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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불법(佛法)이 흥성했던 양진남북조 시대 (1)

(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의(義)’를 마음껏 연기했던 삼국시대(三國時代)는 동오(東吳)의 멸망과 함께 마침내 막을 내렸다. 가만히 책을 덮고 이미 지나온 역사라는 큰 연극을 다시 생각해보면, 하늘의 정묘(精妙)한 안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토록 분분한 사건들과 이토록 다양한 조대(朝代)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주선(主線)에 단단히 이끌려 한 차례 스쳐 지나가는 사이에 각자 찬란한 문화를 남겼고, 후인들이 깊이 생각하고 거울로 삼기에 충분한 이야기들을 남겼으며, 사람의 정신적 내포를 풍부하게 하는 사상과 행위 방식을 남겼다.

무대의 막이 다시 열릴 때, 우리는 짧은 통일을 거친 후 삼백여 년에 달하는 대분열과 대동탕(大動蕩)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불교(佛教)가 화하(華夏) 대지에 널리 전파된 시대이기도 하니, 이것이 바로 양진(兩晉)과 남북조(南北朝) 시기이다.

인류 정신(正信)의 기초를 다지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개요

모두가 알다시피 불교는 고대 인도에서 기원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떻게 중국으로 전해져 중국인의 신앙이 되었을까? 여기에는 자연히 일정한 조건과 기연(機緣)이 필요하지만, 이미 걸어온 그 역사가 모든 것을 이 안배해 두었다.

지리적 위치로 말하자면, 고대 인도는 오늘날의 인도뿐만 아니라 부탄, 네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을 포함한 남아시아 아대륙 전체를 가리킨다. 중국 고대 역사서에서는 인도를 ‘신독(身毒)’ 또는 ‘천축(天竺)’이라 불렀다.

고대 인도는 중국의 서부와 남서부에 위치해 고대의 서역(西域)과 이웃하고 있었다. 서역은 중국 사서의 지리적인 개념으로, 광의적인 의미로는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 서쪽의 광대한 지역을 통칭하며, 좁은 의미로는 역사상의 신강(新疆)을 가리킨다. 신강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에 위치하여 동서방 사회 교류의 중추였다. 과거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한(西漢)의 장건(張騫)이 일찍이 서역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실크로드(絲綢之路)’를 개통했음을 알고 있다. 이는 중국과 이역(異域) 문화의 교류와 소통을 더욱 편리하고 빈번하게 만들었다. 불교는 바로 고대 인도─서역─실크로드─중원(中原) 지역─중국의 기타 지역이라는 이 맥락을 따라 전래되고 홍양(弘揚)되었다.

佛教傳入西域

불교의 서역 전래

대략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소카왕[阿育王] 시기에 불교는 당시 서역의 우전(於闐, 지금의 호탄), 구자(龜茲, 지금의 쿠차) 등지로 전해졌다. 오늘날 학술계에서는 주로 티베트어 문헌인 《우전교법사(於闐教法史)》,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등의 사적에 근거하여 추론하는데, 대략 기원전 80년경에 비로자나(毗盧遮那) 아라한(阿羅漢)이 서역에 최초의 불사를 건립하면서 소승불교(小乘佛教)가 전래되었다. 인도의 대승불교(大乘佛教)가 흥기한 후, 기원후 약 2~3세기경에는 서역 각지에도 전해져 대승과 소승이 병존하는 국면이 나타났고, 점차 우전, 구자, 고창(高昌, 지금의 투루판) 및 사차(莎車), 소륵(疏勒, 지금의 카스) 등의 성(城)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성지가 형성되며 발전했다.

자연히 서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가장 먼저 불법(佛法)의 은혜를 입었다. 진(秦)나라 때부터 동한(東漢)에 이르기까지 서역(광의)에 거주하던 소수민족은 선후로 월지(月氏), 오손(烏孫), 대완(大宛), 흉노(匈奴), 선비(鮮卑), 강(羌), 갈(羯) 등이 있었다. 불교가 서역에서 흥기하고 강성해진 것은 자연히 이들 소수민족에게 영향을 주어, 상층 귀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불법을 듣기 시작했고 불교(佛敎)도가 되었다.

불교가 서역으로 전래됨과 동시에, 상술한 소수민족들은 영토를 쟁탈하기 위해 서로 정벌했는데, 그중 흉노는 서한 시기에 대부분의 소수민족을 복속시키고 광대한 서역 지역을 차지했다. 일부 패배한 소수민족들은 중국 외부나 중국 내부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내부로 이주한 자들은 점차 한족(漢族)과 섞여 살게 되었다.

여기서 반드시 월지족(月氏族)을 언급해야 한다. 그들은 가장 처음에 하서주랑(河西走廊) 지역에 거주했으나, 서한 시기에 흉노에게 패했다. 일부분의 월지족은 부득이 북쪽으로 이주했다가 나중에 아무다리아강[阿姆河] 유역으로 옮겨갔으며, 기원후 1세기에 쿠샨 왕조를 건립하고 인도 북방에서 흥성하여 간다라(犍馱羅, 고대 인도 16대국 중 하나)를 집어삼키며 고대 인도 북방의 공동 맹주가 되었다. 쿠샨 왕조의 카니시카왕은 독실하게 불교를 믿었으며, 나중에 불교 예술을 서역으로 다시 전했다.

불교의 중원 전래

동한 명제(明帝) 때, 서역에 신(神)이 있어 그 이름을 불(佛)이라 한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천축(天竺), 즉 고대 인도로 보내어 그 서적과 사문(沙門, 승려)을 구하게 했으며, 낙양(洛陽)에 중국 최초의 불교 사원인 백마사(白馬寺)를 건립했다. 이때 일부 천축의 승려들도 서역을 거쳐 중원으로 들어와 유력하며 법을 전하고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후한서·서역전(後漢書·西域傳)》에서는 환제(桓帝)가 불교를 받든 일을 서술한 후 “백성 중에 차츰 불교를 받드는 자가 생기더니, 나중에는 마침내 번성해졌다”라고 했다. 당시 민간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도 소수에서 점차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도겸전(後漢書·陶謙傳)》과 《오지·유요전(吳志·劉繇傳)》의 기재에 따르면, 헌제(獻帝) 때 단양(丹陽) 사람 착융(笮融)이 수백 명의 무리를 모아 서주주목(徐州州牧) 도겸(陶謙)을 찾아갔는데, 도겸은 그에게 광릉(廣陵), 하비(下邳), 팽성(彭城) 3군의 조운을 감독하게 했다. 착융은 이에 3군의 조운을 맡아 관리하면서 “크게 불탑 사찰[浮屠寺]을 일으켰으니, 위로는 금반(金盤)을 포개고 아래로는 중루(重樓)를 만들었으며, 또 당각(堂閣)을 두루 둘러치니 3,000명을 수용할 만했다. 황금으로 도금한 불상을 만들고 비단과 채색 옷을 입혔으며, 불교 행사를 치를 때마다 음식을 많이 베풀고 길에 자리를 폈는데, 그 자리에 앉거나 구경하는 자가 만여 명에 달했다”라고 했다. 이는 헌제 때 낙양에도 불교 사찰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삼국시기 위(魏)가 후한(後漢)을 계승해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모든 문화가 후한을 이어받았으므로, 위대(魏代)의 불교 역시 후한 불교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위 명제(明帝)는 일찍이 부도(浮屠)를 크게 세웠으며,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이 불경 읽기를 좋아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동한 말기부터 한 왕조의 군사적 정복과 중원의 병력 및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 그리고 주변 소수민족 간의 다툼으로 인해, 중국 서부와 북부 변경의 각 소수민족이 대규모로 중국 내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삼국 말기와 서진(西晉) 초기에 이르러 호족(胡族)의 내부 이주는 정점에 달했다. 내부로 이주한 소수민족은 주로 흉노, 갈, 선비, 저(氐), 강 등을 포함했으며, 역사상 널리 ‘오호(五胡)’라 칭했다. 여기서 ‘호(胡)’란 고대 한인(漢人)들이 한민족(漢民族) 이외의 민족, 특히 북방의 소수민족을 총칭하던 말이다. 갈은 흉노의 일파이고 저는 강의 일파이므로, 실질적으로는 오직 삼호(三胡)만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서진 통치 시기, 중국 북부·동부·서부, 특히 병주(並州)와 관중(關中) 일대에는 대량의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사서에는 “서북의 여러 군은 모두 융족(戎族)의 거처가 되었다”라거나 관중의 백만여 인구 중 “융적(戎狄)이 절반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수민족과 한족은 섞여 사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한편으로는 한족의 영향 하에 이들 내부 이주 소수민족이 점차 유목에서 농업 정착으로 전환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소수민족이 대부분 불교를 신앙했기 때문에 한족과 융합할 때 불교가 점차 한인들에게 받아들여져 민간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특히 서진 말기와 동진(東晉) 시기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건립은 중원의 혼란을 초래했으나, 도리어 불교의 광범위한 전파를 추진했다.

삼국·양진(兩晉)·남북조 시기의 서역 불교는 전성기에 도달했다. 위로는 왕공대신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교를 믿었다. 특히 많은 왕공귀족들이 출가하여 불교를 섬기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고, 이는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승려들에게 숭고한 사회적 지위를 갖게 하여 불교의 발전을 추동하고 불법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확대했다. 이러한 영향은 점차 중원과 남방 지역으로도 확장되었다.

이 시기 서역 경내에는 규모가 웅대하고 거대한 많은 석굴이 개착(開鑿)되었고, 웅장하고 장관인 사찰이 건립되었으며, 사방의 현명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여 경전을 강의하고 법(法)을 설하게 함으로써 불교 사찰을 당시 사회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현재 남아있는 고창 등지의 석굴군 및 사찰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것들은 대부분 산을 의지하고 물을 바라보아 매우 우아한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거나, 도시 중심에 우뚝 솟아 황궁 관부(官府) 및 번화한 거리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속세 세간을 드나들면서도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어지지도 않아 자연스레 사람들이 동경하는 승지(勝地)가 되었다.

서역 불교의 흥성함은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법을 구한[西行求法] 승려들과 동쪽으로 와 법을 널리 알린[東來弘法] 고승들의 노력과 함께, 호인(胡人)들의 내부 이주와 호인들의 중원 통치에 힘입어 광범위하게 전파되기 시작했고, 특히 남북조 시기에 이르러 불교의 전파는 비교적 강성한 시기에 도달했다.

이전의 중국인들이 신(神)이 되는 수련 방법은 도(道)를 닦는 것이었으나, 도가(道家)가 강조하는 것은 독수(獨修)와 청수(清修)여서 큰 면적으로 보급될 수 없었다. 불교는 이와 달라 중생제도(眾生度度)를 강조했다. 불교가 화하(華夏) 대지에 전해지고 널리 알려지면서 점차 사람들에게 무엇이 부처(佛)이고 무엇이 수련인지를 인식하게 만들었으며, 사람들이 불법(佛法)을 이해하는 기초를 닦아주었다.

이외에도 양진, 남북조 시기 수많은 황제들이 부처님을 믿고 부처 수련을 한 것은 불교의 흥기와 광범위한 전파에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