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아들의 운명이 대반전된 이야기

중국 대법제자 노율자(勞栗子)

【정견망】

나는 법을 얻은 지 거의 30년이 된 대법 여제자다. 그동안 나는 자신의 수련 이야기를 써본 적이 없다. 하나는 글재주가 없어서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깨달음이 너무 얕아 사부님께서 나의 수련 과정에서 보여주신 실제의 넓고 크신 은혜를 다 적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여 년 동안 사부님께서 수련하지 않는 내 아들에게 보여주신 예사롭지 않은 보살핌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눈으로 똑똑히 본 바이다. 오늘 그것을 적어내어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내가 1997년 봄에 법을 얻은 후, 사부님께서는 나의 신체를 정화해 주시어 반 달 동안 설사를 하게 하셨는데 설사를 할수록 몸이 가벼워졌다. 천목을 열어주어 다른 공간의 금빛 찬란한 신선들을 보게 하셨고, 나에게 명확한 인도를 주시어 더없이 선명한 꿈속에서 나의 두 손을 잡고 걸으시며 가르쳐주셨다. “가라, 앞으로 가라, 계속 가라, 제대로 걸어라……”

1999년 7월 20일 사악한 중국공산당이 대법을 탄압한 후, 나는 법을 배운 것이 깊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몰랐고, 이 박해의 본질과 대법제자의 사명을 의식하지 못하여 수련이 점차 나태해졌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불복하고 분개했으나, 어떤 반박해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언젠가 형세가 뒤바뀌면 나도 전처럼 연공하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책을 보고 연공을 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시간은 마음이 법에 있지 않았다.

나를 정말로 대법을 굳게 닦게 하고 한 걸음도 대법을 떠날 수 없게 만든 것은 2003년 이후였다. 그해에 나의 유일한 아들이 강직성 척추염(난치성 자가면역질환)에 걸려 집에 마비된 채 누워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거대한 마난(魔難)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이 마난을 이용해 내가 확고히 수련하도록 추동하시는 동시에, 내 아들의 모든 것을 단계별로 안배해 주셨다. 그로 하여금 걷지 못하던 상태에서 등산 여행을 다니게 하셨고, 전도가 유망하지 않던 상태에서 하이테크 회사의 기술 골간이 되게 하셨으며, 대상을 찾기 힘들던 상태에서 하늘이 내린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하셨다. 전후 반전이 너무나 커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이다. 아래에 세 가지 방면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1. 걷지 못하던 상태에서 등산 여행을 다니기까지

일찍이 2002년에 아들은 이미 이 병을 검사해 냈으나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때 그는 막 대학에 입학했는데, 병을 치료하기 편하게 하려고 북경으로 대학을 갈 기회를 포기하고 현지의 한 중점 대학을 선택해 다녔다. 당시에 나는 본래 그를 연공으로 이끌어 병을 치료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무신론과 중국공산당 사악한 당의 유언비어 선전의 영향을 받아 나의 건의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룬궁이 내 병을 고칠 수 있다 해도 나는 연공하지 않을래요”라고 말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중의학(中醫學)에 도움을 청했다. 북경의 한 중의가 지어준 약방문으로 반 년 동안 한약을 먹어 일정한 치료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설 명절이 다가올 무렵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다. 북경의 중의는 상황을 전해 듣고 특별히 내가 사는 곳까지 달려와 뜸 요법을 소개해 주며 매우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의 방법에 따라 매일 뜸을 떴는데, 결과는 좋아지기는커녕 뜸을 뜰수록 더 나빠졌고, 한 달 뒤에는 통증으로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뜸 뜨는 것을 그만두었다. 다시 방향을 돌려 현지의 한 중의원에 입원해 침을 맞았다. 십여 일 침을 맞아 약간의 효과를 보았으나, 사람이 다시 미열이 나기 시작했다. 의사는 미열이 날 때는 침을 놓을 수 없으니 미열을 다 고치고 다시 오라고 했다. 그때 마침 ‘사스(SARS)’가 발생한 데다 거동까지 불편하여 병원에 전혀 갈 수 없었다.

북경의 그 중의는 상황을 알고 많은 약초를 가지고 우리 집에 달려와, 한약으로 아들의 미열을 치료하려 했다. 나는 매우 감동했고 희망을 전부 그에게 걸었다. 그 후 나는 매일 큰 가마솥 두 개에 약을 달여야 했고, 다시 세 사발로 농축해 세 번에 나누어 마시게 했다. 이렇게 매일 달이고 매일 마신 지 20여 일이 지났으나 좋아지지 않았고, 매일 오후만 되면 미열이 났는데 최고 38도 5, 최저 37도 5였다. 사람이 날로 말라가는 것이 눈에 보였고, 원래 60킬로가 넘던 체중이 54킬로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 남편은 외지에서 일하고 있어서, 나 혼자 병든 아들을 대면하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매일 지옥 같은 곤경 속에서 삶아지듯 고통받았다. 어느 날 밤 너무나 시름겨워 침대에 가로로 엎드려 있었는데, 마음속이 헝클어진 실타래가 막힌 것처럼 극도로 괴로웠다. 그렇게 엎드려 있다가 잠시 후 갑자기 한순간에 가벼워졌고, 마음을 막고 있던 그 물건이 단숨에 사라졌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니 집은 여전히 그 집이고 아들도 여전히 그 아들이었으나, 나의 심정이 바뀌어 시름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종의 기쁨과 흥분되는 느낌이 있었다. 당시 나도 영문을 몰라 어찌 된 일인지 몰랐으나, 그저 시름이 없어졌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사부님께서 나의 그 ‘시름 덩어리’를 가져가 버리셨음을 깨달았다.

아들이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동안 닦는 둥 마는 둥 하던 나는 그 시기에 다시 수련을 다그쳤다. 내심 법 속에서 의지할 곳을 찾아 난관을 걸어가기를 갈망했다. 내가 다른 길은 전혀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구함이 있었음에도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도리어 나를 관장해 주셨다. 기적은 그때부터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근에 사는 노부부 동수가 내게 권고했다. “아이가 수련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당신은 우선 그에게 동작을 연습하게 하여 활동하게 하는 것도 좋아요.” 나는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날 오후, 나는 긴 소파에 앉아 옆에 있는 아들에게 “나와 함께 가부좌를 하고 움직여보자!”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움직인다고는 했으나 사실 그는 단지 두 손으로 제인 하고 두 발을 바닥에 교차했을 뿐, 다른 어떤 동작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녹음기를 켜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연공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신체가 허약해 오랫동안 등받이를 떠날 수 없었으므로, 10분이 지나자 멈추었다.

멈춘 후 그는 탁자 위의 체온계를 집어 겨드랑이에 끼웠다. 5분 후 체온계를 꺼내 보니 거기에 36도 5부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세상에! 이것은 정상이지 않은가? 겨우 10분이었다. 그전의 20여 일 동안 매일 오후 이 시간만 되면 미열이 났고 그 한약들을 다 헛먹었는데, 단지 이렇게 잠시 앉아 있었더니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무한히 기뻤다. 아들이 살 길이 생겼다!

확실한 사실 앞에서 아들은 처음으로 할 말이 없었다. 무신론이 그의 마음속에서 와해되기 시작했고, 그는 대법 서적을 보기 시작했으며 나와 함께 가부좌를 했다. 그 후 다시 한약을 먹으려 하자 토하기 시작해 먹어 넘기지 못했다. 연속으로 두 번을 토한 후, 나의 일깨움 하에 그는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았고 사부님이 자기를 관장하심을 알았다. 며칠이 지난 후 미열이 완전히 사라졌고 한 달 사이에 체중이 10킬로 정도 늘었다. 부근의 동수들이 알고 난 후 모두 매우 기뻐하며 잇달아 찾아와 그가 수련을 잘하도록 격려해 주었고, 그 본인도 수련할 염원을 가졌다.

그러나 수련은 엄숙한 것이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당신이 여기에 앉아 있다고 해서 당신을 곧 수련자라고 할 수는 없다. 사상이 근본적으로 바뀌면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이런 것에 그치지 않으며” 아마도 업력이 크고 근기가 좋지 못해 조성된 장애 때문인지, 아들은 참되게 닦아 들어오지 못했고 단지 병을 고치려는 마음으로 대법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사부님께서는 단지 장시간 미열이 나던 이 가장 긴급한 문제만 해결해 주셨고, 척추염이라는 이 병은 그에게 건드리지 않으셨으므로 그는 여전히 관절이 아파 걷지 못했다.

이 시기에 나는 한편으로 자신의 수련을 다그치고, 다른 한편으로 아들이 법을 배우고 연공(제대로 하지는 못함)하도록 독촉하며 조속히 병이 낫기를 바랐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비록 이랬을지라도 내가 수련을 다그쳤기 때문에 대법의 지탱이 있어 나의 마음은 훨씬 가벼웠다. 이 기간에 나는 또 그를 위해 의사를 찾고 약을 구했다. 그해 연말에 현지의 한 중의원에서 마취 견인 치료를 한 번 받았는데, 다행히도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며칠 후에는 걷고 자전거를 탈 수 있었으며, 동기에 치료받은 세 환자 중 그가 효과가 가장 좋은 한 사람이었다. 의사와 우리는 모두 매우 기뻐했다. 나와 아들은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다고 느꼈다.

해가 바뀌어 아들은 복학했다. 통증 문제가 줄곧 존재했기 때문에 걷고 거동하는 것이 비교적 곤란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독학했고 시험을 칠 때만 학교에 갔으므로 학업 성적도 따라가지 못했다. 한 학기가 지난 후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집에 있었다.

이 마난 속에서, 압력 하에서 그 시기에 나는 한편으로 아들에게 법을 배우고 수련하도록 독촉하고, 한편으로 마음을 써서 자신을 수련했으며, 아들의 협조 하에 진상을 말해 사람을 구하는 일을 했다. 바쁜 와중에 때때로 아들의 건강과 앞날 때문에 염려했다.

어느 날 나는 사부님의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을 배우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은 대법제자의 원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알고 있는가? 당신 앞뒤의 모든 일을 모두 사부가 당신에게 책임져 주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는가? 당신이 걱정한다고 될 일인가? 당신이 배치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말해서 될 일인가? 나는 여러분에게 이 이치를 말하지 않았는가? 그에게 복이 없다면 당신이 무엇을 배치하든지 모두 소용이 없다. 그러나 사부는 오히려 당신에게 배치해 줄 수 있으며, 있든지 없든지 나는 모두 배치할 수 있다. 당신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가? 오로지 당신이 수련하기만 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모두 당신에게 책임져 줄 것인데, 이를 말하지 않았는가?”

이 단락의 법은 전에도 여러 번 읽었으나 모두 그리 개의치 않았었다. 왜인지 이번에는 사부님께서 직접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져 단숨에 나의 영혼 깊은 곳을 내리쳤다. 격동된 나는 아들 앞에서 눈물을 비 오듯 흘렸고 걷잡을 수 없이 오랫동안 울었다. 나는 평소에 잘 울지 않으며 아들이 병이 가장 심했을 때도 울지 않았었다. 이때의 울음은 감동이었고 깨달음이었으며, 끝없는 수심 속에서 최종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사부님의 이 단락 말씀을 반복해서 음미했고 마음속이 극도로 밝아졌으며 심경이 마치 무수히 넓어진 것 같았다. 활연히 열리고 하늘이 맑고 몸이 투명해지며 가볍고 즐거운 등등이 모두 그때의 느낌이었다.

이후부터 아들의 신체, 아들의 전도는 나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무겁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매우 가벼워졌다. 이전에 나는 아들의 수련에 집착하여 그는 자주 사부님의 말씀으로 나에게 응수했다. “남에게 수련을 강요할 수 없어요.” 나중에 그는 점차 수련에서 이탈하여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가 무엇을 배우고 무엇으로 바쁜지 알 수 없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맡겨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아들이 이미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았으니, 내가 법 속에서 확고히 수련하기만 하면 사부님께서 모든 것을 다 관장해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후의 시간 동안 의사를 찾고 약을 구하는 것, 아들의 전도 등등을 나는 그리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리 하지도 않았다. 대법 수련의 세 가지 일을 하는 것 외에는 그저 아들의 일상생활을 돌보았다.

이 기간에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법을 홍보하고 사람을 구하기도 했고, 교외에 큰 집을 사서 이사해 살며 현지의 동수들을 알게 되어 현지의 정법 사람 구하기 활동에 융합되었다. 나를 본 사람들은 모두 내가 밝고 가벼워 보인다고 했으며 집에 마난이 있는 느낌을 알아보지 못했다.

2010년 어느 날 나는 진상을 말하다가 경찰에게 발견되어 납치되고 가택수색을 당했다. 구치소에 막 들어갔을 때 심정이 낙담되어 남편이 아들을 잘 돌보지 못할까 봐 염려했다. 그러나 위의 사부님의 그 단락 법을 생각하니 마음이 금방 안정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밖의 일은 내가 아무것도 관장할 수 없으니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겠다, 일체는 모두 사부님이 관장하신다.’ 나는 끊임없이 사부님의 시를 외웠다.

“살아 바라는 것 없고
죽어 애석할 것 없네
허망한 생각 다 떨쳐버리면
부처 수련 어렵지 않도다”

외우고 외우고 외우며 어떤 다른 것도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이 바뀌어 시름겨운 얼굴에서 기쁜 얼굴로 바뀌었고 심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그곳의 수감자들에게 법을 홍보하고 ‘삼퇴’를 말했다. 8일 후 친지들의 구명하에 나는 구치소를 걸어 나왔고 감옥의 재난을 해체했다.

집에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은 나에게 그가 일종의 수입 약을 발견했다고 말했는데, 면역억제제로서 그의 병에 억제 작용을 하며 유효율이 비교적 높다고 하여 우리는 써보기로 결정했다. 결과는 한 번 쓰자마자 뚜렷한 효과가 있어서 관절이 그리 아프지 않았다. 아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나는 즉시 이 소식을 전화로 그와 함께 입원했던 환우(患友)에게 알려주어 이 약이 효과가 좋으니 어서 써보라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환우는 자기가 이미 이 약을 써보았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전화를 내려놓고 나는 그 환우를 위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동시에 이것이 또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 것임을 의식했다.

이러한 치료 효과가 보장되자 아들은 또 북경의 한 큰 병원과 연락하여 고관절 치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과 과정 중에 우리는 줄곧 마음속으로 “파룬따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웠고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후 또 중의 침도(針刀) 치료를 받아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이 일들은 모두 아들이 스스로 연락한 것이며 나는 단지 그에게 협력했을 뿐이다. 거의 1년의 시간을 들여 치료와 재활 훈련을 거치며 아들의 신체는 극대화된 개선을 보였다. 허리가 굽고 등 표기가 힘들어 걷기 곤란하던 데서 곧게 서서 혼자 걷기까지 되었다. 2년 후에는 정속인과 똑같이 등산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수년간의 통증으로 인해 어깨와 목 부위 관절이 유착되어 해당 부위 활동이 제한되므로 보기에 자연스럽지 못할 뿐이다.

이만 해도 우리는 이미 사부님께 매우 감사해했다. 당시에 그와 똑같았던 환우들은 이미 집에 누워있은 지 여러 해가 되어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사부님께서 관장해 주시지 않았다면 아들의 현재 비참한 상태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2. 전도가 유망하지 않던 데서 첨단기술회사 핵심이 되기까지

아들이 병이 중해진 이후부터 친척들은 이 병의 심각성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 이 아이는 학교에도 갈 수 없고 직장 생활도 할 수 없으니 장차 아무런 전도가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 병은 고칠 수 없기 때문에 간신히 억제해 둔다 하더라도 고졸 학력에 병든 신체를 가진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고모는 이 일을 생각하면 참지 못하고 울며 나의 고달픈 운명을 탄식했다. 나의 사촌 남동생은 외지에서 그를 보러 달려왔다가 떠날 때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외지의 여러 친척들이 다녀간 후 모두 심정이 무거웠으며, 나에게 돈을 좀 주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대법을 수련한 것이다. 당시에 나의 심정은 친척들보다 훨씬 가벼웠다. 법 속에서 나는 알았다. “사람은 이전에 나쁜 일을 하여 생긴 업력(業力) 때문에 병이나 마난(魔難)이 조성된다. 고통을 겪음은 바로 업력의 빚을 갚는 것이다.”(《전법륜》) 아들이 죄를 겪는 것은 업을 갚는 것이다. 하나의 수련자로서 바로 아들의 마난이 나에게 이러한 수련과 제고의 기회를 제조해 준 것이며, 그 속에서 나는 마난의 고험 하에 자신을 수련하고 자신을 승화하여 최종적으로 반본귀진(返本歸真)하고 천국으로 돌아가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마난이 없이 당신이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만약 당신에게 속인 중에서 복만 누리게 하고, 돈이 많아 당신 집의 침대도 모두 돈으로 깔았으며 아무런 고통도 없다면, 그럼 당신에게 신선이 되라고 해도 당신은 다 싫다고 할 것이다.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인생행로를 개변해 줄 수 있으며, 또 오직 수련해야만 비로소 개변할 수 있다.”(《전법륜》)

이러한 법리를 명백히 알았을 때 나는 자신의 수련을 다그쳤고, 아들에 대한 정, 속인 속에서의 명리와 같은 이러한 집착심을 갈수록 담담하게 내려놓았다.

물론 그때는 수련 층차가 높지 않아 인심(사람의 마음), 아들의 전도에 대한 염려가 때때로 밖으로 번져 나왔다. 그러나 매번 이럴 때면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당신 앞뒤의 모든 일을 모두 사부가 당신에게 책임져 주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는가? 당신이 걱정한다고 될 일인가? 당신이 배치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말해서 될 일인가?”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그리하여 이러한 일들을 나는 기본적으로 그리 생각하지 않았고, 많아야 ‘아들이 컴퓨터를 아니까 장차 밖에 나가 일하지 못하더라도 인터넷으로 무슨 일을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비록 아들의 일이 난제이기는 했으나 사부님이 계시고 대법이 받쳐주고 있어 나의 생활은 일반 속인들보다 더 답답하지 않고 든든했다.

아들이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엄마, 앞으로 틀림없이 가족들이 나를 부양하지 않게 할께요.” 아마도 그가 인터넷에서 무슨 기회를 발견한 모양이었으나 나도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매우 격동되어 나에게 알렸다. “엄마 나 일감을 받았어요!” 인터넷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일감을 받았는데 시간당 계산하여 한 시간에 50위안이라고 했다. 나는 “참 좋구나, 돈이 적다고 탓하지 마라”고 말했다. 이 해에 그는 대략 3만 위안을 벌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자신의 생활이 대책이 섰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정말 내가 마음 쓸 필요가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그는 독학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자격증을 땄다. 또 한참 지나 나에게 말했다. “외지에 나가서 일하고 싶어요, 상해나 북경 같은 네트워크 기술이 발달한 곳에 가서 일하고 싶어요.” 내가 깜짝 놀라 말했다. “외지에 간다고? 너 혼자 가느냐 아니면 내가 너를 따라가느냐?” “당연히 저 혼자죠.” “안 된다, 너는 독립적인 생활 능력이 없다, 빨래하고 밥 짓는 것은 고사하고 양말 한 켤레도 빨아본 적이 없잖냐. 가려면 나도 너를 따라가야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되도록 외지에 안 가면 좋겠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병치레를 하여 다 내가 그의 생활을 돌보았는데 나를 떠나면 틀림없이 안 된다, 가려면 나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들이 북경의 한 큰 전자상거래 회사에 채용되어 컴퓨터 기술 서비스를 하게 되었는데 면접에 합격하면 가서 출근할 수 있다고 했다. 이때에야 나는 아들이 정말로 독립하여 외지로 일하러 가려 함을 의식했고 나도 그를 따라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면접에 합격한 후 나와 남편이 함께 그를 북경으로 데려다주었다. 당일 아주 순조롭게 회사 부근의 한 사립 대학교 안의 학생 기숙사 방 한 칸을 얻었는데, 해가 잘 들고 화장실이 딸려 있어 목욕하고 세탁기로 빨래할 수 있어 거주 환경이 매우 좋았고 학교 식당과도 매우 가까웠다. 너무나 편리했다! 이제 어떤 생활 문제든 다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마치 이 모든 것이 사전에 안배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아들이 첫날 출근했다가 돌아왔는데 목에 회사 직원 카드를 걸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며 나는 매우 감개무량했다, 이것은 이전에 내가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다. 당장에 나는 몇몇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보고했고 그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으며 현지의 친척은 특별히 축하하러 달려오기도 했다.

나와 남편은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내심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감사함으로 가득 찼다.

아들은 이 회사에서의 업무가 상사에게 인정을 받아 1년 후에 월 급여가 8000위안에서 1만몇천 위안으로 올랐다. 이때 그는 또 직장을 바꾸고 싶어 했다. 해당 회사의 주업은 상품 판매이고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은 단지 보조적인 것이라 전문적인 전도가 없다고 말했다. 그때 그와 함께 근무했던 한 동료가 이미 퇴사하여 전문적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을 종사하는 하이테크 회사를 창업하는 중이었는데 그에게 함께 일하자고 초청했다. 자세한 고려를 거친 후 그는 이 초기에 와서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에 종사했다. 막 갔을 때는 회사에 몇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는 자연스럽게 기술 핵심이 되었고 사장(전 동료)에게 매우 중용되었다.

매우 다행스럽게도 이 회사는 초창기에 천시, 지리, 인화를 모두 얻어 시작하자마자 신속히 발전했고 몇 년 후에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현재는 이미 체급이 비교적 크고 고객이 국내와 세계 여러 곳에 분포한 유명한 회사로 성장했으며 기술 수준이 세계 선두에 도달했다. 이 수년 동안 아들은 이 회사에서 줄곧 핵심 기술 골간이었으며 그의 급여, 대우는 이미 업계의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현재 고등학교 문학 학력인 아들이 사업상 도달한 고도는 일반 대학 학사, 석박사들도 좀처럼 도달하기 힘든 것이다. 20년 전으로 돌려 가 병으로 퇴학하고 집에 있던 이 아이를 대면했을 때의 나는 꿈에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그때 생각했던 것은 어떻게든 돈을 좀 더 모아두어 그가 향후 생활할 때 쓰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는 자기 힘으로 자립했을 뿐만 아니라, 6, 7년 전에는 북경에 집을 샀고(우리의 지원이 있었음), 몇 년 전에는 또 우리 노부부를 위해 새 집을 사주었다.

이러한 일들을 이야기할 때 친지들 중 어떤 이는 아들이 똑똑해서 그런 결과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만 창업에 이렇게 성공한 회사를 만나기는 매우 힘들다. 통계에 따르면 당시 이러한 기술 회사의 창업 성공률은 5퍼센트 미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사는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줄곧 고속 발전을 하고 있으며 관련 분야에서 양호한 전망과 잠재력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아들이 다행히 이러한 기회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대법이 복을 주셨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으며 대법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결과이다.

3. 결혼 상대를 찾기 힘들던 상태에서 하늘이 내린 좋은 인연을 만나기까지

아들이 일할 때 이미 30세에 가까워졌으므로 대상을 찾아 결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고려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병이 심각해 초래된 어깨와 목 활동이 제한되는 후유증으로 인해 그의 본래 괜찮았던 용모에 손상을 입었다. 나와 친지들은 이 아이가 각 방면으로 모두 만족스러운 대상을 찾기는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고, 오직 조건을 낮추어 예컨대 신체에 약간 잔재가 있거나, 문화 소양이 높지 않거나, 가정생활이 빈곤한 등등이어야만 그의 혼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당시에 나는 직장 생활 일은 그 개인의 노력에 기댈 수 있지만 대상을 찾는 일은 그 개인의 노력에 기대어선 잘 안될 것이라 여겼다. 한편으로 그는 신체에 결함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성격이 내향적이라 사람 사귀는데 능하지 못했고, 게다가 그의 업무 환경에 여성이 많지 않아 자유연애를 할 기회가 매우 적었다. 이것은 가장으로서 마음을 좀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첫 몇 년 동안 아들은 업무에 바빠 자신의 혼인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친지가 몇 명 소개해 주었으나 각 방면 조건이 모두 평범하여 그도 모두 개의치 않았다. 나중에 내가 있는 곳에 선후로 두 명의 학력과 소양이 모두 괜찮은 처녀가 그와 접촉할 의향이 있어 내가 선을 연결해 연락하게 해주었다. 아마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몇 번 연락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 북경에서도 몇 번 소개팅을 했으나 역시 성과가 없었다. 나는 좀 조급해져 그가 까다롭다고 원망했다. 이 과정은 나 역시 끊임없이 자신을 닦으며 아들의 혼인에 대한 집착을 담담하게 내려놓는 과정이었다. 이 일을 고려할 때마다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당신은 오직 수련하러 가기만 하면 내가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준다.”

2019년 9월 어느 날 나는 아들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는데 자기가 여자친구를 찾았다고 했다, 본 회사에 새로 온 지 얼마 안 된 석사생으로 인사 업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10월 1일” 연휴에 집으로 데려와 우리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이 돌연한 희소식은 나로 하여금 감히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게 했다. “10월 1일”에 돌아왔을 때 내가 이 처녀를 보니 가녀리고 아담하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마음속으로 매우 만족했다. 듣자니 둘이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서로 끌려 아주 빨리 함께 걷게 되었다고 했다. 보아하니 둘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정말 기뻤다. 친지들도 알고 난 후 모두 따라 기뻐해 마지않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예상을 크게 초과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단지 처녀가 아들보다 8살 연하라 그녀와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그녀는 “저는 아직 어리니 서두르지 않아요”라고 말하곤 했다. 아들은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고 나에게도 그녀와 이 이야기를 급하게 나누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 대수롭지 않게 보인 세부 사항이 나중에 전체 일의 변고를 조성했다 (뒤에 이야기함).

음력 설에 아들이 이 처녀를 데리고 집에 와 이틀을 묵고 다시 쌍쌍이 그녀의 처가(내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도시)로 갔다. 우리는 또 특별히 처가 부모님에게 비교적 귀중한 선물을 택배로 보냈고 상대 부모 역시 우리에게 상응하는 선물을 답례로 보내왔다. 둘의 관계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었고 양가 부모도 연락을 수립했다.

해가 바뀌어 “5월 1일”이 다가올 무렵 아들이 전화를 걸어 그들이 연휴 기간에 양가 부모가 우리 집에서 만나 결혼 약속을 상의하도록 안배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당연히 기뻤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대하던 바였다. 나와 남편은 뜨거운 열정으로 각종 준비를 했다. 5월 1일이 되자 처녀와 내 아들은 그들 일가(그녀의 부모와 남동생 한 명 포함)를 외지에서 우리 집으로 데려왔고 양가 부모가 정식으로 대면했다. 이어서 우리가 안배한 호텔에 투숙한 후 만찬을 진행했다. 식사 도중 양가 부모는 각자 상대방의 아이를 칭찬하며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내가 주동적으로 약혼 이야기를 꺼냈다. 상대 부모는 비교적 신중하여 돌아가서 집안 친척들과 상의해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우리도 이해했다, 결국 아들의 상황이 좀 특별하니 신중하게 구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다음 날 우리는 함께 나들이를 했다. 점심 식사를 할 때 상대 부모가 갑자기 당장 약혼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선포했다. 말하기를 전날 밤 딸이 그들에게 “양가가 한 번 만나기 쉽지 않은데 어차피 쌍방이 다 좋게 보았으니 도리어 일찍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쌍방의 염원이 일치하자 우리는 당연히 기뻤다. 그리하여 원래 계획대로 상대방에게 액수가 적지 않은 예금을 주었다. 또 금방에 가서 처녀를 위해 금목걸이, 금귀걸이, 옥팔찌를 샀다. 또 그녀의 어머니를 위해 금목걸이를 샀고 그녀의 남동생을 위해 귀중한 시계를 샀다. 그리고 당해 “10월 1일” 기간에 혼인 등록(신고)을 하기로 상정했다.

이 모든 것을 치르고 난 후 우리는 일체가 다 건실해졌다고 여겼으며 이제 며느리를 맞아 시부모가 되기만 기다렸다. “10월 1일” 연휴 때 둘은 결혼사진을 찍고 우리 집에 와서 하루를 묵은 후, 다시 우리 집의 호구부를 가지고 함께 처가로 가 연휴가 끝난 후의 첫 출근일에 그곳에서 등록 신고를 하려 준비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등록을 앞둔 긴박한 시기에 일이 그만 틀어져버렸다. 이 기간에 우리는 처가에 와서 손님이 되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처녀는 집에 없었고, 친구를 만나 놀러 갔으니 직접 식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우리가 식당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우리를 대하는 것이 이전처럼 열정적이지 않음을 발견했다. 단지 예의상 자리를 권하고 음식을 권할 뿐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좀 이상하다 느꼈으나 깊이 생각지 않았다. 돌아온 후에도 한마음으로 그들이 혼인을 등록했다는 소식만 기다렸다. 등록일이 되어 나는 전화로 소식을 물었다. 아들이 말하기를 처녀가 “우선 등록하지 말자, 너무 서두르지 말고 좀 있다가 다시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단숨에 처녀가 마음을 바꾸었을지 모른다고 의식했다. 아마 문제는 그녀가 친구를 만났을 때 발생했을 것이다.

아들이 일찍이 말하기를 그녀는 이전에 부모의 좋지 못한 혼인 관계의 영향을 받아 결혼할 생각이 없었고 친한 친구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이전에 사귀었던 남친과도 상대방이 결혼을 제기했기 때문에 헤어졌다는 것이다. 내 아들과 결혼하는 데 동의했던 이유는 내 아들이 선량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느껴 결혼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짜 등록하는 그 순간이 되자 원래의 생각이 다시 튀어나왔고 그녀는 주저하는 심정을 품고 친구를 찾아갔던 것이다. 친구의 설득에 다시 결혼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 버렸다. 상황이 비록 이랬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아들과 그녀 부모의 권도를 통해 그녀의 생각을 바꾸어 등록을 끝내기를 바랐다.

나는 기다렸다. 대략 두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난 후 아들이 갑자기 둘이 이미 정식으로 헤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처녀가 예물을 돌려보냈고 몇 가지 장신구는 그녀에게 기념으로 남겨두라고 주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마음은 단숨에 반 토막으로 식어버렸고 직접 침대에 누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모든 노력이 다 허사로 돌아갔구나, 너무나 아깝다, 다시 어디 가서 조건이 이렇게 좋은 처녀를 찾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친지들도 알고 난 후 모두 안타까워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수련인임을 알았고, 자신의 그러한 상태가 바로 인심이고 집착이며 아들에 대한 정이자 아들의 혼인 문제에 대한 심각한 집착임을 명확히 의식했다. 이것은 내가 정을 담담하게 내리고 집착을 버릴 기회였다.

그 며칠 동안 인심(人心)과 불심(佛心)이 끊임없이 부딪혔다. 때때로 처녀에 대한 원망이 튀어나왔다. “결혼하기 싫으면 왜 사람과 연애를 했는가? 이것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염두들은 번번이 수련의 정념에 의해 억제되었다. 이것은 정이기 때문이며 사랑과 미움은 모두 정이고 수련자가 반드시 닦아 버려야 할 물건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천천히 의식하기를 이 처녀가 나를 도와 정관(情關)을 넘겨주고 있으니 내가 그녀에게 감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 일념을 강화하기 위해 나는 필기구를 들고 종이 위에 끊임없이 적었다. “효명(曉明)이 나를 도와 정마(情魔)를 제거하네, 효명이 나를 도와 정마를 제거하네……” 끊임없이 적고 끊임없이 적었다. 한참 지나 인심이 올라오면 다시 적었다. 며칠 동안 다 이랬으니 참으로 얼마나 많이 적었는지 알 수 없다. 천천히 정념이 갈수록 강해져 처녀에 대해 한 가닥의 미운 마음도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상반되게 그녀에 대한 자비의 마음이 생겨났다.

그녀는 사회 전체 풍기가 패괴된 피해자라 느껴졌고 이렇게 가녀린 여자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남편의 보호가 없다면 어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는가? 그녀를 위하는 생각에 기초해 나는 전화로 처녀를 설득해 자기 인생의 행복을 고려해 마음을 돌리게 하려 했다. 그러나 아들이 도리어 나를 저지하며 말했다. “엄마는 그녀를 찾으면 안 돼요, 그녀가 엄마를 무서워해요.” 내가 생각하니 그렇기도 했다, 그녀가 보기에 이유 없이 혼인을 번복한 것은 나에게 큰 상처를 입혔을 것이니 내가 틀림없이 그녀를 미워할 것이라 여겨 감히 나를 대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일은 아들이 일찍이 그녀에게 말했었고 첫 대면 때 내가 그녀에게 대법 진상을 말해주었으며 그녀가 사악한 당의 대 조직에서 탈퇴하도록 돕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때의 그녀는 아직 내가 하나의 대법 수련자로서 그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자비로운 심태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나는 이 생각을 포기했고 단지 묵묵히 그녀가 좋은 인생을 살기를 축원할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고 그녀의 사상 압력을 덜어주기 위해 나는 그녀에게 답장이 필요 없는 문자 한 통을 보냈다. “효명, 너는 선량하고 좋은 아이란다, 향후 네가 어디를 가든 아줌마는 항상 네가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영원히 축원하마!”

메시지를 보낸 후 나의 마음은 평온해졌고 넓어졌다. 이 한 페이지는 이렇게 나의 심성이 승화함과 동반하여 가볍게 넘겨졌다.

그 후 나는 아들과 통화할 때 가끔 그에게 서둘러 여자친구를 찾으라고 넌지시 띄우기도 했으나 모두 비교적 가볍게 묘사했을 뿐 이전처럼 집착하지 않았다. 사실상 아들은 이 일에 대해 비교적 담담하게 대처하여 그리 너무 개의치 않았고 도리어 더욱 업무에 전념하여 성과가 아주 좋았다. 여자친구가 혼인을 번복해 그에게 초래한 상해는 금방 머리 뒤로 던져버렸다. 보아하니 이 일은 주로 나를 닦기 위한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사부님께서는 내가 이 일에서 위로 닦아 올라오고 승화해 올라온 것을 보시고, 뜻하지 않게 또 우리에게 더 좋은 며느리를 안배해 주셨다.

시간이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마침 역병 봉쇄 시기였는데, 아들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에 외부에서 바이러스가 유입되어 밖으로 나갈 수 없게 완전히 폐쇄되었다. 커뮤니티 방역 직원들이 각 동 주민들을 위해 위챗 단체방을 만들어 상호 부조 활동을 조직했다. 각 가구 주민들의 개인 정보 예컨대 성명, 성별, 나이, 인구, 근무 단위 등을 모두 단체방에 올렸다. 비록 아들이 이곳에 집을 사서 거주한 지 3년이 넘었으나 평소에는 이웃들과 서로 왕래가 없어 알지 못했었다. 이번에 모두가 서로의 정보를 다 알게 되었고 채소를 배달받고 핵산 검사를 할 때 모두 만나서 알게 되었다.

아들의 바로 옆집 주민(벽 절반이 남북으로 연결됨)는 독신 처녀였는데 석사 학력에 금융 기관에 종사하고 있었고 아들보다 세 살 연하였으며 마침 남편감을 찾는 상태였다. 이 처녀는 내 아들의 상황을 보자마자 주목하게 되었고 주동적으로 다가와 접촉하고 한담을 나누며 매우 높은 열정을 보여주었다. 아들은 처음에 비교적 수동적이었는데 왜냐하면 이 처녀가 외모, 키, 소양, 수입 수준과 가정 조건이 모두 전 여자친구보다 한 단계 위였으므로 약간 과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녀가 명확하게 그와 사귈 의향이 있음을 표시했을 때 아들은 자기가 신체에 병이 있는 갖가지 상황을 먼저 말해주며 상대방더러 잘 생각해 보라는 뜻을 전했다. 이렇게 되자 처녀는 아들의 신체 상황에 대해 개의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가 성실하고 선량하며 신뢰할 만하다고 느껴 더욱 교제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 후 둘은 빈번하게 접촉하며 이해하게 되었다. 더욱이 옆집이었기 때문에 만나기가 너무나 편리했다.

4개월 동안의 깊이 있는 이해단계를 거쳐 그들은 연애 관계를 확정하고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아들이 이 소식을 나에게 알려주었을 때 나는 평온하면서도 감개무량했다. “이것은 참으로 신의 한 수로구나!” 나는 감히 기뻐하지 못했고 환희하지 못했으며 오직 감사할 뿐이었다, 우리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사부님 외에 누가 이렇게 교묘하게 이 모든 것을 안배할 수 있겠는가?

둘은 아주 빨리 등록 결혼을 했고 두 가구가 긴밀히 맞닿은 문 위에 동시에 커다란 붉은 쌍희(囍) 자가 붙었다. 현장에 도착한 친지들이 찬탄했다. “이것은 참으로 하늘이 내린 인연이로구나!” 현장에서 신랑과 신부는 모두 큰 상을 받은 것처럼 감동하고 흥분해 했다. 나는 그들에게 대련 한 부를 선물했다.

(상련) 남북 방이 반 쪽 벽으로 서로 막혀 이웃이 되었고, 南北房半牆互隔爲近鄰

(하련) 자녀의 마음 두 정이 서로 기쁘게 맞아 한 가정을 이루었네. 兒女心兩情相悅成一家

(가로쓰기) 하늘이 내린 좋은 인연 天賜良緣

아들은 이 대련이 공정하고 딱 맞아떨어진다고 칭찬했다.

그들이 결혼한 지 4년이 되었는데 둘의 관계는 갈수록 바늘과 실처럼 좋았다. 올해 3월에는 또 귀한 아들을 얻었다. 한번은 내가 아들에게 물었다. “만약 네 신체에 아무런 병도 없고 정속인과 똑같이 대학을 다니고 석사를 하고 박사를 하고 직장을 구하는 등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상황이라 하더라도 찾을 수 있는 좋은 며느리가 기껏해야 이 정도이지 않겠느냐?” 그는 인정했다. 이 일에 대해 나는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내가 아들의 혼인 파동 속에서 심성을 제고하고 자비심을 낸 것을 보시고 교묘하게 더 좋은 사람을 우리에게 안배해 주신 것이다.

아들이 신체, 사업, 혼인이라는 이 세 가지 인생의 큰일에서 산더미처럼 겹쳐 길 없는 듯하다가 버들 푸르고 꽃 밝아 또 한 마을을 이룬 듯한 진화 과정을 되돌아보면, 외부 사람이 보기에는 불가사의한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발하는 감개는 바로 ‘내가 대법을 수련했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내 아들을 전면적으로 접수하여 관장해 주신 것’이다. 관장해 주신 것이 너무나 좋아서 내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바이다. 이것 역시 사부님말씀을 실증한다.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인생행로를 개변해 줄 수 있으며, 또 오직 수련해야만 비로소 개변할 수 있다.” (《전법륜》)

“당신 앞뒤의 모든 일을 모두 사부가 당신에게 책임져 주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는가?”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조카딸이 이 안의 오묘함을 명확히 알아채고 말했다.

“이모, 오빠의 이런 좋은 일들은 바로 이모가 파룬궁을 수련했기 때문이에요.”

확실히 그렇다, 만약 내가 대법을 닦지 않았고 우리 위대하신 사부님의 신묘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현재 내 아들의 생활이 아직 얼마나 힘들지 알 수 없다!

당장 나에게는 오직 일념뿐이다. 대법 수련의 길을 확고하게 걸어가며 정념정행으로 사부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보답하겠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