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죽(新竹)
【정견망】
한번은 동료들과 회식을 가졌는데, 자리에서 두 어린이가 각자 휴대폰을 하나씩 들고 밥을 먹으며 놀고 있었다. ‘손놀림’이 어찌나 능숙한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이러한 장면은 이미 갈수록 보편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전자 게임이 진정으로 어린이들에게 있어야 할 행복을 얼마나 많이 빼앗아 갔는지 모른다.
필자가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1980년대 직원 기숙사 건물 아래에서 여전히 어릴 적 동무들의 노래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날이 어두워지고, 부모님의 부르는 소리에 분노가 섞일 때가 되어서야 우리 어린 동무들은 아쉬워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절 아이들에게는 휴대폰이나 태블릿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갖가지 아이들 놀이뿐이지만, 그 시절의 행복은 진실한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남자아이들만의 전용 놀이가 있었는데, 바로 ‘닭싸움’이라 불렀다. 이것은 경기성이 매우 강한 놀이였다. 놀이 참여자는 반드시 한 발로만 서서 뛰어야 했고, 양손으로 다른 쪽 다리를 잡아 올려 삼각형 모양을 만들며 무릎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했다. 놀이의 규칙도 매우 간단하여, 게임을 하는 양측이 무릎으로 서로 부딪치다가, 어느 한쪽이든 손을 놓치거나 넘어지면 경기에서 지는 것이다.
물론 놀이를 할 때는 계속해서 한 발로 뛰며 위치를 조정하고 이동해야 했으며, 그런 다음 기회를 봐서 무릎으로 상대방을 충격해야 했다. 이 놀이는 덩치가 큰 아이들에게 확실히 유리해서 힘만 있으면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힘이 없는 작은 아이도 완전히 이길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민첩한 이동에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기술을 더하면 우연히 몇 판을 이기기도 했다. 그러한 승리 후의 기쁨은 당시의 우리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전교 1등을 한 것에 못지않았다.
어떤 이의 고증에 따르면, ‘닭싸움’의 유래는 아마도 고대의 어떤 새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춤을 추면 비가 내린다. 외다리 새인데, 이름을 상양(商羊)이라 한다. 자통(字統)에서 이르기를: ‘상양’이다. 일명 우천(雨天)이라고도 하는데, 비가 내리려 하면 날면서 운다. 공자가 제나라 왕궁에서 이 새를 변별하였다.”(《금경(禽經)》)
당시 제나라 왕궁 밖에 외다리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날개를 펴고 뛰었다. 제나라 왕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공자에게 물어보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이 새는 상양이라고 하며, 이것이 나타나면 곧 큰비가 내릴 징조이니 속히 수해를 방지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어린아이들이 또 둘씩 서로 이끌고 한 발을 굽혀 뛰며 말하기를: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려 하니 상양이 춤을 춘다고 한다.” (《설원(說苑)》) 그리고 아이들이 상양의 모습을 모방해 한쪽 발을 구부리고 껑충껑충 뛰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것이 점차 ‘닭싸움’ 놀이로 변천한 것이다.
닭싸움이 남학생 전용 놀이였다면, 당시의 ‘사방치기(跳房子)’는 대부분의 여학생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물론 그렇게 경기성이 강한 놀이는 아니지만 놀이의 즐거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사방치기를 하기 전에는 먼저 집을 지어야 했는데, 분필이나 그 자리에서 돌멩이 하나를 찾아 맨땅에 집을 그린다. 집이라고 하지만 그저 여섯 칸, 열 칸짜리 큰 사각형들이었고, 그런 다음 사각형 위에 숫자를 표시했으며, 마지막 칸은 ‘천당(天堂)’으로 삼았다.
놀이를 할 때는 돌멩이를 첫 번째 칸 안에 차 넣은 후, 한 발로 첫 번째 칸에 뛰어들고, 다시 지탱하는 발로 돌을 두 번째 칸으로 차 넣은 다음, 두 번째 칸으로 뛰어드는 식으로 유추하여 마지막에 ‘천당’으로 뛰어든다. 이 놀이의 난이도는 결코 작지 않아서, 돌멩이가 까딱 잘못하면 칸 밖으로 나가거나, 혹은 중심을 잃고 양발이 땅에 닿으면 반칙이 된다. 다만 지역마다 노는 방법이 조금씩 달랐는데, 어떤 이는 외국에서도 어린아이들이 사방치기를 하는 것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사실 사방치기는 전통적인 중국 놀이가 아니라 유럽에서 발원한 것이며, 명청(明淸) 시기에 선교사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왔으니, 나름 외래품 중의 ‘골동품’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놀이를 꼽자면, 단연 숨바꼭질(捉迷藏)이었다. 그 시절에는 흔히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함께 모여 한번 놀면 한나절 동안 놀아도 지칠 줄 몰랐다.
놀이를 시작할 때는 먼저 가위바위보로 누가 술래가 될지 결정했는데, 잡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눈을 가려야 했다. 이때 다른 아이들이 수건으로 그의 두 눈을 단단히 싸매어 조금의 빛도 새어 나가지 않게 했다. 때로는 너무 단단히 매어 아이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다른 이들은 입을 막고 배를 움켜쥐며 즐거워했다.
놀이 구역의 범위도 정해야 했는데, 한편으로는 ‘장님’이 잡기 편하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놀이의 자극성을 더해 주었다. 사람을 잡는 것도 방법에 꽤 신경을 써야 해서, 단순히 가운데만 맴돌아서는 안 되고 고기를 몰 듯이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아야 했는데, 이것이 범위를 좁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참을성 없는 아이들이 갖가지 소리를 내거나 웃거나 소리를 질렀다. 이때 ‘잡는 이’가 한꺼번에 앞으로 나아가 마구 더듬으면 흔히 한바탕 소동과 비명소리가 일어났는데, 이 순간이 성공의 관건이다. 물론 숨을 죽이고 있는 참을성 있는 아이도 있어서, 처음에 잘 숨기만 하면 요지부동이었고, 다른 아이가 ‘밀고’하지 않는 한 그는 늘 다음 판까지 버텨낼 수 있었다.
요컨대 숨바꼭질은 지략과 신체 민첩성의 이중 대항전이었다. 물론 놀다 보면 이따금 넘어지거나 피부가 까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툭툭 털고는 곧바로 다시 놀이에 투입되어 우는 것조차 잊어버렸으니, 놀 때의 아이들은 참으로 강인했다!
숨바꼭질은 어린아이들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황제들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현종은 양귀비와 숨바꼭질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흥미롭게도 현종의 숨바꼭질 실력은 그다지 좋지 못하여 “옥진(양귀비)이 상(上 황제)을 잡기는 늘 쉬웠으나, 옥진은 가볍고 민첩하여 상이 매번 놓치니, 온 궁궐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치허잡조(致虛雜俎)》) 그러나 이 놀이가 사람에게 주는 즐거움은 천여 년 동안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사실 우리가 당시에 했던 놀이는 이뿐만이 아니어서 제기차기, 고무줄놀이, 팽이치기, 굴렁쇠 굴리기, 수건돌리기, 구슬치기, 실뜨기, 공기놀이 등등이 있었다. 문(文)적인 것, 무(武)적인 것, 혼자 하는 것, 단체로 하는 것, 배워온 것, 즉석에서 지어낸 것 등 그야말로 다양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어릴 적의 그 놀이들이 점차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으니, 지금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온통 ‘전자 화면’에 매여 있는 것을 생각하면 탄식이 절로 나온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9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