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
【정견망】
고사성어 중에 ‘충언역이(忠言逆耳, 충직한 말은 귀에 거슬린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한비자》 〈외저설 좌상(外儲說左上)〉에서 유래했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지혜로운 자는 권하여 그것을 마신다. 그것이 몸에 들어가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충직한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현명한 군주는 그것을 듣는다. 그것을 채택하면 큰 공을 이룰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구절에서 ‘충언역이(忠言逆耳)’라는 성어가 변형되어 나와, 진심 어린 정직한 권고는 흔히 귀에 거슬려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함을 비유하게 되었다.
《공자가어》 〈육본(六本)〉에 공자의 말이 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직한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다.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직언하는 신하가 있어 흥했고,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은 아첨하며 순종하는 자들만 있어 망했다.”
《사기》〈유후세가(留侯世家)〉에도 유방이 내키지 않았음에도 장량(張良)의 간언을 받아들여 귀에 거슬리는 충언을 수용하고, 마침내 패상(霸上)으로 군대를 돌린 일을 기록하고 있다.
〖패공(沛公 유방)이 진(秦) 궁궐에 들어가니 궁실의 휘장, 개와 말, 귀중한 보물과 미녀가 수천 명에 달해 그곳에 머물며 살고 싶어 했다. 번쾌(樊噲)가 유방에게 궁 밖으로 나가 진을 치라고 간했으나 유방은 듣지 않았다.
이에 장량이 말했다. ‘진나라가 무도했기에 유방께서 여기까지 오실 수 있었습니다. 천하를 위해 잔적을 제거하려면 마땅히 소박함을 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 겨우 진나라에 들어와 곧바로 그 즐거움에 안주하려 하시니, 이는 이른바 ‘걸왕을 도와 폭정을 부추기는 것(助桀為虐)’과 같습니다. 또한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고, 독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다’고 하니, 원컨대 패공께서는 번쾌의 말을 들으소서.’ 유방이 마침내 군대를 패상으로 돌렸다.〗
훗날 명대(明代) 고훈과 민간 속담을 모아 만든 《증광현문(增廣賢文)》에서는 이 말이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직한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다(良藥苦口利於病, 忠言逆耳利於行).”로 변했다. 동시에 이 책에는 상반된 의미를 담은 속담도 존재한다. “좋은 말 한마디는 한겨울도 따뜻하게 하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한여름도 춥다.” 민간에서 흔히 쓰이는 언어로는 “좋은 말 한마디는 엄동설한도 따뜻하게 하고, 악한 말은 사람을 상하게 하여 오뉴월도 춥게 한다”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반되어 보이는 가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사에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첫째는 당태종(唐太宗) 시기 ‘사람을 거울로 삼았다’고 칭송받은 천고의 쟁신(諍臣, 직언으로 간쟁하는 신하) 위징(魏徵)이고,
둘째는 교묘한 간언에 뛰어났던 제나라의 상대부 안자(晏子, 안영)다.
공자는 안자에 대해 “안평중(晏平仲)은 사람과 사귀기를 잘하니, 오래되어도 상대를 공경하는구나.”라며 높이 평가했다. 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방식은 후대인들에게 어떤 사색과 계시를 남겨주는가.
당태종 정관(貞觀) 6년(632년), 장락공주(長樂公主)가 장손중(長孫仲)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태종은 공주가 황후의 친딸이라 유독 아꼈기에, 관계 부처에 명하여 혼수를 영가장공주(永嘉長公主)보다 배나 더 많이 주도록 했다.
이에 위징이 간했다. “과거 한명제(漢明帝)가 황자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려 할 때 ‘내 아들이 어찌 선대 황제의 아들들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며 초왕(楚王)과 회양왕(淮陽王) 봉지의 절반만 주게 했습니다. 지금 공주의 혼수가 장공주보다 배나 많으니, 어찌 한명제의 뜻과 너무 멀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종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궁으로 돌아와 장손황후에게 이 일을 말했다. 황후는 탄복하며 말했다. “제가 늘 폐하께서 위징을 칭찬하시는 것을 들으면서도 그 까닭을 몰랐는데, 이제 보니 그가 예의를 인용해 군왕의 사사로운 정을 억제하게 하니 참으로 폐하를 보필하는 동량과 같은 신하입니다! 저는 폐하와 오랜 세월 부부로 지내며 많은 은총을 입었음에도 매번 말씀드릴 때 얼굴빛을 살펴야 했고 폐하의 위엄을 감히 거스르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대신(大臣)은 폐하와 소원한 관계임에도 이처럼 직언으로 강력히 간하여 폐하께서 그 의견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하니 대단합니다.”
황후는 태종에게 청하여 환관을 위징의 집으로 보내 동전 400민과 비단 400필을 하사하게 했다. 그리고 “그대의 정직함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친히 확인했기에 이를 상으로 줍니다. 바라건대 늘 이 충심을 유지하고 변치 마소서.”라고 전했다.
훗날 태종이 조정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말했다.
“기회를 봐서 저 시골 영감을 반드시 죽여버려야겠소”
황후가 누가 폐하를 노하게 했느냐고 묻자 태종은 “위징이 늘 조정에서 나를 모욕하오.”라고 답했다. 황후는 잠시 물러갔다가 조복(朝服)을 갖춰 입고 뜰에 꼿꼿이 섰다.
태종이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황후가 말했다.
“제왕이 현명해야 신하가 정직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위징이 정직하게 간할 수 있는 것은 폐하께서 현명하시기 때문이니, 제가 어찌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제야 태종은 화를 가라앉히고 기뻐했다.
《구당서(舊唐書)》 〈위징전〉에서 사관은 위징을 역대 최고의 쟁신으로 평가하며 “몸이 바르고 마음이 굳세었다(身正而心勁)”라고 적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내가 일찍이 위공(魏公 위징)의 고사를 읽어보니 문황(文皇, 당태종)과 정치를 토론한 문답이 수십만 자에 달했다. 왕의 과오를 바로잡고 위배됨을 보필함에 있어 가까운 비유를 들고 널리 유추하니, 이는 전대 어떤 쟁신(諍臣)도 미치지 못한 바였다. 그 바탕은 도의(道義)에 근간을 두었고 겉으로는 법도로 나타났으니, 몸이 바르고 마음이 굳세어 위로는 군주를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권세가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안으로는 친족에게 사치하지 않게 했고 밖으로는 붕당을 짓지 않았으며, 때를 만났다고 절개를 바꾸지 않았으며 지위를 얻고자 충성을 팔지 않았다. …전대의 쟁신 중 오직 (위징)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위징 스스로가 추구한 것은 ‘충신(忠臣)’이 아니라 ‘良臣(양신, 어진 신하)’이 되는 것이었다. 정관 원년(627년) 위징은 태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다행히 폐하를 모시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저를 양신으로 만들어 주시고 충신으로 만들지 마소서.”
태종이 충신과 양신의 차이를 묻자 위징이 대답했다.
“후직(後稷), 계(契), 고요(皋陶)처럼 군신이 마음을 합해 함께 영광을 누리는 것을 양신이라 합니다. 용방(龍逄)이나 비간(比幹)처럼 면전에서 다투고 직언하다가 자신은 죽임을 당하고 나라는 망하게 하는 이를 충신이라 합니다.”
태종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비단 500필을 하사했다.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은 《구당서》 위징전에서 위징이 세상을 떠난 후의 일을 기록했다. 위징은 생전에 두정륜(杜正倫)과 후군집(侯君集)이 재상의 재목이라며 추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훗날 두정륜은 죄를 지어 파직되었고, 후군집은 모반죄로 처형당하자, 부정한 무리에 가담했다는 비난이 위징에게까지 미쳤다.
또한 위징이 생전에 간언했던 기록을 사관 저수량(褚遂良)에게 보여주었다는 소문이 돌자 태종은 더욱 불쾌해했다. 이에 태종은 공주와 위징의 아들 숙옥(叔玉)의 혼약을 파기하고, 친히 가려 뽑아 세웠던 위징의 비석을 넘어뜨리게 했다.
사마광은 비평에서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임금과 신하 사이란 참으로 어렵지 않은가! 위징의 충성심과 태종의 명민함이 있었음에도,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기와 모함이 이처럼 쉽게 행해졌다. 처음에 위징은 수십만 자에 달하는 간언을 올리며 군자와 소인의 구별을 반복해 왕에게 말했고, 간사함이 충성을 어지럽힐 것을 경계했다. 오래되었음에도 오히려 면치 못했다. 옛날부터 ‘너무 깨끗하면 더러워지기 쉽고, 지나치게 높으면 온전하기 어렵다(皓皓者易汙, 嶢嶢者難全)’고 탄식한 바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요요(嶢嶢)’는 높고 험준한 모양으로, 정직하고 완벽한 상태를 형용한다. 사마광은 마음속 깊이 분노와 의문을 품었다. 위징처럼 저토록 깊은 충성과 태종과 같은 영명함으로도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 그래서 결국 소인들이 “간사하고 사악함으로 충성스러움을 어지럽힌 것”으로 결론지었다.
위징은 비록 양신이 되고자 했으나 역사적 평가로는 정직하고 강직한 쟁신으로 남았다. 그렇다면 이보다 1,000년 전 제나라의 명재상 안영은 제경공(齊景公)에게 어떻게 간언했을까.
한번은 제경공이 참새 둥지를 털러 나섰다. 참새를 잡느라 땀을 한 바가지 흘린 경공은 의관마저 흩어져 엉망이었다.
정식 조회가 아닌 시간에 안자가 우연히 이 소식을 듣고 경공을 알현했다.
안자가 물었다.
“군왕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경공이 대답했다.
“과인이 방금 참새를 잡으려 털었는데, 새끼 참새가 너무 어려서 다시 둥지에 넣어주고 오는 길이라오.”
안자는 이 말을 듣고 몇 걸음 물러나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며 경공에게 축하를 올렸다.
“우리 군왕께는 성왕(聖王)의 도가 있으십니다!”
경공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과인이 참새 둥지를 털다가 새가 작아 다시 넣어준 것이 성왕의 도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안자가 대답했다.
“군왕께서 참새를 잡으시다가 너무 어려 다시 돌려보내 주셨으니, 이는 어른이 어린 생명을 자애롭게 대하는 마음(長幼)입니다. 우리 군왕의 인애(仁愛)하신 마음이 미천한 조수에게까지 미치거늘, 하물며 사람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이 인애가 바로 성왕의 도입니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제경공이 아끼는 말을 마부에게 기르게 했는데, 그 말이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경공은 칼을 가져와 마부의 사지를 찢어 죽이려 했다.
이때 안자가 경공에게 조용히 물었다.
“과거 요(堯)임금과 순(舜)임금께서 사람의 사지를 찢으실 때, 몸의 어느 부위부터 시작하셨습니까?”
경공은 깜짝 놀라 당황하며 “그럼 나부터 시작이로군(내 대에서 그런 잔인한 형벌을 시작한다는 의미).”라며 사지를 찢으라는 명령을 거두었다.
경공이 대신 “저자를 옥리(獄吏)에게 넘겨라.”라고 하자 안자가 말했다.
“이 자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죽게 될 것이니, 제가 폐하를 대신해 죄목을 하나씩 열거하여 제 죄를 알게 한 뒤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경공이 좋다고 했다.
안자는 마부를 향해 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네 죄는 세 가지다.
군왕께서 말을 기르게 하셨는데 말을 죽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첫째 죄요,
군왕께서 가장 아끼시는 말을 죽게 했으니 이것이 둘째 죄다.
그리고 겨우 말 한 필 때문에 군왕이 사람을 죽이게 만들어, 백성들이 들으면 우리 군왕을 원망하게 하고 제후들이 들으면 우리 나라를 경시하게 만들었다. 네가 군왕의 말을 죽여 백성들의 마음속에 원망을 쌓이게 하고 나라의 힘을 이웃 나라보다 약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네가 마땅히 죽어야 할 셋째 죄다.”
제경공이 이 말을 듣고는 탄식하며 말했다.
“선생은 그를 놓아주시오! 나의 인애(仁愛)함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
이처럼 안자가 제경공에게 간한 방식은 순순히 타이르고 인도하는 ‘순순선유(循循善誘)’의 방식이었다. 요순이나 성왕의 도를 하나의 잣대로 삼아 제경공의 행위를 자로 재고 교정하려 한 것이 아니라, 왕의 내면에 있는 인애와 선념(善念)을 촉발하는 방식을 썼다.
공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안자는 가히 화를 멀리할 줄 아는 이로다. 자신의 옳음으로써 타인의 그름을 반박하지 않고, 겸손한 언사로써 허물을 피하게 하니 이 또한 ‘의(義)’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자신의 정당함을 무기 삼아 타인의 잘못을 쏘아붙이지 않고, 겸손한 말로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을 피하도록 이끄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리의 구현이라는 뜻이다.
사마천 역시 《사기》 〈관안열전〉 마지막에서 “만약 안자가 살아 있다면, 내가 그를 위해 채찍을 들고 마부를 하더라도 매우 기쁘고 간절히 바라마지 않을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위징과 안자의 간언에는 모두 사심(私心)이 다. 개인의 이익이나 득실을 위해 움직인 것이 아니다. 단지 간언의 방식이 달랐을 뿐인데, 이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의 가치 이념에서 기인한 것이다.
위징은 국가와 대업(大業)을 제1순위에 둔다. 군왕의 과오를 바로잡는 목적은 전적으로 사직과 강산을 지키기 위함이다.
반면 안자의 방식은 군주의 선념을 촉발하는 것을 제1순위에 둔다. 내면이 선을 향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과오를 깨닫고 허물을 피하게 만든다.
전자의 방식은 자칫 군왕의 내면에 있는 부면적인 요소(자존심, 분노 등)를 강하게 들이받아, 그것이 폭발할 경우 큰 화를 부를 위험이 있다. 반면 후자의 방식은 군주 내면의 인선(仁善)을 자극해, 군주 스스로가 자신의 부면적인 심태를 통제하고 억누르도록 이끈다.
인류 사회는 본래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연극이며,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는 역사의 필연이다. 미혹된 세상의 인간이 극 안에서 아무리 힘을 쓰고 애를 태운다 한들, 역사의 발전 구도와 법칙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바르게 서서 마음속의 선(善)을 지키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언행으로 타인의 선념(善念)을 일깨워 인류의 도덕을 승화시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근본적인 사명이자 이 세상에 태어난 진짜 목적일 것이다.
주해:
[1] 《資治通鑒.卷一九四.唐紀十》:【嘗罷朝,怒曰:“會須殺此田舍翁。”後問爲誰,上曰:“魏徵每廷辱我。”後退,具朝服立於庭,上驚問其故。後曰:“妾聞主明臣直;今魏徵直,由陛下之明故也,妾敢不賀!”上乃悅。】
[2] 《資治通鑒.卷一九二.唐紀八》:【征再拜曰:“臣幸得奉事陛下,願使臣爲良臣,勿爲忠臣。”上曰:“忠、良有以異乎﹖”對曰:“稷、契、皋陶,君臣協心,俱享尊榮,所謂良臣。龍逄、比幹,面折廷爭,身誅國亡,所謂忠臣。”上悅,賜絹五百匹。 】
[3] 《燕子春秋.卷五.內篇雜上第五》:【景公探雀鷇鷇弱反之晏子稱長幼以賀 第九 :……公曰:“寡人探雀鷇,鷇弱故反之,其當聖王之道者何也?”晏子對曰:“君探雀鷇,鷇弱反之,是長幼也。吾君仁愛,曾禽獸之加焉,而況於人乎,此聖王之道也。” 】
[4] 《燕子春秋.卷一.內篇諫上第一》:【景公所愛馬死欲誅圉人晏子諫 第二十五:……公喟然歎曰:“夫子釋之!夫於釋之!勿傷吾仁也。” 】
[5] 《燕子春秋.卷五.內篇雜上第五》【晏子居喪遜答家老仲尼善之 】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7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