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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없다 하여 한 물건도 속이지 말라

섬섬(纖纖)

【정견망】

밝으신 신령이 허물을 맡아 다스리니 어찌 억울하게 하리오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이 본래 재앙의 문이로다
사람이 없다 하여 한 물건도 속이지 말라
훗날 돌이 말할 수 있음을 모름지기 염려해야 하리

明神司過豈令冤,暗室由來有禍門。
莫爲無人欺一物,他時須慮石能言。

이상은(李商隱)은 자가 의산(義山)이고, 호는 옥계생(玉溪生) 또는 번남생(樊南生)이다. 원적은 회주 하내(懷州河內 지금의 하남성 심양沁陽) 사람이며, 훗날 조상을 따라 형양(滎陽)으로 이주했다. 그는 만당(晩唐) 시기 가장 뛰어난 시인 중 한 명이다. 흔히 두목(杜牧)과 병칭해 ‘소이두(小李杜 작은 이백과 두보)’라 불리고, 온정균(溫庭筠)과 병칭해 ‘온이(溫李)’라 불렸다. 그의 시문 풍격이 단성식(段成式), 온정균과 서로 비슷한데 세 사람이 가문 내에서 모두 항렬이 열여섯 번째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36체(三十六體)’라고도 불렀다.

이상은은 일생동안 우이당쟁(牛李黨爭 우승유와 이덕유)의 틈바구니 속에 처해 있었기에 관직 길이 순탄치 못했고 장한 뜻을 품었으나 펴기 어려웠다. 사망한 후 고향인 심양에 묻혔으며, 《이의산시집(李義山詩集)》을 세상에 남겼다.

이 시 《명신(明神)》은 비록 이상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니고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으나, 시에 함축된 인생의 깨달음이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이 반성하게 한다. 내용으로 보아, 마치 시인이 세상일의 부침을 겪은 후, 인과응보와 선악(善惡)의 득실에 대해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보이니 후세 사람들이 거울로 삼을 만하다.

“밝으신 신령이 허물을 맡아 다스리니 어찌 억울하게 하리오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이 본래 재앙의 문이로다”

시인은 어두운 곳에서 아무도 없을 지라도 선악을 가늠하고 공과(功過 공과 허물)를 기록하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진정한 선악은 끝내 완전히 매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비록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행한 일일지라도 천지와 양심의 증거를 도망해 피하기 어렵다. 수많은 재앙과 불행은 보기에 우연한 듯하지만, 실지로는 흔히 사람이 과거에 행했던 행위와 관련이 있다.

현실 생활 속에서 수많은 일은 당사자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내심으로는 왕왕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명백히 알고 있다. 시인은 아마도 바로 인생의 온갖 골절을 겪은 후에 비로소 이러한 소감을 지녔을 것이다.

“사람이 없다 하여 한 물건도 속이지 말라
훗날 돌이 말할 수 있음을 모름지기 염려해야 하리”

이 구절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수많은 사람이 강자 앞에서는 아주 조심하면서도, 약자는 능멸하기를 좋아하니, 즉 속담에서 말하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함’이다. 어떤 사람은 동물을 학대하고, 어떤 사람은 풀이나 나무를 함부로 해치며, 또 어떤 사람은 일시적인 분노로 인해 주변의 사물에 화풀이를 한다. 시인이 보기에 이러한 보기에 사소한 행위들은 사실 모두 한 사람의 덕행과 선념(善念)을 반영하는 것이다.

‘돌이 말할 수 있다(石能言)’는 것은 당연히 글자 그대로의 돌이 입을 열어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일종의 형상적인 비유이다. 그것은 세상의 만사만물(萬事萬物)이 모두 흔적을 남기며, 사람이 행한 모든 것 역시 모두 기록을 남긴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준다. 오늘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여긴 행위가, 끝내 어느 날엔가 자신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전법륜》 제7강에서는 다음과 같이 담론하셨다.

“사람ㆍ동물뿐만 아니라 또한 식물에도 모두 생명이 있는데, 다른 공간에서는 어떤 물질이든 모두 생명으로 체현될 수 있다.”

수련자의 각도에서 본다면, 만물은 모두 그것이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마땅히 더욱 자비와 선의(善意)로써 주변의 모든 생명을 대해야 한다.

사람이 약자를 능멸하고 중생을 해칠 때, 상대방은 어쩌면 반항할 힘이 없을지라도, 그것이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함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옛사람들은 흔히 “선에는 선의 보응이 있고 악에는 악의 보응이 있다”고 말했으니, 수많은 일은 단지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뿐이다.

현실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모함하고 박해하는 것은, 왕왕 오해와 편견 때문이거나 수련자가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각도에서 본다면, 이 역시 바로 일종의 자비와 인양(忍讓·참고 양보함)을 체현해 내는 것이다. 신불(神佛)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시비를 명석히 분별하고 착오를 고칠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든지를 막론하고, 마땅히 마음속의 선념(善念)을 지켜야 하며, 타인을 해치는 것을 중지하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해야 한다.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은 천지가 다 알고 있다. 신불이 중생에게 주신 것은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질 기회이지, 잘못을 용인하라는 구실이 아니다. 절대로 자비를 연약함으로 여기지 말 것이며, 더욱이 기회를 잃었을 때 비로소 후회해도 소용없게 되진 말아야 한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머리 석 자 위에 신명이 있다(舉頭三尺有神明)”고 했다. 신명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선량함을 유지하고 생명을 경외하며 자신의 언행을 단속하는 것은 시종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근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