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清風)
【정견망】
봄 제사도 지나고, 주렴과 장막 사이를 드나드니,
지난해의 먼지만이 차갑게 앉아 있구나.
깃털을 가지런히 정돈하며 머물고자, 옛 둥지에 들어가 서로 나란히 몸을 기댄다.
다시 화려하게 조각된 들보와 우물천장을 돌아보며,
또 나긋나긋한 울음소리로 무엇인가 끊임없이 상의하네.
이윽고 훌쩍 날아올라 꽃나무 끝을 가볍게 스치니,
비취빛 꼬리가 붉은 꽃 그림자를 갈라놓네.
過春社了,度簾幕中間,去年塵冷。
差池欲住,試入舊巢相並。
還相雕梁藻井。又軟語、商量不定。
飄然快拂花梢,翠尾分開紅影。
향기로운 오솔길에는 비에 젖어 촉촉한 미나리 진흙이 있구나.
땅에 스칠 듯 다투어 날아오르며, 저마다 가볍고 빼어난 몸짓을 뽐낸다.
붉은 누각으로 늦게 돌아와, 버드나무 으스름해지고 꽃빛이 저무는 밤 풍경을 실컷 만끽하네. 틀림없이 향기로운 둥지에 깃들어 편안히 잠들었으리라.
머나먼 타향에서 보내온 봄 소식은 그새 잊었는가,
날마다 난간에 홀로 기대 눈썹을 찌푸린 채 기다리는 이의 시름만 깊어가누나.
芳徑。芹泥雨潤。愛貼地爭飛,競誇輕俊。
紅樓歸晚,看足柳昏花暝。應自棲香正穩。
便忘了、天涯芳信。
愁損翠黛雙蛾,日日畫闌獨憑。
사물에 기탁하여 읊는 영물(詠物)은 시사(詩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이다. 사달조(史達祖)의 《쌍쌍연·영연(雙雙燕·詠燕)》이라는 이 사(詞)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러한 소재 중에서도 단연 수작으로 꼽힌다.
이 사를 읽으면 느껴지는 감정은 오직 한 단어로 요약된다. 바로 ‘살아있다(活)’는 것이다. 두 마리 제비의 형태와 표정, 그리고 심리 상태가 마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하다. 나는 수년 전 《절묘송사(絕妙宋詞) 100수》라는 책에서 이 작품을 처음 접했는데, 몇몇 구절이 순식간에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솜씨 좋은 화가가 몇 대의 붓질로 두 마리의 제비를 살아 움직이듯 그려낸 것처럼 글의 묘사가 실로 절묘하다고 느꼈다. 혹은 사진의 거장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단 수십 초 만에 제비의 역동적인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해 낸 것 같기도 하다.
최근 어떤 우연한 계기로 문득 작가에게 타심통(他心通, 타인의 마음을 읽는 신통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이 스쳤다. 그는 두 마리 제비가 생각하고 바라는 바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봄날에 제비를 보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며, 사 속에서 묘사된 장면 역시 무수히 많은 사람이 보아온 풍경이다. 그럼에도 오직 작가만이 이토록 절묘하고 훌륭한 사를 쓸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사물을 관찰하는 각도와 방법이 남달랐다. 낮에 쌍제비를 관찰한 후, 밤이 되면 고요함 속에 입정(入定)하여, 정정(定中) 상태에서 낮의 장면을 다양한 각도로 ‘되감기’ 하며 반복해서 느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제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마리의 제비가 서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있었다.
사에 등장하는 ‘끊임없이 상의하네(商量不定)’, ‘저마다 가볍고 빼어난 몸짓을 뽐낸다(競誇輕俊)’와 같은 구절들은 이른바 문학적인 수사로서의 의인법이라기보다 작가가 실제로 감지하여 알게 된 사실이다. 물론 낮에 볼 때도 대략은 짐작했겠지만, 밤에 입정한 상태에서 감지한 것은 훨씬 더 정확하고 생동감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제비의 원신(元神)과 대화하고 교류하는 것도 가능해지니, 이는 일반인들이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여기에 작가 본인의 뛰어난 필력이 더해졌기에 이 사가 이토록 극치에 달한 표현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는 제비를 묘사하고 있지만, 동시에 작가의 정력(定力, 마음을 가라앉히는 공력)을 체현하고 있기도 하다. 내면이 들뜨고 조급하면서 욕망의 구렁텅이를 채우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힐 수 없으며, 당연히 제비와 소통하는 데 필요한 정력에도 도달할 수 없다.
만물유령(萬物有靈, 만물에는 영성이 있다)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 동물, 식물, 심지어 물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는 생명이 있다. 그것들은 저마다의 사유와 언어가 있으며, 서로 간의 감정과 충돌도 존재한다. 일반인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하지만, 공능(功能, 신통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를 매우 명확하게 알고 있다. 이렇게 보면 작가의 도행(道行) 역시 결코 낮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8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