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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말이 있다: 검댕에도 풍골이 있다

장수객(長袖客)

【정견망】

책상 앞에 놓인 벼루에 맑은 물 몇 방울이 떨어지고 먹이 연지(硯池) 안에서 가볍게 회전한다. 처음에는 그저 미세한 사각사각 소리뿐이었으나, 점차 검은색이 물속에서 번져가며 짙으면서도 막히지 않고, 윤택하면서도 빛이 난다. 한 줄기 청아한 먹향이 뒤따라 피어오르니, 마치 고요한 세월의 깊은 곳에서 깨어난 듯하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먹빛이 풀리는 것이고, 맡는 것은 문기(文氣)가 처음 피어나는 것이지만, 이 한 줄기 먹향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연기와 불꽃(煙火), 얼마나 많은 단련, 얼마나 많은 기다림이 있었는지는 생각하는 이는 드물다.

먹은 처음부터 먹이 아니었다.

그것은 본래 그저 연기였고, 소나무가 탄 뒤의 청연(青煙)이었으며, 등잔불 위에서 조금씩 엉겨 내린 검댕이었다. 만약 그대로 흩어지게 내버려 두었다면 그저 바람을 따라 가버렸을 것이고, 그릇 벽에 떨어졌더라도 그저 한 층의 재 흔적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인이 몸을 굽혀 그것을 조심스레 거두고, 다시 아교와 섞고, 공이로 찧고, 틀로 찍어내고, 세월로 길러내자, 이 가벼운 연기와 먼지는 점차 단단하기가 옥과 같은 하나의 먹으로 응고되었다.

먹을 만드는 것은 먼저 검댕을 모으는 것에서 시작한다.

송연묵(松煙墨)은 소나무가 탈 때 나오는 그을음(검댕)에서 얻고, 유연묵(油煙墨)은 오동나무 기름이나 유채 기름 등이 탈 때 나오는 검댕에서 얻는다. 불 조절이 조금만 맞지 않아도 연기는 거칠어지고, 떠버리며, 잡스러워진다. 불길이 너무 맹렬하면 입자가 거칠어지고, 불길이 너무 약하면 연기가 부족해진다. 진정으로 좋은 검댕은 가늘고, 깨끗하고, 고르고, 가라앉아야 한다. 그것은 보기에 가벼워 보이지만 먹의 근본을 결정한다.

사람의 생명 역시 종종 미미한 곳에서 시작된다. 많은 사람의 출발점은 혁혁하지 않으며, 심지어 검댕처럼 세사(世事)에 휩쓸리고 환경에 밀려나, 겉보기에 형체도 없고 무게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생명 속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반드시 태어날 때부터 눈부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내면 깊은 곳에서 세속을 따르지 않으려는 한 가닥 청명(淸明)함일 수도 있고, 선(善)을 향하는 한 가닥 본성일 수도 있으며, 바르게 돌아가고자 하는 한 가닥 마음일 수도 있다.

검댕을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연기와 먼지일 뿐이며, 사람이 만약 마음을 지킬 줄 모른다면 역시 홍진(紅塵)에 휩쓸려 가기 쉽다.

연기를 모은 후에는 아교와 섞어야 한다.

연기는 흩어지는 성질이므로 반드시 아교가 있어야만 응집되어 형태를 이룰 수 있다. 아교가 너무 적으면 먹의 질이 느슨해지고, 아교가 너무 많으면 먹의 성질이 막히고 무거워진다. 좋은 먹은 아교를 가볍게 쓰면서도 단단할 수 있고, 응집되면서도 판에 박히듯 막히지 않으며, 견고하면서도 윤택함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사람도 이와 같다. 만약 재능만 있고 단속이 없다면 쉽게 흩어지기 쉽고, 만약 규칙만 있고 영성(靈性)이 없다면 또 쉽게 굳어버리기 쉽다. 진정으로 풍골(風骨)이 있는 사람은 방종하게 제멋대로 구는 것도 아니고, 고리타분하게 구속되는 것도 아니며, 자율 속에서 청명함을 유지하고 원칙 속에서도 여전히 온유하고 윤택함을 잃지 않는다. 마치 연기와 아교가 서로 합해져 연기의 영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아교의 응정(凝定, 엉기어 고정됨)함을 얻는 것과 같다.

그다음은 가장 고된, 공이로 찧고 주무르며 단련하는 과정이다.

먹 덩어리는 반복해서 매질 당하고, 문질러 압착되고, 뒤집히고, 다시 매질 당해야 한다. 옛날의 제묵법에는 ‘십만 번을 찧는다(十萬杵)’라는 말이 있다. 좋은 먹은 가볍게 합쳐져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 번 만 번의 두드림과 단련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한 푼의 단련이 부족하면 표면에서는 아마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막상 벼루 위에 이르고, 물을 만나고, 종이에 떨어지면 곧고 낮음(高下)이 드러나게 된다. 먹이 찌꺼기를 일으킬지, 색이 흐려질지, 기운이 겉돌고 미끄러울지는 모두 반복해서 찧고 단련하는 과정에서 결정된다.

사람의 품격도 마찬가지로 순경(順境) 속에서 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일이 반복해서 마모하고 단련하는 속에서 서서히 다져지는 것이다. 어떤 고통은 보기에 사람을 꺾어 손상시킬 듯하지만 사실은 들뜬 기운을 제거하는 것이고, 어떤 난관은 보기에 사람을 압박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생명을 견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선(善)을 향한다면, 고난은 도리어 사람 내면의 잡질을 조금씩 단련해 없애줄 수 있으며, 사람을 조급함에서 침착함으로, 취약함에서 확고함으로 걸어가게 한다. 먹의 골력(骨力) 역시 바로 이 반복적인 압착과 단련 속에서 점차 형체를 이루어 간다.

주무르고 단련한 후에는 먹을 틀에 넣어야 한다.

틀 위에는 글자, 문양, 산수, 용과 봉황이 새겨져 있어, 먹 덩어리가 그 안으로 압착되면서 점차 형제(形制, 구조와 형태)를 갖추게 된다. 틀이 없으면 먹이 비록 덩어리는 이룰지언정 일정한 형태가 없다. 틀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단정한 몸가짐과 전해질 수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된다.

사람 역시 내적인 준칙이 필요하다. 이 준칙은 세속의 명리가 사람에게 주는 틀이 아니라, 양지(良知)가 생명에게 세워준 척도다. 한 사람이 만약 내적인 준칙이 없다면 일을 만났을 때 파도를 따라 흐르고 바람을 따라 쏠려, 오늘 이랬다 내일 저랬다 하니 결국 진정한 기상(氣象)을 가지기 어렵다. 그릇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속에 스스로의 분수가 있고, 또 스스로 평생 따르고자 하는 도(道)가 있다.

틀에 들어간 후에도 먹은 아직 급하게 쓸 수 없다.

그것은 틀에서 빼내고, 다듬고, 그늘에서 말리고, 매달고, 뒤집어주며, 바람 속에서 서서히 물기를 빼내고 세월 속에서 서서히 아교의 성질을 안정시켜야 한다. 새로 만든 먹은 불기운이 다 마르지 않았고 아교와 연기가 융합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시간의 함양을 거쳐야만 온화하고 윤택하면서 조급하지 않고, 견실하면서 갈라지지 않는다. 좋은 먹은 화후(火候, 불조절)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에도 기대며, 단련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정양(靜養)에도 기대는 것이다.

이 단계가 마음을 닦는(修心) 것과 가장 닮았다.

사람은 일을 겪은 후에도 격렬한 정서 속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성숙은 아직 조용히 가라앉아 반성하고, 겪은 바가 지혜로 침전되게 하며, 억울함이 너그러움으로 화하게 하고, 날카로운 기세가 내면의 수렴으로 돌아가게 하며, 조바심이 점차 정력(定力)을 이루게 해야 한다. 만약 겪기만 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고난은 그저 고난일 뿐이지만, 만약 겪는 과정에서 안으로 볼 수 있다면 고난은 도리어 계단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먹의 온전한 성취는 절반은 화후와 단련에 있고, 절반은 정양과 세월에 있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그것이 마지막으로 물을 만나는 그 순간이다.

단단한 먹이 벼루 안에서 맑은 물에 의해 가볍게 갈려지며, 검은색이 조금씩 풀린다. 그것은 더 이상 그저 하나의 침묵하는 형태가 아니라, 글을 쓸 수 있는 먹즙으로 화(化)한다. 그리하여 산수가 붓 아래에서 생겨나고, 시문이 종이 위에서 흘러나오며, 충의(忠義), 청기(清氣), ㅂ민(悲憫, 자비와 가엾게 여김), 호연(浩然)의 뜻이 모두 그것을 빌려 나타날 수 있게 된다.

먹은 처음에 검댕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문장과 산하를 짊어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먹을 만드는 것에 담긴 가장 깊은 우의(寓意)다. 세상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흔히 불꽃과 연기를 겪지 않은 순백이 아니라, 불꽃과 연기 속에서도 그 바름을 잃지 않고, 단련 속에서도 그 참됨을 잃지 않으며, 기다림 속에서 그 두터움을 길러내고, 갈려지는 속에서 그 쓰임새를 화해 내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생명이 세상에 오면 풍진, 고초, 오해, 마난을 겪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반드시 사람을 비하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사람이 그 속에서 본심을 지켜낼 수 있는지, 마난을 심성을 수련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지, 속세의 갈림을 생명의 침착과 풍골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달여 있다.

찻잎은 끓는 물 속에서 펼쳐지며 일생의 향기를 해방하고, 먹은 벼룻물 속에서 갈려지며 종이에 가득한 문기를 화해 낸다. 그것들은 모두 사람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은 흔히 마난을 피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난 속에서 깨어나고 온전해지는 것임을 말해준다.

모든 검댕이 다 먹이 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경험이 다 자연스럽게 사람을 성취시키는 것도 아니다. 검댕은 연기를 모으고, 아교와 섞고, 공이로 찧고, 틀에 넣고, 그늘에 말리고, 묵혀두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먹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세상일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정념(正念)과 선심(善心)을 잃지 않아야만 비로소 고통과 어려움을 생명의 중후함으로 단련해 낼 수 있다.

하나의 좋은 먹은 고요할 때는 단단하기가 옥과 같고, 움직일 때는 물에 들어가 문장을 이룬다. 그것은 시끄럽게 굴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오직 갈려질 때에만 오랫동안 축적해 온 내함을 조금씩 석방해 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풍골이다.

풍(風)은 청기와 기운(氣韻)이고, 골(骨)은 지탱과 원칙이다. 진정한 풍골은 외표의 강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의 청정함과 견지함에 있다. 검댕에 도리어 뼈가 있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 단련을 거친 후 더 이상 떠서 흩어지지 않고 침착하게 문장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검댕에 풍골이 있다는 것은 먹을 만드는 도리이기도 하고, 인생의 도리와도 닮았다.

사람이 만약 티끌 세상 속에서 먼지를 따라 가버리지 않고, 마난 속에서 원망하지 않고 가라앉지 않으며, 기다림 속에서 자신을 함양하고, 감당하는 속에서 타인을 온전하게 해 줄 수 있다면, 아무리 평범한 생명이라도 자신만의 먹향이 있을 것이며, 아무리 침묵하는 세월이라도 천명에 부끄럽지 않은 한 획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