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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불법(佛法)이 흥성했던 양진남북조 시대 (7)

(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불법이 널리 흥성했던 북조(北朝)

북조 각 대(代)는 모두 불교를 독실히 믿었는데, 북위(北魏) 탁발씨(拓跋氏)는 도무제(道武帝) 때부터 불교를 신봉하기 시작했다. 도무제 본인이 불경 읽기를 좋아했고, 매번 사문(沙門, 승려)을 만날 때마다 예(禮)를 올렸다. 명원제(明元帝)는 도성 곳곳에 불상을 건립하고 사문으로 하여금 민속을 이끌게 했다.

그러나 태무제(太武帝)는 태연(太延) 4년(438년) 3월 50세 이하의 사문은 일제히 환속하도록 명령했다. 나중에는 최호(崔浩)의 참언을 믿고 장안 및 각지의 사문을 모조리 죽이고 경전과 불상을 불태우도록 명령했으니,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멸불(滅佛) 사건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후위(後魏 북위를 말함) 때 태무제가 장안을 네 번 정벌했는데, 사문들이 불율(佛律 불교 계율)을 많이 위반하고 무리를 지으며 더럽게 어지럽히니, 이에 유사(有司, 담당 관청)에 조서를 내려 그들을 모조리 묻어 죽이고 불상을 불태워 부수게 하니 장안의 승도(僧徒)들이 일시에 주멸(殊滅)되었다. 나머지 정진(征鎮, 군사 요지)에서는 조서를 미리 듣고 숨어 재난을 면한 자가 열에 한두 명이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태무제는 불교를 멸했기 때문에 선종(善終)하지 못했고 45세 때 환관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태무제 이외 북위의 여러 황제들은 모두 불교를 믿었다. 태무제의 손자인 문성제(文成帝) 때 불교를 다시 일으키라는 명령을 내려, 여러 주(州)·성(城)·군(郡)·현(縣)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각기 사찰 한 곳을 건립하도록 허락하고 평민의 출가를 허용하니 사탑(寺塔)과 경상(經像 불경과 불상)이 점차 회복되었다.

헌문제(獻文帝)가 즉위한 후에는 궁중에도 사찰을 짓고 선(禪)을 익혔다.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원년(477년)에 이르러서는 수도인 평성(平城)에만 승려가 2천여 명이었고 각 지역에 7만 7천 2백 5십 8명에 달했다. 북위 말년에 이르러서는 각지의 승려가 많게는 2백만여 명에 달했다. 평성에 위치한 사찰이 약 100소였고 각지를 합치면 총 6,478소였으며, 낙양(洛陽) 안에는 이미 1,376소가 있었고 각지의 사묘(寺廟)는 3만 여 소에 달했다(《석로지(釋老志)》와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참조).

북위는 효정제(孝靜帝) 이후로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는데, 동위를 계승한 것이 북제(北齊) 황실이었다. 북제의 문선제(文宣帝)는 고승 법상(法常)을 내정(內庭)으로 파견해 불경을 강론하게 했고 그 후 북제의 여러 황제들도 대부분 불교를 좋아하여, 수도인 업도(鄴都) 내에 큰 사찰 약 4,000소에 승려가 8만 명에 가까웠으며 나라 전체로 사원 4만 여 소에 승려가 2백여 만 명이었다.

서위를 계승한 북주(北周) 왕조는, 명제(明帝) 때 척호사(陟岵寺)와 척기사(陟屺寺) 두 사찰을 지었으나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또 한 번 불교를 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제(宣帝) 때에 이르러서야 점차 옛 모습을 회복했으며 정제(靜帝) 때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불교와 도교를 회복하고 불상 및 천존상(天尊像)을 다시 세워 불교를 전면적으로 부흥시켰다.

북조 시기에는 불사 건축이 성행했는데, 예를 들어 《낙양가람기》 서문에서 가리키듯 “초제(招提, 사찰)가 빗살처럼 빽빽하고 보탑(寶塔)이 나란히 늘어섰다.” 북위 도무제가 불교를 받아들였을 때인 천흥(天興) 6년(403년)에 수도 평성에 “5층 부도(浮屠, 탑)와 기사굴산(耆闍崛山) 및 수미산전(須彌山殿)을 짓고 채색 장식을 더했다.” 훗날 헌문제(獻文帝)는 또 황흥(皇興) 원년(467년)에 평성에 영녕사(永寧寺)를 일으키고 7층 부도를 세우니 높이가 300여 척이었고 기틀이 넓고 시원했다.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 더욱 대대적으로 사탑을 건설해 낙양 한 지역에만 1천 여 사찰이 있었는데, 그중 영녕사·요광사(瑤光寺)·경락사(景樂寺)·법운사(法雲寺)·황구사(皇舅寺)와 기원정사(碉洹精舍)가 비교적 유명했다.

북조 북위(北魏)의 흥망

* 북위의 건립

북위는 선비족(鮮卑族) 탁발부락(拓跋部落)이 건립했다. 탁발부는 최초에 동북 대흥안령(大興安嶺) 북단 동쪽 기슭 일대에서 활동하며 유목 생활을 했다. 서진(西晉) 말기에 탁발부는 세 부락으로 나뉘었다.

307년, 의로(猗盧)가 세 부락을 통합하니 기사(騎士)만 40만 여 명이었다. 의로는 서진을 도와 흉노족의 유총(劉聰)과 갈인(羯人) 석륵(石勒)과 맞서 싸운 공으로 서진에 의해 대왕(代王)에 봉해졌다. 316년, 의로가 살해당했다. 이로부터 탁발부락은 분열되어 다시 분란에 빠졌다.

338년, 십익건(什翼犍)이 대왕의 지위를 계승했다. 탁발부는 “비로소 백관을 두고 여러 직무를 나누어 맡아” 국가 기구가 점차 완비되었다. 십익건은 빈번하게 대외 정벌을 감행하여 수백만 마리에 달하는 가축과 인구를 노략질함으로써 세력이 점차 장대해졌다.

376년, 전진(前秦) 부견(苻堅)이 탁발부를 정복해 십익건이 살해당하자 부락은 이산(離散)되었으며 남은 무리는 두 부락으로 나뉘었다.

386년, 십익건의 손자 탁발규(拓跋珪)가 전진이 와해되는 틈을 타서 성락(盛樂)에서 대왕(代王)을 칭하며 대국(代國)을 재건했다. 같은 해, 국호를 위(魏)로 고치니 역사에서는 이를 ‘북위’라 일컫는다.

* 북방 통일

탁발규가 북위를 건립한 후 둔전 제도를 추진해 농업을 발전시키니 국력이 나날이 강성해졌다. 395년, 그는 후연(後燕)의 군대를 대패시켰고 이어 신도(信都, 하북 기현)·중산(中山, 하북 정현)·업(鄴, 하북 임장) 등지를 차지했다.

398년, 탁발규는 평성(平城, 산서 대동)로 천도했다. 북위는 중원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한족(漢族)을 임용해 관직을 주었으니 많은 유명한 한족 호강(豪強)들이 탁발규의 유력한 모사(謀士)가 되었다.

아들인 원제(元帝) 탁발사(拓跋嗣, 409년~423년)가 즉위한 초기에 능력 있는 한인들을 계속 임용하여 그들에게 요직을 주었다. 그들은 책략을 제안하여 정치·예의·법률 제도를 제정하도록 도왔으니 북위가 점차 공고해지고 강성해지게 했다. 훗날 산동과 하북의 유명한 사족 호강들도 모두 북위에 귀부했다.

뒤이어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 424년~451년)가 즉위할 때에 이르러서는 16국 후기의 각 정권들이 서로 병탄해 오직 북량(北涼)·북연(北燕)·하(夏)와 서진(西秦)만 남게 되었다. 정복 전쟁을 거쳐 439년에 이르면 북위가 북방을 통일한다.

* 효문제(孝文帝)의 출신과 인덕(仁德)

471년, 헌문제(獻文帝) 탁발홍(拓跋弘)이 황제 자리를 다섯 살 된 아들 원굉(元宏)에게 전하니 이가 바로 효문제이며, 나이가 어려서 조모인 풍태후(馮太后)가 집정(執政 정사를 주관)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효문제가 출생할 때 기이한 징조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신비로운 빛이 실내를 비추었고 천지에 기운이 서리며 온화한 기운이 가득 찼다.” 그는 출생할 때부터 생김새가 비범했고, 자라나서는 매우 어질고 효성스러워 뛰어난 임금의 표상이 있었다.

효문제는 형제 친족과 대신 및 주변 사람들을 대함에 늘 매우 관대하고 인자했다. 한 번은 다른 사람이 식사 중에 뜨거운 국으로 손에 화상을 입혔으나 문제는 미소를 지으며 용서했고, 또 한 번은 밥에서 벌레가 나오고 더러운 물질이 나왔으나 문제는 여전히 웃으며 시종을 용서했다. 어떤 환관이 일찍이 태후 앞에서 황제의 과실을 고해 바치니 태후가 대노하여 문제에게 수십 대의 매(杖)를 때렸다. 문제는 묵묵히 맞을 뿐 이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나중에 태후가 죽은 후에도 문제는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문제는 또 불법(佛法)을 좋아해 15세 때부터 더는 살생하지 않았고 사냥 활동도 중지했다. 이외에 그는 성품이 소박해서 말에 얹는 안장은 철과 나무로 된 것뿐이었다.

문제가 친정한 후 좋은 의견을 흐르는 물처럼 받아들였다. 천지·오교(五郊)·종묘의 이분(二分, 춘분과 추분) 제례에는 늘 반드시 몸소 행차했고, 춥거나 덥다는 이유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는 늘 백성들의 질고를 생각하고 염려했으며, 수하의 대소 백관들에 대해서는 유심하게 관찰해 임용하되 현능(賢能)한 선비에 대해서는 재능에 따라 임용했다.

그는 늘 “무릇 인군(人君)이 된 자는 고르지 못함을 근심하고 진정으로 성의를 다해 사물을 부리지 못함을 근심한다. 진실로 고르게 하고 성의를 다할 수 있다면 호월(胡越, 멀리 떨어진 이민족) 사람이라도 또한 형제처럼 친할 수 있다.”라고 했다.

문제는 사관(史官)에게 말하길 “시사(時事)를 곧게 쓰고 나라의 악행을 숨기지 말라. 인군(人君)이 위엄과 복록을 마음대로 하는데 사관마저 쓰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했다.

그가 남북으로 정벌하고 순행할 때 어떤 관원이 도로를 정비할 것을 주청하자 문제는 마차가 통과할 수 있도록 간단히 교량만 수리하면 될 뿐이지 풀을 깎아 땅을 평평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무릇 수리하는 것은 부득이하여 행하는 것일 뿐,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의 힘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문제가 회남(淮南)을 순행할 때 만약 백성의 나무를 베어 내야 할 필요가 있으면 반드시 돈을 주게 했고, 백성의 농토는 절대 짓밟지 않았다.

* 효문제의 개혁

북위 건국 초기에는 관리들에게 봉록(俸祿)이 없었기 때문에 농민의 부담이 비교적 무거웠다. 국가 규정에는 “천하의 호구를 9품으로 통합한다. 호조(戶調)로 비단 2필, 솜 2근(絮二斤), 실 1근(絲一斤), 곡식 20석(粟二十石)을 내며, 또 비단 한 필 두 자를 주고(州庫 주 창고)에 들여보내 다른 비용에 공급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사실 농민의 부담은 결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외에 북위 초기에는 한족과 다른 소수민족 인민에 대해 차별 정책을 채택해 그들을 노예와 잡호(雜戶)로 삼았으며, 전투시에는 그들을 보병으로 삼아 진 앞에서 돌격하게 몰았고 선비족 기병은 뒤에서 독전하게 했다. 만약 보병이 전진하지 않으면 곧 기병에게 짓밟혀 죽었다. 선비족 상층 귀족과 한족 상층 인사들 사이에도 모순이 존재했다. 예컨대 청하(清河)의 대족(大族) 최호(崔浩)는 북위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큰 힘을 보탰으나 훗날 탁발도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살해당했고, 최호와 인척 관계가 있던 한족 문벌들도 모두 멸문의 재앙을 당해 피살된 자가 2천 여 명에 달했다. 이러한 모순 역시 북위 정권의 안정에 영향을 주었다.

위와 같은 모순들은 북위 통치자들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의식하게 했다.

효문제는 485년부터 일련의 개혁 조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균전제(均田制)를 실행했다. 북위 초년에 일찍이 ‘계구수전(計口受田 호구 수에 따라 농지를 나눠주는 것)’ 제도를 추진한 바 있었는데, 새로 실행된 균전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남자 나이 15세 이상은 노전(露田, 곡물만 심는 땅) 40무(畝)를 받고 부인은 20무를 받는다. 윤작을 위해 노전은 2배 또는 3배로 준다. 노전은 매매를 허락하지 않으며, 나이가 들어 과세가 면제되거나 죽으면 반환한다.

(2) 남자 1인당 뽕나무밭(桑田) 20무를 주어 세업(世業, 대대로 물려주는 가업)으로 삼게 하고 종신토록 반환하지 않았다. 20무의 뽕나무밭 위에는 반드시 규정에 따라 일정 수량의 뽕나무·느릅나무·대추나무를 심어야 한다. 처음 땅을 받을 때 본래 뽕나무밭이 없는 자는 법식에 의거해 땅을 받고, 원래 뽕나무밭이 부족한 자는 법식에 의거해 보충하며, 남는 자는 남는 부분을 충당하여 배전(倍田 휴경용 토지)으로 삼되 아무리 많아도 노전으로 충당해 돌려주거나 수여하지 않는다. 인구의 증감에 따라 남는 부분은 팔 수 있고 부족한 부분은 살 수 있으나, 매매를 해도 마땅히 얻어야 할 분액을 초과할 수 없다. 뽕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에는 마밭(麻田)을 주되 남자는 10무, 부인은 5무로 하며 반환하고 수여하는 방법은 노전과 같다.

(3) 노비가 땅을 받는 것은 양인(良人)과 동일하다. 쟁기 소 한 마리당 땅 30무를 받되 소는 4마리까지로 제한한다.

(4) 토지가 넓고 백성이 드문 곳은 힘닿는 대로 갈아 개간하게 하여 제한을 두지 않는다. 토지가 좁고 백성이 조밀한 곳은 정남(丁)이 늘어 땅을 받아야 마땅하나 이주하기를 원치 않는 자는 뽕나무밭으로 받아야 할 노전의 수에 충당하고, 부족한 자는 배전을 주지 않으며, 또 부족하면 가족의 전지 중에서 수량을 줄여 나누어 준다. 이주하기를 원하는 자는 비어 있는 황무지 어디든 가도 좋으나 부역을 피해서는 안 된다.

(5) 관리에게는 공전(公田)을 주되 자사(刺史)는 15경(頃 1경은 100무), 태수는 10경, 치중(治中)과 별가(別駕)는 8경, 현령과 군승(郡丞)은 6경으로 한다. 이직할 때는 다음 부임자에게 인계하고 전매할 수 없다.

그다음으로 삼장제(三長制)를 실행했다. 삼장제는 지방 말단 행정 조직으로, 5가(家)에 인장(鄰長) 하나를 세우고, 5인(鄰)에 이장(里長) 하나를 세우며, 5리에 당장(黨長) 하나를 세우도록 규정했다. 삼장의 직책은 호구를 검사하고 농민을 관리하며 조조(租調)와 역역(力役)을 징발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신조조제(新租調制)를 실행했다. 신조조제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일부일부(一夫一婦)는 매년 실 한 필(匹 마를 키우는 향은 삼베)과 곡식 2석을 낸다. 15세 이상으로 미혼인 남녀 4인, 경직(耕織)에 종사하는 노비 8인, 쟁기 소 20두는 각각 일부일부(一夫一婦)의 조조를 낸다. 새로운 제도가 실행된 후 등급에 따라 조조를 징수하던 ‘9품혼통(九品混通)’ 제도는 폐지되었다. 상술한 제도를 추진한 후 농민은 일정 수량의 경작지를 가지게 되었고 조조가 상대적으로 고정되고 경감되었으니, 농민의 생산 조건이 다소 개선되어 생산력 발전에 유리했다. 이외에 많은 소수민족 백성들이 균전호(均田戶)가 되어 그들의 정착 농업 생활을 공고히 하는 데에도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북위 정부의 수입 또한 증가했다.

* 효문제의 천도와 한화(漢化) 조치

490년, 풍태후가 죽자 효문제가 정식으로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친정 후 그의 첫 번째 대사는 곧 도성을 평성에서 낙양으로 옮긴 것다. 천도(遷都)를 단행한 까닭은 효문제 본인이 한족 문화를 매우 숭상하여 한화 정책을 추진하기를 희망했으나, 선비 귀족들이 집중되어 있는 옛 도성 평성에서는 한화 정책을 추진하는데 저항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이에 493년, 효문제는 남벌(南伐)을 구실로 내세워 2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낙양에 도착한 후 그는 계속 남하하겠다고 선언했고, 군신들이 말 앞에 무릎을 꿇고 말렸다. 그는 군신들이 남벌을 원치 않는 심리를 이용해 그럼 낙양에 도읍을 정한다고 선언했으며, 이로부터 그의 한화 조치를 추진했다.

한화 조치는 다음을 포함한다.

첫째, 관제(官制)를 고쳤다. 북위 초기에는 선비족과 한족의 관호(官號)를 섞어서 썼다. 천도한 후 관제를 개정해 완전히 위진(魏晉)이나 남조(南朝)의 제도에 의거했다.

둘째, 선비족 언어인 북어(北語) 사용을 금지했다. 선비족은 원래 자신의 언어를 사용했고 북위 군대 중에서도 선비어를 썼다. 조정 위에서는 선비어와 한어(漢語)를 섞어 썼다. 효문제는 천도한 후의 이듬해 6월에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조정에서 북속(北俗)의 말(선비어)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만약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관직을 박탈할 것이다.”라고 했다. 구체적인 실행에 있어서는 30세 이상인 자들은 단번에 바꿀 수 없으므로 그래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30세 이하인 자들은 조정에서 반드시 한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셋째, 호복(胡服)을 금지했다. 선비족의 옛 풍속은 피발좌임(披發左衽,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밈)이었고 부인들은 관모를 쓰고 협령(夾領 좁은 깃)·소수(小袖 짧은 소매)·단오(短襖 짧은 웃옷)를 입었다. 천도한 같은 해에 명령을 내려 호복을 금하고 복장을 한제(漢制)로 바꾸게 했다.

넷째, 성씨를 고쳤다. 선비인은 탁발(拓跋)·독고(獨孤)·보륙고(步六孤) 등과 같이 2~3글자로 된 복성(複姓)이 많았다. 성씨가 한인과 다른 것은 민족의 차이를 드러내 ‘호(胡)’와 한족 귀족 간의 합작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천도한 후 3년 째 되는 해 효문제는 명령을 내려 선비족의 복성을 단음(單音)의 한성(漢姓)으로 바꾸게 했다. 예컨대 탁발씨는 성을 원씨(元氏)로 고치고, 독고씨는 성을 유씨(劉氏)로 고쳤으며, 보륙고씨는 성을 육씨(陸氏)로 고치고, 구목릉씨(丘穆陵氏)는 성을 목씨(穆氏)로 고치는 등이었다.

효문제의 한화는 일부 보수적인 탁발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제도를 고치기 전에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고치는 중과 고친 후에도 끊임없이 반항했다.

496년에는, 태자 탁발순(拓跋恂)이 평성으로 도망쳐 반란을 일으키려 꾀하다가 효문제에게 처형당했다. 같은 해 겨울, 옛 귀족들이 평성에서 병변(兵變)을 일으켰다. 효문제는 군사를 파견해 반란을 평정함으로써 제도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돌록 보장했다.

효문제의 한화는 한족(漢族)을 주체로 하는 민족 대융합을 촉진했다.

* 효문제 개혁과 한화의 영향

효문제가 개혁한 후에는 삼장(三長)을 세우고 호구를 조사해 정부가 통제하는 편호(編戶, 호적에 등록된 가호)가 증가했다. 효명제(孝明帝) 신귀(神龜) 연간에 이르러서는 호구가 서진 태강(太康) 원년에 비해 배로 증가해 대략 500만 여 호에 3,000만 여 구(口)가 있었다. 관리들의 정치가 개선되고 부담이 경감되자 농민들이 안심하고 생산에 종사할 수 있게 되어 농업이 다소 회복되고 발전했다.

북위의 목축업은 본래 매우 발달해 있었다. 효문제 시기에 다시 하남(河南)에 목장(牧揚)을 설치하여 군마 10만 필을 길렀다. 예컨대 계호(契胡 흉노의 일족) 이주영(爾朱榮)의 부친 이주신흥(爾朱新興)은 “소, 양, 낙타와 말을 색깔별로 무리를 나누었음에도 계곡에 가득했다.”고 한다.

수공업 역시 진보를 이루었다. 견포(絹布, 비단) 생산량이 증가해 비단 가격이 하락했다. 위나라 초기에는 비단 한 필에 1,000전이었으나 효문제 이후에는 200~300전으로 떨어졌다. 착유(榨油 기름 짜기)·양조(釀酒 술 제조)·조지(造紙 종이)·자염(煮鹽 소금)·야철(冶鐵 제철) 등의 부문도 발전이 있었다.

효문제의 개혁과 한화 조치를 채택한 후에는 북방의 민족 모순 또한 다소 완화되었다.

* 효문제 이후 북위의 발전

북위 후기에는 상업 역시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루었다. 큰 도시로는 낙양·업(業)과 장안이 있었다. 낙양은 북방의 정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무역 중심지였다. 낙양 서양문(西陽門) 밖에는 대시(大市)가 있었는데 주위가 8리에 달했다. “시장 동쪽에는 통상(通商)과 달화(達貨) 두 리(里)가 있었다. 리 안의 사람들은 모두 수공업이나 도축과 장사를 생업으로 삼아 재산이 아주 많았다.”

당시에 장사를 하는 이들은 열사(列肆, 늘어선 가계)의 상판(商販)과 대상인들 외에도 많은 귀족과 관료들이 상업에 종사했다.

서역·중앙아시아·조선(역주: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말하는 듯)·일본의 상인들도 북위에 와서 무역을 진행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말해 북방의 상업은 남조만큼 활발하진 못했고,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견포와 곡물을 교환 매개(화폐 대용)로 삼았다.

북위 후기에 선비 문벌들은 넉넉하고 우아한 생활 속에서 이미 완전히 타락해 있었다. 예컨대 고양왕(高陽王) 원옹(元雍)은 집안 하인이 6,000명에 시녀가 500명이었고 한 끼 식사를 먹는 데 수만 전을 소비했다. 하간왕(河間王) 원침(元琛)은 더욱 사치스러워, 그는 10여 필의 준마를 모두 은으로 만든 구유통으로 길렀고 손님 대접에 사용하는 그릇도 수정 사발(水晶缽), 마노 대접(瑪瑙碗) 등 모두 외국에서 수입한 귀한 물건들이었다. 원침은 일찍이 자부하기를 “내가 석숭(石崇, 서진의 거부)을 보지 못한 것은 한스럽지 않으나 석숭이 나를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했다.

효문제 이후로는 정치가 나날이 부패해 매관매직(賣官鬻爵)을 일삼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이는 통치자와 일반 백성들 사이의 모순을 갈수록 격화시켰다.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에 이르러 북방에서는 이미 끊임없이 농민 기의(起義)가 폭발했다. 북위 말년에는 각 민족 인민들의 대봉기가 북방 각지에 두루 퍼져 이름도 복잡다단했으나, 주요하게는 네 갈래가 있었으니 북방 변진인 육진의 난(六鎮之亂), 하북 봉기, 산동 봉기와 관롱(關隴) 봉기였다.

북위 말년의 각 민족 인민 봉기는 전후로 8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지금의 하북·산동·내몽골·영하(寧夏)와 감숙(甘肅)의 광대한 지역을 휩쓸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22