먹을 수 없을 지경이었고, 정부의 창고에는 재물이 넘쳐났다. 수도에 쌓인 돈은 수천만 전에 달해 돈을 꿴 줄이 썩어 끊어질 정도였다. 이는 문경의 치를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는 대목이다.
경제 발전은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도 이어졌다. 서한 초기에는 큰 제후국의 가구 수가 만 가구를 넘지 못했고 작은 곳은 오륙백 가구에 불과했으나, 문경의 치를 거치며 유랑하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농토를 일구면서 큰 제후국은 3~4만 가구로 늘어났고 작은 곳도 가구 수가 배로 증가했다. 더불어 백성들의 삶 역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하고 실속 있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