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達力)
【정견망 2026년 7월 4일】
법 공부를 통해 나는 고생이 우리 수련 과정의 일부분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수련인의 일생에 고생은 필연적이며,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일반인보다 훨씬 더 고생스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고생스러운 것일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일반인은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이지만, 수련인은 충분히 감당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대법 수련인은 신(神)에 가까운 의지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몸이 고되어 병이 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도로를 닦거나 돌을 골라내고 흙을 파는 등 힘든 일을 할 때, 일반인들이 쓰는 ‘등이 땀에 흠뻑 젖다’, ‘비 오듯 땀을 흘리다’, ‘땀이 옷깃을 적시다’ 등의 표현을 뛰어넘는 고생을 나는 실제로 겪어보았다. 일반인들은 대개 이 정도까지 고생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손을 닦거나,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거나, 혹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일을 시작한다. 그래서 그 이상의 정도를 나타내는 형용사가 없는 것이다.
내가 체험한 그 이상의 고생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짠 땀이 눈을 찌르고, 눈물과 콧물이 흐르며, 콧구멍은 막히고, 입은 크게 벌어지며, 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상태’이다. 이때 누군가 곁을 지나간다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제발 나에게 아는 척하며 말을 걸지 말아 줘!’이다. 이미 너무 지쳐서 신음 한 번 낼 기력조차 없는, 바로 그런 정도의 고생까지 감당해 보았다.
초상적인 대법 수련인으로서 고생을 통해 업력을 갚는 방면에서 일반인은 경험하기 어려운 온갖 초상적인 고생을 체험하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는 환갑의 나이에 접어들어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았다. 일을 할 때의 육체적 고생은 줄었지만,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으면서 몸으로는 아주 생생하게 느껴지는 ‘천 근의 허리’와 ‘만 근의 다리’라는 고생이 생겨났다. 나는 이것이 수련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른 형태의 고생임을 깨달았다. 《홍음》의 <태산에 올라(登泰山)>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그중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만근다리 옮기나니(恒心舉足萬斤腿)”라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줄곧 ‘만 근의 다리’를 예술적 과장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만 근의 다리’가 실제적이고 진실한 현실을 묘사한 글귀일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몸이 가볍고 자유로울 때는 평소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단 고생을 통해 업을 소멸해야 할 때가 되면 ‘몸에 태산 하나를 짊어졌다’는 말로는 그 고통을 다 표현할 수 없다. ‘몸에 장백산 하나를 짊어졌다’고 해야 비로소 표현이 된다. 왜 ‘장백산’인가 하면, 장백산에는 산꼭대기에 호수가 하나 더 있어 태산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빚은 갚아야 한다! 일반인은 생생세세에 진 업의 빚이 얼마나 많은지, 육도윤회의 고통 속에서 모두 빠짐없이 갚아야 한다. 하지만 대법제자는 훨씬 운이 좋다. 창세주의 자비롭고 광대한 불은(佛恩)의 도움으로, 대법 수련의 문에 들어서는 순간 업의 빚이 절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여러 가지 배치를 통해 수련의 시기마다 각 층차에서 고생을 나누어 갚게 된다. 사실 그것은 갚아야 할 빚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일반인과 비교하면 모두 ‘벌기만 하고 잃지는 않는’ 행운아인 셈이다!
제자는 제자를 대신해 고통을 짊어지고, 생생세세에 지은 업의 빚을 갚아주신 창세주의 자비로운 고도(苦度)에 평생 감사할 뿐이다. 제자는 엎드려 아홉번 절하는(三跪九叩)의 예로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